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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7 : 신의주학생사건 보도

Posted by 신이 On 6월 - 19 - 2012

 

 동아일보가 신의주학생사건 1 을 처음 보도한 것은 사건발생 10여일 후였다. 복간 후 닷새째인 12월 5일 오후 상해 임시정부 시절 교민단장이었던 이유필 2의 사망소식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최근 신의주에서 학생들과 지방 여러 단체와 충돌사건이 있던 바 이 사건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 사건관련 되어 상경 도중 사망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유필 씨, 정부 방문도중 조난, 1945년 12월 6일자 1면)

 

 희생된 학생의 어머니 소식은 독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3  

 

   지난달 23일 신의주시내에 학생 학살 사건이 있다고 전문되고 잇는데 이 사건은 듣는 이로 하여금 통탄케 하는 바 6일은 학살당한 신의주 제일공업학교 제 4학년생 박태근 군의 자당□씨(52)여사가 원한 품은 아들의 유골을 안고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타기 어려운 기차로 도보로 38도선을 돌파하야 서울에 도착하였다.

 

(희생된 순진한 학생들, 유골 안고 모친 입경(入京), 신의주 참살(慘殺)사건 점차 판명, 1945년 12월 8일자 2면)

 

 

 동아일보는 이 사건의 목격자의 얘기를 12월 8일자 4 와 9일자 5 에 연달아 실었다. 참여 학생의 경험담도 게재했다. 6 38선 때문에 북조선의 취재가 어려운 상황에서 짜낸 고육지책이었다.

 

   처음에는 보안대에서 학생을 향하여 발포하려고 하니까 학생들은 가슴을 헤치며『자 쓸테면 쏘아라, 우리는 정의(正義)를 위하야 죽어도 좃타』고 고함치니 감히 발포하지 못하였는데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동원시켜서 살해하였든 것입니다.

(목격자 김기관 씨 담, 1945년 12월 8일자 2면)

 

   21일에는 용암포 노동조합원과 농민조합원이 합력하여 소남병원과 제일교회를 파괴한 외에 국민학교 선생 2명과 소남병원 의사에게 살상을 가하고 22일에는 또다시 운향시에 있는 장촌병원 용촌약방 형제약방 등을 파괴하였다.

(병원파괴、인원살상, 발단은 인민위원회의 학교접수소동, 1945년 12월 9일자 2면)

 

   보안대 도청보안부경비대、공산당본부 세 곳을 부내 7개 중등학교가 각각 분담하야 동일 오후 2시에 적수공권으로 용암포 동무들의 분을 풀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을 미리 안 상대방은 삼팔식 장총과 권총 등에 장전을 한 후 엄밀히 경비하고 있었다. 우리 신의주 상업생 7백명은 오후 2시까지 예정대로 도보안부 경비대를 행하야 가고 있는 도중 전투기 1기가 나타나…

(관계학생의 입경(入京)담, 1945년 12월 9일자 2면)

 

 

 조선일보 7 와 자유신문 8 은 12월 9일자에서야 청년단체 발표를 인용해 이 사건을 알렸다. 동아일보는 12월 중순 전국학생대회에서 이 사건을 여론화하려하자 이 사실을 기사 9 로 전했다.

 
 

 김일성도 신의주학생사건 직후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이 사건 10은 냉전으로 인해 남북에서 각기 다른 역사가 됐다.

 

  “이북에서 제가 듣기로는 신의주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김일성이 직접 신의주로 내려가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는 겁니다. 연설도중 한 학생이 그에게 당신 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더라는 겁니다.그래서 공산주의다 했더니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그 사상을 따르겠다면서 환성을 올렸다더군요.” (귀순비행사 이웅평)

 

  “제가 신의주학생사건에 직접 가담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만 정말 말이 안되는군요. 신의주 동중 강당에 학생들이 모였을 때 30대의 김일성이 나타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입에서 공산당이란 말은 한마디도 안나왔습니다. 신민주주의로 나간다고 했어요. 당시 신민주주의가 모택동이 내걸었던 사상인 걸 누가 알았습니까. ‘신’자는 빼고 민주주의라는 말에 그대로 박수를 쳤던 거예요. 그래서 강당밖에 환영플래카드를 들고 몰려왔던 공산당원과 농민회원등이 학생들에게 잔뜩 두들겨 맞고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었지요.” (동아일보 오상원 논설위원)

