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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동아일보 사람들- 장행훈

Posted by 신이 On 12월 - 27 - 2018

 

장행훈(張幸勳, 1937~2018)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9년 동아일보 공채 1기로 입사했다. 파리·베를린·모스크바 특파원을 거쳐 편집국장과 유럽총국장, 논설위원, 출판국장 등을 맡으며 36년간 동아일보에 재직했다. 2005년 신문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8년부터 언론광장 공동대표를 지냈다. 저서로는 <제2차대전이후의 소련의 대한반도정책><미디어독점:‘시민 케인’에게 언론을 맡길 수 없다> 등이 있고 프랑스정부 공로훈장(1992년)을 받았다.

 

장행훈(張幸勳) (함평, 1937~ ) ▲ 1959. 4 수습(편집국), 기자(외신부, 정치부), 외신부차장, 프랑스특파원, 비서부장, 해설위원(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부고] 장행훈 前 동아일보 편집국장

신문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낸 장행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사진)이 14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193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9년 동아일보 공채 1기로 입사했다. 파리·베를린·모스크바 특파원을 거쳐 편집국장과 유럽총국장, 논설위원, 출판국장 등을 맡으며 36년간 동아일보에 재직했다. 한양대와 호남대, 경원대 등에서 10년 가까이 언론 강의를 했고, 언론개혁시민운동에도 참여했다. 아태평화재단 민족통일문제연구소장과 사무총장, 2005년 신문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8년부터 언론광장 공동대표를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미자 씨와 아들 재준 재혁 씨, 딸 성심 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7시.

(동아일보 2018년 1월 16일 A25면)

 

 

언론개혁 위해 평생을 산 언론인 故 장행훈 군을 떠나 보내면서

장 군, 우리는 평생 동안 언제나 만나기만 하면 “장 군”, “남 군” 하고 서로를 불렀었지. 오늘은 자네를 저 먼 나라로 떠나보내면서 마지막으로 그렇게 부르겠네.

장 군, 우리가 대학신입생처럼 떨리는 기분으로 동아일보사에 견습기자-그 때는 일본식으로 그렇게 불렀었지-1기생으로 첫 출근한 1959년 4월 1일을 기억하겠지. 그러고 보니 벌써 59년이 되었네. 그 때 우리는 모두들 하늘로 날 것 같은 들뜬 기분이었지. 우리가 동아가족의 일원으로 언론에 입문한 그 시대는 바야흐로 자유당정권 말기, 그 회색의 우울한 시대였지. 우리는 다음해에 초년병 기자로 3·15부정선거와 연이은 4·19학생혁명을 현장취재하면서 얼마나 보람과 긍지를 느꼈었는지 자네도 잊지 않았겠지. 우리가 그 때 타고 다닌 취재차는 대형 동아일보 사기(社旗)를 단 초록색 지프였지. 데모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은 동아일보 기자가 탄 지프가 나타나기만 하면 박수갈채를 보냈었지. 우리는 그 때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우리 힘으로 실천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었지.

장 군. 그러나 얼마 못가 5·16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유신통치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에게는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지.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다름 아닌 동아투위사태였지. 자네도 1974년 11월 12일의 충격적인 사건을 기억하겠지. 동아일보는 일부 기자들의 집단적인 제작거부로 이날 자 신문(당시는 석간, 일부지방 13일자)을 휴간하는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졌지. 당시 편집국장은 기자들의 자유언론투쟁에 가장 이해심이 많았던 송모 선생이었지.

송국장께서는 그 때 발생한 천주교 인권회복기도사건을 7면(사회면) 중간톱 4단 기사로 사진과 함께 싣도록 결정했지. 당시의 언론통제 상황에서는 대단히 용기 있는 결정이었네. 그러나 기자들은 이에 반대하고 이 기사를 7면 톱 또는 1면 톱으로 게재할 것을 요구하면서 신문제작을 거부하지 않았나. 이 사건은 그 후 전개될 우리 동아의 엄청난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었지. 그 때 우리는 다 같이 부장 자리에 있었지.

이제 우리는 생과 사를 달리하면서 엄숙한 진실의 순간을 맞았네. 자네도 이 사태를 당하고 많은 고민을 했지만 나 역시 큰 충격에 빠졌었네. 우리 후배기자들의 순수했던 자유언론투쟁이 점차로 막강한 독재권력 앞에서 ‘적전분열사태’로 치닫고 있다고 나는 판단했지. 후배기자들을 설득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그리 큰 성과는 없었네. 예상대로 사태는 결국 더 이상 회상하기조차도 싫은, 120여 명의 집단해임이라는 일대 파국으로 발전하고 말았지.

