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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동아일보 사람들- 장인갑

Posted by 신이 On 12월 - 27 - 2018

 

장인갑(張仁甲, 출생연도 미상~납북)은 1933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치부, 사회부, 판매부에서 근무하다가 1938년 9월에 퇴사했다. 광복 후 1948년 9월 문봉제(文鳳濟)가 창간한 국민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한 달쯤 뒤 국민신문이 폐간하자 동아일보로 옮겨 1949년 12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50년 6월 27일 오후, 북한군의 서울 점령이 임박하자 남은 기자들을 지휘해 제작한 마지막 호외 300장 정도를 시경 지프차를 이용, 서울 도심에 배포했다. 그 후 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했던 장인갑은 7월12일 종로구 재동 자택에서 납북됐다.

 

장인갑(張仁甲) ( ~1950 납북) ▲ 1950. 6 편집국장, 재직중 납북.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은 김삼규가 겸직하던 편집국장에는 1949년 12월 장인갑(張仁甲)이 임명됐다. 이보다 앞서 3월에는 영업국장 김승문(金勝文)이 사임하고 정균철(鄭均撤)이 후임 영업국장이 됐다. 7월 제25기 주총에서는 백관수 김삼규 김상만 등 3인의 취체역을 증원했고, 총무국장 김동섭이 물러나자 김상만을 후임으로 임명하였으며, 취체역을 사임한 김성수 전 사장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

전란 초기의 동아일보  

6월 25일은 일요일이라 느긋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사원들은 이른 아침, 비상소집을 받고 신문사로 달려 나왔다. 거리에는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이 북으로 질주하여 가고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시민들은 불의의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원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적침(敵侵)을 알리는 호외 1보를 만들어 가두에 뿌렸다.

당시 본보에서는 10여명의 기자가 중앙청, 검경, 군, 외국공관 등을 취재했는데 이들이 출입처에서 얻은 정보는 일시적 도발이 아니라 전면전쟁이며 전세가 매우 위급하다는 데 일치됐다. 그러나 당국은 ‘아군, 적을 격퇴 중’이라는 지극히 낙관적인 발표만 하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편집국 전원은 사내에서 밤을 새우며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과 해외 동향을 계속 호외로 발간했다.

이튿날인 6월 26일 새벽에는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적군은 전차를 앞세워 물밀 듯 쳐  내려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적의 진격은 너무나 급속히 진행돼 27일에는 의정부를 거쳐 선봉은 미아리 근처까지 육박해 왔다.  (…)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마지막 호외는 기자들의 손으로 찍혀 나왔고, 그들은 시경에서 지프차를 빌려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을 돌며 뿌렸다. 적의 포탄이 산발적으로 서울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호외를 뿌린 사원들은 무교동의 설렁탕 집 실비옥(實費屋)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이언진(李彦鎭) 장인갑(張仁甲) 이동욱(李東旭) 조인상(趙寅相) 변영권(邊永權) 김성열(金聖悅) 권오철(權五哲) 최경덕(崔慶德) 김준철(金俊喆) 김상흠(金相欽) 최흥조(崔興朝) 김호진(金浩鎭) 정인영(鄭仁永) 백광하(白光河) 김진섭(金鎭燮) 등이 서울에 마지막까지 남아 최후의 호외를 만든 면면들이다.

(…)

적치(赤治) 3개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학살 또는 납북됐다. 동아일보 사원 가운데도 희생자가 있었다. 취체역 김동섭(金東燮), 편집국장 장인갑(張仁甲), 사진부장 백운선(白雲善) 등이 북으로 끌려갔고, 영업국장 정균철(鄭均轍), 논설위원 고영환(高永煥) 등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논설위원 이동욱은 피랍 중 탈출했고, 전무 취체역 국태일, 공무국장 이언진은 적치하에 있었으나 무사했다.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본사 편집국장(本社編輯局長)에 장인갑 씨(張仁甲氏) 취임(就任)
금반 본사 신 편집국장(今般本社新編輯局長)에 전 한국일보사 편집국장(前韓國日報社編輯局長)으로 있던 장인갑 씨(張仁甲氏)가 취임(就任)하였고 이에 따라 종래 주필 겸 편집국장(從來主筆兼編輯局長) 김삼규 씨(金三奎氏)는 주필(主筆)로 임(任)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1949년 12월 14일 1면)

