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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동아일보 사람들- 정신영

Posted by 신이 On 12월 - 27 - 2018

 

정신영(鄭信永, 1931∼1962)은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1956년 3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1957년에 설립된 중견기자단체 관훈클럽의 30번째 회원이기도. 1957년 6월 동아일보를 퇴사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독일 함부르크대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유학 중 1961년부터 동아일보 유럽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1면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잠입한 정 특파원이 취재한 동베를린 소식을 전했다. 이후 두 차례나 더 위험을 무릅쓰고 동서독 단절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한국 언론사에 남을 기사를 썼던 그는 이듬해 봄 유학 중이던 독일 함부르크에서 32세의 젊은 나이에 장 폐색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맏형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동생의 못다 한 뜻을 잇기 위해 1977년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에 기금 1억 원을 기탁해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이 탄생했다.” (동아일보 2012년 4월 14일자 ‘정신영 본보기자 50주기 추모식’ 기사)

 

정신영(鄭信永) (통천, 1931~ ) ▲ 1956. 3 수습(편집국), 기자(취재부), 1957. 6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61년부터 해외취재는 활기를 더하였다. 외신부의 정연권(鄭然權)은 61년 1월부터 한 달간 라오스 사이곤 방콕 프놈펜을 순회하여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인도차이나사태를 현지 중계하였고, 이어 61년 4월부터 8월까지 미국과 중남미 12개국을 순회취재하였다.
 정경부장 김성열(金聖悅)은 4월부터 7월까지 본사가 주최한 유럽 경제 문화 시찰단을 인솔하여 유럽일대를 순회하였다.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군사정부는 비공산 5개지역 미주 유럽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에 친선사철단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 현지사정을 보도하기 위해 다섯 지역에 한 명씩의 특파원을 보냈다. 사절단 파견은 61년 7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유럽지역은 독일에 유학 중인 정신영(鄭信永)통신원이 맡았고, 남북미주 역시 이미 순회중인 정연권(鄭然權)기자가 맡았으며, 아프리카에 외신부의 이갑수(李甲秀)기자가, 중동에 사회부의 이효식(李孝植)기자가, 그리고 동남아에는 정경부의 권오기 기자가 7월에 출발하여 그 후 1, 2개월간 이들이 현지에서 보낸 기사로 지면을 장식했다. 마침 군사통치하에 국내기사의 취재보도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시절이라, 이들 5명의 특파기자가 보내오는 저마다 색다른 생생한 현지 르포는 지면의 활성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25日에 永訣式… 정 전 구주통신원(鄭 前 歐洲通信員)
서독「함부르크」대학원서 경제학 박사학위의 최종과정을 밟고 있던 정신영(鄭信永)(전 동아일보「유럽」통신원) 씨는「함부르크」대학부속병원에서 장수술을 받던 중 지난 14일 사망하였음은 기보한바 있거니와
정(鄭)씨의 유해는 23일 낮 12시45분 NWA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영결식은 25일 상오10시 서울에서 장지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선영묘지이다.

(동아일보 1962년 4월 24일자 3면)

 

 

 

본사기자(本社記者) 5명(五名), 해외(海外)에 특파(特派)
해외 친선사절(海外親善使節)들의 활동(活動)을 신속보도(迅速報道)

남북미주(南北美洲)…  정연권 (鄭然權) 특파원(特派員)
구라파(歐羅巴)…   정신영(鄭信永) 특파원(特派員) (…)

(동아일보 1961년 7월 15일자 1면)

 

 

정 본사 특파원(鄭本社特派員), 동(東)베를린 모험답사(冐險踏査)
동·서경계(東·西境界) 사이로 신경전(神經戰)… 긴장상태(緊張狀態) 더욱 격화(激化)

【『베를린』에서 25日 정신영 본사 특파원 국제전화(鄭信永本社特派員國際電話)】미·영·불(美英佛) 등 서방동맹국부대(西方同盟國部隊)와 동독군(東獨軍)이 밤새워 마주선「베를린」시(市)의 분위기(雰圍氣)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긴장(緊張)에 휩싸여 있다. 서방동맹군(西方同盟軍)은 서부(西部)「베를린」시민(市民)의 안전(安全)을 보장(保障)하는 조치(措置)로 경계선(境界線)으로부터 백(百)미터 밖으로 떨어져 있을 것을 경고(警告)하였으며 한편에서는 동독경찰(東獨警察)은 소방차(消防車)를 동원(動員), 소방(消防)호스로 물세례(洗禮)를 주는 등의 신경전(神經戰)을 벌리고 있고 또 서부(西部)「베를린」안에 있는 13개의 공산당사무소(共產黨事務所)가「브란트」시장(市長)의 명령(命令)으로 폐쇄(閉鎖)를 당하는 등의 사태(事態)는 사뭇 더한 긴박감(緊迫感)을 조성(造成)해주고 있다.