장 군, 이번에 어느 언론전문매체가 자네의 별세기사를 쓰면서 ‘언론개혁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온 원로언론인’이라고 평한 것을 보고 나는 자랑스러웠네. 자네의 진보논조 때문에 가끔 나와 토론도 많이 했지. 자네와 나는 대한민국 건국시기, 케이블TV 허가 문제, 정부의 특정매체 지원(자네는 당시 신문발전위원장으로 이 사업에 관여했지) 등등 여러 문제에서 의견을 달리했었지. 이 때문에 어떤 때는 보수언론이 자네 이름을 거명하며 비판한 적도 몇 번 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가끔 다른 의견을 가졌지만 토론을 통해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서로에게 제공하는 막역한 친구였지.

나의 영원한 친구야,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안식하기를 비네.

(남시욱 화정재단 · 21세기평화연구소 이사장,  ‘故 장행훈 군을 떠나 보내면서’, 동우회보, 2018년 1월 23일)

 

 

 

[얼굴] 장행훈 동아일보 편집국장

편집책임자가 지닐 조건 골고루 겸비
청렴성과 용기,해박한 지식 두루갖춰

동아의 36대 편집국장이 된 장행훈국장은 직전의 남시욱국장과는 1959년 입사 1 기 동기 생으로서 외신부 정치부기자와 두번에 걸친 주불특파원을 거쳐 외신부장 논설위원 출판국장 등 동아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직업 언론인 출신으로서는 외도이긴 하지만 비서부장을 지내는 동안 오히려 끈질긴 인내력과 부드러운 대인관계를 쌓아을리는데 좋은 기회로 선용하기도 했다.
‘幸動’이라는 이름의 한자뜻과 ‘행운’과 닮은 발음이 장국장의 낙천적0J 성품을 잘 나타내주는 둣싶다.
그의 경력은 이름의 뜻처럼 행운을 싣고 비교적 탄탄대로를 걸어온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찰은 다소 피상적 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의 지나온 세월과 위치는 항상 피나는 노력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언론인으로서의 성취외에 학문적안 배경 또한 만만치 않다.
서울법대 졸업후 영국 웨일즈대학에서 석사학위 (국제정치)와 파리 제 1대학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영어 독어 불어 일어 중국어 소련어 둥 6개 외국어에 능통하며 여러권의 저서도 있다. 그래서 언론계에서는 그를 어학의 천재라고 부른다.
오랫동안의 파리특파원 생활과 부지런한 해외취재여행을 통해 쌓아을린 해박한 국제정치 지식은 취재사령탑으로서의 역할에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장국장은 취재. 및 편집 총책임자가 지녀야할 모든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지식의 폭과 깊이는 평소 자료와 책을 손에서 때지않는 왕성한 지식욕구와 편집국장 부임 직전까지 집필해온 동아일보 ‘광장’ 칼럼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량전달매체를 움직이는 언론인은 어느부문 종사자들보다도 모든 일에 대해서 폭넓게 알고 있어야 하며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로서 깊은 지식을 갖고 있어 야 한다. 장국장은 직업언론인으로서 풍부한 체 험을 한 제 너 럴리스트이 면서 동시에 정치학박사로서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런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언론이 갖추어야할 두번째의 조건은 청렴성이다. 언론은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과 여론의 매개구실을 하는 외에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구실을 떠맡고 있다.
바꿔말하면 언론은 정치와 사회가 썩지않게 소금구실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5공시절 방송광고공사가 언론인들에게 지급하는 자녀 장학금 수령을 거절함으로써 한국언론사에 기록될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
세번째의 조건은 원칙과 일관성의 문제다. 원칙의.문제는 잣대의 문제며 동일한 잣대로 모든 사물을 다루고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국장은 평소 이런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으로 희자되었다. 전공이 법학이고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체득한 신조일 것이다.
넷째는 언론인들에게는 국제화시대 국제정세를 보는 감각이 필요한데 장국장의 경 력으로 보아 이런 면에 풍부한 자산을 갖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섯번째로 갖춰 야할 조건은 용기 다. 용기 가 없고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의 남용과 부정을 도저히 감시하고 폭로 고발할 수 없다. 장국장은 출판국장시절 신동아가 쓴 부정폭로기사에 불만을 품고 회사로 몰려온 어떤 외부 집단의 압력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싸워 초지를 관철,기자정신과 용기를 보여준 일도 있었다.

민주화 자율화 국제화시대로 발돋움하는 대전환기,-그리고 남북화해의 먼동이 트려는 한반도의 과도기를 맞아 한국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동아 편집국장의 중책을 맡아 그동안 축적한 실력 발휘에 큰 기대가 모아진다.

