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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동아일보 사람들- 조동화

Posted by 신이 On 12월 - 28 - 2018

 

조동화(趙東華, 1922~2014)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후 1963년 동아방송 개국 때 입사해 동아방송 편성부장과 심의부장을 지냈다. 1960년대부터 월간 ‘신동아’에 16년간 무용평론을 기고한 1세대 무용평론가로 1964년 신인 무용수들의 산실이 된 동아무용콩쿠르 창설에 큰 역할을 했다. 1976년 월간 ‘춤’을 창간해 한국 무용에 대한 평론이 거의 없던 시절 무용 비평의 토대를 만들었다. 조동화는 동아방송 재직 시 이른바 1964년 ‘앵무새 사건’과 1965년 ‘테러 사건’을 겪었다. 1990년 대한민국옥관문화훈장 수훈.

1964년 ‘앵무새 사건‘ 개요‘ : 1964년 한일협정 당시 계엄 당국은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날인 6월 4일, 동아방송의 최창봉 방송부장, 고재언 뉴스실장, 이윤하 편성과장, 조동화 제작과장, 김영효 PD 등 5명을 남산 중앙정보부로 연행했다. 그 다음 날에는 ‘앵무새’ 프로그램 집필자인 이종구 외신부장도 연행했다. ‘앵무새’ 프로그램은 정부의 한일협정 강행을 비판하는 내용인데다가 특히 내레이션을 맡은 여자 성우 이은미의 목소리가 매섭고 당차서 그 고발 효과가 배가 되었다. 청취자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앵무새 사건에 대한 계엄보통군법회의의 기소 요지는 ‘‘앵무새’ 프로그램이 사사건건 정부시책을 야유하거나 과장·비방하여 불법 학생데모를 선동·선전했다’는 것이다. 반공법과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조치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된 동아방송 간부 6명이 1심 판결 무죄에 이어 고등법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꼭 5년 1개월이 걸렸다. 물론 ‘앵무새’도 날아갔다. 최창봉·이윤하·조동화는 그 해 7월 14일, 고재언·이종구·김영효는 7월 28일 보석으로 각각 풀려났다.

1965년 동아간부 ‘테러사건’ 개요 : 1965년 9월 8일 새벽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때 국내 정세도 매우 뒤숭숭했다.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되었지만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는 계속되었다. 월남 파병동의안도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여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됐다. (8월 13일 국회 통과). 대규모 학생데모 움직임이 보이자 무장 군인들이 연세대에 난입하는가 하면 서울지구에 위수령이 또 발동됐다. 이런 정세 속에서 동아일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불만과 압박은 점점 거세어졌다. 먼저 9월 7일 밤 11시 45분경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 대리의 서울 이문동 집이 폭파되었다. 대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대문 왼쪽 기둥이 부서지고 대문 안 벽이 허물어졌으며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안 된 8일 새벽 0시 40분경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몰매를 맞았다. 갈비뼈가 세 군데나 금이 갔다.

 

조동화(趙東華) (회령, 1922~ ) △ 63.5 방송제작과장, 편성부장, 심의부장, 부국장대우, 심의위원, 75.3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여기는 동아방송’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동아의 첫 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1963년 4월 25일 상오 5시 30분, 새벽 정적을 뚫고 동아방송이 태어났다. 꿈과 희망에 찬 첫소리, 그 자체가 방송사상 획기적인 큰 뉴스였다. 관영방송이 지배하고 두 민방이 앞섰으므로 세 번째 민방이지만 그러나 참된‘민중의 소리’를 대변할 유일한 민간방송이 태어난 것이다. 다른 두 민방, 기독교방송과 문화방송과는 달리 동아방송은 유일하게 일간신문사가 겸영하는 것, 활자매체와 전파매체가 서로 연계하여 보완하는 시대의 문이 열린 것이다.

1961년말부터 1963년초에 걸쳐 건축공사와 방송시설을 준비하고, 시험전파를 성공리에 끝낸 동아방송은 개국을 목전에 두고 인적구성에 착수하였다. 국의 기구는 3부 6과 2실 1소로 다음과 같다.
초대 국장에 김상기(金相琪) 업무국장이 전보되었고, 방송부장에 최창봉(崔彰鳳), 기술부장에 신광우(申光雨), 업무부장에 정봉진(鄭奉鎭), 그리고 편성과장에 이윤하(李潤夏), 제작과장에 조동화(趙東華), 음악과장에 조갑준(趙甲濬), 아나운서실장에 전영우(全英雨), 뉴스실장에 고재언(高在彦), 송신소장에 이창섭(李昌燮), 기술과장에 정관영(鄭寬永), 총무과장에 김기택(金基澤), 영업과장에 강기철(姜基喆)이 각각 임명되었다.