공포(恐怖)분위기에 싸인 동백림(東伯林)에서는 동독공산당(東獨共產黨)이 23일 하오5시(현지시간) 이른바 8·13조치(措置)를 지지(支持)하는 한 강제집회(强制集會)를 가졌는데 무장(武裝)한 동독군인(東獨軍人)들이 엄청난 경비(警備)를 했던 이 시위(示威)에는 동(東)「베를린」안의 각 직장(職場)을 단위(單位)로 강제동원(强制動員)된 약 5천명(五千名)의 시민(市民)이 무표정(無表情)하게 늘어서 있었다.
기자(記者)는 23일(현지시간 하오) 동서(東西)「베를린」사이의 삼엄(森嚴)한 경비망(警備網)을 뚫고 동(東)「베를린」에 잠입하여 약 세시간 반 동안이나 그곳 시내(市內)를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그곳 시민(市民)들은 기자(記者)가 서(西)「베를린」으로부터 온 것을 알자 노골적(露骨的)인 태도(態度)로 공산정권(共產政權)에 대한 욕설(辱說)을 퍼부었다. 그러나 기자(記者)가 동(東)「베를린」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스타린」가(街) 등의 번화가(繁華街)에서까지도 일반시민(一般市民)들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 지경이었다.「바리케이트」로대치(對峙)된 동서(東西)「베를린」의 경계선(境界線)을 따라서는 수(數)많은 장갑차(裝甲車)와 탱크가 철조망(鐵條網)가에 버티고 서있으며 이 선(線)으로부터 백(百)미터 밖에는 역시 수(數)많은 시민(市民)들이 이 긴박(緊迫)한 국제적 초점지대(國際的焦點地帶)를 응시(凝視)하고 있었다.
이렇듯 발자국 하나만 잘못 디디어도 폭발(爆發)할 듯한 경계선(境界線)、동(東)「베를린」의 죽음과도 흡사(恰似)한 불안(不安)속의 고요에도 불구(不拘)하고 서방동맹군(西方同盟軍)의 엄호하(掩護下)에 놓인 서(西)「베를린」의 거리는 마치 이같은 국제위기(國際危機)를 비웃기라도 하듯 평시(平時)나 다름없다.
멀리 총칼이 맞선 경계선(境界線)을 바라보며「카페」에 앉은 시민(市民)들의 화제(話題)는 대개의 경우 이 위기설(危機說)과는 동떨어진 것이 마련이다. 지금도 이곳 서(西)「베를린」의 새벽은 여뇌때나 아무런 다름도 없이 고요하며 흡사 이 새벽의 정적(靜寂)을 깨뜨리고 전화(電話)통에 소리를 지르는 기자(記者)만이 이 긴박감(緊迫感)에 사로잡힌 듯한 착각(錯覺)을 일으키기도 한다.

(동아일보 1961년 8월 25일자 석간 1면)

 

 

집단감옥(集團監獄) 동백림(東伯林)을 가다
정신영 특파원(鄭信永特派員)

이 기사(記事)는 동서백림경계선봉쇄조치(東西伯林境界線封鎖措置)로 말미암아 극도(極度)의긴장상태(緊張狀態)에 쌓여있는 백림사태(伯林事態)를 취재(取材)코자 서부(西部)「베를린」에 특파(特派)된 본사 정신영 기자(本社鄭信永記者)의 생생한 동부(東部)「베를린」답사기(踏査記)이다 정 특파원(鄭特派員)은 지금 서백림(西伯林)에 있는 대학(大學)에 유학중(留學中)인  김택환 군(金宅煥君)과 함께 미국 기자(美國記者)들조차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동부(東部)「베를린」을 발로 걸어 들어가 수시간(數時間)에 걸쳐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모험적(冐險的)인 취재(取材)를 감행(敢行)한 것이다.

