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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동아일보 사람들- 조광식

Posted by 신이 On 12월 - 28 - 2018

 

조광식(趙光植, 1938~2011)은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뒤 일간스포츠 기자를 거쳐 1965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동아일보 체육부장을 역임한 뒤 1981년 MBC 스포츠국장으로 옮겼다. 이후 프로야구 MBC 청룡과 LG 트윈스 초대 단장, 프로축구 LG 치타스 단장, 한국체육언론회 고문 등을 지냈다.

 

조광식(趙光植) (서울, 1938~ ) △ 65.9 기자(체육부), 체육부장, 81.1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조광식 형을 추모함

조광식형!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식입니까. 조형과 저는 지난 1965년 같은 해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형제의 정을 나누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사이였습니다.
조형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졸업하던 1963년 일간스포츠사에 입사 한뒤 라디오서울과 동양텔레비전 사회부를 거쳐 동아일보에 스카우트되어 왔었지요.
조형은 스포츠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조형은 스포츠 이야기만 나오면 좌중을 압도했고 선수들의 개인기록을 컴퓨터에서 자료를 빼내 듯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설명하였지요. 60년대 중반 밤늦게까지 당시 동대문야구장에서 경기내용을 같이 기록하던 일이며 부근 음식점에서 막걸리로 허기를 달래던 옛 일들을 이제 다시는 나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형은 특히 동아일보 체육면의 야구 기사를 과학적 수치 등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기사와 해설로 장안의 지가를 올리기도 했었죠. 1965년 가을이던가요. 그때 임학수 부장과 김광희 선배 그리고 조형과 나는 창덕궁으로 소풍을 갔었죠. 그 때의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웠던 추억들은 우리들이 만날 때 마다 되풀이하는 단골 메뉴였는데 이제 주인공을 찾을 수가 없게 됐구려!
조형은 그 이후 문화방송에 스카우트 되어 MBC 청룡 야구단장을 맡아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스포츠보도와 야구단 발전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그 이후 LG스포츠 상무이사로 자리를 옮겨 LG트윈스 야구단장을 맡고 이어 한국체육대학에서 사회체육 강의를 맡기도 하셨죠. 특히 조형은 지난 2001년 동아일보사 사우회 창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조형 등이 앞장서 80년 동아일보 역사에서 처음으로 퇴직 사우들의 구심체인 사우회를 구성했었습니다. 조형은 2대 총무직을 맡아 운명하시기 직전까지 동우회를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운명하시기 며칠 전 문병 갔을 때 동우회 일을 걱정하시던 조형의 모습이 영영 지워지지 않습니다.
조형은 특히 동우산클럽을 창립, 초대 회장으로 계시면서 북한산 등 매월 산행에 빠지지 않고 참석 하셨는데 그렇게도 잘 걷던 조형이 이렇게 떠나시니 그 놀라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형은 오로지 스포츠 전문 기자로서 외길을 걸으셨으며 체육관련 기자모임이나 협회에도 큰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조형! 조형이 해야 할 일들이 아직 태산같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어찌 이렇게 홀연히 떠나버리십니까.
조형! 가슴이 미어집니다. 남에게 항상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살았던 조형은 분명히 서방 정토에 왕생하실 것입니다.
조형! 이제 조형이 못 다한 일들은 훌륭하게 성장한 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나갈 것입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극락왕생 하소서!

(이병대 동우회 부회장, 동우회보 제20호, 2011년 4월 20일, 12면)

 

 

[추억의 사진] 夜勤 기자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하는 것이지만 유리창이 흔들리는 칼바람이 부는 겨울철. 일주일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야근은 기자들이 모두 힘들어했다.
기자들은 펜으로는 국민의 복지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회사에 변변한 숙직실 하나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하지못하고 책상에서 긴밤을 새는날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사진기자의 눈에는 눈에 보이는 심각한 사회현상만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이불을 뛰집어 쓰고 기사를 쓰고 있는 기자의 모습도 곧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진을 찍자 야근기자는 “에이, 쓸데없는 것을 또 찍는 구먼” 했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기자들은 옷도 벗지 않고 웅크리고 눈을 붙이는 신세였지만 눈만 뜨면 모든 공적인 악덕과 두려움없이 투쟁하는 기자들이 많았다.
이 날 야근기자는 체육부 기자로 유명했던 고(故)조광식(1942~2011)기자였다. 언론사 체육부장을 거쳐 MBC 스포츠 국장, MBC청룡야구 초대단장(1982), LG트윈스 야구초대 단장(1990)을 역임했다.