(…)

‘앵무새’사건으로 입을 틀어막아 

서울특별시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 날인 6월 4일 상오, 방송부장 최창봉(崔彰鳳), 뉴스실장 고재언(高在彦), 편성과장 이윤하(李潤夏) 등 3명이 수사기관원에게 연행되고, 같은 날 하오 제작과장 조동화(趙東華), ‘앵무새’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김영효(金榮孝)가 다시 당국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5일에는 ‘앵무새’ 프로그램의 스크립트 라이터였던 동아일보 외신부장 이종구(李鍾求)가 자택에서 연행되어 도합 6명이 체포되었다. 이밖에도 편집국 수습기자 이종률(李鍾律)이 6월 13일 학생데모 직후 조종혐의로 구속되었다.

한편 4일 하오에는 5월 20일에서 6월 3일 사이에 방송된 뉴스원고와 ‘앵무새’ 프로그램 원고도 압수되었다.

‘앵무새’프로는 강하고 신랄한 고발적 성격의 방송 ‘칼럼’. 우리나라 방송사상 처음 시도된 것인데, 냉철한 활자매체가 주는 효과와 달리 방송매체가 주는 감정적 소구력(訴求力)이 예민하여 권력측에서는 ‘앵무새’의 해학적 내용을 가리켜, ‘의도적으로 학생을 선동한 것’으로 단정하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앵무새’를 낭독한 동아방송 성우 1기생 이은미(李銀美)의 목소리는 매섭고 날카롭고 힘찬 데가 있어 더욱 청취자를 매료시켰으며, 그들의 압도적인 반응은 ‘체증이 뚫릴 정도로 시원하다’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해도 괜찮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도 박정희가 시국불안의 요소로 지적한 ‘무책임한 일부언론’의 보도 논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6.3사태로 구속된 동아방송 요원 6명은 6월 17일 반공법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별법 등 위반혐의로 군재에 송치했다고 밝혔는데, 그때까지 이들 본사 사원의 구속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

그 후 7월 14일 계엄보통군법회의의 심판부는 관련자 6명 가운데, 최창봉(崔彰鳳) 조동화(趙東華) 이윤하(李潤夏) 등 3명을 보석키로 결정, 이날 밤 9시 40분께 서울 교도소에서 풀려났고, 나머지 3명은 64일만에 겨우 풀려났던 것이다. 그러나 1심과 재심공판이 끝나고 무죄가 확정되기까지는 만5년 1개월이 걸렸고, 이 동안에 한일회담이 성숙, 조약이 체결되었고, 67년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긴 시일에 걸쳤던 것이다.

전기 6명이 제6관구 계엄보통군법회의 공판정에 선 것은 1964년 7월 27일이었다. 범죄혐의는 ① 반공법 제4조 1항, 반국가단체활동의 찬양고무 ② 형법 제90조 2항, 내란선동선전(민재로 넘어간 후 이(此)항만이 적용되었다) ③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별법 제3조 3항 1호, 허위사실 유포, 정부비방 등등이었고, 증거물은 뉴스원고 14건, 앵무새원고 13건이었다.

1964년 7월 28일 영시를 기해 계엄령이 해제되어 이 사건은 민재로 이관, 민재 첫 공판은 1966년 11월 7일 서울형사지법 합의3부에서 열리었다. 11월 19일 구형공판에서 전원 징역 3년씩 구형(담당검사 김기형)되었다가 11월 29일 선고공판(재판장 김영준)에서 전원 무죄가 언도되었다. 그러나 검찰이 이에 불복, 고법에서 항소하여 다시 3년을 끌다가 1969년 7월 2일 서울고법 형사부에서 윤운영(尹雲永)판사 주심으로 제1회 공판이 있었고, 7월 8일에 있은 선고공판에서 1심 선고 때의 판시내용과 같은 이유로 항소기각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판시내용의 주지를 보면, ‘피고인들이 신문이나 잡지와는 달리 사람에게 예민한 반응을 주는 음파(音波)를 통해, 좀 지나친 보도(뉴스)나 논평(앵무새)을 한 것은 인정되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비난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형법에 규정된 내란죄라는 적극적인 범죄를 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내란 선동선전에까지의 행위에도 이르지 못했으므로, 무죄……’라고 판시하였다.

검찰(주임검사 정윤)이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무죄가 확정되어 이 사건은 일단락을 지었던 것이다.