 

 

사고(社吿)

좌기(左記) 본사사원(本社々員)의 행방(行方)이 불명(不明)인바 가족(家族) 되시는 분은 즉시(卽時) 본사(本社)로 연락(連絡) 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인갑(張仁甲) 편집국장(編輯局長) 정균철(鄭均澈) 영업국장(營業局長) 이동욱(李東旭) 조사부장(調査部長) 백운선(白雲善) 사진부장(寫眞部長) 김성열(金聖悅) 편집국 기자(編輯局記者)서정국(徐정國)(同) 조용근(조龍根)(同) 변영권(邊永權)(同) 김준섭(金準섭)(同) 이성득(李盛得) 정판과장(整版課長) 상복규(함復圭) 보급부 차장(普及部次長) 장성규(張聖圭) 판매부 차장(販賣部次長) 최화익(崔華翼) 사원(社員) 이상필(李相弼)(同) 김인호(金仁浩)(同) 이대종(李大鍾)(同) 오득한(吳得漢)(同) 정활모(鄭活模)(同) 정봉진(鄭奉鎭)(同) 주재정(朱宰정)(同)
4283년 10월 3일(四二八三年十月三日)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동아일보 1950년 10월 4일 2면)

 

 

[東亞 45年의 証言] (13) 6.25와 東亞日報
조인상(趙寅相)씨 회고(回顧)

6월25일 이른새벽 사(社)에서 비상 소집이 왔다.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 취재부장(取材部長(취재부장)이었던 나는 그날 마침 일요일이라 교대근무로 쉴 참이었는데 부리나케 신문사에 나가보니 벌써 장인갑(張仁甲) 편집국장(납북(拉北))이 나와 있다. 대뜸 하는 말이『38선 전역에 적군이 기습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삽시간에 신문사 전원은 출근시간 훨씬 전에 일제히 모여들었다.

당시 서울공인사(公印社)(지금의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를 사옥으로 쓰고 있던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앞거리는「트럭」에 만재된 전투복 차림의 군대가 속속 북쪽 일선으로 군가를 부르면서 출동하고 있었다. 호외(號外) 원고가 순식간에 엮어져서 그 제1보가 이렇게 거리로 뿌려졌다.

『38선 전역(全域)에 적군 내습(敵軍來襲)』

그때의「東亞」는 대판 두면의 석간지로 10여명 내외의 취재기자들이 인선을 필두로 하여 군부、중앙청、경찰、재한의 국공기관에 홑어져 취재한「레포트」는 모두 그 사태가 초비상사태이며 낙관을 불허하는 전면적인 기습을 받아 아군이 고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국발표는『아군(我軍)、적(敵)을 격퇴중(擊退中)』이라는 극히 낙관적인 접전상태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분통할 6·25의 첫 신문이 우리가 이 강토를 전화 속에 몰아넣고 수백만인명이  살육의 도가니속에 삼켜지는 예보(豫報)일 줄은 그때「東亞)」의 일선에서 일하던 우리들 로서도 감히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날 밤부터 편집국 간부와 기자 전원은 편집국에 대기、철야전투태세하에 종군 및 외근기자의 취재로 호외를 박아냈다.

(동아일보 1965년 4월 15일 6면)

 

 

 

[구우회고기(舊友回顧記)] 그리운 사람들  -장인갑 김삼규 두 선배

6.25동란과 동아일보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가 없고,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언제나 회상하면서 그윽한 감회에 젖어서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는 선배 두분의 이야기만을 대강 적기로 한다.

한분은 6.25당시의 편집국장이던 장인갑(張仁甲) 씨에 관한 이야기이고 한분은 지금 일본에 있는 당시 주필이던 김삼규(金三奎) 씨에 관한 이야기이다.

