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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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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5 Nov 2009 11:18:0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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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16;뉴스코퍼레이션&#8217; 머독 회장, 구글과 전면전 선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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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5 Nov 2009 11:18:03 +0000</pubDate>
		<dc:creator>신이</dc:creator>
		
		<category><![CDATA[동네밖소식]]></category>

		<category><![CDATA[구글]]></category>

		<category><![CDATA[머독]]></category>

		<category><![CDATA[전면전]]></category>

		<category><![CDATA[콘텐츠유료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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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 ‘구글’과 거대 미디어그룹 ‘뉴스코포레이션’이 전면전을 선언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포스트, 더 타임스 등 전 세계 30여개 신문사를 보유한 ‘뉴스코포레이션’의 루버트 머독 회장이었습니다. 머독 회장은 구글, 야후 등 검색엔진 등을 신문사의 뉴스를 도둑질해 수익을 창출하는 ‘도벽환자(Kleptomaniacs)’라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으로 모자라 내년 하반기부터 구글에서 자사 기사가 검색되지 않도록 차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뉴스코포레이션 산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small;">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 ‘구글’과 거대 미디어그룹 ‘뉴스코포레이션’이 전면전을 선언했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사건의 발단은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포스트, 더 타임스 등 전 세계 30여개 신문사를 보유한 ‘뉴스코포레이션’의 루버트 머독 회장이었습니다. 머독 회장은 구글, 야후 등 검색엔진 등을 신문사의 뉴스를 도둑질해 수익을 창출하는 ‘도벽환자(Kleptomaniacs)’라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으로 모자라 내년 하반기부터 구글에서 자사 기사가 검색되지 않도록 차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뉴스코포레이션 산하 신문사들의 콘텐츠를 전면 유료화하는 계획과 맞물려있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2123"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680px"><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eba8b8eb8f85eab5aceab880.jpg"><img class="size-full wp-image-2123 " title="eba8b8eb8f85eab5aceab880"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eba8b8eb8f85eab5aceab880.jpg" alt="'뉴스코퍼레이션' 머독 회장이 구글과 전면전을 선언했다." width="670" height="153" /></a><p class="wp-caption-text">뉴스코퍼레이션 루버트 머독 회장이 구글과 전면전을 선언했다.</p></div>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머독 회장은 구글 같은 검색엔진에서 검색을 통해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고 신문 사이트를 ‘가끔’ 찾는 독자는 중요하지 않다며 “직접 신문 사이트에 들어와 돈을 지불하고 기사를 읽는 소수의 소비자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구글은 인터넷 상의 모든 페이지를 돌아다니며 이를 검색 대상으로 수집하지만 머독 회장은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수집하는 것이 저작권 침해라는 입장입니다. 또한 뉴스코퍼레이션의 모든 콘텐츠를 유료화한 뒤에도 구글에서 기사가 검색이 된다면 무료로 기사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는 셈이고 유료화에 장애가 된다는 판단인 것이죠.</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이에 구글도 반기를 들었습니다. 우선 구글이 언론사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머독 회장의 주장에 구글은 기사 제목과 내용의 일부만 보여주고 이용자가 기사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언론사 사이트로 이동하는 구조여서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또한 구글을 통해 언론사로 유입되는 클릭수가 분당 10만회에 달하는 만큼 오히려 언론사 입장에서는 구글을 통해 보다 많은 이용자를 유인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구글에서 검색 자체를 막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구글 뉴스에서 검색되길 원하지 않는 언론사는 “간단한 기술적 절차”만 거치면 된다는 입장도 밝혔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콘텐츠를 올리는 것은 검색엔진에서 검색이 되길 원하는 뜻이며, 이를 원치 않는 사이트는 홈페이지 내에 검색 거부 명령어를 삽입해 정보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검색 거부 명령어를 삽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온라인 콘텐츠를 유료화하면 콘텐츠에서 수익을 발생하지만 방문자는 감소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광고 수익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만큼 온라인 콘텐츠 유료화를 계획하고 있는 언론사라면 자사 콘텐츠는 돈을 낸 독자에게만 공개해야겠죠. 검색엔진에서 콘텐츠가 무료로 검색되는 것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글에서 유입되는 방문자를 무시하기엔 그 숫자가 너무 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독 회장이 결단을 내린 것은 그만큼 온라인 콘텐츠 유료화를 성공시키는데 총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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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디유넷, IPTV용 쌍방향 교육콘텐츠 공급 계약 체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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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Nov 2009 02:41:22 +0000</pubDate>
		<dc:creator>재기</dc:creator>
		
		<category><![CDATA[동네알림방]]></category>

		<category><![CDATA[myLGtv]]></category>

		<category><![CDATA[디유넷]]></category>

		<category><![CDATA[쿡tv]]></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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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동아미디어그룹의 e러닝 전문 자회사인 디유넷이 KT의 ‘쿡(QOOK) TV’와 LG의 ‘myLGTV’에 IPTV용 쌍방향 교육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쿡TV는 11월 15일부터, myLGTV는 11월 30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다.
  IPTV를 통해 안방에 선보일 콘텐츠는 ‘썰렁 홈즈의 퍼즐나라’. 어린이 과학 동아가 펴낸 인기 과학교육 도서 ‘퍼즐 탐정 썰렁 홈즈’를 차용해 디유넷의 e러닝 콘텐츠 제작 노하우로 재가공한 쌍방향 시청각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112" title="ecb59ceca285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ecb59ceca2851.gif" alt="ecb59ceca2851" width="630" height="333"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동아미디어그룹의 e러닝 전문 자회사인 디유넷이 KT의 ‘쿡(QOOK) TV’와 LG의 ‘myLGTV’에 IPTV용 쌍방향 교육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쿡TV는 11월 15일부터, myLGTV는 11월 30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다.</p>
<p>  IPTV를 통해 안방에 선보일 콘텐츠는 ‘썰렁 홈즈의 퍼즐나라’. 어린이 과학 동아가 펴낸 인기 과학교육 도서 ‘퍼즐 탐정 썰렁 홈즈’를 차용해 디유넷의 e러닝 콘텐츠 제작 노하우로 재가공한 쌍방향 시청각 교육 콘텐츠다. 시청자는 명탐정 홈즈가 되어 리모컨을 통해 질문에 답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그림 찾기, 길 찾기, 과학상식 퀴즈를 풀어가며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p>
<p>  디유넷은 4월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지원하는 매체융합형 콘텐츠 제작 사업자로 선정돼 이 콘텐츠를 제작하게 됐다. 한 회당 약 15분 분량으로 총 20회를 선보인다.</p>
<p>  디유넷은 앞으로도 IPTV용 콘텐츠를 비롯해 휴대폰, 게임기 등 다양한 분야의 미디어 환경에 접목 가능한 e러닝 콘텐츠를 개발해 동아미디어그룹의 방송 사업 진출에 대비할 계획이다. <br />
                                                              </p>
<p><br class="spacer_"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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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살아있는 다큐, 품위있는 오락 &#8220;역시, 동아방송!&#8221;</title>
		<link>http://dongne.donga.com/2009/11/09/%ec%82%b4%ec%95%84%ec%9e%88%eb%8a%94-%eb%8b%a4%ed%81%90-%ed%92%88%ec%9c%84%ec%9e%88%eb%8a%94-%ec%98%a4%eb%9e%80-%ec%97%ad%ec%8b%9c-%eb%8f%99%ec%95%84%eb%b0%a9%ec%86%a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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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9 Nov 2009 09:46:23 +0000</pubDate>
		<dc:creator>재기</dc:creator>
		
		<category><![CDATA[동네여행]]></category>

		<category><![CDATA[다큐]]></category>

		<category><![CDATA[동아방송]]></category>

		<category><![CDATA[재발견]]></category>

		<category><![CDATA[저널리즘드라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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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동아방송의 재발견(下)-시대를 앞선 격조있고 창의적인 방송