(‘얼굴- 장행훈 동아일보 편집국장’, 신문과방송, 1989년 5월호)

 

 

 

[ 미니 회고 ] ‘운명의 연속’이었던 언론인 생활 57년

장행훈 | 언론광장 공동대표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 영국 웨일스 애버리스트위스 대학 국제법 및 국제관계 디플로마
■ 프랑스 파리 제1대학 정치학 박사
■ 동아일보 공채 1기 파리·베를린·모스크바 특파원
■ 동아일보 이사대우 출판국장
■ 동아일보 이사 편집국장

‘미니 회고’ 청탁을 받고 뭘 쓸지 결정하기 위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한번 되돌아봤다.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것 이 엊그제 같은데 반세기를 훌쩍 넘기는 세월이 흘렀다. 다른 동료들에 비 해 해외특파원 생활을 오래 한 편이다. 주로 유럽을 무대로 활동했다. 내가 운동해서 여러 나라 특파원 생활을 한 게 아니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때 로는 내 의사에 반해서 특파원으로 나간 일도 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 이 7년 전 자결을 결심하고 집을 나서면서 인터넷에 남겨놓았다는 마지막 한마디 “운명이다!”라는 말처럼 내게도 언론인 생활 57년이 운명의 연속 처럼 느껴진다.
나는 동아일보에서만 36년을 일했다. 지금은 신문사 판도가 달라졌지만 내가 동아를 그만둘 때까지는 동아 외에 가서 일하고 싶은 신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리특파원 두 차례, 동아의 초대 베를린특파원, 초대 모스크바특파원 겸 유럽총국장, 합해서 12년을 유럽에서 특파원으로 일했다, 영국유학 1년, 파리유학 2년 반을 합치면 유럽에서 보낸 시간이 15~16년은 되는 것 같다.
동아를 그만둔 다음에는 DJ(김대중)가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운영하던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 위원장으로, 나중에는 DJ의 아태재단 연구실장과 사무총장으로 몇 년 일한 것을 제외하면 호남대를 비롯해서 한양대, 경원대 등에서 겸임교수로 10년 가까이 언론관련 강의를 해오면서 신문에 글을 쓰고 언론개혁시민운동(언론광장)에 참여해 왔다. 이런 경력 덕에 노무현 정부 때 3년간 신문발전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상이 나의 간단한 이력이다.
반세기 이상 언론인으로 일한 햇수 때문에 언론인 대접을 받고 있지만 나는 대학졸업 때까지 언론인이 되겠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내가 서두에 언론인이 된 것을 ‘운명’이라고 쓴 것은 그래서 한 말이다.
내가 기자가 된 것은 1958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닐 때 민중서관에서 같이 일하던 한 동료의 권유로 1959년 동아일보 공채 1기 기자 모집에 응시한 것이 운명적 계기가 됐다. 동아를 떠난 후 잠시 DJ가 운영하는 아시아자유민주청년지도자운동 일을 도왔고,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학선배인 오기평 아태재단 이사장의 강권으로 재단 사무총장직을 2~3년 맡은 일이 있다. 그러나 정치활동에 관여한 일은 없다. 정당에 가입한 사실도 없다. 어느 정당에 가입하게 되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공정하게 비판해야 할 언론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런 태도로 살아갈 것이다.

기자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1959년 4월 1일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한 해 전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기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법과대학에 들어갈 때는 흔히 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거나 관료의 길을 걷는 것이 학생들의 일반적인 꿈이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다. 고등고시도 한 번 응시한 일이 있다. 하지만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원서를 내본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내 답안지를 채점해 봐도 가망이 전무하다고 판단돼 중간에 그만뒀다. 그리고 고시 자체를 포기했다.
대학 3학년 때로 생각되는데 친구들과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 판검사 돼도 ‘부수입’ 없이 월급만 가지고는 살기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됐는데 그때부터 마음에 동요를 느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닌 아기 신자라 양심에 가책받는 일은 하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서생이었기에 인생 설계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래서 판검사 될 꿈을 접었다.
그다음 대학교수의 길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58년 봄 법대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법철학과 헌법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런데 법철학과 헌법학 지도교수가 한 학기 내내 결강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당시 대학가에서는 휴강 많이 하는 교수가 명교수라는 우스개가 나돌았다. 그래도 한 학기에 한 번쯤은 지도교수 얼굴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더 하려면 외국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종로5가에 위치한 법대 입구에 파리 유네스코 직원 채용 광고가 나붙은 걸 보았다. 월급이 월 400달러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다. 해외에 근무하는 우리 외교관 3등 사무관 초봉이 100달러 정도로 알고 있던 때인데 400달러라니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유네스코 직원이 되려면 2가지 조건이 있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해야 하고, 홍보 경력이 3년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홍보라는 말이 낯설었다. 어느 선배에게 물어봤더니 일본에서 많이 쓰는 용어 같은데 신문이나 출판 활동을 통틀어 홍보라고 한다고 했다. 우선 프랑스어부터 공부하면서 홍보 경력을 쌓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원 첫 학기가 끝날 무렵인 58년 초여름이었다. 신문에서 출판사 민중서관의 직원모집 광고를 봤다. 출판사라면 홍보 계통 아닌가? 그래서 응시했다. 직장 구하기가 지금보다 힘든 때라 응모자가 꽤 많았는데 운이 좋아 합격했다. 대우도 괜찮았다. 민중서관 취직은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던 때여서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 앞으로 있을지 모를 유네스코 응모에 필요한 스펙 쌓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일거양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민중서관 입사는 내가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는 다리 역할을 해준 동료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58년을 넘기고 59년 초였다. 지금은 성도 이름도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동료가 동아일보 공채 1기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동아는 한국 제1의 민족지로 신문사 중 대우가 최고라며 응시해 보라고 적극 권유했다. 그 동료가 귀띔해 주고 동아 PR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나와 동아의 인연은 맺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으면 오늘날 언론인 장행훈도 출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운명이다!
되돌아보면 기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내가 지금까지 반세기 넘게 언론인으로 살아왔고, 여생도 언론인으로, 언론개혁을 목표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운명 아닌가!