   

(이웅평 씨의「남과 북」특별 대담-오상원 본사 논설위원, 동아일보 1983년 4월 12일자 3면) 11

 

 

 

 

 

 

Notes:

  1. 신의주학생사건,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엮음, 가람기획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에서 일어난 반공학생 시위. 11월 16일 용암포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민주당 지방대회에서의 좌우익세력간의 충돌이 발단되어 일어났다. 용암포의 우익계 학생들이 좌익규탄 시위를 전개, 23일에는 신의주의 6개 중학교가 이에 가담하여 인민위원회·보안서 등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5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80명이 투옥되었다.

  2. 강만길, 20세기 우리 역사, 창작과비평사,1999, 227쪽

     

    평안북도에서도 이유필을 위원장으로 하는 자치위원회가 성립했습니다. 이 자치위원회는 소련군의 요구로 임시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습니다(8.30).

  3. 1945년 12월 8일자 2면, 희생된 순진한 학생들, 유골 안고 모친 입경(入京), 신의주 참살(慘殺)사건 점차 판명
     
    지난달 23일 신의주시내에 학생 학살 사건이 있다고 전문되고 잇는데 이 사건은 듣는 이로하여금 통탄케 하는 바 6일은 학살당한 신의주 제일공업학교 제 4학년생 박태근(□□)군의 자당□씨(52)여사가 원한품은 아들의 유골을 안고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타기 어려운 기차로 도보로 38도선을 돌파하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모친의 도착으로서 학살사건의 전모는 점차 명학하게 들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사건은 과연 중대한 문제로 확대되어 일반의 주시를 이끌고 있다. 분함을 못이겨 유골을 안고 상경한 여사는 조선유학생동맹의 일선으로 방금 동합숙소에 유골을 안치한 금천대회관안에 잇는 이재민수용소에 수용되어있다.(사진은 고 박태근 군과 그 유골)

  4. 1945년 12월 8일자 2면, 목격자 김기관 씨 담

     신의주학생 학살사건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왔다는 평북 용천군 부라면 삼용동 김기관(29) 씨는 시내 금천대회관 전재민수용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신의주학생사건을 목도하였습니다. 그 여파가 학생들에게만 미치지 않고 다른 방면으 로 확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보안대에서 학생을 향하여 발포하려고 하니까 학생들은 가슴을 헤치며『자 쓸테면 쏘아라, 우리는 정의(正義)를 위하야 죽어도 좃타』고 고함치니 감히 발포하지 못하였는데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동원시켜서 살해하였든 것입니다.

  5. 1945년 12월 9일자 2면, 병원파괴、인원살상, 발단은 인민위원회의 학교접수소동, 축차(逐次,차례차례) 판명되는 신의주사건

    신의주 학생사건의 도화선이 된 용암포 사건의 피해를 입고 그곳을 탈출하야 삼십팔도 이남으로 피난을 온 평북 용천군 부라면 삼룡동 168 김기관(29) 씨는 방금 시내 남대문통 금천대회관 재외전재동포구제회에 보호를 밧고 잇는데 동씨는 신의주학생사건 대하여 목도한 바을 일부 말하엿거니와 다시 게속하여 학생사건의 도화선이란 용암포사건의 전모에 대하야 다음과 갓치 말한다.

     

    피해자담

    11월 20일 용암포수산학교 교사의 접수문제를 싸고 동교교장이하 직원을 인민위원회에서 감금하자 동교학생들이 일치단결하야 동교교장이하 직원의 석방을 요구하고저 인민위원장의면담을 청하였으나 위원장은 어데로인지 피신하고 인민위원장의 명령에 의한 보안대의출동을 맛나 마침내 사건은 악화되고 말엇다.

    그리하야 학생대는 보안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도라가는 도중에 또 다 북중 경금속 회사 노무자 1천여명의 급습을 받아 학생대중에서 5명의 부상자를 내엇는데 때마츰 이 현장을 지내든 홍 제일교회장로가 이를 말리자 노동자들은 홍 장로를 박살하고 말엇다.