 “어느 날 새나라 택시를 탔다. 운전사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어디 방송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운전사는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동아방송입니다’라고 말했다.”
  동아방송 개국 멤버인 최창봉 전 MBC 사장이 최근 ‘나와 한국방송’이라는 글에서 밝힌 일화 중 한 대목. 최 전 사장은 “개국과 함께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한 동아방송은 특히 주 청취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2098" title="eb8f99ec9584ebb0a9ec86a11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eb8f99ec9584ebb0a9ec86a111-700x448.jpg" alt="eb8f99ec9584ebb0a9ec86a111" width="618" height="394" /></p>
<p><strong></strong> </p>
<p><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동아방송의 재발견(下)-시대를 앞선 격조있고 창의적인 방송</span></strong></p>
<p><strong></strong></p>
<p><strong></strong></p>
<p><strong></strong></p>
<p> “어느 날 새나라 택시를 탔다. 운전사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어디 방송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운전사는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동아방송입니다’라고 말했다.”</p>
<p>  동아방송 개국 멤버인 최창봉 전 MBC 사장이 최근 ‘나와 한국방송’이라는 글에서 밝힌 일화 중 한 대목. 최 전 사장은 “개국과 함께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한 동아방송은 특히 주 청취 기반을 수도권과 지식층에 두고 있어 영향력은 그만큼 독실하고 강력했다”고 회고했다.</p>
<p>  동아방송의 이 같은 영향력은 충실한 보도 기능과 함께 격조와 창의성을 겸비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저널리즘에서 출발하면서도 흥미와 긴장을 잃지 않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제작했고, 원조 ‘오빠부대’ 열풍을 일으킨 오락프로그램으로 청취자를 라디오 앞으로 모았다.</p>
<p><br class="spacer_" /></p>
<p><strong>●다큐와 저널리즘드라마 개척</strong><br />
  동아방송은 개국 초부터 뉴스 못지않게 다큐멘터리 분야에 제작 역량을 집중했다. 동아일보의 콘텐츠 생산 노하우를 방송 분야에 접목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영역이기도 했다.</p>
<p>  동아 다큐멘터리의 첫 테이프를 끊은 프로그램은 ‘여명 80년’. 갑신정변부터 8·15 광복까지의 우리 근세 정치외교 사건들을 망라한 대작으로 한국 최초의 본격 시사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여명 80년’은 방송 후 6권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p>
<p>  ‘정계야화’ ‘조선총독부’ ‘특별수사본부’ 등의 기라성같은 다큐가 뒤를 이었다. 동아방송의 상징적 정치다큐 중 하나였던 ‘정계 야화’는 전설의 주먹이었던 김두한 전 의원 등이 직접 출연해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p>
<p>  실화 자선극인 ‘이 사람을!’은 세미다큐멘터리 드라마라는 새 장르를 열었다. 이 프로그램은 일본까지 소문이 났다. 당시 NTV에서 ‘논픽션극장’을 연출하던 영화감독 오오시마 나기사가 동아방송을 찾아와 4·19 혁명 때 부상당한 뒤 윤락녀로 전락한 여성 A씨 이야기를 방송하겠다고 요청하기도 했다.</p>
<p>  이승만 정부의 경무대(청와대) 이야기를 다룬 ‘잘 돼갑니다’는 한국 최초의 정치 드라마로 기록됐는데, 이후 영화로 제작됐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2093" title="eb8f99ec9584ebb0a9ec86a123"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eb8f99ec9584ebb0a9ec86a123-255x400.jpg" alt="eb8f99ec9584ebb0a9ec86a123" width="255" height="400" /></p>
<p><strong></strong></p>
<p><strong>●한국 방송 최초의 DJ 도입<br />
</strong>  ‘막장 드라마와 저질 오락프로그램’이 판치는 요즘 방송과는 달리, 동아방송은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첨단의 문화 조류를 시기각각 안방에 전달하는 오락프로그램을 선보였다.</p>
<p>  전영우 아나운서 실장이 진행하던 ‘유쾌한 응접실’은 당시 방송 오락프로그램의 종합판이었다. ‘자칭 국보’ 양주동 박사, 서울상대 김두희 교수 등이 패널로 출연해 매주 다른 주제를 놓고 유쾌한 논쟁을 벌여 전국 청취율 1~3위권을 늘 유지했다.</p>
<p>  최동욱 씨는 ‘톱튠쇼’와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며 한국 방송 최초의 디스크자키(DJ)로 자리매김했다. 정해진 원고를 읽는 게 아니라 진행자가 시간대에 맞는 음악과 정보를 제공했다. 동아방송은 뉴스의 앵커처럼, 오락프로그램에 DJ를 도입함으로써 다양한 ‘퍼스낼리티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p>
<p>  이런 오락프로그램은 당시로는 생소한 ‘팬덤’(fandom)을 낳았다. ‘탑튠쇼’는 팝 음악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방송 시간 무렵에는 최동욱 씨를 보러 온 ‘오빠부대’가 방송사 주변에 장사진을 차기도 했다.</p>
<p><br class="spacer_" /></p>
<p><strong>●첨단의 편성 및 인력 충원 전략<br />
</strong>  동아방송이 이렇게 청취자들의 관심을 모은 데에는 시대를 앞서 간 편성 운용 전략도 한 몫했다.</p>
<p>  개국 당시 한국 라디오는 오전 7시 전후와 저녁의 서너 시간 외의 시간은 편성 사각 지대로 방치했으나, 동아방송은 각 시간대마다 주 청취층에 맞는 프로그램을 집중 편성해 저녁 전 낮 시간과 심야 시간을 황금 시간대로 바꿔 놓았다.</p>
<p>  최동욱의 ‘3시의 다이얼’은 이전 같으면 전형적인 사각 편성이었겠으나, 1966년부터 3년 간 당시 공보부 공식 조사에서 청취율 1위를 기록했다. 가수 윤형주, 이장희 씨 등이 진행했던 ‘0시의 다이얼’도 역발상의 편성 전략이 낳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p>
<p>  기존 방송과의 차별화를 위해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모아 적재적소에 운용한 것도 주효했다. 서울대 약대 출신의 조동화 씨가 다양한 문화적 경력을 인정받아 제작과장으로 발탁된 것이 그렇다.</p>
<p>  동아방송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는데 개국 공채 당시 기자 8명 모집에 400여명, 아나운서는 8명에 300여명, 성우는 30명에 2000여명이 모여 동아가 만드는 방송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그대로 보여줬다. 성우의 경우 사미자, 전원주, 박정자, 박웅 씨 등이 1기로 합류했고 이들은 지금까지 TV와 연극 분야에서 베테랑으로 활동하고 있다.</p>
<p>  30일이면 동아방송이 통폐합된 지 29년 째. 하지만 동아방송의 각종 프로그램과 선배들의 발자취는 새 방송을 준비하는 동아 인들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p>
<p>  이는 동아방송을 21세기 뉴미디어 환경에 맞춰 부활시켜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br />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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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美 트리뷴 사 &#8216;AP없이 신문만들기&#8217; 성공할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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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8 Nov 2009 10:56:27 +0000</pubDate>
		<dc:creator>신이</dc:creator>
		
		<category><![CDATA[동네밖소식]]></category>

		<category><![CDATA[AP]]></category>

		<category><![CDATA[계약중단]]></category>

		<category><![CDATA[트리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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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세계 최고 통신사인 미국 AP통신의 콘텐츠없이 신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요. LA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등을 발간하는 트리뷴 사는 8일부터 한 주 동안 AP통신의 콘텐츠를 신문에 최소한만 반영하는 실험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AP통신의 콘텐츠 없이도 신문이 무리없이 발행된다면 바로 비용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인데요. 트리뷴 사는 지난해 10월 AP에 2년 후 전재계약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한 바 있습니다. 내년 가을이면 AP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font-size: small;">세계 최고 통신사인 미국 AP통신의 콘텐츠없이 신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요. LA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등을 발간하는 트리뷴 사는 8일부터 한 주 동안 AP통신의 콘텐츠를 신문에 최소한만 반영하는 실험을 한다고 밝혔습니다.</span></span></p>
<p><span style="font-size: small;"></span></p>
<p><span style="font-size: small;">AP통신의 콘텐츠 없이도 신문이 무리없이 발행된다면 바로 비용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인데요. 트리뷴 사는 지난해 10월 AP에 2년 후 전재계약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한 바 있습니다. 내년 가을이면 AP와 전재계약을 중단할 수 있는 만큼 이번 실험은 트리뷴 사와 AP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 같습니다. (AP통신과 전재계약을 중단하려는 언론사는 2년 전에는 AP에 통보해야합니다.)</span></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2082"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277px"><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ed8ab8eba6acebb7b4ec82ac.jpg"><img class="size-medium wp-image-2082" title="ed8ab8eba6acebb7b4ec82ac"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ed8ab8eba6acebb7b4ec82ac-267x400.jpg" alt="미국 시카고에 위치한 트리뷴 사 " width="267" height="400" /></a><p class="wp-caption-text">미국 시카고에 위치한 트리뷴 사 </p></div>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실험 기간 동안 AP의 콘텐츠를 모두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포츠 경기 결과는 여전히 AP의 콘텐츠를 실을 예정이며 만약 AP 외에는 어느 매체에서도 찾을 수 없는 콘텐츠가 있다면 역시 AP의 콘텐츠를 게재합니다. 또, 이번 실험은 종이신문에만 국한된 것으로 트리뷴 사 소속 방송사와 신문 웹사이트에서는 AP의 콘텐츠를 예전과 다름없이 볼 수 있습니다.</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AP 콘텐츠를 이용할 수 없는 한 주 동안 종이신문 각각은 신문사 소속 기자들이 직접 생산한 기사들과 로이터나 워싱턴 포스트, 뉴욕타임스, AFP, 블룸버그 등의 타 언론의 콘텐츠를 활용합니다. 이 언론사 중 일부는 그동안 트리뷴 사 소속의 신문사에서는 자주 이용하지 않은 매체라고 합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트리뷴 사의 대변인 게리 웨이트맨은 이번 실험을 “AP통신 없이 신문을 발행하는 연습”이라며 다른 뉴스 소스들로 AP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다고 밝혔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이에 대해 AP의 폴 콜포드 대변인은 “AP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신문사들이 비용절감을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며, 그 중 하나로 AP와의 계약을 재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우리는 AP가 신문사와 독자들에게 중요한 정보원으로 남기 위해 노력 중이다”고 밝혔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지난해 AP에 전재계약 중단을 통보하며 트리뷴 사 소속 신문사의 한 에디터는 “특히 AP 지역 콘텐츠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양도 부족하지만 때론 질에서도 떨어진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트리뷴사 외에도 다수의 지역 언론들이 AP에 잇따라 전재계약 중단을 통보했는데요, 이번 실험의 결과에 따라 내년 이맘때 쯤 AP통신과의 재계약 여부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이번 실험으로 신문사마다 보다 다양한 기사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까요. 아니면 AP의 콧대가 더욱 높아질까요. 결과가 궁금해집니다. </span></p>
<p><span style="font-size: small;">출처: <a href="http://www.editorsweblog.org/newspaper/2009/11/tribune_co_newspapers_trial_reporting_ap.php" target="_blank">Tribune Co. newspapers trial reporting AP-free</a> (Editor&#8217;s Weblog)<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 </span></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img src="http://dongne.donga.com/?ak_action=api_record_view&id=2081&type=feed" alt=""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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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D-story 29 : 최초의 주식 담당 기자 김동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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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Nov 2009 02:49:00 +0000</pubDate>
		<dc:creator>신이</dc:creator>
		
		<category><![CDATA[동네역사관]]></category>

		<category><![CDATA[김동철]]></category>

		<category><![CDATA[대한체육회]]></category>

		<category><![CDATA[장덕수]]></category>

		<category><![CDATA[조선체육회]]></category>

		<category><![CDATA[조선체육회 창립 취지서]]></category>

		<category><![CDATA[취인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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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창간된 지 10일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체육회’ 결성을 주창한 변봉현의 논설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1920년 4월 10일자부터 12일자까지 3회 연재)은 4면 한 구석에 조그맣게 실렸지만 역시 선각자들의 집결체였던 동아일보다운, 시대를 앞서 간 기획기사였습니다.