나는 咸平 촌놈

나는 1936년 전남 함평군 함평면 진양리(양림)에서 태어났다. 호적은 선친이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37년으로 1년 반 정도 늦다. 양림은 함평에서 영광으로 올라가는 큰길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100호 가까운 인동 장(張)씨 집성촌이다. 불행히도 내가 태어날 때 우리는 나라를 잃은 일본 식민지 신세였다. 그래서 호적에는 아마 일본어로 쇼와(昭和) 12년생으로 기록됐을 성싶다.
내 나이 다섯 살 때쯤 선친이 군청 직원시험에 합격, 영광(靈光)군청으로 발령받아 함평에서 영광으로 이사 가게 됐다. 그때 버스라는 것을 처음 탔는데 휘발유가 아니라 목탄(木炭)으로 움직이는 버스였다. 지금 생존해 있는 한국인 중 목탄 버스를 타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적는 것은 이 글을 읽는 후배 세대에게 우리 세대가 후배들과는 얼마나 다른 시대에 태어났고, 그 후 격변하는 시대를 어떻게 관찰하고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보여주려는 뜻에서다.
영광으로 이사 온 지 1년 뒤인 1942년, 여섯 살 때 북(北)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또래 애들보다 한두 해 빨리 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뒤늦게 2차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이 동남아 국가들을 점령한 기념이라며 고무로 된 공을 학생들 전원에게 나눠줬다. 고무공을 태어나서 처음 만져봤다.
3학년 때 다시 함평으로 돌아와 대화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전쟁으로 국력이 달린 일본의 한국인 탄압과 착취가 점점 가혹해지고 있었다. 교실에서는 일본말만 쓰게 하고, 한국말을 쓰다 발각되면 벌을 주었다. 아직 일본어가 자유롭지 못한 나로서는 모든 대화를 일본어로 하라니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농촌에서는 일본 군대에 조달할 쌀 공출(징발)이 시작되고 청년들의 징병, 청장년들의 징용(노동 동원)이 실시됐다. 징병에 동원된 청년들이 입영할 때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기차역까지 나가 ‘닛뽄단지(일본 남아) 잘 싸우고 돌아오라’는 군가를 부르며 환송했다.
가장 잊지 못할 일은 한 10대 소녀가 고향 양림 마을에서 옆구리에 긴 칼을 찬 일본 순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울며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때 어린 소녀는 끌려가지 않겠다고 어머니를 향해 울며 발버둥치는데 어머니는 그냥 따라가라고 울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어찌나 처절해 보이던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제의 만행이다. 직접 소녀를 끌고 간 것은 한국인 남자이고, 일본 순경은 칼을 찬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아베 총리는 일본인들이 군대위안부를 직접 끌고 간 일이 없다고 억지를 쓰고 있다.
4학년 때인 1945년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기쁨과 혼란이 뒤범벅된 상태에서 학교가 몇 달 문을 열지 않아 교회에서 어른들과 함께 한글과 영어를 동시에 배웠다. 내 나이 아홉 살 때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5년이 채 안 돼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국토가 초토화됐다. 한반도 서남부는 불과 몇 달 간이지만 공산치하에 들어갔었다. 그때 함평에서 인민재판이라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젊은 서북청년단 대원 한 명이 사람을 죽인 일이 없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받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군중 가운데 누군가 ‘청년단이 경찰에 농민들을 밀고하는 주구 노릇을 하니까 농민들이 경찰에 체포돼 죽는 거’라며 그 청년단원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외쳤다. 다른 군중들이 “옳소!” 하고 따라 외치자, 재판관이 방금 무죄판결을 받은 그 청년단원에게 다시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일본 구식 총을 든 집행관이 청년을 강 언덕으로 끌고 가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
우리가 공산치하에서 살면서 공산체제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북한에 대한 막연한 미련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몇 달 동안의 6·25 초기 경험을 통해 공산체제의 잔인성을 직접 봄으로써 공산체제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지워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동아일보 기자가 되다