무죄로 확정되는데 5년, 우선 동아방송의 비판적인 기능을 물리적 탄압으로 봉쇄한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는 명백해졌지만, 본보가 입은 상처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 시사 해학프로 청취자들의 열광적 호응을 받고 있던 ‘앵무새’ 프로는 사건발생과 더불어 중단되었고, 끝내 살아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

변영권 조동화 남중구의 수난  

1965년 9월 초순 한일협정 비준의 여진이 불타고 있었다. 서울은 위수령하에 있었고, 주요대학은 휴업령하에 문을 닫고 ‘정치교수’가 쫓겨나고 있었다. 국회는 공화당 일당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일방적으로 가결하여 야당은 국회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9월 7일 밤 11시 45분 본보 편집국장대리 변영권 집이 폭파되었고, 약 1시간 후인 8일 새벽 영시40분경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가 집에서 납치되어 몰매를 맞았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에 민중당 중앙위의장 유옥우(劉沃祐) 집이 폭파되었다. 3일간에 걸친 폭력사태는 분명히 동일성질의 정치성을 띤 권력의 소행이라고 추정되었으나, 끝내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

65년 9월 8일자 3면에 실린 조동화에 대한 테러사건 보도는 다음과 같다.

<8일 새벽 영시40분경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씨(성동구 성수동 1가 3의41)는 자택에서 자칭 ‘시경에서 왔다’는 4명의 괴한에게 납치,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장위파출소에서 3백여‘미터’ 떨어진 한길에서 괴한으로부터 심한 매질을 받아 턱 가슴 옆구리 무릎에 상처를 입었다.

조씨는 8일 새벽 영시반경 집에 들어와 옷을 벗고 있었는데 영시40분경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나 밖에 나갔더니 40세 가량된 장년과 30세 가량된 3명의 청년이 ‘시경에서 왔는데 잠깐 가자’고 한 후 검은색 ‘찝차’(번호판〓서울 자5371)에 태웠다.

조씨를 태운 이‘찝’은 성동서 옆을 끼고 돌아 마장동 미군 ‘피 엑스’ 창고 옆에 이르자 차가 고장이 났다고 정차, 조씨만 남기고 4명이 모두 하차, 무슨 밀담을 주고 받았다. 그 후 다시 달려 이문동 외국어대학을 좀 지나자 또 ‘고장이 났다’고 정차, 모두 내려 밀담한 후 다시 달려 7백‘미터’쯤 간 후 정차하는 등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정차, 밀담한 뒤에 전기 장위동까지 와서 ‘차가 고장이 났으니 조선생도 밀어달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괴한들이 ‘왜 협조 안 하느냐’고 주먹으로 양쪽 턱을 때리기 시작했다. ‘최루탄이 어떻게 되었어?’ ‘왜 협조 안 하느냐’고 말하면서 무수히 구타, ‘내일 떠들었다간 가만 안 두겠다. 영장 가지고 와 정식 구속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기네 끼리만 ‘찝’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조씨는 곧 파출소로 와 순경에게 ‘테러’ 맞은 경위를 신고했으나 신고 받은 이병일 순경은 ‘돈사람 같다’고 신고를 안 받았다가 나중에야 마지못해 본서로 전화연락 했다.>

위수령하에 일어난 폭력사건이요, 조동화에 대한 테러사건의 경우 통행금지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그에 폭행을 가한 범인들이 ‘시경에서 왔다’고 사칭하였으나, 시경에서 모르는 일이었다.

당국은 ‘범인색출’을 장담하였으나 군 검 경 합동수사반을 구성하여 한때 조동화에 대한 테러현장 지휘자로 보이는 혐의자를 파악하기도 하였다. 즉 10월 초순, 합동수사반은 전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유기홍(劉基鴻)중령이 조동화 테러의 현장지휘자 모습과 같다는 결론을 얻었고, 또한 테러 당시 특수사명을 띠고 특수훈련을 받은 지휘관 이진삼(李鎭三)대위와 부대원 우재록 김명규 두 하사가 행동대였다는 심증을 얻었으나, 월남전출 등 이유로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하였다. 국회도 9월 18일에 조사단을 구성 정치테러의 조사에 나섰으나, 12월 21일에 이르러 ‘특수기관원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구체적인 내용이나 범인은 캐내지 못하였고, 이 사건은 영원한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국회조사권이 미치지 않는 ‘특수기관원’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적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동우초대석] 조동화 전 심의위원

