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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동아일보 사람들- 정연권

Posted by 신이 On 12월 - 28 - 2018

 

정연권(鄭然權, 1929~2007)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뒤 한국일보 기자를 거쳐 195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외신부장, 영국특파원, 논설위원, 총무국장, 비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영어에 능해 동서냉전 분위기속에서 미국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기 전인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3국에 순회특파원으로 자주 특파됐고 베트남 전문가로서 인도차이나 분쟁 및 베트남 공산화 관련 특종기사들을 많이 썼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영국특파원을 지냈다.

 

정연권(鄭然權) (서울, 1929~ ) ▲ 1958.11 기자(조사부, 외신부), 외신부차장, 외신부장, 심의위원, 논설위원, 주영특파원(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鄭然權(1929~2007)

○1929년 11월 5일 충남 예산 출생, 2007년 1월 24일 별세
◇학력 ·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54)  ·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신문대학원 수료(67)
◇주요경력  · 한국일보 사회부, 정치부, 외신부 기자(55)  · 동아일보 조사부, 외신부 기자, 외신부장, 논설위원(58~81)  · 동아방송 상임해설위원 겸임  · 동아일보 안보조사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주영 특파원, 총무국장, 문화센터 사무국장  · 영국국제전략연구소(IISS) 정회원  · 신문협회 총무협의회장
◇저서 ‘스베틀라나의수기’(역서), ‘여수상마가레트대처’ 등 다수

친화적 귀골 풍 인상으로 주위 압도

정연권(鄭然權)은 1929년 11월 5일 아버지 延日정씨 정두화(鄭斗和)와 어머니 손흥순(孫興順)의 2남중 장남으로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태어났다. 부인 김동자(金東慈)와의 사이에 딸 다섯을 두었다.
내가 정연권을 처음 만난 것은 1962년 외신부에서 선임기자인 그와 같은 부에서 일을 하면서부터다. 그는 하얀 피부 색깔에 기골이 장대하고 훤칠한 키로 주위사람들을 압도하는 체구를 갖춘 귀골 형 언론인이었다. 외신부에서도 모든 기사작성에 철저하며 상하 간에도 깍듯한 예의를 차렸다.
후배들에게도 늘 필요한 조언을 해주고 부원 간 화합에도 신경을 쓰는 선배였다. 정연권은 신체 건강한 거구이기 때문에 경기중고교 재학 때도 투원반과 아이스하키 등의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그는 성악에도 취미가 있어서 젊은 시절 늘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정연권은 경기중고등학교(당시는 중학 6년제임)를 거쳐 서울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외신부장 때인 1967년엔 미국 컬럼비아대학 신문대학원에서 1년간 국제신문 보도론을 연수하기도 했다. 물론 그전에 그는 1950년대 미국무성 초청으로 6개월간 미국에서 언론보도 연수를 이미 받고 돌아 왔다. 그의 이런 경력을 두루 살펴 볼 때 그가 영어와 국제뉴스보도 논평에 달통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정연권이 동아일보 외신부에서 선임기자, 차장 그리고 부장을 거치는 기간에는 동서냉전이 치열하던 때였다. 미국과 유럽을 한편으로 하고 중국과 소련을 반대편으로 하는 동서냉전은 특히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 사생결단의 결전이 베트남과 라오스에서 전개되었다. 소련은 유럽에서 분단 동서독을 중심으로 베를린을 전초기지로 삼아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구축, 유럽의 안보를 최고도로 위협했다. 또 소련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과 함께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 구 프랑스령(領)을 공산화하려고 으르렁댔다. 소련은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위성국 북한을 앞장세워 한국과 일본의 공산화를 획책하고 있었다.
1960년대 유럽 및 동남아와 동북아 지역은 동서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 자유세계 리더였던 미국은 베트남 등 동남아의 자유우방이 붕괴되어 소련과 중국 편으로 넘어간다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들과 한국 등 나머지 자유국가들도 도미노게임처럼 연쇄적으로 공산주의세력에 의해 전복될 것으로 우려했다. 이것이 당시 유행했던 동남아지역의 공산화 도미노 이론이었다.