1959년 4월 1일 동아일보사에 첫 출근했다. 이날은 동아일보 창간기념일이기도 하다. 2층 각천(覺泉) 최두선(崔斗善) 사장실에 1기 합격자 10명 전원이 모였다. 각자 인사를 나눈 다음 각천으로부터 동아일보의 전통과 동아 기자의 품격에 관한 훈시를 들었다. 각천이 가장 강조한 것은 돈에 대한 언론인의 올바른 인식이었다. 동아 기자는 기자활동을 하면서 돈을 받거나 요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만약 돈 문제로 불미한 일이 발생하면 당장 해임이라고 경고했다. 각천은 촌지문제에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동아일보 기자는 기자실 간사를 맡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또 한 가지는 동아는 기자들의 기사에 회사에서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경영 측이 언론의 편집권을 존중한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다. 고무적이었다.
그런데 67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 공화당이 포천 유세장에 유권자들을 동원하던 트럭이 전복하는 사고가 발생해 동아일보 가판 1면에 크게 보도됐다. 다른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2판에서는 사고 사진이 빠진 채 발행돼 어떤 압력이 작용했으리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편집국이 웅성거렸다. 그래서 우리 공채 1기 몇 사람이 2층 주필실로 내려가 고재욱 주필에게 경위를 따지며 항의한 일이 있다. 고 주필이 압력설을 부인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해서 주필 방을 나온 다음 중앙정보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벽보를 편집국 입구에 써 붙인 일이 기억난다.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가 격화되고 정권의 반격이 가혹해지면서 사내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던 때다.
기자의 부패와 관련해서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자주 언급했다. 63년 말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박 의장이 동아일보 정연권 특파원과 가진 인터뷰에서 언론계의 부패를 비판하고 군사정부가 부패언론인 리스트를 화보하고 있다면서 언젠가 이를 공개할 생각이라고 한 말이 보도된 일이 있다. 동아에 인터뷰가 보도된 후 언론계가 좀 긴장했었다. 머지않아 언론계 숙청 바람이 불려나 주시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싫어하지만 차제에 언론계 부패가 일소되면 언론이 제 기능을 하는 데 오히려 기여하게 되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언론의 부패 숙청 같은 것은 없었다. 66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오히려 언론인 부패가 심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다. 67년 대선을 앞두고 언론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권이 언론계 부패를 조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당시 정치부 정당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나돈다는 부패 루머들은 정말 창피해서 옮기고 싶지도 않다. 그러고 보면 3년 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은 일종의 연막작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패문제에 관한 한 동아의 부패 경고는 회사의 변함없는 큰 원칙이었다고 믿고 있다. 각천 최두선 사장은 민정이양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얼굴마담’으로 발탁돼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기고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이 각천의 뒤를 잇는다. 64년 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어느 날 오후 전 사원을 동아 3층 옥상으로 소집하라는 사장 호령이 떨어졌다.
지금은 동아가 6층 빌딩이지만 그때는 아직 증축 전으로 3층이 최고층이었다. 모두 무슨 일인지 몰라 궁금해하면서 옥상에 집합했는데 일석이 엄숙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기자들의 촌지를 금하는 정부의 지시로 한동안 촌지가 없어졌는데 최근 기자들이 다시 촌지를 받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면서 만약 동아 기자 중 촌지 받는 사람이 적발되면 파면이라는, 조용하면서도 엄중한 경고의 목소리였다.
박정희의 군정이 기자의 촌지를 금하는 지시를 발표한 후 한동안 기자실 촌지 풍토가 사라졌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총리실을 출입하는 중앙청 기자들도 총리의 지방 순시를 수행할 때 총리와 함께 타는 특별열차의 기차 요금만 무료이고 나머지 비용은 모두 기자 각자가 부담했다. 출입처에서 나오는 지원은 일절 없었다. 그런데 민정이양이 되고 분위기가 이완되면서 촌지가 다시 돌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던 모양이다. 원칙에 엄격한 일석이 그 소문을 듣고 모른 채 넘어갈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 사원을 옥상에 소집해 놓고 촌지 금지 호령을 내린 것이다.
나는 65년까지 3년가량 중앙청을 출입하다 영국 정부의 브리티시 카운슬 스칼라십 시험에 합격해 65년 7월 영국 유학을 떠나 웨일스의 애버리스트위스(Aberystwyth) 대학에서 1년간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그때 중앙청 기자실에 들렀더니 안면이 있는 기자가 촌지가 되살아난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쿠데타 전으로 되돌아간 분위기라며 한탄했다.
역시 1년 뒤 있을 선거를 앞두고 정부 쪽에서 긴장을 푼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언론의 부패를 근절하겠다던 군사정권이 권력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 언론에 부패의 악수를 내밀지 않았으면 언론의 촌지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동아 수습 첫날 재무부에서 겪은 일

