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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50 : 복간 후 첫 사업은 애국가 공모

Posted by 신이 On 12월 - 12 - 2012

1945년 복간 후 첫 사업은 애국가 공모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으로 시작하는 애국가가 새 시대에 맞지 않아 새 시대의 새 기상을 심자는 것이 취지였다.

 

1945년 12월 15일자 1면 사고

 

애국가 모집
당선작 사례금 삼천원
해방된 우리 강토 해방된 우리 민족 그리하여 광복될 우리의 신국가를 사랑하는 새로운 “애국가”를 천하에 구한다. 시공을 통하여 자별한 우리의 전통과 긍지 향기와 정조를 새로운 이념으로 재인식하고 새로운 각도로 재음미하야 국가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축복하는 새로운 애국가를 우리는 힘껏 마음껏 부르고 싶다. 가슴속에서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감격의 노래를 하루바삐 부르고 싶다. 그리하여 해방된 삼천리강산과 해방된 삼천만 심금에 선율 위에서 무궁한 해조(偕調·함께 어울리다)를 누리게 하자.

응모규정
일、『동해물과 백두산』리는 애국가를 수 잇도록 할 일
일、일인일수(一人一首)에 한하되 이절 이상 사절 가 한말시대부터 있었으나、이는 가사나 가곡이 새 시대에 맞지 않는 점이 있음으로 이 종래의 애국가에 구애치 말고 새로운 호흡으로 창작할 일
일、문체와 격조는 수의로 하되 실내악으로나 행진곡으로나 작곡에 의하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일.
일、애국가의 주제와 정신은 별항 전문과 같거니와 특히 씩씩하고도 명랑하고 웅건하고도 경쾌하여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누구나 어데서던지 부 이내로 할 일
일、투고는 동아일보 편집국내로 (한성시 태평가 경일사옥 내) 기한은 명년 일월말일까지로 함
일、당선작 일편에 대하여 사례금 삼천원을 진정함
일、투고는 일절 반환치 아니하며 당선작의 판권 일체는 본사에 있음
일、고선자(考選者) 밋 이에 대한 상세는 추후 발표함
동아일보사

 

1920년 창간 후 첫 사업은 단군영정 공모였다. 민족지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단군영정 공모 때나 애국가 모집 때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단군영정 공모 때는 마침 무기정간을 당해, 애국가 모집 때는 그 뒤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 때문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으로 시작하는 애국가는 20세기 초 민간에 퍼져 있던 가사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것이었으나 해방 당시 가사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1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시인 서정주는 애국가의 작사가를 밝히려는 기사를 썼다가 논란에 휩싸였다. 2

 

“본래 출신이 문인이라 동아에 있으면서 문학작품이나 학술부문을 많이 다루었어요. 한번은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는 기사를 써서 히트(?)했으나 당시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고증까지 하는 등 물의를 빚어 최두선 사장한테 불려가 견책을 당한 일이 기억나는군요. 훗날 역시 안창호가 아니고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만.” (서정주, 동아일보 1980년 4월 1일자 16면)

 


사진은 윤치호 씨 친필의 애국가. (동아일보 1948년 10월 7일자 2면) 3

 


고 윤치호 씨 필적이라는 애국가. 제 3절 두서 점선으로 표식한 흐려진 곳은 사학의 권위 황의돈 씨가 고문서감정법에 의하여 손에 침을 묻혀 문질러본 곳(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십년이상 경과된 것이라면 문질러도 좀체로 흐려지지 않는다고 한다.(동아일보 1955년 5월 21일자 3면)

 

작사가가 윤치호냐 안창호냐하는 이 같은 기사는 21세기까지 등장하고 있다. 4

 

 

 

Notes:

  1. 이봉구 서울신문 기자, 「신문기자가 겪은 8·15」좌담회, 신천지 1948년 8월(3권 7호) 78쪽.

    애국가를 불러야겠는데 누가 잘 알아야지. 이것도 학생들이 종이쪽지에 적어가지고 다니는 것을 얻어가지고 신문사에서 부랴부랴 적어서 게시판에 갖다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신문사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적으며 합창을 하고 난 그때 들창에서 내다보고 있으려니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2. 서정주(66·전 사회부장·시인), 동아를 거쳐 간 역대기자 방담-잊지 못할「그때 그일」, 동아일보 1980년 4월 1일자 16면. 