  ‘대한체육회 70년사’(대한체육회, 1990년, 38~40쪽)는

  “기나긴 전사기(前史期)가 폐막되고 여명의 장이 열린다. 국권을 잃은 뒤의 굴종과 저항의 세월이 어느덧 10년째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창간된 지 10일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체육회’ 결성을 주창한 변봉현의 논설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1920년 4월 10일자부터 12일자까지 3회 연재)은 4면 한 구석에 조그맣게 실렸지만 역시 선각자들의 집결체였던 동아일보다운, 시대를 앞서 간 기획기사였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대한체육회 70년사’(대한체육회, 1990년, 38~40쪽)는</p>
<p><br class="spacer_" /></p>
<p>  “기나긴 전사기(前史期)가 폐막되고 여명의 장이 열린다. 국권을 잃은 뒤의 굴종과 저항의 세월이 어느덧 10년째가 되는 1920년, 한 가닥 뜻있는 이들이 ‘민족체육’의 한 곬으로 뜻을 모아 광야에 외치듯 조선체육회의 창립을 선언하고 나섰으니, 이는 곧 ‘광복’을 지향한 대도(大道)와도 상통하는 장거(壯擧)일뿐더러 후세의 이 겨레에게 긍지를 안겨주는 장한 출범으로 볼 수 있다.”고 ‘조선체육회’ 창립의 의미를 적고 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대한체육회 70년사’는 이어</p>
<p><br class="spacer_" /></p>
<p>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연면히 이 땅의 민족 언론으로서 소임을 다해온 양대지(兩大紙)의 공적에 대해서는 췌언을 요(要)치 않거니와 조선체육회의 창립 또한 이 가운데의 동아일보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으니…(중략)…조선체육회의 발기는 변봉현이 동아일보의 창간 때부터 활동하면서 표면화되었다.…(중략)…동아일보사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고 또 각계 유지들의 공명을 얻은바 되어…(중략)…드디어 그 해(1920년) 6월 16일 하오 6시, 서울 인사동 소재 명월관 지점에서 발기인대회를 열었으니 모인 인사는 47인이었다. 이 발기인대회에서는 창립준비위원으로 윤익현(尹翼鉉) 변봉현  원달호(元達鎬) 이동식(李東植) 김병태(金丙台) 이중국(李重國) 유문상(劉汶相) 이원용(李源容) 김동철 김규면(金圭冕) 등 10명을 선출하여 모든 준비작업을 위임하고…(중략)…발기인은 먼저 학교 교장이나 학교를 대표할만한 인사와 사회유지로 친일적 색채가 없는 사람, 그리고 운동경기를 애호하는 체육인 등으로 구별해서 전국적으로 그 인물을 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96명의 발기인을 모았는데 그 중 사회인사의 태반은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 씨가 천거하였다.” 며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의 설립에 동아일보의 역할이 컸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2071"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486px"><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1.jpg"><img class="size-full wp-image-2071" title="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1.jpg" alt="1" width="476" height="284" /></a><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0년 6월 18일자 3면 </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  체육협회 발기</p>
<p>  16일 오후에</p>
<p>  오십 명 유지가</p>
<p>  근래에 여러 가지로 새로운 사업이 많이 일어나는 중 특별히 한 민족의 쇠하고 성함에 큰 관계가 있는 체육에 대하여는 아즉 현저한 운동이 없는 것은 매우 유감으로 여기든 바이더니 지난 16일 오후 6시에 이에 대하여 뜻있는 몇 분이 시내 명월관 지점에 모이어서 체육회를 발기하였다는데 우선 창립위원 10명을 선정하고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한 후 폐회하였다는데 당일 출석한 사람은 고원훈 이동식 장두현 씨 외의 47인이었더라.</p>
<p><br class="spacer_" /></p>
<p>  1965년에 발간된 ‘대한체육회 70년사’ 별책 68쪽에 따르면 1920년 7월 13일 개최된 조선체육회 창립총회에서 장덕수(당시 동아일보 주간)가 발기인 대표로 자신이 작성한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를 낭독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조선체육회 창립총회</p>
<p>  “조선체육회 창립총회는 먼저 발기인 총회로부터 시작하여 고원훈 사회 하에 회의를 진행, 장덕수가 발기인 대표로 취지서를 낭독, 이승우가 규약을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이를 통과시키고 뒤따라 창립총회에 들어갔다. 발기인이 많이 모였으나 준비위원들이 준비한대로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계속하여 장소를 명월관지점 별유천지(別有天地)로 옮겨 피로연을 베풀고 이 석상에서 전형위원들에 의한 체육회 첫 이사진이 선출되었고 다음날 이 이사진에 의하여 체육회 초대 회장으로 장두현이 선임되었던 것이다. 창립총회 석상에서 낭독된 취지서는 장덕수가 만들고 체육회 규약은 이원용 이중국이 작성하여 배재고보 교무주임으로 있는 이중국의 형 이중화의 교열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 체육회 창립취지서는 구할 길이 없고 그 며칠 후 즉 7월 16일자 동아일보 사설로 게재된 조선체육회 창립에 대한 논설내용이 지금 남아 있을 뿐인데 이 사설은 취지서를 쓴 장덕수가 집필한 것으로 조선체육회 창립정신을 이 사설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어 그 사설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아래는 동아일보 1920년 7월 16일자 사설 내용 전재.”</p>
<p><br class="spacer_" /></p>
<p>  동아일보의 창간사를 쓴 장덕수의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 역시 명문입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2.jpg"><img class="aligncenter size-medium wp-image-2072" title="2"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2-500x351.jpg" alt="2" width="500" height="351" /></a> <br />
 </p>
<p>  변봉현과 함께 이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이었던 김동철(金東轍)도 본사 창간 기자였습니다. 변봉현은 야구선수, 김동철은 축구선수 출신이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동아보다 한 달 앞서 창간(1920년 3월 8일)된 조선일보에서 경제부장을 맡아보고 있던 김동철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진학문 창간 당시 정치부장의 권유로 동아가 창간되기 사흘 전 입사, 취인소(取引所 · 증권거래소)를 맡아 동아일보 최초의 주식 담당 기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체육 분야에 있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나는 명색 경제부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경제보다 오히려 체육 관계에 더 열을 올려 체육기자로서의 활약이 더 적극적이었으며 지금도 체육기자로서의 생활이 더 생생하게 기억된다. 학교시절부터 거의 모든 운동에 손을 뻗쳐 당시 우리나라에 수입된 종목 쳐놓고 조금씩이나마 손대 보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마라톤에 있어서는 학교에 있던 4년간 줄곧 전국 기록을 보지(保持)하고 있었으며 축구에 있어서도 경성 ‘베스트’의 ‘센터 포드’를 맡았고 정구도 전국대회 개인전에서 준결승에 올라간 정도의 실력은 갖고 있었다.” (김동철, ‘동우’ 1963년 10월호)</p>
<p><br class="spacer_" /></p>
<p>  “나는 학교시절부터 체육인으로서는 건방질 정도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체육에 대한 열(熱)도 또한 이에 못지않게 대단했었다. 내가 마라톤에서 일등을 했을 때든가 당시 모 신문사의 기자로 있던 이상협 씨가 내 이름을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내심 자존심이 깎인 듯한 불만한 마음을 품고 ‘당신이 기자십니까’고 반문, 기자라는 대답을 듣고는 ‘기자가 내 이름도 모르느냐’고 무례한 핀잔을 주었을 정도로 자기에 대한 자만이 대단했었다.” (위 글 중)</p>
<p><br class="spacer_" /></p>
<p>  ‘김동철 선수’의 이름을 몰랐던 기자, 이상협은 창간 편집국장으로, 학창시절 마라톤 선수 김동철은 평기자로 동아일보에서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나는 동아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의 체육진흥을 위하여 애쓸 수 있었던 것과 또 작으나마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내 일생동안의 보람으로 생각한다. 그때만 해도 아직 체육인을 그저 장난꾼으로만 알던 때였지만 나는 나대로 체육진흥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민족운동의 하나로 확신했고 이를 위해 헌신할 결의까지도 서 있었다. 그때 모든 민족운동이 다 그랬듯이 체육운동 역시 동아의 그늘 아래서 전개되어 갔다. 오늘날 이 나라 체육의 중심 기관이 되고 있는 대한체육회만 해도 동아의 사람들에 의하여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위 글 중)</p>
<p><br class="spacer_" /></p>