동아에서는 공채 1기라는 신분(?) 때문에 회사나 선배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수습기간에 특별히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선배들 따라다니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였지 않나 생각된다.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경험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면 지금은 타계한 김성열 전 사장을 따라다닐 때 겪은 일이 생각난다.
59년에 입사하니 동아일보 편집국 인원이 30명을 좀 넘을 정도밖에 안 됐다. 거기에 수습 1기 10명이 들어왔으니 앉을 자리가 없었다. 선배들이 석간 기사를 쓰려고 출입처에서 돌아오면 앉을 자리가 없어 서 있거나 구석에 비켜 있어야 했다. 정치부, 경제부가 분리돼 있지 않고 정경부로 한 부가 돼 있었는데도 합해서 10명이 채 안 됐던 시절이다.
입사하니 나중에 사장 자리까지 오른 김성열 정경부 차장이 실질적인 경제부장으로 재무부를 출입하고 있었다. 내가 최초로 출입처란 데를 따라 나가 본 곳이 재무부였다. 동기 10명 중 경제부 쪽을 지망한 사람이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한 달간 강의 코스가 끝나고 희망부서를 적으라는데 경제부 지망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경제부 강의를 맡은 이동욱(나중에 사장) 경제 기자가 경제부가 아주 중요한데 제대로 일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너무 겁을 줘 아무도 지망할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경제부 지망자가 없다는 말이 곧이 안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땐 그랬다. 그래서 그렇게 어려워 다들 싫다면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경제부를 자원해 김성열 차장을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첫날 김성열 차장을 따라 재무부로 갔다. 지금 교보빌딩 자리에 있던 3층 빌딩이다. 송인상 재무장관 때였다. 김성열 차장은 늘 중절모자를 쓰고 다녔다. 재무부 건물에 들어서면 모두 인사를 하는데 김성열 차장은 고개만 끄떡하고 지나갔다. 모자를 벗는 걸 못 봤다. 한번은 김 차장이 나를 돌아보더니 나는 재무부 안에서 모자를 벗어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재무부 안에서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의 위상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외신부(국제부) 시절 외국어 공부에 전념

나는 영어 성적이 괜찮았던 덕에 수습기간을 제외하고는 3년 가까이 국제부에서 외신뉴스를 다뤘다. 신문이 조·석간 8면이던 시절이라 국내뉴스를 싣는 데도 지면이 부족했다. 국제뉴스를 실을 지면이 거의 없었다. 통신사에서 배달하는 국제뉴스 몇 장 뜯어 실으면 충분했다.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다. 아까웠다. 그래서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우선 프랑스어를 마스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유네스코를 상상하며 프랑스어를 공부했지만 나중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베트남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프랑스 신문을 봐야 한다는 미국 언론의 기사에 영향받아 프랑스어를 마스터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당시 베트남전쟁이 오늘의 IS(이슬람 국가) 문제만큼 세계 언론의 이목을 끄는 문제였는데 미국 전문가들이 미국 언론이 전쟁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보도를 하고 있다고 언론의 베트남전쟁 보도를 비판했다. 미국 정부도 베트남전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방향을 못 잡고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비판을 쏟아냈다. 그래서 미 국무성과 상원 외교분과위원회는 베트남전을 가장 정확히 보도한다는 평가를 받는 프랑스 르몽드가 파리에서 발행되는 즉시 수백 부를 워싱턴으로 공수해서 읽는다고 미국 신문들이 보도하던 때다.
프랑스 AFP통신은 세계적인 통신사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뉴스는 영어로 송신하지만 드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이나 프랑스의 알제리 독립전쟁에 관해 중요한 연설을 할 때면 프랑스어로 뉴스를 송신할 때도 있었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해서 빨리 프랑스어로 기사를 읽어야겠다는 의욕을 자극했다.
우선 1차로 프랑스어를 영어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마음먹고 신문사 퇴근시간이 되면 회현동의 프랑스어 학원 알리앙스로 달려갔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2년 뒤에는 프랑스어 문법 교재 모제 4권까지 끝낼 수 있었다.
스페인어 학원도 몇 달 다녔다. 그것은 유엔에서 사용하는 6개 언어에 스페인어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국제문제를 다루려면 스페인어도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영어와 독일어는 어느 정도 잘하는 편이었고, 중국어도 배웠다.

내가 존경하는 언론인 월터 리프먼

내가 언론인을 평생직업으로 삼는 데 영향을 준 인물을 든다면 단연 월터 리프먼을 꼽고 싶다. 조사부에 파견돼 외신을 맡게 되니까 작가이면서 편집국 부국장이던 김성한 선생이 영국의 더타임스와 주간 이코노미스트의 논설 그리고 여러 신문에 연재되던 리프먼의 신디케이트 칼럼 ‘오늘과 내일’을 번역하게 해서 그것을 신문에 실었다. 영국의 더타임스 사설과 이코노미스트 논설은 영어 표현이 번역하기 어려워 애를 먹었는데 리프먼의 칼럼은 문장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세계를 보는 눈이나 언론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어 언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리프먼은 특히 언론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서 언론인이 열심히 공부하고 사실과 의견을 혼돈하지 말아야 뉴스 소스의 조작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교훈을 강조했다. 지식에 기초한 저널리즘을 강조했다. 평범하면서도 깊이 있는 그의 언론관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지내려는 지식인에게는 아주 소중한 충고를 많이 담고 있다. 그래서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들도 리프먼을 존경하고 그의 판단을 높이 평가했다. 인도의 네루 수상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두 번 만났지만 리프먼은 세 번 만났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언론에서 은퇴할 때 후배 언론인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를 말해 달라고 했을 때 ‘가까운 친구를 경계하라’고 한 말은 내게도 잊히지 않는 명언으로 남아 있다.