  3. 박은용(朴殷用), 애국가고(愛國歌攷) 1~3, 주로 그 작사자에 대하여, 동아일보 1948년 10월 6~8일자 2면.

    시대의 변천이나 역사의 개혁에 따라서 하나의 사관이 변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뚜렷한 역사의사실을 변경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란 오직 그 사실의 정확한 근거를 토대로 하여 부연되는 진실의 살아 있는 기록이기에. 이 땅이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6일 오후 5시부터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우렁찬 합창 소리가 울리고 나온 것은『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애국가』였다. 우리들은 모두들 오래 듣지 못하였던、또는 일찍 들어본 기억도 없는 이 노래의 구절구절 맺힌 심정에 눈물은 빗발치듯하였고 감격은 압도적이었다. 내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감동을 가장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기쁨과 용기와 충성의 마음을 북도다준 것은 이 노래 한가락이었다.(중략) 해방 후 이 노래가 최초로 출판된 것은 1945년 국제음악문화사 판인데 이것은 물론 구 애국가의 악보이다. 이 악보에는 작사자의 명(名)이 생략되어 있고 주(註)『노래를 지은 이는 혹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하고 되어있다. 이와 같이 애매하게 일반에는 유포되었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미국에서 전해 온 것은 1946년 5월이다. 현 정부 노동국에 근무하고 있는 배민수 목사가 미국에서 군속으로 귀국하게 된 그 길로 이화여자중학교에 따님을 찾으러 방문하여 기념 선물로 불러준 것이 현재의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로서 이 곡조가 조선에서 불리워진 시초인가 하는데 필자는 그 즉시로 배 목사에게서 그 악보를 □수 받아 학생들에게 지도를 하고 1주일 후 이화합창단이 방송을 통해서 첫 소개를 하였었다. 비로소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애국가를 가지게 되였는데、그러나 이 뉴욕 판에도 역시 작사자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고 작곡자 명만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같이 유야무야로 지나오던 차에 1947년 5월 도산 안창호 선생기념사업회에서『도산 안창호』의 전기가 출판되자 그 제6장『상해시대』에 여기에 대한 기록이 약간 나타나게 되였다. 즉『정청(政廳·상해 임시정부)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야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중략) 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작(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저서 애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라는 걸로서 이로써 대체로는 도산 선생의 작사로 일반에게 오인이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독자 여러분은 필자가 느끼는 것과 동일한 애매한 감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것은 오히려 당연이다. 왜냐하면 애국가는 여러 가지 고증으로 미루어보아 도산의 작이 아니라 사실은 좌옹 윤치호 씨의 작이기 때문이다. 이하에 나는 그 점을 선명하려 한다. 피아니스트 윤기선 씨 집에 전해 오는 윤치호 씨의 필적 중에는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1907년 좌옹 윤치호 작』이라는 서명이 붙은 애국가사의 글발이 있다。그의 다른 필적과 대조해보아 호(毫) 리도 틀림없는 그의친필이다。소위『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의한 관사가 붙게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작 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은 그것이 작사된 연대에 관한 일이다。윤 씨의 필적에는 1907년 작이라고 씨여 있으나 이것은 내 생각같아서는 그것을 필서한 연대의 기록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만 기자협회 발행인 협보지(協報誌) 삼호에 게재된 정주생(서정주 씨의 필명)의『청년 이승만』을 볼 것 같으면 애국가의 작사는 이미『독립협회』발족 당시에 윤치호 씨의 손으로서 제작되였다고 기록되여 있는데 서 씨의 말에 의하면 이 사실은 이박사로부터 친히 구수(口授)를 받은 필기 중의 일절이라하니 여기에 더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후략)

  4. “애국가 작사가는 안창호” 증언영상 공개. 기사입력 2012-08-22 17:31.

    흥사단 규명발표회…”‘작사 미상’수정해야”. (서울=연합뉴스) 조민정 기자=흥사단은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애국가 작사자 규명발표회’를 열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의 궤적과 여러 증언, 과거 자료를 종합해볼 때 애국가 작사가는 안창호 선생이 맞다”며 관련 증언 영상을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영상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 3년 동안 안창호 선생의 비서역할을 했던 독립지사인 구익균(105) 옹이 지난 2월 오동춘 흥사단애국가규명위원회 위원장 등을 만난 자리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담은 것이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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