(전민조 편집위원, 동우회보 제46호, 2016년 1월 22일, 12쪽)

 

 

광화문의추억들②  「명월」뜨면 보너스 나오던 시절

취재 고달픔 털어내는「쟁이」들의 천국

옛날 봉급생활자에게 보너스란 말보다 더 매력적인 말은 아마 없었을 게다. 정해진 달에 정해진 보너스가 지급되고 있는 요즘의 봉급생활자에게 보너스는 아마도 봉급을 좀 많이 받는 것쯤으로 여겨져 그 매력이 옛날 보다 분명 덜 할 것이다.
60년대 동아일보사가 타 언론사와 많은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상여금 지급이었다. 한해 적어도 400%정도의 상여금을 주었다.
월급이 제때 나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신문사가 결코 흔치 않았던 무렵에 동아일보사는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봉급을 주었고 4월 창간 기념 보너스를 시작으로 6월 상반기 보너스, 입동 무렵 김장 보너스, 연말 보너스 등 평균 100%씩 상여금을 주었다.
하지만 월급과는 달리 보너스의 지급일은 일정치가 않았다. 뜻 밖에 일찍 주어 놀랄 때가 있었는가 하면 월급날을 넘긴 뒤 거의 말일이 다 되어나오기도 했다.
“야 ! 수위실에 명월이 떴어. 오늘 보너스가 나올 거야.” 수위실에 떴다는 ‘명월’은 다름 아닌 사직동에 자리하고 있던 기자들의 단골 외상 술집인 명월옥(明月屋)의 주인이다.
나지막한 지붕, 삐걱대는 나무대문(大門이 아닌 小門이 맞겠지만) 전통 한옥의 명월옥은 약주(막걸리 보다 좀 맑은 양조 술)에 명란 찌개,  생선 전 등을 안주로 내 놓는 초라하지만 인정이 넘쳤던 술집이다.
신문 기자들 가운데 명월옥에 외상 장부 없는 기자는 거의 없었을 정도로 언론인들의 단골집이었다. 외상이 밀리고 쌓여도 결코 독촉하는 법이 없었다. 주는대로 받고 나머지는 장부에 남겨 놓았다. 명월옥에 외상 장부를 가진 동아일보 단골들의 외상 값 청산 일은 바로 보너스 나오는 날.
70년대 초반에 이미 60을 넘겼을 나이의 명월옥 주인아저씨는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대머리였다. 명월옥이란 옥호(屋號)도 여기서 유래한 것일게다.
외상 값 수금을 위해 나름대로 보너스 지급 일의 취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명월이 아저씨였기에 그가 수위실에 나타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보너스가 나왔다.
처음 신문사에 입사하면 선배들은 으레‘신참’을 명월옥으로 데리고 가 한잔을 사주고 “이제 정식으로 기자가 된 거야”하며 명월옥 외상 장부에 이름을 올리게 했다.
70년대 초반 만해도 냉장고는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여름 명월옥에 가면 시원한 약주를 마실 수 있었다. 명월옥 특유의 냉장고덕이었다. 큼지막한 비닐 주머니에 어름을 넣고 고무줄로 동여 맨 다음 술독에 넣는 명월옥식 약주 냉각방식이 그것이다.
석간신문을 내고 신문사 문을 나서 출출한 배를 달래면서 발길을 사직동 명월옥으로 돌린다. 여기 저기, 이 신문사 저 신문사, 아는 사이건 모르는 사이건 명월옥에 모인 ‘쟁이’들이 거나하게 취기에 사로잡힐 무렵이 되면 비닐 주머니에 담았던 얼음도 다 녹아 냉주가 온주로 돌아가고 조그마한 칠판에 분필로 쓰였던 안주 목록이 하나 둘씩 지워지기 시작한다.
미지근해진 약주마저도 동이 나고 준비된 안주도 다 떨어졌다고 해서 대수인가. 오늘의 고달픔을 툴툴 털어 버리려는, 또 내일의 벅찬 취재 경쟁을 위한 쟁이들의 외침은 그칠 줄 모른다.

(조 광 식 前 체육부장, 동우회보 제2호, 2006년 9월 30일, 8면)

 

 

전열 정비(戰列整備)에「모멘트」
19회 전국지구별초청고교야구(全國地區別招請高校野球)를 끝내고 총평(總評)

(동아일보 1965년 10월 21일자 8면)

 

고교야구(高校野球) 변혁(變革)의 새바람… 황금(黃金)사자(旗)대회 총평(總評)

발랄한 신진(新進)들 상위(上位)에
훈련(訓鍊)과 정신자세(精神姿勢)서 승부(勝負) 판가름
기존질서(既存秩序) 완전히 붕괴

(동아일보 1972년 7월 21일자 8면)

 

스포츠관중(觀衆)
천덕꾸러기된「고객(顧客)」… 모시진 못하나마「椅子(의자)대접」이라도 해줬으면

(동아일보 1981년 3월 14일자 5면)

 

아시아경기(競技) 유치 점검(點檢)
평양(平壤)의 요란한 선전(宣傳) 보고 온 조사단에게 우린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동아일보 1981년 10월 20일자 3면)

 

프로야구(野球)의 태동

“하필이면 세계아마야구(野球) 치르는 해인가” 일부비판…
아마튜어와의 협조체제(協調體制) 절실

(동아일보 1981년 11월 12일자 3면)

 

[브리핑룸] 조광식 이사 `세계를 향한 도전과 창의` 책 펴내

(동아일보 2002년 12월 31일자 B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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