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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휴+명절+고향=민족대이동

 

 21세기 들어서도 추석기사에서 ‘연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였다. 추석과 함께 나타난 공기어 3645개중 1위라는 얘기다. 추석이 지금과 같이 사흘연휴가 된 것은 1989년부터다. 1 일제시기 ‘농민의 공휴일은 설날과 추석날이오 그 박게는 지방별로 단오날이 잇슬뿐’이었다. 2 해방 후 미군정 때도 추석은 하루 공휴일이었다. 3

 ‘연휴’라는 단어 다음으로 ‘명절’이 많이 나왔다. ‘추석은 태음중심의 명절로 생식찬양 풍요감사 부족적 국민적 사회적 최고최대의 전례를 이룬 점에서 조선독특의 명절같이 되었다’는 것이 동아일보 촉탁기자 육당 최남선의 진단이다. 4

 추석은 설과 달리 유래도 전해진다. 국어학자 이윤재 선생은 ‘팔월십오일에는 그 량편의 성적을 상고하야 진편에서는 술과 음식으로써 이긴 편에 사례하고 이어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이를 다하야 즐겁게 지내어’라고 설명하면서 ‘더욱이 경상도에서 이 가온 날 놀이가 다른 도에 비하야 성행’한다고 소개했다. 5

 ‘추석’도 일제시기를 겪었다. “조선과 같이 명절 없는 나라는 없다”며 ‘추석명절을 부흥하라’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이십년내로 점점 쇠퇴하는 명절이 인제 와서는 거의 형해(形骸)만 남고 말앗다…특히 사계중의 조흔 시절을 택하야 한바탕씩 모든 실생활의 노고와 우려와 모든 슬픔을 잇고 인리(隣里)와 친척이 타아(他我)와 이해의 염(念)을 바리고 에덴 낙원의 석일(昔日)을 회상하는 것이다’. 6

 추석기사에서 ‘고향’과 ‘가족’은 변함없이 10위안에 들었으나 이와 관련된 ‘귀성’ ‘귀성길’ ‘귀향’ ‘귀향길’은 2000년대 중반이후 20위안에도 드물었다.

 기사로 보면 추석의 이동인원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2011년에도 추석의 이동인원은 2930만 명으로 전해에 비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7

풍속사가 김화진 선생은 196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이남으로 갈수록 추석을 연시보다도 더 성황을 이루고 서울 이북은 갈수록 추석행사보다 오월단오를 중하게 여긴다”고 했다. 8

 도시 직장인들이 선물꾸러미를 싸들고 귀향하면서 빚어내는 명절풍속도는 20세기 현상으로 여겨졌다. 농경사회에서 급격히 산업사회로 옮아간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농촌을 떠난 젊은이들이 “다른 때는 못들러도 명절에는 꼭 고향에 간다”는 강박관념에 고향을 찾았다. 추석을 앞두고 ‘첫줄은 떡방앗간, 둘째가 목욕탕, 셋째가 서울역 가는 줄이요’란 신문 만평 9으로 시작해, 귀성객 붐비는 서울역 10을 거쳐 ‘민족의 대이동’이란 말 11까지 등장했다.

 

 

                                                                                                                                                                                                                                                                                                              1959년 9월 16일자 사회만평

 

Notes:

  1. 1989년 1월 25일자

  2. 1922년 9월 27일자

  3. 1946년 9월 6일자

  4. 1925년 11월 1일자

  5. 1930년 10월 7일자

    가온날의이야기
    이날의 놀이는 신라때부터
    시작된 경기와여홍
    이윤재(李允宰)

    팔월 보름 곳『가온날』을추석(秋夕)이라、중추절(中秋節)이라 하야 동양에서 공통된명절로 아는 것이다 이때는혹독한 더위가 물러가고 일긔가 서늘하야지며 새 곡식과 새실과가 나서 일년중 에도 가장 조흔 철이라할만 하다。 이러한 철을 당하면 사람들은 현실의 깃븜을생각하는 한곁으로 또 감구(感舊)의 회상이 일어나는것은 자연의 리치라할것이다。 그리하야 우리 조선사람은 이때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며산소에 성모하는것이 한 년중행사로된것이다。 녜로부터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는정조(正朝)、한식(寒食)、중추(中秋)、동지(冬至)를 사대명일이라하야 성묘를 하는데중추때가 제일이라하는것이 세시긔(歲時記)에 적히어 잇다이 가온날의 유래를 상고하야보면 력사상에 가장오래고깁흔 의미가 잇서 다른 명절에비하야 특수한 관게가잇다가온날이란 말은 녯적 력사상의 명칭 가배일(嘉俳日)에서된것이다。 지금으로부터일천구백년전 신라나라 제삼세유리니사금(儒理尼斯金)때에신라 서울 륙부(六部)를 두편으로나누고왕녀(王女)두사람으로 하야금 각히 그부내(部內)의녀자들을 거느리게하고편을갈러서 칠월십륙일로 부터날마다 대궐의 뜰에모아서 질삼을시키어 이른아츰부터 밤들기까지 하야팔월십오일에는 그량편의 성적을상고하야 진편에서는 술과음식으로써 이긴편에 사례하고이어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이를 다하야 즐겁게 지내어이날을 가배(嘉俳)라 이름하엿다。