세계적인 언론인이 되려면 외국어 몇 개는 해야

앞서 나는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잠깐 했다. 그때는 외국어 몇 개 한다는 것이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내가 외국어를 여러 개 하기로 마음먹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60년대 초 동아일보 맞은편(지금의 동화면세점 자리)에 감리교 빌딩이 있었고, 5층에 영국문화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국의 신문, 잡지를 내 돈 주고 구독할 형편이 안 됐는데 문화원에서는 영국 신문, 잡지를 볼 수 있어서 아주 편리했다.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자주 들르는 편이었는데 문화원을 관리하는 연세대 출신 한국분이 발행일이 좀 오래된 영국 잡지를 가끔 주었다. 집에 가지고 가서 보라는 것이다. 주로 주간지 스펙테이터(Spectator)와 뉴스테이츠맨(New Statesman)이었다. 전자는 보수계 주간지, 후자는 진보계 주간지라 국내 문제나 국제정치를 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같은 영국에서 영어로 발행되는 주간지인데도 당시 아프리카 대륙을 휩쓸고 있는 식민지 독립운동을 보는 시각이 그렇게 다를 수 없었다.
그때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말로 발행되는 매체의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면 나라와 말이 다른 곳에서 발행되는 매체는 얼마나 내용이 다를까 하는 의문이었다. 세계 문화와 국제문제에 관해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려면 이념과 말이 다른 여러 나라 매체를 읽을 수 있는 외국어 실력이 필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국제문제를 다루는 언론인이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혼자 생각해낸 구상이 세계어인 영어, 프랑스, 중국어, 러시아어, 스페인어와 문화의 언어 독일어, 이웃나라인 일본어, 그리고 세계 최대 종교인 이슬람교의 언어 아랍어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외국어를 하는 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6개 국어 정도에서 중단한 상태다.

4·19혁명이 저널리스트를 평생직업으로 만들게 했다

동아에 입사할 때는 유네스코에서 일하게 될 때까지 한 3년 일하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동아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4·19혁명을 맞았다. 1960년의 4·19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지만 내게도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한 전기였다. 동아일보를 3년만 근무하다 떠나는 기착지가 아니라 평생을 보낼 직장으로, 그리고 나 개인으로서는 언론인으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3·15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된 이승만 독재 항의 시위와 4·19혁명 기간 중 동아의 보도와 논설은 정권의 부정을 감시·고발하고 비판하는 용기를 보여줘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동아의 이러한 용감한 행동은 전 국민의 존경 대상이 됐다.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은 동아의 깃발을 단 지프가 거리를 지나가면 시민들이 지프를 향해 성원의 박수를 보내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나도 이런 광경을 보며 동아에서 일하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이러한 자부심이 유네스코에 대한 꿈을 접고 동아를 평생직장으로, 그리고 내가 언론인을 평생직업으로 삼게 만드는 결정적인 자극이 됐다.

유럽의 문을 두드리다

입사 6년차이던 65년 영국 정부 장학금인 브리티시 카운슬 스칼라십 학생으로 웨일스의 애버리스트위스(Aberystwith) 대학에 유학 가게 됐다. 3년 만에 영국 유학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62년부터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지원하는 대학 학과에서 나를 받아들이겠다는 회답이 와야 최종 합격자로 선정되는데 이전의 두 번 합격 시에는 시험에만 합격했을 뿐 학교 측 동의를 얻지 못해 허탕을 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버리스트위스 대학에서 나를 받아줘 영국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애버리스트위스 대학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한 카(E. H. Carr)가 국제정치라는 학문을 세계에서 최초로 강의한 곳으로 잘 알려진 대학이다. 지금은 국제정치학과가 어느 대학에나 있을 정도로 흔한 학과지만 50년 전 영국에서 국제정치학과가 있는 대학은 애버리스트위스 대학과 런던 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두 군데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망학교란에 옥스퍼드대학 국제정치학과라고 적었으니 대학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50년 전에는 옥스퍼드대학에 국제정치학과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영국 유학은 공부 못지않게 신문사 내에 나도 영어를 한다는 것을 알리는 과시효과도 염두에 둔 유학이었다. 당시 한국 신문은 일본 도쿄에서 진행 중인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 상주 특파원을 두고 있었을 뿐 다른 나라에는 상주 특파원이 없었다. 동아일보가 워싱턴에 처음으로 정식 특파원을 파견한 것이 1965년이다. 한국전쟁을 취재했고 AP통신 한국 지국장을 지낸 진철수 선배가 동아일보 초대 워싱턴특파원으로 발탁된 분이다.
그때는 기자라면 누구나 해외특파원 한번 나가 봤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사로서는 비용문제 못지않게 해외에 나가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는 영어 실력을 갖춘 기자가 드물어 해외 상주 특파원을 내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64년쯤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라오스 문제가 국제적 이슈였다. 베트남과 접경해 있는 라오스가 친공 파테트라오 세력 때문에 공산화 위험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에서 최초로 단기간 라오스에 특파원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영어 하는 기자를 찾아보니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6개월 다녀온 정연권 외신부장이 유일했다. 그래서 정 부장이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라오스를 2주간 취재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정 부장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영어 인력이 그렇게 필요하면 신문사 비용으로 사람을 양성하면 될 간단한 일인데도 인재양성을 위해 투자할 생각을 하는 신문사가 없었다. 각자도생 자기 힘으로 영어 공부하고 오면 그때야 실력을 인정해 주고 특파원 후보로도 인정해 주는 그런 멘탈리티였다. 내 경우도 영국에서 1년 유학하고 돌아오니 그제야 ‘장행훈도 영어 하는 기자’로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