동서냉전 절정기 베트남등 인도차이나 분쟁 보도의 개척자

이런 이론에 따라 미국은 1961년 존 F 케네디 행정부 때부터 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된다면 김일성의 북한공산위성국가의 군사적 대남전복위협도 가중되어 한국도 안보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은 소련과 이웃한 거인국 중공이 후원하는 북베트남(월맹)의 자유베트남 공산화 전복활동을 먼 산의 불구경하듯 방관할 수만 없는 형편이었다.
정연권은 이런 최악의 동서냉전 분위기속에서 미국이 1964년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기전인 1961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10여년간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3국에 순회특파원으로 빈번하게 특파됐다. 이 기간 그는 인도차이나 분쟁관련 특종기사들을 숱하게 취재,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통킹 만 사건은 미국이 1964년 8월 2일 3척의 북베트남 어뢰정이 통킹 만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구축함 매독스호를 향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 공격을 가함으로써 일어났다. 미국은 이에 대해 매독스호가 즉각 반격했고, 주변에 있던 항공모함 타이콘데로가 호와 구축함 터너조이도 반격에 가담,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고 2척에 손상을 입혔다. 이 사건을 명분으로 존슨 민주당출신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공개적으로 본격 개입하게 되었다.
그해 8월 7일 미 의회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통킹 만 결의’를 의결했고 국방부는 1965년 2월부터는 B-52 폭격기로 연일 북폭에 나섰으며 단계적으로 대규모 지상군도 파견했다.
평전 집필을 위해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구활자로 된 동아일보 지면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때 정연권이 특파원으로서 보낸 주요한 큰 기사들만도 관련 사진과 함께 무려 32건이나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1954년까지 식민지시대 불령(佛領)이었던 인도차이나반도 3국에서는 1960년대초 부터 소련과 중공 그리고 월맹 등의 후원으로 공산세력의 준동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 반도 3국중 라오스에서부터 공산세력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연권은 공산 파테트 라오의 발호로 항상 정정 불안에 휘말렸던 라오스에 자주 특파되었다. 그는 이무렵 당시 수상 수바나 푸마 등 정계거물들과 베트남 주둔 미군고문단사령관 등을 단독 인터뷰한 특종 기사들로 동아일보 지면을 빛냈다.

61년 부터 국교없던 라오스 드나들며 중공등 배후세력 정체 폭로

정연권이 라오스에 특파돼 단독으로 현장기사들을 쓸 때는 한국과 라오스는 국교도 없었을 뿐 아니라 통상도 물론 없었다. 그는 언제나 비자를 태국 방콕 아니면 캄보디아에서 발급받아 라오스에 입국하는 등 숱한 난관을 겪었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라오스까지 가는데도 3일 또는 일주일까지 걸리기도 하는 등 특파기자로서 신변위협 등 온갖 모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중고등학교시절 아이스하키와 투원반 선수로서 다져진 스포츠맨의 담력이 이런 어려운 고비를 돌파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초는 지금처럼 항공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은 한국에서 그만큼 아득한 먼 나라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공산화여부가 한국 안보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정부당국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초기부터 국내 다른 신문들에 휠씬 앞서 정연권이 단독으로 보낸 인도차이나 분쟁 관련기사들은 한국인들의 대북안보에 현실적인 관심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인도차이나 분쟁에 관한 생생한 현장 기사들은 독자들이 국제문제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데도 기여했다. 자유 베트남내 공산베트콩과 월맹(北베트남)의 대 자유베트남 군사공격이 점차 치열해지자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자유 베트남의 요청에 따라 집단안보차원에서 1964년부터 이동외과병원을 시작으로 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에 이어서 청룡, 맹호부대 등 전투병 파병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1973년까지 8년간에 걸쳐 자유베트남을 돕기 위해 베트남에서 연합군과 함께 베트남 공산화 방지를 위해서 싸웠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국내 거의 모든 신문들이 앞다퉈 상주특파원을 보내, 베트남 전황을 소상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구 불령(佛領)인도차이나반도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3국으로 분할 독립한 직후 공산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하던 초기부터 그 지역의 정치 및 군사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한 인도차이나분쟁 보도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도차이나 군사및 政情보도는 196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출발점은 라오스에서 소련 및 중공과 북베트남의 공산세력촉수가 뻗치기 시작할때였다. 1960년대 초 라오스에는 자유우파와 중립주의파, 그리고 공산주의등 3개정파가 단독 집권을 향해 각축을 벌였다.
라오스는 1893~1953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와 함께 불령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였다. 1954년 프랑스가 물러난후 라오스는 왕정으로 독립해 중립주의자 수바나 푸마 수상이 집권했으나 이복동생들인 두 정파 우두머리들과 항상 치열한 반목과 갈등을 겪으면서 정쟁을 거듭하는 불안정한 소국이었다. 그 후 라오스도 베트남의 공산화와 함께 1975년 파테트 라오 공산정파가 왕정을 전복하고 공산화했다.라오스는 독립 후 초기부터 중립주의자 수바나 푸마공(公)과 우파인 분움 公, 그리고 파테트 라오 공산세력 정파인 수파누봉 3공자 등이 3등분해서 정치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정불안이 일상사처럼 잇따랐다. 수파누봉公은 소련과 중공, 그리고 월맹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정파였다. 수바나 푸마 정부는 한때 미국 등 서방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정연권은 자유우파와 중립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세력이 정치 군사적으로 각축하는 위험한 라오스를 순회특파원으로 빈번히 오가면서 분쟁현장을 열정적으로 취재 보도했다.
그는 라오스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미국 등 서방세력과 중공 등 배후세력들이 치열하게 벌이는 난마처럼 얽힌 갈등과 각축을 요령있게 골라내 일목요연하게 독자들에게 해설해 주었다.
라오스 내 각 정파들은 군대를 각각 따로 거느렸다. 그들은 자아르평원을 중심으로 협상과 무력충돌을 번갈아가면서 지루한 정쟁을 거듭했다. 각 정파들은 한편으로 상대방을 무력으로 치면서 한편으로는 단독 혹은 중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국제협상들을 되풀이 해왔다.