<p>  그는 창간 당시를 “당시에 일간신문이 동아일보만은 아니었으나 거의 조선 이천만 민중의 의사를 대표할만한 것은 동아일보 뿐 이었다.”며 “당시 동아일보는 이 나라 뜻 품은 젊은이들의 선망의 적(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경신(庚申)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으나 그 간난(艱難)한 것은 이루 말하겠습니까, 경제상 곤란은 둘째요 격일하야 당하는 압수처분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에 일간신문이 동아일보만은 아니었으나 거의 조선 이천만 민중의 의사를 대표할만한 것은 동아일보 뿐이었습니다. 이제 창간 당시를 회고할 때에 이와 같이 수난이 앞을 가리었음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시의 주지를 일관하여 조선 사람의 신문임은 물론이요 세계적 대신문이 된 것을 기뻐합니다.” (‘창간호 박든 그 때 세월도 빠르다 - 창간 당시 정치부 기자로 있다가 지금은 철도국에서 일보는 김동철 씨의 술회담’,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자, 부록 5면)</p>
<p><br class="spacer_" /></p>
<p>  “동아에서 내 젊음을 쏟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내 나이 칠순을 넘고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이제 몇이 남지 않았다. 동아는 내가 가장 힘세고 꿈 많던 시절 정열을 불태우던 일터이자 또 나를 키워준 도장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가장 절실한 희로애락과 꿈이 얽힌 곳, 나는 동아를 생각할 때마다 마치 오래전에 떠나온 나의 고향을 그리는 듯한 깊은 감회를 맛보지만 바뀌인 세대는 이제 김동철이 동아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벌써 마흔세 해 전, 동아보다 한 달 앞서 창간된 조선일보에서 소위 경제부장의 일을 맡아봤던 나는 얼마 안 있어 그 자리를 박차고 동아가 창간되기 바로 사흘 전에 동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나라 뜻 품은 젊은이들의 선망의 적(的)이었다.” (김동철, ‘동우’ 1963년 10월호)</p>
<p><br class="spacer_" /></p>
<p>  그는 “당대의 문필 양기탁 유근 선생을 비롯 김성수 장덕수 이상협 씨 등등 아마 한곳에 그 많은 인재들이 모이기란 전무후무 할 것이다. 나는 동아가 이 민족이 대망하던 유일한 민족대변지라는 점도 있었지만 언론생활을 열망하던 내가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던 양기탁 유근 선생 등을 직접 모시고 배울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지우(知友) 진학문 씨로부터 입사 교섭을 받았을 때 기쁜 마음으로 응낙하였다. 내가 동아에 있는 동안 일 자체에도 큰 보람을 느꼈지만 더욱이 그곳에서 뛰어난 동료들과 훌륭한 선배들을 사귈 수 있었던 것을 더없는 큰 보람으로 길이 간직하고 싶다.”며 그들의 면모와 일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기도 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당대의 문장 양기탁 선생도 그저 별다른 풍채나 겉에 흐르는 재기(才氣)마저 없는 초라한 노인이었으며 고하 송진우 씨 같은 이도 후세인이 상상하는 바와 같이 어떤 영웅적 기질이나 또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거창한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고하 같은 이는 그가 노상 즐겨 피우는 담배의 이름과 그 값조차도 번번이 잊어버려 사환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그 이름이 무어다라’ ‘값이 얼마지’하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건망증을 부리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내 생각키에는 대체로 위인들의 위인 된 기질이란 일단 유사시 일에 부딪쳐서 발휘되는 것이지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그 내음이 풍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 여겨진다. 요즈음 흔히 위인인척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도 평범했던 옛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p>
<p><br class="spacer_" /></p>
<p>  “조선 신문에 경제면이 생기기는 동아일보가 창간된 후에도 얼마 지난 뒤 일이었고 그것도 그때는 동아일보가 4면 신문이었기 때문에 광고 관계로 전면 12단 중 6단 내외가 경제기사의 차지로 양으로 퍽 빈약하얏섯스며 시대일보가 창간되자 10단 이상의 경제면이 조선에 비로소 처음으로 독자 앞에 나오게 되었으며 이에 자극되어 동아, 조선 등도 경제면을 점차 확대하였었다.…(중략)…현재 각 사의 경제부원으로 보면 어느 사나 많아야 3인이오 그렇지 않으면 대개는 2인이다. 한사람은 내근하고 한사람은 각 은행, 회사, 취인소 등을 오전 중에 돌아다니다가 오후에 사에 들어와서 막음(마감)시간 안에 기사 쓰고 편집하느라고 두 사람이 애쓰는 것이 현황이다.…(하략)…” (이건필&lt;李健赫 · 중외일보&gt;, 철필&lt;鐵筆&gt;, 1930년 8월호, 35쪽)</p>
<p><br class="spacer_" /></p>
<p>  위 이야기는 1930년의 상황이나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경제 담당 기자가 2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김동철(金東轍), 또 한 명은 월봉 한기악(月峰 韓基岳) 이었습니다. 한기악 기자는 주로 은행을 출입했고 김동철 기자는 지금의 증권거래소에 해당하는 취인소(取引所)를 담당했습니다. </p>
<p><br class="spacer_" /></p>
<p>  “나는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또 잠간이나마 인연으로 동아에 와서도 줄곧 경제부에 소속 취인소와 시중상황(市中商況)의 취재를 전담하게 되었다. 말이 경제부지 기자라고는 단 두 명, 당시는 경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아직 소홀했고 우리나라의 경제계 자체도 아직 미미했을 뿐 아니라 또 취재를 맡은 나 자신도 경제에 대한 소양이 극히 저급하여 기사다운 기사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지 않나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 모든 것이 다 그러했지만 취인소는 특히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어서 거기서 쓰는 모든 용어 전부가 다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왜식 용어였다. 마감시간에 뒤쫓기며 이것들을 우리말로 고쳐 쓰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동철,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3년 10월호 10쪽)</p>
<p><br class="spacer_" /></p>
<p>  당시 주식 기사는</p>
<p><br class="spacer_" /></p>
<p>  ‘초부(初付 · 처음) 후 부동(不動)으로 무폭(無幅)의 추이 계속되다가 결국 **등은 대인(大引 · 크게 상승)이었으나 일반 장세는 전과 다름없이 무활기(無活氣)였다.’는 식으로 썼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3.jpg"><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073" title="3"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3.jpg" alt="3" width="579" height="214" /></a></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class="mceTemp mceIEcenter" style="text-align: center;"> 김동철이 쓴 상황(商況) 기사
<dl id="attachment_2074"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510px;">
<dt class="wp-caption-dt"><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4.jpg"><img class="size-medium wp-image-2074" title="4"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4-500x116.jpg" alt="4" width="500" height="116" /></a></dt>
<dd class="wp-caption-dd">동아일보 1920년 7월 5일자 2면 </dd>
</dl>
</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 style="text-align: center;"> </p>
<div id="attachment_2075"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170px"><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5.jpg"><img class="size-full wp-image-2075 " title="5"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1/5.jpg" alt="5" width="160" height="200" /></a><p class="wp-caption-text">김동철 선생</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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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dongne.donga.com/?ak_action=api_record_view&id=2070&type=feed" alt=""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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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스타 저널로거 5인이 말하는 블로그 운영 필살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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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dongne.donga.com/2009/10/28/%ec%8a%a4%ed%83%80-%ec%a0%80%eb%84%90%eb%a1%9c%ea%b1%b0-5%ec%9d%b8%ec%9d%b4-%eb%a7%90%ed%95%98%eb%8a%94-%eb%b8%94%eb%a1%9c%ea%b7%b8-%ec%9a%b4%ec%98%81-%ed%95%84%ec%82%b4%ea%b8%b0/#comments</comments>
		<pubDate>Wed, 28 Oct 2009 10:37:24 +0000</pubDate>
		<dc:creator>재기</dc:creator>
		