1976년 월간‘춤’誌창간… 아들 며느리와 함께 운영
동아방송시절 ‘앵무새’필화사건으로 호된 곤욕치러

함북 회령출생, 기독교계 학교 다녀

-건강 비법을 좀…

“잘 먹고 잘 자고 하는 것뿐이지요. 그리고 서울 대학로 건너편 살림집에서 여기 사무실까지 하루 서너 차례 왔다갔다 하는 게 전부지요.”조 동우는 말하면서 자꾸 웃고 또 자꾸 얼굴을 비비며 쓰다듬는다.
“외할아버지가 매우 건강하셔서 94세까지 사셨는데 아마도 그분의 체질을 닮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외할아버지는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 노동자 상대로 옷을 만들어 파는 일에서부터 고국에 편지와 돈을 보내는 일, 조선인 러시아 입국 알선과 일자리를 소개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는 제법 알려진 조선인 일자리소개소를 경영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종업원 7-8명 중에서 우리 아버지가 중국말과 러시아말을 잘하고 정직하게 일도 잘했기 때문에 사위로 맞이하여 소개소 일까지 맡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1917년)으로 연해주 정세도 사회주의 체제로 뒤바뀌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 접경도시 함경북도 회령으로 귀국했습니다. 나는 1922년에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누나,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조선 사람은 우리말로 편지 쓸 줄은 알아야 한다며 나를 캐나다 선교사가 운영하는 회령의 조그만 사립소학교로 보냈습니다. 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무던히도 고생을 했습니다. 4학년 때 다시 공립학교로 옮긴 후 중학교는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로 갔고, 중학 4학년 때 함흥영생중학에 편입, 5학년에 졸업했습니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 내가 다닌 학교는 모두 예수교계통 학교입니다.”

두만강에서 헤엄도

-두만강에 대한 추억이 많겠습니다.

“두만강은 독립운동가, 밀수꾼, 마적 등 온갖 사연의 사람들이 넘나들었던 강이지요. 어릴 때는 두만강에서 헤엄도 쳤고, 한겨울 밤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봄이 오는 줄도 알았지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친척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와서 대성통곡하던 일입니다. 일본 관헌들이 두만강 나루터에 지키고 서서 조선 사람들의 도강을 일일이 조사하던 때였어요.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고코쿠 신민노 세이세(皇國臣民の誓詞)’를 외워보라고 명령하고 그것을 외우지 못하면 도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코쿠 신민노 세이세’란 ‘우리는 황국신민입니다. 충성을 다하여 일본황실을 보좌합시다’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친척 아저씨의 여든 넘은 어머니가 간도로 시집 간 딸을 만나기 위해 두만강 나루터에 여러 차례 나갔으나 ‘고코쿠 신민노 세이세’를 외우지 못해 끝내 딸을 못보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회령에는 문화예술가들도 많았습니다. 영화배우 나운규와 윤봉춘, 김희갑, 사진작가 정도선, 소설가 최인훈, 만화가 신동헌과 신동우, 식물학 박사 이민재 교수, 국문학자 이두현 서울대 명예교수 등…. 김동환의 시「국경의 밤」도 생각 나는군요. ‘아아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중략)’
우리 집에는 풍금도 있었고 바이올린도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풍금도 잘 타고 노래도 잘했습니다. 중학생때는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내달렸고, 나무 그늘에 누워 책을 읽다가 건너오는 나룻배를 바라보면서 갖가지 사연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조 동우의 눈시울은 벌써 촉촉해졌다.

해방 다음해 단신 월남

-언제 월남하셨습니까.

“만 23살 때까지 회령에서 소학교 교원을 하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봄에 서울로 왔습니다. 그 다음 다음해에 어머니와 동생 철화(哲華)도 서울로 왔습니다. 누나는 이미 서울에서 결혼해 있었고, 누이동생은 회령에 애인이 있어 그곳에 남았습니다.”

(…)

한일협정 비판이 화근

-이제 동아방송 때 얘기 좀 하시지요. 조동화 하면 ‘앵무새 사건’과 ‘테러 사건’이 바로 연상되는데요.