    그때에 진편에서 녀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여 이르대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 고음으로 후세 사람이 그 소리를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하니 이것이 지금까지 풍속에 류행하엿다 한다。
    또 신라나라가 발해(渤海)로더불어 전쟁하여 팔월십오일로써 승첩을 얻엇슴으로 이날을 긔념하기위하여 일반국민은온갓맛나는음식을준비하고 가무관현(歌舞管絃)으로써 사흘동안 유쾌히놀앗는데이것이 영원히 국속을이루엇다 한다。
    우에 두가지의 력사적사실을따지어보면 하나는 경기(競技)의 여흥이요하나는전승긔념이다。 둘다 신라나라에서된것이니 천년내지 이천년이전의일로 매우 오래인래력이잇음을 알것이다。 이렇게 오래엇것마는 지금까지도 특히남도에서는 그중에도 더욱이경상도에서 이가온날 놀이가다른도에비하야 성헹하는 것도 이러한 리유가 잇는 것이아닌가。

  6. 1923년 9월 26일자

  7. 2011년 9월 5일자

  8. 1961년 9월 24일자

    추석날밤에 농촌청년들이 넓은마당에 모여 농악(農樂)을치며 놀고있는 그림자가 과목(果木)아래로 빙빙도는것과「닭놀이」니「술래잡기」니하는 소녀들의그림자가 맨드라미 과꽃옆으로 너울너울 스치는것은 풍속영화(風俗映畵)를 완상(玩賞)하는듯한 촉감(觸感)이든다。

    우리나라에서 신라때『가위』에 회소곡(會蘇曲)을부른것과 전라도여수나 경상도통영에서『강강수월래』도 이날의 행사이고 그유래는모두아는 바라 덧붙여쓰지아니하고 충청도천안등지의『거북이놀이』라는 소인극(素人劇) 비슷한것을 소개하면 다음과같다。

    추석날밤에 농촌청년들이모여 멍석을말아둘러메고 큼직한집 문깐에서『이댁에 복(福)거북이 들어옵니다』하면 그집에서 대문을 열어제친다。 청년들이 마당에 멍석을펴고 한사람은 그속으로들어가 업드린다。 청년들이 그멍석을툭툭 치면서

    『천석(千石)거북이놀아라。 만석(萬石)거북이놀아라』하면 그속에서는 손찟발찟으로 멍석을 이리저리치면 멍석이 들석들석한다。

    그러한 광경이 밝은달밤에 재미 있고 우습기도 하려니와 그와 더불어 거북이가 덕담축복으로 민요를 부르고 청년들은 그 음조(音調)에 맞추어 춤도 추고 합창도하면 주인은 웃으며『우리집에 천석·만석 거북이가 들어왔으니 술 한상내야지』하고 술과 음식을 내온다。 청년들이 먹느라고 쩍쩍거리면 거북이가 멍석 밑에서『나는안 주나』하며 멍석 밑으로 술 사발이나 안주점을 주는 것이 보기에좀 어색하나 농촌의 순후(淳厚)한 맛이 돈다。 이것은 오십년전에 본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이남(以南)으로 갈수록 추석을 년시(年始)보다도 더 성황을 이루고 서울 이북(以北)은 갈수록 추석행사보다 오월단오를 중(重)하게 여긴다。 대체 서울 이남은 갈수록 중국이 료원(遼遠)하며 접촉이 적으므로 고유한 우리풍속이 그대로 내려온것이요、서북은 몇번을 중국에 예속한것을 도로 찾은 지역이라 중국풍속이 혼동되어 그러한가한다。김화진(한학자, 풍속사가)

  9. 1959년 9월 16일자

  10. 1966년 9월 28일자

  11. 1980년 9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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