		<category><![CDATA[동네사람들]]></category>

		<category><![CDATA[공종식]]></category>

		<category><![CDATA[김아연]]></category>

		<category><![CDATA[나성엽]]></category>

		<category><![CDATA[블로그 운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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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스타 저널로거]]></category>

		<category><![CDATA[저널로그]]></category>

		<category><![CDATA[주성하]]></category>

		<category><![CDATA[필살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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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동아일보 기자와 누리꾼들이 함께 만드는 블로그 ‘저널로그’(www.journalog)가 10월 1일 첫 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커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스타 ‘저널로거’들도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주성하 기자의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가 6월 초 일찌감치 누적 방문자 수 1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지금까지 5명의 밀리언 비지터가 탄생했습니다.
  이들이 소개하는 블로그 운영의 ‘필살기’를 전합니다.



◉ 주성하 (편집국 국제부 ·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동아일보 기자와 누리꾼들이 함께 만드는 블로그 ‘저널로그’(<a href="http://www.journalog">www.journalog</a>)가 10월 1일 첫 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커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p>
<p>  스타 ‘저널로거’들도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주성하 기자의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가 6월 초 일찌감치 누적 방문자 수 1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지금까지 5명의 밀리언 비지터가 탄생했습니다.</p>
<p>  이들이 소개하는 블로그 운영의 ‘필살기’를 전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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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2046" title="ed8f89ec9691ec9db4ec95bceab8b0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ed8f89ec9691ec9db4ec95bceab8b01-474x400.gif" alt="ed8f89ec9691ec9db4ec95bceab8b01" width="354" height="337"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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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주성하 (편집국 국제부 ·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p>
<p><a href="http://www.journalog.net/nambukstory">http://www.journalog.net/nambukstory</a></p>
<p>  저널로그를 시작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북한 이야기를 어떻게 재미있게 전달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관련 서적은 잘 팔리지 않아 출판사들도 외면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저는 무거운 주제와 가벼운 주제를 적절히 섞고 최대한 재미있게 풀어나가는데 신경을 썼습니다.</p>
<p>  블로그를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특화된 분야를 가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야 그 주제에 관심 있는 탄탄한 고정 독자층이 형성되고 이들의 추천을 받아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독자층을 만족시키려면 글의 수준을 보장해야 하는 동시에 고심의 흔적도 엿보여야 하고 논쟁이 될 주제까지 제시하는 등 나름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p>
<p>  제목 달기도 매우 중요합니다. 60% 이상이 제목을 보고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고심하고 재치있게 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내용이 없는 블로그는 제목으로 서너 번 ‘낚시질’에 성공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방문자에게 만족을 주는 꾸준한 콘텐츠 업그레이드가 기본이지요.</p>
<p>  아, 참. 블로그 하면 뭐가 좋냐구요? 저는 저널로그를 시작한 뒤에야 기자가 지면에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인지도(?)가 오르는 건 덤입니다. 저는 블로그 한 뒤 받은 메일이 신문에 기사를 6년 쓴 것보다 더 많습니다.</p>
<p>  1년 동안 제 블로그에 450만 명 넘게 방문해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블로그팀과 회사 선후배들께 감사드립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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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2053" title="eb8298ec84b1ec97bd"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eb8298ec84b1ec97bd-471x400.gif" alt="eb8298ec84b1ec97bd" width="351" height="309" /><br />
◉나성엽 (편집국 인터넷뉴스팀 · ‘바쁜 작업실’)</p>
<p><a href="http://www.journalog.net/internet">http://www.journalog.net/internet</a></p>
<p>  기자교육을 받은 사람이 블로그에 글쓰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글쓰기 방법이 다르고 제목 뽑고 편집하는 스타일도 완전히 다릅니다. 또 저널로그는 개인 블로그가 아니기 때문에 공익성도 고려해야 합니다.</p>
<p>  독자들이 관심있어 하고,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영역을 골라 우선 큰 틀을 잡는 게 좋습니다. 그 다음은 해당 주제 내에서 구체적인 소주제를 하나씩 골라 가급적 시의성있게 풀어나가면 됩니다.</p>
<p>  글은 맛깔스럽게, 구어체가 좋습니다. 새롭거나 색다른 정보를 접하는 재미 못지 않게 ‘읽는 즐거움’도 중요합니다.</p>
<p>  블로그가 10이면 제목은 9입니다. 제목은 ‘클릭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도록 답니다. 단순 요약형 표현은 피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의문형이나, ‘스펀지’처럼 빈칸 사용하기 등의 다양한 방법을 쓰면 도움이 됩니다.</p>
<p>  맷집도 세야 합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8216;초딩부터 박사까지’ 다양합니다. 악플에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p>
<p>  뉴미디어 환경에서 인터넷 뉴스 서비스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기자 블로그도 동아일보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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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2054" title="eab3b5eca285ec8b9d"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eab3b5eca285ec8b9d-463x400.gif" alt="eab3b5eca285ec8b9d" width="354" height="326" /><br />
◉공종식 (출판국 신동아팀 · ‘뉴욕 스토리’)</p>
<p><a href="http://www.journalog.net/kingjs1999">http://www.journalog.net/kingjs1999</a></p>
<p>  작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블로그에 글을 처음 올린 날입니다. 전날 주성하 기자로부터 블로그 활동상을 전해 듣고 ‘나도 한 번 해보자’며 일을 저질렀죠. 블로그 경력 9개월에 불과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방문자 수를 늘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p>
<p>  첫째, ‘오늘의 이슈’를 노려라. 예를 들어 탤런트 송혜교가 배우 현빈과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밝힌 뒤 뉴욕으로 떠난 날 ‘맨해튼에서 만났던 송혜교’ 글을 올렸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기자는 맨해튼 바에서 우연히 송혜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 당시는 몰랐다면 믿으시겠어요?)</p>
<p>  둘째, 제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글이 내용도 좋고 재미도 있는데 제목이 너무 점잖다면…. ‘하버드대가 한국 여학생 선호하는 이유’, ‘반기문 총장과 프랑스어 사투리 소동’ 등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을 제목에 담으세요.</p>
<p>  셋째, 답글을 정성스럽게 써라. 많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누리꾼들의 댓글에 ‘반응’을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다른 누리꾼들의 블로그에도 댓글을 달아주면 좋겠죠? 사실 이 부분은 제 개인적으로 충실하게 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들기도 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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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2055" title="eab980ec9584ec97b0"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eab980ec9584ec97b0-466x400.gif" alt="eab980ec9584ec97b0" width="362" height="321" /><br />
◉김아연 (편집국 인터넷뉴스팀 · ‘무엇이 재미있나 초롱초롱’)</p>
<p><a href="http://www.journalog.net/aykim">http://www.journalog.net/aykim</a></p>
<p>  “그런데 국내 포털 업체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죠?”(해외 소셜네트워킹 사이트들이 이용자가 사망한 후 사이트를 추모 게시판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했다는 글에)</p>
<p>  “장례 절차는 어떻게 진행됐죠?”(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해외 대통령들의 비슷한 사례를 정리한 글에)</p>
<p>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소재를 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마땅한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방문자들의 댓글에서 힌트를 찾아보세요. 방문자들이 댓글에 남겨놓은 의문점이나 공감을 살펴보면 ‘가지치기’를 할 수 있습니다.</p>
<p>  추석 연휴가 끝날 즈음에 맞춰 연휴 동안 갑자기 늘어난 체중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 팁이나 휴가 시즌 비행기 표 싸게 예약하는 법과 같은 ‘생활 밀착형’ 포스팅은 누리꾼들을 유인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p>
<p>  또한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도 시선을 끌기에 좋습니다. 미국, 영국 등지에선 학생들의 활발할 질문을 끌어내기 위해 선생님들이 ‘가장 멍청한 질문을 하는 날’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가장 멍청한 질문을 하는 날을 도입하면 어떨까’와 같은 글은 호응이 보장되는 동시에 댓글에서 토론이 벌어져 다양한 의견을 듣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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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2056" title="ec849deb8f99ebb988"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ec849deb8f99ebb988-463x400.gif" alt="ec849deb8f99ebb988" width="397" height="340" /><br />
◉석동빈 (편집국 산업부 · ‘석동빈의 자동차 이야기’)</p>
<p><a href="http://www.journalog.net/mobidic">http://www.journalog.net/mobidic</a></p>
<p>  어떻게 보면 블로그의 조회수라는 것은 허상입니다. 제목만 자극적으로 달아도 일단 조회수는 올라갑니다. 네이버나 다음에 노출된다면 하루 방문자 수 수십만 명도 가능합니다. 또 논란이 예상되는 내용을 의도적으로 과격하게 다루면 엄청난 댓글과 함께 방문자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까지 ‘즐길 수’ 있습니다.</p>
<p>  그런 뒤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조회수에 일희일비하는 천박한 네티즌의 모습일 뿐이겠지요. 기자들이 만드는 블로그는 그래도 ‘지성’과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p>
<p>  자동차 영화 전자제품 부동산 등 특정 주제여도 되고 사회비평이어도 상관 없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잣대가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각종 사물이나 사건을 다뤄낸다면 누구나 수준 높은 블로거가 될 수 있습니다.</p>
<p>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요?</p>
<p>  아니~죠. 우선 부지런해야 합니다. 시사적인 이슈가 처음 나왔을 때 실시간으로 포스트를 올려야 보다 많은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둘째는 꾸준한 지속성입니다. 최소한 1주일에 한 두 차례는 새로운 포스트를 작성해야 독자의 충성도와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마지막으로는 전문성입니다. 네티즌들은 결코 신문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전문성이나 명쾌한 시각이 없다면 죽은 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p>
<p>  이 세 가지만(?) 지킨다면 누구나 유명 블로거가 될 수 있습니다.</p>
<img src="http://dongne.donga.com/?ak_action=api_record_view&id=2043&type=feed" alt=""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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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2009 수습기자 공채 100일의 대장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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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8 Oct 2009 10:17:44 +0000</pubDate>
		<dc:creator>재기</dc:creator>
		
		<category><![CDATA[동네여행]]></category>

		<category><![CDATA[동아일보]]></category>

		<category><![CDATA[수습공채]]></category>

		<category><![CDATA[수습기자]]></category>

		<category><![CDATA[실무평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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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제 전부를 쏟아부을 수 있었고,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이 더욱 생긴 시간이었다.”
  “이번 5일 동안 나는 인생에서 제일 진지했다고 자부한다. 후회는 없다.”
  “이러다 죽을 것 같은 5일이었다.”

  2009년 하반기 수습기자 공채 합숙평가를 마친 10월 10일. 지원자들이 남긴 소감들이다. 이들은 19, 20일 최종 면접을 치렀다.

  동아일보 수습기자 선발은 7월 23일 사회부 사건팀을 모델로 내세운 ‘알립니다’로 시작됐다. 최종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class="alignleft size-full wp-image-2025" title="untitled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untitled1.bmp" alt="untitled1" width="624" height="418"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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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제 전부를 쏟아부을 수 있었고,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이 더욱 생긴 시간이었다.”<br />
  “이번 5일 동안 나는 인생에서 제일 진지했다고 자부한다. 후회는 없다.”<br />
  “이러다 죽을 것 같은 5일이었다.”</p>
<p>
  2009년 하반기 수습기자 공채 합숙평가를 마친 10월 10일. 지원자들이 남긴 소감들이다. 이들은 19, 20일 최종 면접을 치렀다.</p>
<p>
  동아일보 수습기자 선발은 7월 23일 사회부 사건팀을 모델로 내세운 ‘알립니다’로 시작됐다. 최종 합격자들이 이달 말 입사할 예정이니 장장 100일의 대장정인 셈이다.</p>
<p>
  수습기자 지원자들은 서류전형-필기시험-1차 면접-실무평가-최종 면접 등 5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p>
<p>
  신문 취재, 출판 취재에 모두 1000여 명이 지원했다. 자기소개서 등 서류전형을 통과한 지원자는 모두 571명. 8월 24일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중학교에서 열린 필기시험(논술, 작문)에는 542명이 응시해 95%라는 사상 최고 응시율을 나타냈다. 실무진들은 준비한 고사장이 부족해 부랴부랴 책상과 의자를 나르면서도 전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p>
<p>
  ‘정부의 중도실용 정책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논술), ‘엄마’(작문)라는 쉽지 않은 주제의 필기시험을 통과한 지원자는 95명. 이 숫자는 1차 면접이 끝나자 다시 33명으로 크게 줄었다.</p>
<p>
  다음 단계는 5일 간의 실무평가. 동아일보 수습기자 실무평가는 기간도 길고, 강도도 세 ‘지옥의 레이스’라 불린다. 그 사이 2명이 포기해 31명의 지원자들이(신문 25명, 출판 시사지 3명, 출판 생활지 3명) 진검승부를 시작했다.</p>
<p>
  신문 취재 지원자들은 르포, 인터뷰, 취재력, 스토리보드, 3분 스피치, 토론, 기사판단능력, 영어면접 등 8개 과목, 출판 취재 쪽은 기획안 구상, 상급 주제, 중급 주제, 스토리보드, 토론, 프레젠테이션, 영어면접 등 7개 과목을 치렀다.</p>
<p>
  지원자들은 실무평가 기간 내내 강의와 취재, 기사작성으로 파김치가 됐지만 매일 인성평가 위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는 ‘준비된 답변’으로 일관하려 했지만 평가위원들의 날카로운 눈과 술 앞에 장사는 없었다. 평가위원들은 최고의 인재를 가려내려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때로는 ‘스마트 폭탄’까지 투하했다.</p>
<p>
  매일 밤 지니 프로젝트 룸의 수습기자 평가방은 평가위원들의 덧글이 쌓였다. ‘논리적이다’, ‘안정감을 준다’는 코멘트가 있는가 하면 ‘오늘도 지각’, ‘착하기만 함’ 등 신랄할 평까지….</p>
<p>
  실무평가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9일 밤. 지원자들은 후련함과 아쉬움, 탈진, 마음의 내상(內傷)을 폭탄주로 달랬다. 전형과정 내내 한없이 강한 모습이었던 한 남성 지원자가 눈물을 보였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했다. 한 지원자는 울면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다. 붙든 떨어지든 깨끗이 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동녘이 밝아왔다.</p>
<img src="http://dongne.donga.com/?ak_action=api_record_view&id=2023&type=feed" alt=""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dongne.donga.com/2009/10/28/2009-%ec%88%98%ec%8a%b5%ea%b8%b0%ec%9e%90-%ea%b3%b5%ec%b1%84-100%ec%9d%bc%ec%9d%98-%eb%8c%80%ec%9e%a5%ec%a0%95/feed/</wfw:commentRss>
		</item>
		<item>
		<title>D-story 28 : ‘조선체육회’ 창설에 불지핀 체육기자 변봉현</title>
		<link>http://dongne.donga.com/2009/10/26/d-story-28-%e2%80%98%ec%a1%b0%ec%84%a0%ec%b2%b4%ec%9c%a1%ed%9a%8c%e2%80%99-%ec%b0%bd%ec%84%a4%ec%97%90-%eb%b6%88%ec%a7%80%ed%95%80-%ec%b2%b4%ec%9c%a1%ea%b8%b0%ec%9e%90-%eb%b3%80%eb%b4%89%ed%98%8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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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6 Oct 2009 05:49:49 +0000</pubDate>
		<dc:creator>신이</dc:creator>
		
		<category><![CDATA[동네역사관]]></category>

		<category><![CDATA[대한체육회]]></category>

		<category><![CDATA[변봉현]]></category>

		<category><![CDATA[야구선수 변봉현]]></category>

		<category><![CDATA[조선체육회]]></category>

		<category><![CDATA[조선체육회 창립 취지서]]></category>

		<category><![CDATA[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category>