기자(記者)가 서백림(西伯林)에 닿은지가 8월 21일-그러니까 동독정권(東獨政權)이 동서백림(東西伯林) 폐쇄조치를 단행(斷行)한지 일주일(一週日) 후에 일이고 소련사주로 간주되는 동독정권(東獨政權)의 이와같은 불법적(不法的)인 조처에 서방측(西方側)이 양보없는 과감(果敢)한 대결(對決)을 시도(試圖)함으로써 백림시(伯林市)의 분위기는 표면상(表面上) 조용하나 무척 긴장된바 있었다. 더우기 기자(記者)가 동백림(東伯林)을 방문(訪問)한 8월 23일)은 완전(完全)무장된 군인(軍人)들과 전차부대(戰車部隊)가 동서백림경계지대(東西伯林境界地帶)의 하나인「후리드릿히」가(街)에 진군(進軍)코 대비(對備)함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조성(造成)하였으면 동독(東獨)의 이른바 인민(人民)경찰과「노동계급의 전투부대(戰鬪部隊)」가 대량(大量) 각(各) 경계지역마다 투입(投入)되어 경비태세를 갖춤으로써 자못 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민간인(民間人)들은 썩 뒤에서 경찰의 제지(制止)를 받아 경계지대엔 얼씬도 못하고 기자증(記者證)을 제시(提示)하고 백림(伯林)서 공부하는 김택환 군(金宅煥君)과 함께 경계지역(境界地域) 최전방(最前方)에 나섰다.(…)

(동아일보 1961년 8월 29자 석간 1면)

 

 

`살아있는 記者정신` 푯대…`신문의 날`제정 故정신영기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동맹국 부대와 동독군이 밤새워 마주선 베를린시의 분위기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긴장에 휩싸여 있다….’

1961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석간 1면은 멀리 동베를린으로부터 날아든 숨가쁜 소식을 전했다. 때는 동독이 장벽을 쌓아 동서베를린을 차단한 열흘 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기자들도 신변안전을 염려해 취재를 꺼리는 이 지역에 단신으로 뛰어든 것은 본보 정신영(鄭信永·1931∼1962)특파원이었다. 이후 정특파원은 두차례나 더 위험을 무릅쓰고 동베를린으로 잠입해 분단국가 기자의 눈으로 동서독 단절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한국언론사에 남을 기사를 썼던 그는 이듬해 봄 유학 중이던 독일 함부르크에서 서른한살의 꽃다운 나이에 황망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4일은 기자로서 짧지만 굵은 획을 긋고 간 그의 38주기. 또 해마다 ‘신문의 날’(7일)이 다가오면 그를 떠올리는 언론인이 많다. 당시 그가 ‘신문의 날’ 제정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정신영기자는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56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국회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그가 기자직을 택한 데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던 둘째형 인영(仁永·한라그룹명예회장)씨의 영향이 컸다. 정인영씨는 6·25 발발 직후 전 언론사가 후방으로 철수한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서울의 외국기관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50년 6월27일자 동아일보 호외로 알렸던 인물.

“쾌남아였으며 호기심도 많고 감수성도 강해 ‘감탄사’란 별명을 얻었던”(대학시절 친구 정재석·丁渽錫전경제부총리의 회고) 정신영기자는 특유의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취재원과 동료 사이에 신뢰를 얻었다.

57년 1월 소장 기자들이 ‘연구와 친목’을 목적으로 만든 관훈클럽이 기자생활 1년 미만이었던 정기자를 30번째 회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능력과 인간됨됨이가 선배들로부터 일찌감치 인정받은 증거였다.

57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독일로 유학한 뒤에도 그는 학생이기보다는 기자로서의 의식을 잃지 않았다. 58년에는 한국일보 독일 통신원으로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 관람기와 아일랜드 기행문을 게재했다. 61년 7∼9월에는 다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임명돼  당시 5·16 군사정부가 파견한 유럽 친선사절단의 활동을 보도했다.

그의 해외취재기가 끝나자 김상만(金相万) 당시 동아일보발행인은 ‘독자의 호평을 받던 형의 취재기사가 없어짐을 섭섭히 생각합니다’라고 이례적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국의 경제부흥을 확신하며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저축과 경제발전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던 정기자는 논문 완성을 앞두고 장 폐색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한국 신문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맏형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명예회장이 아우의 못다한 뜻을 잇기  위해 77년 관훈클럽에 젊은 기자들의 국내외 연수, 저작활동을 지원하는 데 써달라며 기금을 기탁한 것. 이렇게 탄생한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으로 지금까지 58명이 해외연수를 다녀왔고 638건의 저작지원이 이뤄졌다. 그의 기자정신은 이처럼 곳곳에 살아 있다.정은령 기자

(동아일보 2000년 4월 3일자 A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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