    21일에는 용암포 노동조합원과 농민조합원이 합력하야 소남병원과 제일교회를 파괴한 외에 국민학교 선생 2명과 소남병원 의사에게 살상을 가하고 22일에는 또다시 운향시에 잇는 장촌병원 용촌약방 형제약방 등을 파괴하얏다. 그리고 23일 밤에 일으러서는 마침내 우리집까지 파괴하야 나는 가족도 맛나보지 못하고 빠저 나왓는데 그 후의 소식이 궁굼하다.

  6. 1945년 12월 9일자 2면, 관계학생의 입경(入京)담, 공중에서 총격, 신의주상업 백문도 군

     11월 23일 아침 부내중등학교 위원 일동이 모여서 용암포 수산학교 사건에 대한 선후책을 협의한 결과 보안대 도청보안부경비대、공산당본부 세 곳을 부내 7개 중등학교가 각각 분담하야 동일오후 2시에 적수공권으로 용암포 동무들의 분을 풀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을 미리 안 상대방은 삼팔식 장총과 권총 등에 장전을 한 후 엄밀히 경비하고 잇섯다 우리 신의주 상업생 7백명은 오후 2시까지 예정대로 도보안부 경비대를 행하야 가고 잇는 도중 이외에도 전투기 1기가 나타나 최저공으로 우리들에 대하야 기총소사가 있었다. 그러나 부상자가 나지 아니한 것은 다행이었다.(후략)

  7. 조선일보 1945년 12월 9일자 2면, 신의주, 함흥학생사건진상, 대한민국독립촉성중앙청년총연맹 발표

  8. 자유신문 1945년 12월 9일자 2면, 신의주, 함흥학생사건, 독립촉성중앙청총에서 성명

  9. 1945년 12월 13일자 2면, 전국학생대회, 서북학생사건대책 협의

     이번 삼십팔도 이북에서 발생한 신의주 학생사건을 비롯하야 함흥학생사건 등 서북학생 학살사건이 한번 세상에 알려학자 누구보다도 절문학도들의 관심이 여기에 모히게 되여 유학생 동맹에서는 전국학생 대회를 소집하야 16일 하오 1시부터 휘문소학교 강당에서 전국학생대회(全國學生大會)를 개최한 다몽 대회에는 전국 각 학교 대표를 비롯하야 시내 각 전문대학 남녀 중등학교학생 대표들이 참집하야 이번 서북 학생사건의 진상을 폭노하여 여론을 환기하는 동시에 그 대책을 강구하고 아울러 순국학생동맹(殉國學生同盟)을 결성할 터이다. 그리고 이번 서북학생사건에 관게로 히생당한 학생의 추도회와 장의의 절차에 대하여 서로 협의하기로 되엿다.

  10. 강성재 기자, 남북의 대화 <51>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괴뢰 김일성의 등장 ⑩, 동아일보 1972년 2월 5일자 4면