김대중 납치 ‘이후락이 지시’ 폭로한 신동아 사건

두 번째 파리특파원 4년을 마치고 85년 말 귀국했다. 1년은 이사대우로 연구실장을 맡아 연구사업을 지원하다 87년 출판국장 발령을 받았다. 전두환 체제에서 신문이 안기부의 감시 아래 언론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신동아가 신문의 역할을 많이 대행하고 있던 때다. 안기부의 감시가 있다 해도 언론자유를 위해 싸울 결의만 있으면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또 신동아는 부장부터 전원이 우수해서 그들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기만 하면 잡지의 질이나 경영 면에서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87년 10월호 커버 기사를 무엇으로 정하느냐는 것이었다. 몇 달 전부터 논의해 오던 김대중 납치사건이 아직까지 누가 지시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인터뷰하면 독자를 끌 수 있는 호재가 되리라는 게 편집회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후락 부장이 인터뷰에 응하겠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오래 했고 신동아에 이종찬 장군 전기를 써서 히트를 친 강성재 기자가 이후락 부장과 가까운 사이니 그를 통해 교섭해 보기로 했다. 강성재, 이종각 기자를 한 팀으로 해서 이후락 부장을 몇 차례 방문, 인터뷰를 졸랐다. 마침내 8월에 해보자는 답을 받을 수 있었다. 핵심은 단 한마디, 이후락이 “내가 지시했다”는 대답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이 팀이 이후락으로부터 그 답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그 어려운 답을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 계획은 성공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와의 인터뷰 내용이 어떻게 새나갔는지 어느 날 그가 다음번에 더 좋은 내용을 이야기해 주겠으니 이번 인터뷰는 취소하자고 제의해 왔다. 물론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신동아는 이후락 인터뷰를 계획대로 추진했다. 안기부가 민감한 문제라며 취소를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그랬더니 9월 20일 밤 9시 30분 건장한 청년 7명이 신동아를 인쇄하는 동아인쇄소 윤전실에 찾아와 안기부 직원이라는 신분증을 제시한 후 인쇄를 중단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신동아 기자와 출판국 직원들이 농성투쟁에 들어가 신동아 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나중에 안기부 담당국장과 문공부 홍조실장이 개입해 직설적인 이후락 부장의 답변 표현을 약간 우회하는 말로 바꿔 발행했고, 신동아는 40만 부를 발행해 잡지 사상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편집국장이냐 국회의원이냐

출판국장을 그만둔 나는 1989년 2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임명됐다. 그냥 임명된 것이 아니라 회사의 임명을 기자들이 투표로 추인하는 형태의 반(半)선거 국장이었다. 반선거지만 편집국 기자들이 투표로 추인한 국장이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신임해준 데 대한 책임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그런데 누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국장에 취임한 지 몇 달 후 여당인 민자당 실력자로부터 내 고향 함평에서 실시될 보궐선거 후보로 나와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기자들에 의해 선출된 국장이라 국회의원이 되려고 내 마음대로 편집국장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7월 14일 김대중 총재가 나더러 “장 동지, 고향도 생각해야 할 거 아니오” 하며 출마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DJ의 제의는 100% 호의로 생각하지만 나를 국장으로 투표해준 후배기자들의 신뢰를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배반할 수는 없었다. 그렇잖아도 국회의원이 될 욕심에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대학교수나 언론인이 많아지자 폴리페서라는 야유까지 만들어 비판하는 판에 나까지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한국에 양식 있는 언론인은 없다 할 것 아닌가? 그래서 DJ의 제안은 무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것이 결례가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국회의원이라는 명예를 위해 성직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게 결정했다.

(장행훈, ‘미니 회고- ‘운명의 연속’이었던 언론인 생활 57년’, 관훈저널, 2016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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