“동아방송‘앵무새’프로그램은 한일협정 체결을 강행하던 박정희 정권을 몇 차례 비판했지요. 그것이 화근이 되어 최창봉 방송부장 등 동아방송 간부 6명이 남산 정보부에 몽땅 끌려갔는데 수사관들도 무리한 수사임을 인정하고 심하게 다루지는 않더군요.”
1963년 4월 25일에 개국한 동아방송은 개국 1년 만에 수도권 청취율 50%를 넘어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저녁시간대 5분짜리‘앵무새’프로그램은 박정희 정권의 독선·독재를 칼날로 찌르듯이 비판함으로써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참고로 당시의 정세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64년 3월 24일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대학생들이 결사 반대하던 청구권 6억달러 규모의 한일협정에 대해 일본과 일괄 타결하는 데 전격적으로 합의 서명했다. 청구권 협상 규모는 이승만 정권때는 20억달러, 장면 정권 때는 12억 5000만달러 선으로 논의되었었다. 이사실이 보도되자 대학생들의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폭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1개 종합대학 학생 대표들을 직접 만나 무마에 나섰다. 그러나 학생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시위구호도‘굴욕외교 반대’에서‘박 정권 물러가라’로 바뀌었다. 드디어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모든 집회와 시위는 금지되었고, 언론출판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각급학교에는 모두 휴교령이 내려졌다.>

최창봉 조동화등 6명 군법회의에

그리고 계엄 당국은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날인 6월 4일, 동아방송의 최창봉 방송부장, 고재언 뉴스실장, 이윤하 편성과장, 조동화 제작과장, 김영효 PD 등 5명을 남산 중앙정보부로 연행했다. 그 다음 날에는‘앵무새’프로그램 집필자인 이종구 외신부장도 연행했다.
 ‘앵무새’프로그램은 정부의 한일협정 강행을 비판하는 내용인데다가 특히 내레이션을 맡은 여자 성우 이은미의 목소리가 매섭고 당차서 그 고발 효과가 배가 되었다. 청취자의 반응도 갖가지였다. “체증이 뚫릴 정도로 속 시원하다”는 격려가 있었는가 하면“그래도 괜찮은 거냐?”라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원고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오히라 메모를 서울시내 32개 대학생 대표 58명에게 몰래 공개했다느니 안했다느니 하는 보도는 급기야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켜 놓고 말았어요. 이건 결국 정부의 위신이 여지없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이번 3·24 학생데모의 순수한 의의에도 결과적으로 적잖은 허물이 되고 만 것 같아 씁쓸해요. (중략)
이미 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정부의 대일협상 태도는 아무리 당사자들이 변명을 해 봐야 쓸개 빠진 정신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이젠 덮을 길이 없게 됐습니다
만….”

‘앵무새 사건에 대한 계엄보통군법회의의 기소 요지는‘앵무새’프로그램이 사사건건 정부시책을 야유하거나 과장·비방하여 불법 학생데모를 선동·선전했다’는 것이다. 반공법과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조치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된 동아방송 간부 6명이 1심 판결 무죄에 이어 고등법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꼭 5년 1개월이 걸렸다. 물론 ‘앵무새’도 날아갔다. 최창봉·이윤하·조동화는 그 해 7월 14일, 고재언·이종구·김영효는 7월 28일 보석으로 각각 풀려났다.

괴한 3명에 폭행 당해

조동화 동우는 앵무새 사건 다음 해에 테러도 당했다. 1965년 9월 8일 새벽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기록과 그의 회고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무렵의 국내 정세도 매우 뒤숭숭했다.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체결(6월 22일 조인)되었지만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는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월남 파병동의안도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여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됐다(8월 13일 국회 통과). 대규모 학생데모 움직임이 보이자 무장 군인들이 연세대에 난입하는가 하면 서울지구에 위수령이 또 발동됐다(8월 26일부터 9월 25일까지 한 달동안).
이런 정세 속에서 동아일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불만과 압박은 점점 거세어졌다. 먼저 9월 7일 밤 11시 45분경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 대리의 서울 이문동 집이 폭파되었다. 대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대문 왼쪽 기둥이 부서지고 대문 안 벽이 허물어졌으며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안 된 8일 새벽 0시 40분경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몰매를 맞았다.>

다음은 조동화 동우의 회고담이다.

“방송국에서 야간 편성회의를 마치고 이문동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됐지요. 대문에서 벨소리가 나기에 나가 보았더니 시경에서 왔다며 같이 좀 가자는 거예요. 3명인데 건강한 체격들이었습니다. 지프에 나를 태우더니 이문동 정보부 건물 뒤편 산 쪽으로 차를 몰더군요. 산 중턱쯤에서 차가 고장이 났다며 나더러 차를 좀 같이 밀자고 해요. 그래서 같이 차를 미는데 한 놈이 내 옆구리를 주먹으로 냅다 치는 거예요. 나는 숨이 막힌 채로 쓰러졌지요. 그랬더니 세 놈이 내 몸을 군홧발로 마구 차고 짓밟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얼굴은 때리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나를 죽이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참 때리고 차고 하더니 차를 타고 가버리더군요. 나는 간신히 일어나 산 밑으로 내려와서 신문사에 전화를 했지요. 진단 결과 갈비뼈가 세 군데나 금이 갔더군요. 그런데 뒤에 알려진 바로는 동아방송 제작과장이 방송뉴스를 포함해서 모든 방송 내용을 다 관장하는 막강한 자리라고 괴한들이 잘못 판단하고 나를 납치 폭행했다는 군요. 사실은 방송뉴스부장이 납치당했어야 하는 건데… (웃음).”

