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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125 : 시대를 앞서 간 여기자들(4) 황신덕

Posted by 신이 On 10월 - 28 - 2011

동아일보 회의실서 결혼식 올린 황신덕(黃信德, 1898~1983)


1926년 일본여자대학을 졸업한 황신덕은 1929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주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신랑: 동아일보 기자 임봉순(任鳳淳)


식장: 동아일보 회의실.





 1935년 6월,  ‘신가정’ 편집책임자  수주 변영로.


 “내외간이 같이 출근하는 것도 좋지 않겠소.  ‘신가정’ 의 기자 한 사람이 출가하고 자리가 비어있으니 와서 일 좀 해주시구료…”


 그렇게 해서 동아 가족이 된 황신덕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가정’ 이 없어질 때까지  ‘신가정’의 대표 부인기자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황신덕-김자혜 대담, ‘신가정 때의 여기자’, 여성동아 1967년 11월호 복간호(462~463쪽)

 “그때 나는 학교에 있었어요, 경성실업여학교, 한 3년 있었는데 경영자와 학교장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서 정식 폐교 당하지는 않았지만 학교가 자진 폐교를 했어요. 그래 그때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송 선생님이 부르시더군요. 우리 영감(임봉순 씨)은 그때 동아에 기자로 있었지요.  변영로 씨 그리고 맞은 편에는 신동아의 최승만 씨, 고형곤 씨, 만화 그리는 최영수 씨 다섯이 한 방에 있었는데, 직원이 원래 적었어요. 대중속에 섞이느라 빛깔도 요란한 것은 피하고 머리는 수수하게 틀고 그랬지요. 신여성은 자꾸 나오는데 발표할 기관도 없고, 그때부터 동아일보는 동포들에게는 정부 모양 대중이 신임하고 믿고 의지하는 기관이었지요.” 


 시대를 앞서 간 황신덕은 동경유학시절 이미 세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학생시절 황신덕의 꿈은 여성운동과 교육사업이었습니다. 그는 이 두 가지야말로 뒤떨어진 우리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7일자 4면


 여자청년회 강연회


 안악(安岳)여자청년회 주최로 본월 2일에 강연회를 개최하고 평양숭현고등학교 졸업생 김순희 여사는 ‘시대적 인물을 성(成)하라’는 연제로, 일본동경유학생 황신덕 여사는 ‘조선사회에 할  일이라’라는 연제로 각각 열변을 토하야 4백여의 청중에게 다대한 감동을 일으켰으며 박수가 끊이지않는 대성황리에 폐회하였더라.(안악) 


1921년 5월 2일자 3면


  동경의 조선 여학생 이채(異彩)

 조선인 세 규수가 남자대학에 청강


 동경 조도전대학 문학과에는 3명의 조선 여자 청강생이 있다. 사회철학과에 황신덕(22) 이선행(22) 두 사람이요 영문학과에 임아영(20)이 한사람으로서 모두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공부에 열심함으로 동경 여학생계의 한 이채라는데 황신덕 양은 지금으로부터 다섯해 전에 평양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와 천대전(千代田)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진전영학숙(津田英學塾)에 학적을 두었으며 이선행 양은 경성정신여학교 출신으로 천대전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하며 임아영 양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동경여자대학을 작년에 졸업하였다는데 세사람은 모두 한 집에 있어서 친형제같이 친밀한 정의로 재미스럽게 살림을 하면서 공부한다는데 황신덕 양은 독립운동 사건으로 지금 철창에서 신음하는 황에스터 양의 동생이라더라.

(사진은 오른쪽으로부터 임아영, 황신덕, 이선행)


  1926년 봄 졸업을 앞두고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마음먹고 간단한 차림으로 부산에 온 그는 동래온천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 박찬희를 만났습니다. 그는 대뜸 “신덕씨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축하라니요, 잠시 다니러 온 것 뿐인데…”

 “시대일보 기자로 발령이 났던데 모른단 말이요.”

 “거짓말 마십시오.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럴 리가 있나요. 다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친지들과 친구들이 그를 보기 위해 나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시대일보 기자로 발령이 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신문사에서 일해야 한다며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발령을 냈다는 것입니다.


  황신덕은 얼떨결에 다음날 시대일보로 나갔습니다. 그 무렵 사장에는 홍명희, 편집국장은 한기악 씨였습니다. 한 씨는 “신덕씨, 고생이 많겠지만 도와줘야 하겠소. 그렇다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니 그저 교육받은 여성의 길로 생각하고 일해주세요”라는 말로 그를 맞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황신덕의 기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부인기자들은 지금과는 달랐어요. 요리강습이다, 수영강습이다, 계몽이다 해서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민족운동을 했지요.…(중략)…제가 있던 시대일보 중외신문은 참 곤란했어요. 종이를 하루하루 사오고 할 형편이니 기자들의 월급도 제 때에 잘 안 나오고… 그래도 민폐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 후 동아로 옮긴 다음에 주인과 저의 월급의 반만 쓰고 나머지는 저축할 수 있었어요. 닭치고 돼지 치는 기자의 부업을 맨 처음 시작한 것도 우릴 겁니다.”(황신덕, ‘46년 전 초창기의 언론계 그맘때 지사(志士)기자의 회고’) 




  황신덕은 1926년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동아일보 1926년 11월 24일자 4면