		<category><![CDATA[체육기자]]></category>

		<category><![CDATA[평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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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그(이길용)에 앞서 동아일보의 체육 기사를 담당한 이는 평북사람 변봉현(邊鳳現) 씨였다. 그는 우리나라 마라톤 기사를 쓰는데 국제 기록과 비교를 하면서 체육 기사를 감명 깊게 쓰던 사람이었다.” (창간 기자 유광열,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년, 331쪽)


&#60;1920년 5월 18일자 3면&#62;    



 


  ◆ 육상경기대회와 세계기록의 비교
  인천, 경성 사이 25마일 경주의 1,2등 선수의 경주 시각과 세계 경주계 기록과의 비교
 ◇ 세계기록 2시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그(이길용)에 앞서 동아일보의 체육 기사를 담당한 이는 평북사람 변봉현(邊鳳現) 씨였다. 그는 우리나라 마라톤 기사를 쓰는데 국제 기록과 비교를 하면서 체육 기사를 감명 깊게 쓰던 사람이었다.” (창간 기자 유광열,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년, 331쪽)</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lt;1920년 5월 18일자 3면&gt;    </p>
<p><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16.jpg"><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011" title="16"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16.jpg" alt="16" width="363" height="399" /></a></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24.jpg"><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012" title="24"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24.jpg" alt="24" width="107" height="216" /></a></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 육상경기대회와 세계기록의 비교</p>
<p>  인천, 경성 사이 25마일 경주의 1,2등 선수의 경주 시각과 세계 경주계 기록과의 비교</p>
<p> ◇ 세계기록 2시 36분 34초</p>
<p>  ◇ 임일학군 2시 45분 11초</p>
<p>  ◇ 조창환군 2시 46분 02초</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와세다대학 영문과 재학 당시 야구선수였던 변봉현은 유학생 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할 때 선수단원으로 두 차례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내 야구단과 경기를 가지고 야구 지도를 한 적도 있던 스포츠맨이었습니다. 1918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인 평북 박천에서 지내다 와세다대 2년 선배인 설산 장덕수의 소개로 창간 기자로 입사, 동아일보 최초의 체육 담당 기자가 됐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그는 창간된 지 10일 뒤인 1920년 4월 10일자부터 12일자까지 4면에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글을 3회에 걸쳐 썼습니다. 평파(平波)는 변봉현의 필명입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2013"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570px"><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36.jpg"><img class="size-full wp-image-2013" title="36"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36.jpg" alt="36" width="560" height="269" /></a><p class="wp-caption-text">1920년 4월 10일자 4면 </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  체육 기관의 필요를 논함(1회)</p>
<p>  “시대가 일변(一變)하니 활기 우내(宇內 · 천하)에 충만하도다. 세계의 전 인류는 동(動)하고 뛰고 난다. 일층 활발히 일층 맹렬히 분기하야 활약한다. 생명력이 보다 더 팽창하고 생명력은 보다 더 절실히 감(感)한다. 용감히 살려함이 이상이며 노력이도다…(중략)…이때에 만국 국제적 운동경기대회인 올림픽 대회는 오는(來) 8월에 벨기에의 수도 브랏셀에서 개최(開)하게 되었다. 국제 올림픽 대회! 아- 이는 실로 오인(吾人)에게 무량한 감념(感念)과 무한한 감개를 준다…(중략)…아! 우리가 왜 이에 참가치 못 하는고! 권리가 없는 바인가. 부(否)라, 자기의 있는 권리를 사용치 안음이니…(중략)…각성하라. 운동에 대해 크게 각성하라. 열(熱)과 역(力)을 내어 운동에 대하여 큰 열(熱)과 큰 역(力)을 쓰라…(중략)…오인(吾人)은 이에 장래의 운동계를 위하여 기관을 설립함이 자금(自今)의 급무(急務)요 요무(要務)며 이론보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겠다…(중략)…차제에 조선 운동계를 개탄하는 유의(有意 · 뜻있는) 청년들은 절(絶 · 절실)히 공명하야 궐기하야…(하략)….”</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변봉현 기자의 이 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조선인들을 위한 조선인들의’ 체육회 결성 움직임에 불을 지핀 것입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동아가 창간되던 해에 우리 일본 유학생들이 축구와 야구팀을 짜 가지고 고국 원정을 오게 되었지요. 서울서는 야구 축구 관계인들이 각각 별도로 환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축구 편의 준비를 맡았던 나는 어느 날 야구 편의 준비를 맡고 있던 직장 동료 변봉현 씨와 담소하는 가운데, 환영회를 따로 할 것이 없이 공동으로 하자는데 합의했어요. 또 이번 모임을 계기로 앞으로 우리 체육 활동 전반을 주관할 상설기관을 결성하자는 데도 뜻을 모으고 장덕수 씨 등 신문사 간부진에 전달하였어요. 신문사에서도 우리 뜻에 적극 찬동해 그 뒤 조선체육회 결성 운동의 중심체가 바로 동아가 된 것입니다. 그 발기인 명단을 보면 거의 동아의 연고자나 전국 각지의 지국들로 되어 있어요.” (김동철, 사사 1권, 193쪽)</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변봉현 김동철, 두 기자의 노력과 체육 동호인들의 호응으로 ‘조선체육회’ 창립 준비위가 열리게 됩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1920년 6월 16일 인사동 명월관에서 50여 명의 유지가 참석해 변봉현 김동철을 포함한 10명의 창립준비위원을 선출하고 그 중 연장자인 윤기현(尹冀鉉)을 위원장으로 호선(互選)하였다.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회는 스포츠 애호가, 각 학교의 대표적 인물, 친일적 색채가 없는 사회유지 등 90여 명을 발기인으로 선정하였다. ‘그 중 사회 인사의 태반은 당시 동아일보 주간 장덕수가 천거하였다.’고 하며, 이 90여 명 가운데 본사 관계자로 인촌 김성수, 장덕수(주간), 이상협(편집국장), 진학문(정경부장), 김명식(논설반원), 김동철 한기악 변봉현 기자, 그리고 지국장으로 송제원(신의주) 안희제(부산) 이창석(선천) 하상훈(인천) 등 12명이 포함되었다.” (사사 1권, 193~194쪽)</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조선체육회가 창립(1920년 7월 13일)된 뒤 7월 16일자 동아일보 1면에 ‘조선체육회에 대하여’라는 장덕수 주간의 사설이 실렸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42.jpg"><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014" title="42"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42.jpg" alt="42" width="567" height="150" /></a></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전략)…보라. 오인(吾人)과 같이 경기장에 입(入)한 다른 민족을. 혹은 백보를 앞서고 혹은 천보를 앞섰도다. 이를 추종하여 그와 동등한 문화의 전(前)에 참여코자 할진대 백배 천배의 노작(勞作)을 오인(吾人)은 가(加)하여야 할지니, 슬프다 형제여, 오인(吾人)의 체력은 능히 그를 허(許)하는가. 보라 서양인의 체격과 오인(吾人)의 그것과를, 또는 그의 에너지와 오인(吾人)의 그것과를, 그 추(醜)함과 열(劣)함이 어찌 이에까지 과대(過大)하였던고…(중략)…민족의 발달은 건장한 웅강(雄剛)한 신체로부터 내(來)한다고…(하략)….”</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대한체육회 창립기념일(7월 13일)에 낭독하는 ‘조선체육회 창립 취지서’도 장덕수 당시 동아일보 주간의 작품입니다.</p>
<p style="text-align: center;">&lt;조선체육회 창립 취지서&gt;</p>
<p>  보라, 반공(半空 · 그리 높지 아니한 공중)에 솟은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p>
<p> 그 얼마나 웅웅(雄雄)하며 의의(毅毅)한고? 천지에 흐르는 생명은 과연 총동(總動)하는 도다.</p>
<p><br class="spacer_" /></p>
<p>  보라! 공중에 나는 빠른 새와 지상에 기는 날랜 짐승을! 그 얼마나 강건하며 민첩한고.</p>
<p>  천지에 흐르는 생명은 과연 웅장하도다.</p>
<p><br class="spacer_" /></p>
<p>  희(噫)라! 천지의 만물은 오직 생명의 한 덩어리로다.</p>
<p><br class="spacer_" /></p>
<p>  사람은 원래, 이 약동의 생명과 충실의 생명과 웅장한 생명을 수(受)하여 생(生)한지라. 그 신체는 다시 소나무와 같이 웅건하매, 그 정신은 다시 일월과 같이 명쾌할 것이어늘, 이제 그러하지 못하여 그 안색은 다색(茶色)같이 아무 광채가 무(無)하며, 그 신체는 세류(細柳)의 마른 가지 같아서 아무 기력이 무(無)하고 정신이 오직 혼미함은 하고(何故)요?</p>
<p><br class="spacer_" /></p>
<p>  이는 안일한 생활에 떨어지며 숙리 없는 처신에 빠져서 천리를 거슬러 생명의 창달을 도모치 못함이니, 이 개개인의 불행을 작(作)할 뿐 아니라 국가사회의 쇠퇴를 초래하여 현재에 지(止)할 뿐 아니라 또한 장래에 유전하여 써 자손에 급(及)할지니, 정(正)히 멸망의 도(途)를 자취(自取)함이라, 그 어찌 오인의 한심(寒心)할 바 아니리요.</p>
<p><br class="spacer_" /></p>
<p>  차(此)를 회복하여 웅장한 기풍을 작흥(作興)하며 강건한 신체를 양육(養育)하여 써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며 개인의 행복을 기망(企望) 할진대, 그 도(途) 오직 천부의 생명을 신체에 창달케 함에 재(在)하니, 그 운동을 장려하는 외(外)에 타도(他道)가 무(無)하도다.</p>
<p><br class="spacer_" /></p>
<p>  우리 조선 사회에 개개의 운동 단체가 무(無)함이 아니라. 그러나 이를 후원하며 장려하여서 조선 인민의 생명을 원숙 창달하는 사회적 통일적 기관의 흠여(欽如)함은 실로 오인의 유감이고 또한 민족의 수치로다. 오인은 자(玆)에 감(感)한 바 유(有)하여 조선체육회를 발기하노니, 조선사회의 동지 제군자(諸君子)는 그 내(來)하여 찬(贊)할진저.    1920년 7월 13일</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동아일보의 창간은 한국 체육사에도 길이 남을 단초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의 전신입니다.</p>
<p><br class="spacer_" /></p>
<p>  조선체육회 창립 후 변봉현은 향리에 학교를 세우려는 뜻을 품고 퇴사해 애쓰다가 기부하는 이가 없음을 비관하여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변봉현 씨 장서(長逝)</p>
<p>  야구계의 큰 손실</p>
<p>  전 본사 사원으로 평안남도 안주 대흥학교 교장으로 있던 변봉현 씨는 지난 14일 새벽에 안주에서 돌연 장서하였다는데 씨는 일찌기 동경에 가서 조도전에 다닌 일이 있고 귀국한 후에는 교육에 종사하였으며 재작년 본사 창간 당시에 사원으로 입사하여 건필을 들었으며 씨는 특히 무엇보다도 운동계에 취미를 많이 가져서 일본에서도 ‘와세다’의 선수로 이름이 높았으며 조선 야구계에 굴지하던 인물인데 이와 같이 일찍 불행함은 씨의 자신을 물론이오 우리 운동계를 위하여서도 불익이라 하겠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2015"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397px"><a href="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52.jpg"><img class="size-full wp-image-2015" title="52"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52.jpg" alt="52" width="387" height="204" /></a><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2년 2월 17일자 3면 </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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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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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WSJ, &#8216;지속적인 투자&#8217;로 발행 부수 증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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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1 Oct 2009 07:24:20 +0000</pubDate>
		<dc:creator>신이</dc:creator>
		