종편 동아방송, 국내 최고방송 확신

-동아일보사가 종편사업자로 결정되어 31년만에 방송을 되찾았습니다. 당부의 말씀을….

“참 기뻐요. 동수회(매주 수요일 점심때 모이는 동아방송 전직 사원들 모임)회원들이 그동안 많은 기도와 기원을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힘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전통과 역사를 우리 후배들이 잊지 않는다면 어느 방송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

동아 광고사태 때 강제퇴직

-「춤」지가 발행된 지 벌써 35년(통권 419호)이 되었는데 한 달도 빠짐없이 발행했군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1975년 3월 7일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와 기구축소 조치로 내 나이 53세 때 강제 퇴직됐지요(당시 심의실 심의위원). 무엇을 해 볼까 여러 날을 생각해봤더니 대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춤이 생각났어요. 그래서「춤」지를 시작한 것이지요. 지금은 아들이 건물을 같이 쓰면서, 며느리가 춤 주간을 맡고 있으니까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2층이 아들의 늘봄출판사다). 매달 800부 발행하는데 구독료(월 5000원), 정부지원, 광고 등으로 잘 꾸려가고 있습니다.”

(‘동우초대석- 조동화 전 심의위원’, 동우회보 제19호, 2011년 2월 15일, 10~11면)

 

 

동아방송 그때 그 시절 남은 이야기] ‘여명 80년’제작 조동화선생 타계

1963년 새로 개국하는 동아방송의 프로그램 제작(교양·드라마 등)을 총괄하는 제작부장(당시는 과장)에 과연 누가 올것이냐 관심을 모았는데, 현역방송 경력자가 아닌 조동화 선생이 임명됐다.

처음 주변에서 여러 얘기들이 들렸지만 출발부터 활기를 띠면서 잡음은 곧 사라졌다. 그 당시 방송 전문 경력자라고 해도 기존의 정부 공보방송체제의 틀에 묶여있었고, 정론직필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동아방송의 프로그램 제작 책임자로는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관리자가 요망됐던 때인지라 조동화선생이 적임자로 영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동화선생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해방직후 일찍이 월남해서 서울대 약학대를 다닐때는 우익청년들과 함께 좌익학생단체와 폭력대결도 불사한 열혈청년이었다. 6·25 전쟁 중에는 대학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한국무용의 초석을 다지는가 하면 젊은 연극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문화계 중심인물이었다.

조동화선생의 첫 작품은 동아방송의 간판격인 <여명(黎明) 80년>이다.

연극운동을 함께한 최창봉(崔彰鳳) 국장과 작가 김경옥(金京鈺) 선생이 공동으로 기획, 개국 첫 프로그램으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세상에 나왔을 때 청취자들은 놀라움과 함께 환호를 보냈다.

조부장은 갑신정변으로부터 을사늑약, 독립투쟁, 일제36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80년간의 사건을 정리하고 인물들을 조사 탐색하는데 열정과 심혈을 기울이며 적극 참여, 지원했다. 다큐멘터리, 교양, 연속드라마 등 손대는 프로그램마다 성공이었다.

조동화부장은 재직 중에 테러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5년 9월8일 새벽 6시40분경, 성동구 성수동 자택에서 4명의 괴한에게 납치돼 1시간동안 여기저기로 끌려 다녔으며 장위동 고갯길에 내려놓고 무차별 집단구타를 했다. 군홧발로 마구 짓밟아 숨이 넘어갈듯했다고 한다. 사건이 확대되어 국회에 나가 답변을 해야했다. 특별한 장면은 범행 혐의자와의 대질이었다.

어느날 퇴근시간이 지난 어둑한 시간에 혐의자로 지목받고 있는 한 사람이 제작부 사무실로 온다는 통보를 받고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잠바차림에 군화를 신은 남자가 수행원과 함께 당당하게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조부장을 향해 말했다. “내가 맞습니까?” 위압적이었다. 조부장은 아니라고 했다. 군화는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숨을 돌린 조부장은 “저 사람 맞다!”고 했다. 그 얼마 전엔 유명한 ‘앵무새 사건’(1965.6.6.)으로 40일간 옥고를 치른 후 무죄판결로 석방되기도 했다.

