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동아일보가 4월 1일로 창간 100년을 맞는다. 역사는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삼간(三間)의 합작품이다. 동아일보는 100년 동안 식민지와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숱한 인재들이 치열하게 신문을 만들어왔다. 동아일보가 창간 100년을 맞으며 한국신문으로서는 드물게 한세기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중앙학교, 3·1운동 조직 주도         

동아, 3·15부정선거 4·19혁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 등

한국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

 

 

 

 

 

 

‘동아일보 100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1959년 편집국 수습 1기로 동아일보에 입사해 60년 이상 동아일보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는 1월 15일 동아일보 충정로사옥 2층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실에서 있었다).

 

 

우선 언론사적 관점에서 동아일보100년의 의미를 물었다.
“우리나라 민간신문의 효시는 1896년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독일보다도 몇 십 년 앞선 것이다. 그런 독립신문이 나온 지 20여 년 만에 동아일보가 창간됐다. 창간 시점 자체가 선구적이다.”

그러나 남 이사장은 창간 배경에 더 무게를 둔다.
“잘 알려져 있듯 1919년 거국적으로 3·1운동이 벌어지자 일제는 강압적인 무단통치에서 소위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바꾸었다. 조선 백성을 일방적으로 억눌러서는 안 되고 언로를 틔워줄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조치가 신문발행을 허용한 것이다. 일제는 1920년 민족지, 친일지, 중간지의 세 신문을 허가하는데 동아일보는 민족진영의 신문이었다.
즉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소산이자 민간신문의 대표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보통신문이 아니라 특별한 신문이다. 요즘 ‘상업신문’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동아일보를 지금의 ‘상업신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동아일보를 탄생시킨 시대정신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라는 사시(社是)에 반영돼 연면히 이어져 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신문이 창간 100년을 맞았다는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남 이사장은 이 대목에서 ‘3·1운동의 대표 33인을 누가 조직했는가’라고 반문했다.
“우리는 민족대표 33인은 잘 알아도 그들을 누가 무대 밖으로 나오도록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민족대표들이 표면에 나서도록 막후에서 노력한 그룹이 바로 중앙학교를 경영하던 젊은이들이었다. 김성
수, 송진우, 현상윤 등이다. 이승만은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주목하고 국내의 젊은이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민족운동을 일으키도록 했는데, 그 중심에  인촌 김성수가 있던 것이다.”

인촌 선생 이름이 나왔으니 그를 흠집 내려는 ‘친일 논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남 이사장은 세 가지 관점에서 반박했다.

첫째는 인촌의 선각자적 안목이다.
“인촌 선생이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을 설립한 때가 모두 20대 중후반이다.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를 인수한 때가 41세. 아무리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하던 시절이라고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촌은 왜 교육, 언론, 산업에 매달렸는가. 일부에서는 망국의 원인을 매국노의 행태에서 찾지만  단견이다. 근원은 나라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이를 꿰뚫어 본 사람이 인촌이었고, 인촌은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교
육, 언론, 산업에 주목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실력양성, 무실역행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한 것이다.”

두 번째는 해방 공간에서의 건국 활동이다.
“내가 입사했을 때 광화문 사옥 2층에는 편집국이 있었고, 3층에는 한민당 당사가 있었다. 해방 공간의 양대 세력은 김구와 한독당 그룹, 이승만과 한민당 그룹이었다. 한민당의 기둥이 바로 김성수였다. 인촌 선생은 이승만
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셋째는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김구 선생도 ‘친일파’를 얘기할 때 적극적인 친일파만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인촌 선생은 결코 적극적인 친일파가 아니었다. 냉철하게 공과를 가리지 않고 인촌과 동아일보를 흠집 내려고 하는 것은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불순한 의도’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이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았던 것이 일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은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힘을 쓰는 것이 ‘친일 프레임’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친일 프레임’으로 대한민국의 주류를
교체하려고 시도했는데, 그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 정권에서 보면 인촌과 동아일보는 교체 대상이며, 그를 위한 유효한 무기가  ‘친일 프레임’인 것이다.”

남 이사장은 정권의 이런 시도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즘 신문을 만들고 있는 후배들이 동아일보의 뿌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일부 후배 중에는 ‘인촌과 동아일보가 친일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안 했으면 좋았을 일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시절이든 100% 순백(純白)의 정권이나 기관, 언론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 신문을 만들기 위해 소극적으로 타협한 것까지 그토록 집요하게 문제 삼을 수 있는가. 해외에서 무장투
쟁을 벌인 것도 중요하지만 인촌이 동아일보를 통해 한글보급운동을 벌이고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쓴 것만도 무장투쟁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 이사장의 이런 고언과 소신은 해방 이후 중요한 역사적 고비들을 직접 취재하면서 키워온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는 입사 후 4·19혁명, 3·15부정선거, 5·16군사쿠데타, 10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 피살과 신군부
의 등장,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등을 직접 취재하거나 지휘했다. 기자로서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일들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아일보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한 다음 날인 10월 27일 자 사설을 내가 썼다. 평소에는 두 개의 사설을 실었는데 이날은 임기응변으로 글자를 키워 한 개의 사설만 실었다. 그날부터 12·12사태가 일어나기까지는 동아일보 사설이 주
장하는 대로 정국이 움직였다.”

남 이사장을 인터뷰하며 필자가 들었거나 생각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인촌이 당시는 최고의 재산이었던 땅을 팔아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지도 모를 신문사를 만든 것은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국가를 위해 벤처기업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촌과 동아일보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목에 상처가 있다고 해서 목부터 키를 재자고 하거나, 다리에 흠집이 있다고 해서 앉은 키를 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필자의 기억 속에 가장 깊숙이 박혀 있는 말은 따로 있다.

“일제하 동아일보는 나라 없는 백성의 정부였다.”

세상이 달라진 요즘, 신문이 정부를 대신하는 암울한 시절이 다시 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 100년’은 우리 언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준엄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글· 심규선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동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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