		<category><![CDATA[동네밖소식]]></category>

		<category><![CDATA[wsj]]></category>

		<category><![CDATA[발행부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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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지난해부터 해외 언론사들은 규모에 관계없이 ‘경기 침체로 경영난을 겪고 있다’, ‘광고가 줄어들고 있어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아야 한다’ 등 우울한 소식만 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수익모델로 온라인 콘텐츠를 유료로 공급한다거나 포털 사이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등의 방안들이 줄을 이어 등장했고요. 

이런 소식들 가운데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반가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종이신문 발행부수가 늘어났다는 것인데요. ABC(Audit Bureau of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left;"><span style="font-size: small;">지난해부터 해외 언론사들은 규모에 관계없이 ‘경기 침체로 경영난을 겪고 있다’, ‘광고가 줄어들고 있어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아야 한다’ 등 우울한 소식만 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수익모델로 온라인 콘텐츠를 유료로 공급한다거나 포털 사이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등의 방안들이 줄을 이어 등장했고요.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이런 소식들 가운데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반가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종이신문 발행부수가 늘어났다는 것인데요. ABC(Audit Bureau of Circulation·신문부수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9월 201만1999부였던 WSJ의 발행부수가 올해 9월에는 202만4269부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약 1만2000부가 늘어난 것이죠.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img class="size-full wp-image-2007 alignnone" title="wsj"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wsj.jpg" alt="wsj"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더욱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경기 침체 등의 여파로 발행 부수가 줄어들며 울상인 반면 WSJ만의 성공 비결을 ‘지속적인 투자’로 꼽는다는 것입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14일 WSJ이 지난 몇 년간 꾸준히 투자한 결과 발행 부수가 1만2000여 부 늘어났고 이는 10.1%의 수익 증가로 이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그렇다면 WSJ은 어디에 투자를 했기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우선 콘텐츠를 풍부하게 늘렸습니다. 금융 기사에 큰 비중을 두었던 반면 정치와 국제 기사를 강화했습니다. 스포츠와 문화 뉴스의 중요성도 강조했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종이신문에만 투자한 것은 아닙니다. WSJ의 웹사이트인 wsj.com를 개편하고 글로벌 에디션을 추가했습니다. 또한 블랙베리나 아이폰 등 모바일 독자를 위한 서비스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그 결과는 외부에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미국 최대 호텔 체인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이 독자들이 원하는 신문을 객실로 배달해주는 시스템을 도입하자 호텔 체인 안에서의 WSJ 배달 부수만 20% 증가했습니다. 이에 대해 WSJ의 모회사인 다우존스의 폴 베스코버트 최고마케팅책임자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은 WSJ을 선택할 것이다”고 확신했습니다. </span></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대다수의 언론사가 경영난에 시달리며 감원 등 조치를 취할 때도 WSJ은 투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만큼 핵심 자원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span></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span style="font-size: small;">출처: </span><a href="http://www.reuters.com/article/pressRelease/idUS152470+14-Oct-2009+GNW20091014" target="_blank"><span style="font-size: small;">Wall Street Journal Circulation Continues to Grow as Ongoing Investment in Franchise Provides Greater Value to Readers and Advertisers<br />
</span></a><span style="font-size: small;"> <br />
</span></p>
<img src="http://dongne.donga.com/?ak_action=api_record_view&id=2006&type=feed" alt=""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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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D-story 27 : 일본인보다 일본말 더 잘한 사회부 기자 김정진</title>
		<link>http://dongne.donga.com/2009/10/19/d-story-27-%ec%9d%bc%eb%b3%b8%ec%9d%b8%eb%b3%b4%eb%8b%a4-%ec%9d%bc%eb%b3%b8%eb%a7%90-%eb%8d%94-%ec%9e%98%ed%95%9c-%ec%82%ac%ed%9a%8c%eb%b6%80-%ea%b8%b0%ec%9e%90-%ea%b9%80%ec%a0%95%ec%a7%84/</link>
		<comments>http://dongne.donga.com/2009/10/19/d-story-27-%ec%9d%bc%eb%b3%b8%ec%9d%b8%eb%b3%b4%eb%8b%a4-%ec%9d%bc%eb%b3%b8%eb%a7%90-%eb%8d%94-%ec%9e%98%ed%95%9c-%ec%82%ac%ed%9a%8c%eb%b6%80-%ea%b8%b0%ec%9e%90-%ea%b9%80%ec%a0%95%ec%a7%84/#comments</comments>
		<pubDate>Mon, 19 Oct 2009 04:08:44 +0000</pubDate>
		<dc:creator>신이</dc:creator>
		
		<category><![CDATA[동네역사관]]></category>

		<category><![CDATA[4인의 심리]]></category>

		<category><![CDATA[5대 독자를 참살당한 비애]]></category>

		<category><![CDATA[고흥 총살사건]]></category>

		<category><![CDATA[김정진]]></category>

		<category><![CDATA[시대일보]]></category>

		<category><![CDATA[운정 김정진]]></category>

		<category><![CDATA[인권옹호연설대회]]></category>

		<category><![CDATA[파리강화회의]]></category>

		<category><![CDATA[희곡작가 김정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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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1920년대 조선에서 ‘씨암탉’보다 귀한 희곡작가였던 운정 김정진(雲汀 金井鎭 · 1886~1936)은 창간 당시 가장 나이가 많은 기자(34세)였습니다. 염상섭, 한기악, 유광렬, 이서구, 김형원 등 20대 초반의 젊은 기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김정진은 그래서 ‘중노인’으로 통했습니다. 설립자 인촌(29세), 주간 장덕수(26세), 편집국장 이상협(27세)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은 열혈 사회부 기자였습니다.