    그러면 신의주 학생사건의 도화선이 된 용암포 사건을「현장」에 있었던 이도명(李道明)씨(46·당시 신의주 제일공업학교 3년 재학·현 서울 대광국민교 교감)로부터 들어보자。
    “용암포 인민위원회 주최로 11월 18일인가 열린 시민대회는 일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이 대회에서 학생대표가 공산당의 비행을 고발하고 또 공산당에 뺏겨 정치훈련소로 쓰고 있던『수산학교를 내놓으라』고 외치자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함께『공산당 타도』를 외쳐 대회는 엉뚱하게 공산당규탄대회로 돌변했지요。그런데 조금 후 군중 속에 끼어있던 공산도당들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대회장인 제일교회 부근의 부자집들을 습격、기물을 부수고 폭행을 가하고 사라졌읍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 60여명은 인민위원장 이용흡(李容洽)과 직접 담판하겠다고 찾아갔는데 거기서 그가 양시(楊市)쪽으로 도망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됐읍니다。그래서 학생 약40여명이 용암포에서 양시로 통하는 도로 한가운데 장작을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놓고그 부근 골목에 숨어 이용흡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그런데 어둑어둑해지자 양시방면에서 용암포로 30여명의 노동자와 공산도당들이 떼지어 왔읍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괭이 호미 몽둥이를 든 이들은 바리케이드 앞 20여m에 이르자 돌진해 들어와 붙잡히는 대로 뭇매를 가했읍니다。순식간에 기습을 당했을 뿐 아니라 맨손으로 대항할 수 없어 학생들은 골목길로 논바닥 등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읍니다。도망가다 붙잡히면 가차없이 몽둥이에 얻어터졌지요。이 광경을 보다 못한 제일교회 홍석황(洪錫璜)장로가 이를 만류하자『너는 뭐냐。이 예수장이』하면서 몽둥이로 머리를 후려치니까 두 눈이 튀어나오는 등 치명상을 입고 곧 절명했읍니다。
    용암포 사건은 이걸로 끝났읍니다。나는 그때 용암포와 신의주 간의 기차통학생 동지회장을 맡고 있었읍니다。다음날、기차로 올라가서 당시 결성돼있었던 평북학생자치회에 이 사건의전말을 자세히 알렸읍니다。”
    용암포의 참변을 전해들은 신의주시내 6개 학교 3500여 학도들은 학생대표들의 지휘에 따라 23일 낮 일제히 봉기、분담된 바에 따라 도 보안부와 공산당 본부등을 각각 습격 접수키로 했다。
    ▲박선봉(朴善鳳)씨(46)·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기념회부회장·당시 평안중학 졸업반)=공산당의 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숙청바람이 불고 학교에도 태극기 대신 붉은 기를 달게 하고 학급마다「레닌」「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도록 강요한데 불만을 품어오던 차에 용암포 사건이  터졌다고 해요。기차 통학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신의주시내 6개 중학생 대표들은 제일공업 윤순호(尹淳浩)군 집에서 2、3차례 밀회를 갖고『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읍니다。그때 반공애국청년단체인「우리청년회」의 유형무형의 지원도 계산했었지요。
    22일 동중학교 강당에서 학생대표들과 만난 당시 도 학무국장 함석헌(咸錫憲)씨는 거사의 뜻을 알리자 의로운 일을 억제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의미의 말을 해 학생들의 결심을 굳게 해준 일도 있읍니다。
    23일이 되어 내가 다니던 평안중학과 상업학교는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하기로 돼 11시부터 각기 교정에 모여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의 본부격인 제일공업학교에서 12시에 거사하자는 연락을 받아오던 학생이 중도에 그 무렵 행패가 가장 심했던 특별보안대원을 만나『너 오늘 죽어봐라』며 싸움을 벌이는 통에 늦어 이날 1시경에야 학교문을 나섰읍니다。남신의주의「평중」에서 보안서까지는 약 4㎞나 됐읍니다。
    1천여명의 두 줄로 된 학생대열이「공산당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비행장 옆을 지나쳤는데 그때 보니까 200m앞 둑 위에 기관총이 걸려 있었고 보안대원들이 공포를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신의주에 못들어 간다고 소리치고 있었읍니다。대치하고 있던 학생들이 몇 개 분대의 특공대를 편성하고 투석전을 막 벌이는 순간이었읍니다。
    그 비행장에서 소련군「야크」기가 몇 대 뜨더니 이내 기총소사를 퍼부었읍니다。그러자 학생들은 도로 옆 논두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읍니다。나도 몸을 피해 벼 낱가리 속에 숨어서보니까「야크」기는 학생들과 약간 떨어진 논바닥에다 마구 기관포를 쏘더군요。우리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신일(李新日)씨(45)·당시 제이 공업학교 3학년·현재 동대문구 제기3동사무소근무)=22일밤 제2 공업대표로 학생대표들의 모의에 참가했는데 밤새도록 토의했으나 거사 시간에 대한 확실한 결정이 나지 않았읍니다。다음날 학교로『낮 12시를 기해 거사한다』는 통지가 왔더군요。
    그날 12시가 되자 나는 조병건(趙炳健)군 등 다른 간부들과 함께 운동장에 전교생을 집합시켜 놓고 호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우게 한 후 간부들의 뒤를 따라 오도록 했읍니다。문이 꼭꼭 닫힌 공산당 본부앞에 와서야 학생들에게 오늘 신의주시내 모든 학교가 반공의거를 일으키게 됐는데 우리학교와 신의주사범학교가 제 2반으로 배정받은 목표는 공산당본부라고 비로소 밝히고『쳐부수자』면서 먼저 문을 뛰어넘어 들어갔읍니다。이어 노도와 같이 학생들이 밀려들어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던 보안대원들과 투석전과 육박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내쫓고 말았읍니다。
    우리 선발대는 정신없이 공산당본부 2층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그때까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읍니다。3층까지 올라가 한사무실 문을 여니 소련군 몇 명이 있다가 권총을 꺼내려고해요。그때 내가 먼저 잉크병을 냅다 집어던지고 뛰어나오니까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합디다。 1층을 빠져 나오면서 얼핏 보니까 3층 베란다에서 다발총을 마구 쏘고 있더군요。내 옆에서 뛰어가던 1년 후배가 푹 쓰러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도망쳤읍니다。후에 들으니 이 충돌에서 11명이 죽고 200여명이 부상했다고 합니다。
    ▲이도명씨=내가 다니던 제일공업학교는 동중학교와 함께 제1반으로 평안도 보안부를 맡기로 돼 있었읍니다。그날 11시경이 되자 4학년 학생들이 학생들을 강당에 집합시켜놓고 학생들을 설독한 후 직원실을 점령、전화통을 먼저 점거했읍니다。호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몽둥이를 준비해가지고 1시반경 학교를 출발했읍니다。한사람의 이탈자도 없었지요。중간에서 동중학교 학생들과 합류해서 구(舊) 평북도청 앞에 이르니 높다란 철문 정문이 꼭 잠겨 있었읍니다。
    그러나 철문 안에는 다발총과 권총을 쥔 보안대원들이 5m 간격으로 늘어서 경계를 하고 있었읍니다。더우기 청사 베란다에는 기관총까지 설치돼 있더군요。이렇게 삼엄한데도 전혀 무서운 생각이 안듭디다。잠시 대치하다 동중학생들은 서쪽으로、제일공업학생들은 동쪽으로 굳게 잠긴 대문과 담을 뛰어 넘기로 하고「만세」를 부르며 정문과 담벼락에 붙어 뛰어넘으려 할 때 한두 발의 총성이 들렸어요。그러니까 한 학생이『공포(空砲)다。겁내지 말고 넘자』고 격려합디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총을 쏘고 곧 이어 기관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읍니다。그와 동시에 철문 담 등에 올라있던 학생들이 막 떨어져 피를 흘려요。나도 철문을 타고 오르려다말고 내려왔지요。주위는 금방 수라장을 이루고 비명소리로 뒤덮였읍니다。이때의 무차별사격으로 13명이 즉사했읍니다。
    이 신의주사건에서 24명의 학생이 피살됐으며 350명이 부상、1000여명의 체포된 자중 200여명이「시베리아」유형(流刑)을 당했다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이 신의주 사건은 그 후 북한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반공의거의 봉화가 된다。