조부장은, 당시 국민의 여론을 충분히 대변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란 소감을 남겼다. 제작부장으로서 성취와 감격의 뒤에는 불편하고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기 마련인데, 조선생은 두가지 일을 가끔 추억처럼 얘기했다.

개국 초에 1기 전속 성우를 무려 48명이나 뽑아서 교육을 시켰는데, 막상 현업에 들어가서는 출연기회가 모두에게 다 배당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상당수 인원을 해약해야했는데 그 결정책임이 제작부장이어서 고통스러웠고, 그 후 오랫동안 항의와 심한 불만 전화를 받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1963년 10월 가을 개편으로 <이야기의 샘>이란 대담프로를 편성하고 고담일화에 해박한 김화진(金和鎭)옹과 이상로(李相魯)씨가 출연했는데 1년간 방송하고 다음해 10월 개편 때 막을 내렸다. 내용은 재미있고 의미있지만 청취자에게 전달이 잘 안됐다. 그런데 항상 한복두루마기까지 받쳐입고 출연하는 김화진옹이 프로그램을 내렸다고 화를 내면서 곧장 제작부장한테 달려와 대본으로 머리를 후려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보기도 곤혹스러웠다.

1975년 광고탄압으로 기구가 축소될 때 조동화선생은 해직당했다. 동아방송 전성기의 탑을 쌓고 옥고까지 치르고, 이유 없이 회사를 떠나야했다.
떠나갈 때 너무 담담한 모습이어서 남은 후배들이 오히려 민망스러웠다. 그리고 4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생의 동아방송을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떠나고 나서 욕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야했다.

조동화선생은 1976년 3월부터 월간 무용전문지 <춤>을 창간, 2014년 3월호를 발간하고 4월24일 새벽 세상을 떠나셨다. 향년 93세. 동아방송 개국멤버들이 매주 수요일 모이는 동수회(東水會)사람들이 영안실을 지키고 최창봉선생을 비롯한 각계원로들이 영정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특히 한국무용계의 여러 단체와 무용인들이 모여 1세대 원로지도자를 떠나보내면서 함께 슬퍼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시를 혼잣말처럼 읊조리시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박팔량의 <진달래꽃>등 시를 자주 낭송하시던 원로지도자.

‘바닷물을 먹어봐야 짠 줄 아느냐’며 우선 나서라고 격려해주신 대선배.

조동화선생님 한 분으로 인해 ‘춤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무용계’라는 것을 완성하셨는데, 무용역사를 봐서는 조동화선생이 춤계에 존재하기 전, <춤>지가 있기 전과 후로 큰 선이 그려질 것이라고 본다.

척박한 춤사회에 환한 등불이요 정신적 지주, 자기희생에 철저했던, 늘 초연한 위치에서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견지하고 실천한 큰 어른. 이제 무용계 후학들은 새 길을 찾아서 나설것이다. 선생이 뿌린 춤문화의 씨앗을 가꾸어 열매를 맺는 것, 후학들의 몫이다.

(안평선 전 동아방송 PD, 동우회보 제37호, 2014년 5월 20일, 7쪽)

 

 

본사(本社) 두 간부(幹部)에 난데없는 심야(深夜)의 폭력(暴力)
대문 폭파(大門爆破)·납치(拉致)『테로』

(동아일보 1965년 9월 8일자 3면)

 

첫 공판 개정(公判開廷)… 6·3 DBS사건(事件)

(동아일보 1966년 11월 8일자 7면)

 

6명에 3년 구형(求刑)…동아방송(東亞放送) 6·3사건

(동아일보 1966년 12월 19일자 3면)

 

동아방송(東亞放送)사건 전원 무죄(全員無罪)

(동아일보 1966년 12월 29일자 1면)

 

 

 

고전무용(古典舞踊)의 새 방향(方向)
-현대적 표현(現代的表現)으로 나열(羅列) 기교 배격(技巧排擊)의 전환기(轉換期)

(동아일보 1954년 12월 9일자 4면)

 

민속무용(民俗舞踊)의 부패(腐敗)… 광복10년기념 무용예술제 평(光復10年記念舞踊藝術祭評)

(동아일보 1955년 8월 16일자 4면)

 

『민속무(民俗舞)의 진품귀골(眞品貴骨)』… 강선영 무용발표회(姜善泳舞踊發表會)를 보고

(동아일보 1955년 11월 2일자 4면)

 

현대예술(现代芸術)에의 초대(招待)- 무용(舞踊) … 균제(均齊)된 움직임의 추상성(抽象性)