  “일반 민중의 신망이 두터우니만치 매일같이 조선 민족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1920년대 조선에서 ‘씨암탉’보다 귀한 희곡작가였던 운정 김정진(雲汀 金井鎭 · 1886~1936)은 창간 당시 가장 나이가 많은 기자(34세)였습니다. 염상섭, 한기악, 유광렬, 이서구, 김형원 등 20대 초반의 젊은 기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김정진은 그래서 ‘중노인’으로 통했습니다. 설립자 인촌(29세), 주간 장덕수(26세), 편집국장 이상협(27세)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은 열혈 사회부 기자였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일반 민중의 신망이 두터우니만치 매일같이 조선 민족의 외치는 소리가 산같이 들어와 쌓여서 소화하기에 곤란하였고 외근기자들은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근심하는 지사의 기풍으로 한 정론가(政論家)로써 자처도 하고 다른 방면의 사람들도 그리 인정한 까닭에 가는 곳마다 정론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외근을 나가기는 교육 문제를 가지고 당시 전수학교(專修學校) 교장 오손자(吾孫子)씨를 방문하여 동화교육(同化敎育)에 대한 것을 3시간 이상이나 격론한 것이외다.” (김정진,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자 부록 5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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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김정진 기자가 경성법전(法專)의 전신인 경성전수학교장을 만나  ‘3시간 이상 격론’을 벌이고 돌아와 쓴 첫 기사는 창간호 6면에 실린 200자 원고지 3장 분량의 ‘교육 보급이 급선무’라는 아비코가쓰(吾孫子勝) 학교장의 얘기였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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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id="attachment_1985"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625px"><img class="size-full wp-image-1985 " title="15"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15.jpg" alt="15" width="615" height="199" /><p class="wp-caption-text">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6면</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  조선에 건너온 지 6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간 교육 방면에 다소간 발달이 있지 않은 바는 아니나 물질적 방면과 비교하면 미온적 보조로 몹시 더디게 진행하여 특히 괄목할만한 발달은 나타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즈음 상황이 변하여 사상 방면과 교육 문제에 관한 촉진운동이 자못 맹렬하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낳은 일련의 풍조가 조선에도 다소간 새로 유입된 결과인 것 같다. 이에 대한 이해론(利害論)은 다른 날에 이야기하고 나의 견지(見地), 즉 교육 당사자로서 보면 몹시 더딘 보조로 진행된 교육계의 운동이 오늘의 신풍조에 따라 그 보조를 재빨리 하고 있음은 실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 귀보(貴報) 창간도 역시 교육계 신운동을 의미하는 듯하여 실로 만강(滿腔)의 치하(致賀)를 드린다. 귀보는 특히 교육 방면에 대하여 다대한 지도를 아끼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과 조선의 문제 또는 조선 자체의 실력으로 논할지라도 요컨대 아는 것, 즉 지식이 아니면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조선의 현상과 일본의 문명 정도를 대조하면 각 방면에서 차이가 너무 심하다. 조선의 발달 정도가 일본과 동일한 지위에 이르기 전에 어떤 문제든 해결키 어렵다고 생각한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그 다음 특파로 가서 기발한 재료를 수집한 것은 전남 고흥에서 경관이 제(祭)지내던 보천교도 두 명을 총살한 사건이었다.”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중 김정진의 회고)</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김정진 기자가 전남 고흥에서 보낸 첫 기사는 동아일보 1922년 8월 24일자 사회면(3면)의 1/3 을 차지했고 9월 1일자까지 잇따라 추적 보도,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86"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426px"><img class="size-medium wp-image-1986 " title="23"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23-416x400.jpg" alt="23" width="416" height="400" /><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2년 8월 24일자 3면 </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  이 사건은 1922년 8월 16일 강증산(姜甑山)의 명일(命日 · 기일) 기도회를 감시하던 일경이 기도장으로 들어가려다 이를 막는 신도에게 육혈포를 쏘아 한명이 사망하고 한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현지에 ‘특파’된 김정진기자는 ‘경무국에서 발표한 바는 위와 같으나 나(특파원)의 조사한 바는 다음과 같다.’ 며 기도회 참석 신도 및 목격 주민, 출동 경관의 진술을 대비해가며 연일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고흥총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여하(如何)한가’ (8월 24일자)</p>
<p>  ‘경관의 부상도 의문’ (8월 25일자)</p>
<p>  ‘총살된 5대 독자’ (8월 26일자)</p>
<p>  ‘사건은 극히 중대’ (8월 28일)</p>
<p>  ‘광주에도 여론 비등’ (8월 29일자)</p>
<p>  ‘고흥 총살사건이 일어난 현장’ (8월 30일자)</p>
<p>  ‘총살당한 박병채의 가정’ (8월 31일자)</p>
<p>  ‘주목할 검사의 태도’ (9월 1일자)</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자식을 살려주시오. 무고히 총살당한 원수를 갚아주시오. 오대 째 독자 대신에 장승이라도 깎아 세워주시오 하고 가슴에 맺힌 원한을 부르짖는 광경은 아귀 같은 자들의 눈에도 눈물이 날듯하다…(중략)…박병채의 가족은 육십세나 되는 노모와 삼십육세된 그의 처가 있을 뿐이요 자식도 없으며 생활은 독자인 박병채가 유지하여 왔는데 지금 목숨이 붙어있는 두 과부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은즉 경찰에서는 무죄한 백성의 한 가족을 참살한 셈이니 이 원한을 어느 곳에 호소하면 좋으냐고 울부짖는 정경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노자로 쓰고 남은 돈 중에서 약간의 부의(賻儀)를 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목을 노아 울며 마을 밖까지 나와 일행을 보내는 그 가족의 모양은 황혼에 싸이어 더욱 비참하였다.” (8월 26일자 3면)</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89"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509px"><img class="size-medium wp-image-1989 " title="35"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35-499x246.jpg" alt="35" width="499" height="246" /><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2년 8월 26일자 3면 </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90"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510px"><img class="size-medium wp-image-1990 " title="4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41-500x254.jpg" alt="41" width="500" height="254" /><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2년 8월 31일자 3면 </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  그러나 일제는 ‘정당방위였다’는 수사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9월 5일 경성 종로청년회관에서 ‘인권옹호연설대회’가 열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을 알리고 5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김정진 기자는 그 해 9월 24일 발간된 ‘동명’ 제4호에 쓴 ‘5대 독자를 참살당한 비애 - 무저항자에게 정당방위란 말부터 골계(滑稽 · 웃기는 이야기)’ 라는 글에서 사건 취재 경위와 참상을 다시 한번 전하며 “나는 실지를 답사하고 심각한 비애를 느낀 동시에 현세에서 표방하는 소위 선악이라 함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얼마나 명확한 구별을 확립하여 있는지 새로운 의문을 기(起)케 한다.” 고 암울했던 시대 상황에 절망하고 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당시에 신문기자실이 있는 곳은 총독부뿐이오 다른 관청이나 회사에는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동아일보 기자들이 매일 사무 보는 곳에 가서 기염을 토하는 바람에 체신국, 경성우편국, 경성부청 등의 순서로 만들어 놓기 시작된 것입니다.”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중 김정진의 회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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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 class="spacer_" /></p>
<p>  “그(김정진)와 필자(유광렬)는 동아일보 창간호를 낼 때에 함께 사회부 기자로 일하였었다. 그에게 특색이 있다면 일본말을 일본사람보다도 더 잘하는 것이었다. 오래 일본에 유학하였으므로 일어에 능할 수는 있으나 그것도 지나치게 잘하는 것이다. 내내 그를 일본인인줄 알았던 경성부 관리들은 ‘동아일보 같은 민족주의 신문에도 일본인 기자가 있다.’고 수근대기도 했다. 그의 이름 또한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인 이름과 비슷하여 일본 관리들이 그를 ‘가나이(金井)상’이라고 불렀다가 그에게 호되게 호령을 들은 일도 있었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 김정진 선생’, 기자협회보, 1969년 4월 11일자)</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일본 유학 중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김정진은 동아일보에 있으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0년 6월 7일자부터 6월 15일자까지 8회 연재한 ‘4인의 심리’는 파리강화회의를 다룬 것으로 그의 첫 희곡 작품이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91"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352px"><img class="size-full wp-image-1991 " title="5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51.jpg" alt="51" width="342" height="349" /><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0년 6월 7일자 4면</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  파리강화회의의 전말을 대화체로 구성한 이 작품은 그가 기자가 아니었다면 다루지 않았을 소재였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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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  장소와 시대</strong></p>
<p>  시일 1919년 1월</p>
<p>  장소 프랑스 파리, 프랑스 외무부 외무대신실</p>
<p><br class="spacer_" /></p>
<p><strong>  등장인물</strong></p>
<p>  프랑스 수상 클레만소</p>
<p>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p>
<p>  이태리 수상 올란도</p>
<p>  미국 대통령 윌슨</p>
<p><br class="spacer_" /></p>
<p>  (막이 열리매 프랑스 수상 클레만소,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이태리 수상 올란도의 삼 수상이 테이블을 중앙으로 하고 정좌하여 상의하고 있다.)</p>
<p><br class="spacer_" /></p>
<p><strong>  올란도</strong>(시계를 쳐다보며) 우리 미국 동관(同官)은 늦기도 하군.</p>
<p><strong>  클레만소</strong>(냉정한 어조로) 그들의 느럭느럭하는 것은 버릇이니까. 그 정략에 대하여는 암만 그지마는 변개치 아니하겠지?</p>
<p><strong>  로이드 조지</strong> 그가 늦게 오는 것은 다행이야. 없는 이 사이에…(중략)… 우리들의 태도를 미리 정하여 두는 것이 어떠하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  4대국 수뇌들의 거들먹거림과 술수를 희화적으로 그린 이 작품을 통해 김정진은 조선의 독립이 ‘열강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아직 요원하다는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작품 ‘4인의 심리’에 따르면 김정진은 조선의 해방이 세계 정세와 연관할 때 결코 용이치 않음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나 민족사적 당위성에 의지함 없이 그 사실을 기자의 눈으로 냉연히 바라보고 있다.” (‘기적 불 때’, 윤진현 책임편집, 범우사, 2006년, 663쪽)</p>
<p><br class="spacer_" /></p>
<p>  이외에도 그는 틈틈이 연극비평을 신문과 잡지에 게재했으며 ‘연극의 기원과 희랍극의 고찰’ 같은 글을 통해 서양의 연극이론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조선엔 씨암탉 보다 귀한 희곡작가이다. 근래에는 시대일보에 꾹 박혀 있더니 또 근근래에는 자택에 꾹 박혀있다고 한다. 얼골이 적은데다가 큼직한 안경을 써서 ‘안경 뒤에서 다닌다’는 말이 있다. 또 키가 몹시 짝달막한데 사무용 가방은 트렁크만한 것을 들고 다닌다. 소위 문사들이 새파란 젊은 애송이가 만흔데 씨는 독특히 사십을 넘겼다. (춘해 방인근, ‘문사들의 이 모양 저 모양’, 조선문단 1925년 2월호, 105쪽)</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  짤막한 글이지만 운정 김정진의 외모와 언론인으로서의 활동과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창작 활동을 시작한 이력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92"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208px"><img class="size-full wp-image-1992 " title="6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61.jpg" alt="61" width="198" height="233" /><p class="wp-caption-text">김정진(출처 : ‘기적 불 때’, 범우사)</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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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김정진은 구한말 대제학을 지낸 유정수(柳正秀)의 사위로, 명망 있는 집안의 자손이었습니다. 문중에서 촉망 받는 인재였던 김정진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열두 살 되던 1898년 사립 보흥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립 일본어학당 일본어과에 입학하여 1905년 수료하였습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는 동경수학원에서 공부하였고, 1908년 4월 일본 도쿄 사립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여 1909년까지 이곳에서 공부하다 동경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는 등 오랜 일본 유학생활로 ‘일본말을 일본사람보다도 더 잘한다.’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김억 등이 참여한 ‘페허’ 동인지 발간의 실무를 맡아하기 위해 1923년 초 동아일보를 떠난 김정진은 최남선이 주도한 시대일보가 창간(1924년 3월 31일)되자 지방부장으로 들어가 후에 조사부장을 지냈습니다. 시대일보가 재정난으로 못나오게 되자 호치신문(報知新聞) 조선특파원 등을 거쳐 조선방송협회 제2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1936년 12월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  동아일보에 연재한 ‘4인의 심리’외 김정진은 ‘15분간’  ‘기적(汽笛)불 때’ ‘전변(轉變)’  ‘잔설(殘雪)’  ‘그 사람들’  ‘찬웃음’ ‘약수풍경(藥水風景)’  ‘꿈’ 등 11편의 단막 희곡과 ‘독와사(毒瓦斯)’ 등 13편의 소설 · 평론 · 수필 등을 남겼습니다.</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93"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510px"><img class="size-full wp-image-1993  " title="7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71.jpg" alt="71" width="500" height="239" /><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0년 4월 19일자 4면. 김정진의 수필 ‘향촌에 내왕(來往)하야’</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94"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510px"><img class="size-medium wp-image-1994 " title="8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81-500x87.jpg" alt="81" width="500" height="87" /><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0년 7월 25일자 4면. 김정진의 시 ‘적은 음악가’ </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div id="attachment_1995" class="wp-caption aligncenter" style="width: 510px"><img class="size-medium wp-image-1995 " title="91" src="http://dongne.donga.com/wp-content/uploads/2009/10/91-500x101.jpg" alt="91" width="500" height="101" /><p class="wp-caption-text">동아일보 1920년 9월 14일자 4면. 김정진의 수필 ‘아! 가을’</p></div>
<p style="text-align: center;">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p><br class="spacer_" /></p>
<img src="http://dongne.donga.com/?ak_action=api_record_view&id=1983&type=feed" alt=""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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