  11. (9) 1983년 4월 12일자 3면, 이웅평 씨의「남과 북」, 활기찬 서울, 깜짝 놀랐어요. 특별 대담-오상원 본사 논설위원

     -혹시 신의주학생사건에 대해서 알고계신지요。해방 후 북한에서 최초로 일어난 반공의거 입니다만。

    『네、잘 알고 있읍니다。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내용이 다르군요。이북에서 제가 듣기로는 신의주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김일성이 직접 신의주로 내려가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는 겁니다。연설도중 한 학생이 그에게 당신 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더라는 겁니다。그래서 공산주의다 했더니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그 사상을 따르겠다면서 환성을 올렸다더군요.』

    -제가 신의주학생사건에 직접 가담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만 정말 말이 안되는군요。신의주 동중 강당에 학생들이 모였을 때 30대의 김일성이 나타났던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그때 그의 입에서 공산당이란 말은 한마디도 안나왔읍니다。신민주주의로 나간다고 했어요。당시 신민주주의가 모택동이 내걸었던 사상인 걸 누가 알았읍니까。 ‘신’자는 빼고 민주주의라는 말에 그대로 박수를 쳤던 거예요。그래서 강당밖에 환영플래카드를 들고 몰려왔던 공산당원과 농민회원등이 학생들에게 잔뜩 두들겨 맞고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었지요。

    『그랬었읍니까。 정말 처음 듣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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