(동아일보 1962년 3월 18일자 4면)

 

62년 상반기(上半期)의 무용(舞踴)… 외적(外的)인『호황(好況)』일뿐

(동아일보 1962년 7월 19일자 4면)

 

민속원형(民俗原型) 살린 가면무극(假面舞劇)… 김천흥 신작(金千興新作)『봉산(鳳山)탈춤』

(동아일보 1963년 1월 9일자 5면)

 

진수방(陳壽芳) 도미(渡美) 고별공연(告別公演)… 개성(個性)과 품위(品位) 있는 가작(佳作)

(동아일보 1963년 3월 27일자 6면)

 

너무나 큰 실망(失望) 국립무용단 민속무용부 공연(國立舞踊團民俗舞踊部公演)

(동아일보 1963년 10월 28일자 6면)

 

순수(純粹)한『흥』의 화신(化身)… 장재봉 옹(張在奉翁)의『문둥이』탈춤을 보고

(동아일보 1964년 1일 30자 5면)

 

일품(逸品)… 장희빈(張嬉嬪) 강선영발표회(姜善泳發表會)

(동아일보 1964년 12월 29일자 5면)

 

『템포』와 구성(構成)에 호감(好感)… 선화어린이무둉단(舞踊團) 귀국공연(歸國公演)

(동아일보 1966년 2월 10일자 5면)

 

고전(古典)의 정직(正直)한 시도(使徒)… 한영숙 무용발표회(韓英淑舞踊發表會)

(동아일보 1966년 9월 8일자 6면)

 

결정(結晶) 아름다운 보석(寳石)… 폴·테일러 무용단(舞踊團) 공연

(동아일보 1967년 3월 25일자 5면)

 

프로그램 아이디어 첫 시도(試圖)로는 성공(成功)… 동아방송 7주년(東亞放送開局七周年) 방송작품(放送作品)모집 심사평(審査評)

(동아일보 1970년 7월 8일자 6면)

 

신선한 율동(律動) 끊임없는 커튼 콜… 본사주최(本社主催) 베를린발레단(團) 공연(公演)

(동아일보 1973년 10월 25일자 5면)

 

올 스타 캐스트의 호화연(豪華宴)… 한국무용제전을 보고

(동아일보 1974년 6월 20일자 5면)

 

넘치는 세련미(洗鍊美) 적절(適切)히 탈피(脱皮)한「무언극(無言劇)」… 서울시립무용단(市立舞踊團) 정기공연(定期公演)

(동아일보 1976년 7월 30일자 5면)

 

[東亞무용콩쿠르 심사평] 높아진 수준(水準)… 신인(新人) 등용 위해 매년(每年) 열었으면

(동아일보 1982년 5월 25일자 6면)

 

학구적(學究的) 공연태도 큰 의의(意義)… 한국 명무전(名舞展)을 보고

(동아일보 1982년 6월 9일자 6면)

 

 

발행 20돌 맞은 월간「춤」조동화(趙東華) 발행인

“공정한 시각 위해 공연관람도 중단”

국내유일의 무용전문 월간지「춤」이 3월호로 발행 20주년을 맞는다. 발행부수 1천6백부중 유가부수는 4백부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 잡지가 우리무용계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
20년간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도「춤」지를 발행해온 조동화(趙東華)씨(74)는『성년 기념잔치는 없느냐』는 주변의 물음에『매달 책 만드는 것이 즐거울 뿐,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젊어서부터 춤을 좋아했습니다. 서울대 약대 재학 중에 현대무용을 배웠지요. 동아방송에 재직할 때는「신동아」등에 무용평론을 쓰기도 했습니다.』
「춤」지를 발행하게 된 것은75년 직장을 떠난 뒤『영원히 잃지 않을 내 일터를 가져보자』 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젊었을 때 월급을 아껴가며 모은 골동품을「곶감 빼먹듯」팔아 만들어낸「춤」지에 대해 전문가들은 활발한 비평과 정보제공으로 춤 문화를 정착시켰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순열 이상일 채희완 김채현 김영태 등 무용평론가가「춤」지를 통해 태어난 데다 이 잡지만큼 나라안팎 무용소식의 창구 역할을 해 온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조씨는 10여 년 전부터 일절 춤 공연을 보지 않고 있다. 행여『발행인이 편파적이다』는 오해를 받을까 우려해서다. 『춤을 보는 낙을 잃은 대신「춤」지를 내는 기쁨을 얻었다』면서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했다.<김순덕>

(동아일보 1996년 2월 27일자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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