수바나 푸마 라오스 수상 단독인터뷰 특종 기사 대대적 보도

정연권은 1961년 2월 상순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망명중이던 수바나 푸마 수상을 만나 단독 인터뷰했다.
그의 특종기사는 그해 2월 10일 동아일보 1면에 푸마 수상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면을 거의 다 차지할 만큼 기사가 크게 다뤄졌으며 대문짝만한 제목들로 요란했다. 그는 캄보디아 공보상을 만나 유창한 영어로 끈질긴 설득 끝에 프놈펜 교외에 있는 푸마 수상 별장에서 마침내 인터뷰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푸마 수상과의 단독인터뷰 특종 기사내용은 라오스문제는 절대 군사적 해결로는 풀리지 않으며 라오스의 살길은 중립뿐이라는 요지였다. 푸마 수상은 라오스의 분단으로 제2의 한국화 가능성을 반대했으며 우익정부와 친공파를 제외한 임시정부를 우선 구성해서 캄보디아가 제안한 미국 등 14개 관계국들로 하여금 선거를 주관케해 중립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마 수상의 정치적 소신은 정연권 특파원의 일문일답기사로 상세히 보도돼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이 임시정부에는 자신을 포함해서 우파정부와 분움公, 푸미 노사반 장군, 그리고 파테트 라오당 지휘자인 수파누봉公등도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연권 특파원은 푸미 노사반 장군과도 1964년 9월 9일(동아일보 보도시점 기준)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그는 중립군과 우파군이 합작해서 정부를 수립해야 라오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 후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한국군도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 평화협정은 사기극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 미군철수가 끝나기 무섭게 자유베트남은 월맹군의 전면 남침으로 공산화되었고 이웃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한꺼번에 도미노게임처럼 모두 공산화되었다.
자유베트남의 공산화를 전후한 결정적 안보위기 때 정연권은 베트남 전문가로서 자주 현장에 특파돼 질 높은 기사들을 취재 보도했다. 그는 그후 외신부장으로서 본사에서 순발력 있게 학자 등 전문가들로 좌담회들을 조직, 위기에 처한 자유베트남 상황을 독자들에게 해설해 주곤 했다.