똑똑한 체 하지만 기자처럼 어리석고 약한 사람도 없다. 전황(戰況)을 알아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또 분석도 하고 전망도 한다면서 저 자신의 갈길을 바로 골라잡지 못하는 것이 신문기자이고, 특히 6.25동란때의 동아일보 기자이었다. 몇 시간 후이면 수도 서울이 함락(陷落)할 판국인데 무슨 오기로는 나는 텅빈 동아일보사(현 대한공론사옥) 편집국을 자리하고 권오철, 정인영, 백광하, 변영권, 임운들과 함께 손수 공장에 내려가서 활자를 주어 마지막 호외 몇장을 찍어서 권오철이 서울시경에 부탁하여 빌린 경찰 찦차로 서울시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거리에 뿌렸으나 길가던 사람이 아무도 주워보려고 하지 않은 무서운 현실에서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신문사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마침내 한강을 넘어 남하할 기회를 놓친 나와 대부분의 동아일보 사원들은 공산군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천행만고(千幸萬苦)로 체포되지 않으며 숨어다니며 사우들과 연락을 취하던 7월 중순경의 일이다. 중구 삼각동에 있던 취재부장 조인상(趙寅相) 씨 집에 서울에 잔류한 사우들이 매일 한차례 들러서 소식을 나눈다는 말을 뒤늦게 안 나는 몹시 반가운 생각으로 찾아갔다.

과연 거기에는 몇몇 사우들이 매일 들려서 소식을 나누고 있었고 조인상 씨는 그 무서운 환경에서 큰 희생정신으로 자택을 공산당의 적이라 할 동아일보 기자들의 지하연락장소로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장인갑 씨도 하루에 한번씩 들리는데 오늘은 들리지 않고 곧 바로 집합소로 가겠다고 했으니 이제 함게 그리로 가면 만나게 되리라고 한다. 조인상 씨의 설명은 이러했다.

설의식(薛義植) 씨가 서울에 잔류한 반동언론인들을 규합하여 그 신분을 보장하기로 하여 북창동에 집합장소를 마련하고 널리 반동기자를 찾고 있는데 설 씨와 친한 장인갑 씨는 동아일보 기자들을 책임지고 규합중이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나를 찾고 있는데 오늘 나타났으니 이제 함께 가서 가입하고 설의식 씨의 계획에 따라가면 활로가 열리리라는 것이다.

나는 조씨의 설명을 들으며 내심 섬칫하여 전율을 느꼈으나 겉으로 평온한체 하고 따라갔다. 조 씨는 시청앞 북창동 4층빌딩으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가 들어간 방에는 출입문에 수상한 청년 한 명이 테이블을 놓고 앉아서 출입자를 감시하고 있는데 실내에는 장인갑 씨가 백남교(白南敎)와 담소하고 있었고, 한성일보 편집국장 김찬승(金燦承) 씨가 옆에서 천정을 쳐다보며 연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장인갑 씨는 나를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내 손목을 꼭 잡고 내 얼굴을 주시하였다. 나는 조인상 씨와 함께 멀찌기 멀어져 앉아서 담배꽁초를 종이에 말아서 피웠다. 장인갑 씨와 이야기하는 백남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엿들으니 어디서 ‘볼세비키’당사(黨史)를 구해다가 반동언론인들을 재교육해야 되겠다고 하고 설의식 씨의 말이 곧 매일 점심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했다.

나는 조인상 씨에게 눈짓으로 뜻을 전하고 슬그머니 방을 나왔다. 출입문에서 청년이 제지하길래 변소에 간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와서 도망을 치듯 빌eld을 빠져나왔다. 나는 다시는 거기 가지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에 청계천3가 다리위에서 장인갑 씨를 만났더니 그는 나를 몹시 나무라며, 왜 집합소에 나오지 않느냐고 따졌다.

“장선생, 그게 집단감시 아닙니까? 어쩌자고 제발로 거길 찾아간답니까?”

집합장소의 명칭도 반동언론인동우회(反動言論人同友會)라고 설의식인가 백남교인가가 명명(命名)했다는 것이다. 장인갑 씨는 극구 설명을 하면서 결코 불리한 것이 아니니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서 같이 참가하자고 권하는 것이다. 나는 굳이 거절하고 헤어졌다. 헤어져서 청계천을 걸어가며 나는 속으로 장인갑 씨를 위하여 울었다.

나는 그후 김포로 피신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9.28에 서울로 돌아와서 동아일보 복간에 참여했는데 설의식 씨를 믿고 반동언론인동우회에서 호신책을 찾아보려던 장인갑 씨는 납북되고 말았던 것이다.

(최흥조 <1949.7~1952.2 취재부(장)>, ‘舊友回顧記- 그리운 사람들-장인갑 김삼규 두 선배’, 동우(東友), 1975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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