박정희 정권의 고위직 제의 사양, 외길 언론인 志操지켜

그가 인도차이나분쟁 보도로 각광을 받게 되자 그의 능력과 인기가 한때 상종가를 쳤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 내각에서 발탁제의가 왔다. 그는 고민 끝에 이를 정중히 사양했다.
동아일보 회사 측도 그가 관계로 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며 그 고위직은 언론계의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후 그는 논설위원과 런던 특파원, 그리고 귀국후 다시 논설위원과 총무국장, 문화센터 사무국장 등을 거쳐 1989년 동아일보를 정년 퇴임 했다.
동아일보 재직 말년 무렵 그는 회사의 처우에 대해서 다소 섭섭한 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부를 때 응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정연권은 외신부장 재임시 김상만(金相万) 사장이 외국지인들에게 보내는 영문서한 작성을 상당기간도 맡아 하는 등 헌신했으며 그는 퇴임 후 동아일보 비상임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정연권은 저녁 스케줄이 없을 때는 명동에서 치과의사로 개업했던 부인 김동자(金東慈) 여사를 모시고(?) 항상 舊 미도파백화점 앞에서 버스로 함께 퇴근했던 70~80년대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그는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부인과도 금슬이 좋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부인이 자신보다 앞서 별세한 것이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성공 못지않게 자녀교육에서도 남이 부러워할 만큼 큰 수확을  거두었다. 슬하에는 다섯 공주(딸)를 두었으며 첫째 딸(정명교)은 사위(권운현)와 함께 뉴질랜드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둘째딸(정현교)의 남편은 충북대학교 철학과 안상헌(安相憲) 교수다.
넷째 딸(정영교)은 의사며 그의 부군(김병엽)도 의사로서 건양대 의대교수로 후진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막내딸 정민교 씨는 국제변호사로서 한국주재 미국회사의 법률고문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부군(이승호)은 삼성계열회사 간부로 있다.
이처럼 유능한 언론인으로서, 충성스런 공인으로서, 헌신적인 가장으로서 마이웨이를 질풍노도처럼 살다간 정연권의 희망차고 건장한 젊은 날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하면서 글을 맺는다.

(여영무 뉴스앤피플 대표, ‘鄭然權’, 韓國言論人物史話 제7권, 2010)

 

 

61년부터 해외취재는 활기를 더하였다. 외신부의 정연권(鄭然權)은 61년 1월부터 한 달간 라오스 사이곤 방콕 프놈펜을 순회하여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인도차이나사태를 현지 중계하였고, 이어 61년 4월부터 8월까지 미국과 중남미 12개국을 순회취재하였다.

정경부장 김성열(金聖悅)은 4월부터 7월까지 본사가 주최한 유럽 경제 문화 시찰단을 인솔하여 유럽일대를 순회하였다.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군사정부는 비공산 5개지역 미주 유럽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에 친선사철단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 현지사정을 보도하기 위해 다섯 지역에 한 명씩의 특파원을 보냈다. 사절단 파견은 61년 7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유럽지역은 독일에 유학 중인 정신영(鄭信永)통신원이 맡았고, 남북미주 역시 이미 순회중인 정연권(鄭然權)기자가 맡았으며, 아프리카에 외신부의 이갑수(李甲秀)기자가, 중동에 사회부의 이효식(李孝植)기자가, 그리고 동남아에는 정경부의 권오기 기자가 7월에 출발하여 그 후 1, 2개월간 이들이 현지에서 보낸 기사로 지면을 장식했다. 마침 군사통치하에 국내기사의 취재보도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시절이라, 이들 5명의 특파기자가 보내오는 저마다 색다른 생생한 현지 르포는 지면의 활성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에는 정연권이 수행하였는데, 그는 61년 한해동안 세 번에 걸쳐 연 6개월간 해외에서 취재하였다.

동서남북을 누비는 순회취재활동은 군정하에서 특히 활발하였다. 엄격한 통제하에 국내보도가 여의치 않음으로 해외에서 읽을거리를 찾자는 고육지책이기도 하였으나, 독자의 눈을 해외에 돌려 한국국민이 해외에 웅비할 수 있는 정신기반을 조성하는데 큰 뜻이 있었다.

61년 11월부터 62년 2월까지 문화부장 이동수가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을 방문하여 이국적 풍물을 보도하였다. 62년 6월부터 3개월간 이웅희가 동남아 중근동 일대를 순회하였고, 62년 6월부터 10월까지 정연권이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일대를 누볐으며, 62년 11월부터 63년 2월까지 김진현이 아세아재단이 주최한‘후진국경제개발계획’의 시찰여행을 마쳤는가 하면, 62년 12월부터 63년 4월까지 박순재(朴舜在)가 멀리 브라질에의 제1차 이민단을 따라 취재활동을 벌였다. 62년 8월부터 9월까지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에 이강현(李綱鉉) 이명동(李命同) 두 기자가 참가하였다.

63년에 들어서는 5월부터 6월까지 홍콩에서 열린 도쿄올림픽을 대비한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위한 실무자회담에 이효식(李孝植)이 파견되었는데, 그는 같은 목적으로 8월부터 9월까지 스위스의 로잔느회담을 취재하였다.

63년 5월엔 논설위원 김성한이 맨체스타대학에 유학하게 되자 상주특파원의 자격을 부여 65년 귀국시까지 영국의 국내사정은 물론 서독의 바덴바덴에 날아가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를 취재하였다.

63년 8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정연권이 월남과 캄보디아에 특파되어 새로운 사태발전을 전하였다. 63년 9월 도쿄서 열린 바둑선수권대회를 취재하였고, 역시 그 무렵 도쿄에서 있은 모의올림픽 취재를 최경덕 김광희가 맡았고, 63년 12월에는 노상우(盧常愚)가 서독에 가는 우리 광부를 동반취재하였고, 63년 12월에는 이동수가 뉴델리에서 열린 배구 올림픽 아시아예선을 취재하였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군사적으론 해결 안된다… 『라오스』의 살길은 중립

푸마 전 수상, 망명지서 정연권 특파원과 단독회견

(동아일보 1961년 2월 10일 석간 1면)

 

 

월남대공전(越南對共戰)의 현황… 미 사령관「하킨스」대장은 말한다

전략촌 은 큰 성과… 최근 정정으로 일부 부대에는 다소 영향
6개월 후면 최종 승리의 길 열려

사이곤=정연권 특파원 단독회견

(동아일보 1963년 9월 13일 1면)

 

 

『빠리』3공자회담(公子會談) 실패면 『라오스』반공정권 수립
『노사반』장군 단독회견

월맹·중공군 직접개입,『라오』군병력은 20만
『드·골』안은 친공적(親共的)
『칸』수상의 복귀에 안도
수교엔 한국서 소극적

비엔티안=정연권본사특파원발

(동아일보 1964년 9월 9일 4면)

 

 

정연권 편집국 외신부차장, [해외특파원] 피는 물 보다 진해

(동우(東友), 1965년 12월 31일, 30쪽)

 

정연권 주영특파원, [국제신문발행인협회 심포지움 참관기] 경영과 시장개척- 발행부수유지를 위한 노력의 계획 및 실행

(동우(東友), 1977년 11월 30일, 40~41쪽)

 

정연권 주영특파원, [해외특파원통신] 우의(友誼)로 수놓인 새해 나들이- 김상만 회장의 체영(滯英) 8일간

(동우(東友), 1979년 2월 28일, 20~23쪽)

 

정연권 주영특파원, [해외특파원통신] 거리마다 역사의 숨결…런던

(동우(東友), 1979년 3월 31일, 20~21쪽)

 

정연권 주영특파원, [해외특파원통신] 편리한 외국신문기자협회

(동우(東友), 1979년 4월 30일, 22~23쪽)

 

정연권 논설위원, [언단(言壇)] 활자를 좋아하는 국민이 되자

(동우(東友), 1982년 1월 31일)

 

정연권 논설위원, 민주주의의 산실 ‘대영제국’-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동우(東友), 1982년 2월 28일, 24~25쪽)

정연권 논설위원, 민주주의의 산실 ‘대영제국’-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②

(동우(東友), 1982년 3월 31일, 10~11쪽)

정연권 논설위원, 민주주의의 산실 ‘대영제국’-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③

(동우(東友), 1982년 4월 30일, 12~13쪽)

정연권 논설위원, 민주주의의 산실 ‘대영제국’-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④

(동우(東友), 1982년 5월 31일, 8~9쪽)

정연권 논설위원, 민주주의의 산실 ‘대영제국’ –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⑤

(동우(東友), 1982년 6월 30일, 1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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