신원(新院)청년회 주최

사회문제 대강연

주의, 중지, 해산, 검속으로 일관

경찰 고압(高壓)에 청중 분개


재령군 신원청년회에서는 경성여성동우회 황신덕 양과 신흥청년동맹 옥순철 씨를 초빙하여 지난 19, 20 양일간 사회문제 대강연회를 개최하여 많은 인기를 끌어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었는데…(중략)…황신덕 양이 ‘여자도 살어야 하겠다’란 제하에 조선의 여자는 인간적 지위에 서서 인간다운 활동을 못하니 육체는 살았으되 활동으로는 죽었다는 것을 통론하였고…(하략)


1927년 2월 1일자 2면




사교단체 발기

내외국인사의

영송(迎送)을 중심으로


우리 조선에 끊을새 없이 들고나는 세계 각국의 유명한 인사들을 위하여 또는 해외로 유학 혹은 시찰로 나가며 돌아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그를 맞고 보내는 통일된 사교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알아오던바 이번 교육 언론 실업 종교 법조 예술 체육 의학 기타 각 방면의 남녀 유지들이 조선 각 사회의 통일적 사교기관을 일으켜 밖으로는 세계적으로 우정을 펼치어 우리의 사정에 대한 참된 이해를 얻고 안으로는 사회 각 방면 유지의 사교를 원만히 하게 하기로 협의하였다는데 그 회명과 사업강령은 불일간 발표되리라 하며 그 발기인 씨명은 아래와 같더라.

◇발기인 명단

김연수 김미리사 김병로 김영섭 김영환 김용채 김활란 고희동 구자옥 정광조 여운홍 유영준 이갑성 이시완 이승우 이인 이종린 이곤성 이관용 이광수 민태원 박준호 박창훈 박희도 백관수 신알배트 신흥우 서상국 양재창 임긍순 오긍선 유각경 유억겸 장두현 장우식 조동식 최두선 최은희 홍우만 원달호 황석우 황신덕




  이 당시 황신덕은 조선 여성운동의 결집체인 근우회(槿友會)의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1927년 8월 27일자 3면




전주 근우(槿友)

창립기념 강연


근우회 전주지회에서는 24일 오후 8시 반에 전주공회당에서 창립기념 강연을 개최하였는바 연사는 경성본부로서 초빙한 정종명 황신덕 양 여사이었다 하며 성황으로 마치었는데 연제는 다음과 같더라.(전주)

조선 여성운동의 현실과 그 방침  황신덕

조선여자의 지위향상과 단결         정종명




  여성의 지위 향상과 민족근대화를 염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신문지면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1929년 4월 21일자 3면




 신여성의 가정생활

 이것이 불평이라면

 여성문제의 의견 상위(相違)

 조선 사회시설은 여성 편의를 무시

 황신덕


 “나에게는 불평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내가 말한다면 남들은 더욱이 불평을 많이 가진 자들은 거짓말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이렇다 할만한 불평이 없습니다. 아직도 신혼생활일 뿐더러 유달리 늦게 혼인한 덕(?)인지도 모른다고 하는 친구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튼 현재 나에게는 참으로 안락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재력 혹은 지위상 불공평으로 하여 불만을 느낀다는 것보다 먼저 여자에 관한 문제로 나의 맘을 상하게 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녀간 좀 침착히 생각하는 사람이면 물론 그러한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이때에 우선 여자의 직책이라는데 대하여 생각한다면 과연 내용이 기가 막힌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업부인의 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안팎 사정을 골고루 짐작하게 됩니다. 가령 부인들이 집에서 매일 하는 일이 직업 가진 사람들이 바깥에 나가서 매일 노동하는 것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해도 과히 막말은 아닌듯 합니다. 보십시오. 밤낮해도 끝안나고 티안나는 일인데도 본치조차 아니 나는 집안일—육아, 음식, 의복, 가정정리까지 더욱이 신여성으로서는 재무처리까지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 자세한 사정을 살피는 것 같으면 바깥일을 하는 남자들보다 정신과 육체를 얼마나 과로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여학생시대에 동성연애를 안해 본 사람은 별로 없으리다. 나도 그 축에 빠지지 않고 여러차례의 경험도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나는 대개가 순로(順路)로 모두 친하였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는 별로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은 더러 있지요. 이때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은 숭의학교(崇義學校) 있을 때에 태천(泰川)서 온 동무하고 퍽 친하게 지낸 일이 있습니다. 그 동무는 부모도 없는 퍽 불쌍한 사람인데 처음의 동기는 아마 동정에서부터 일어났던 모양이지요. 집에서 맛난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기숙사에 있는 그 동무를 데려내다가 같이 먹어야 마음이 편하고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그 동무의 얼굴 볼 것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빨라지며 마음이 기뻐졌습니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되어 동무가 고향으로 가게 되었을 때에 2주일 동안 밖에 아니되건만 그동안 견딜 일이 난처하였습니다. 그래 어떻게 서럽던지 정거장에서 막 붙잡고 둘이서  울었지요. 목소리가 높아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한참 울다 나니까 구경군이 쭉 둘러섰겠지요. 그 후 동무가 간 뒤로는 그렇게 빠지지않고 다니던 예배당에를 혼자 가 앉음에 너무 서어해서 몇번이나 빠졌답니다. 이것이 나의 최초의 동성연애인가 봅니다. 그 후로도 많은 동무를 친했지마는 그때적 같이 순전한 감정으로만 사랑해 본적이 없습니다.”(황신덕, ‘여류 명사의 동성연애기’, ‘별건곤’ 1930년 11월호, 120쪽) 


1934년 12월 14일자 4면




시류통론대회(時流痛論大會) 기이(其二)

여학생에 충고하노라

황신덕


내가 오늘 저녁에 말씀하려는 이 여학생이란 반드시 제복을 입은 고등여학생이나 전문학교에 학적을 둔 학생만을 가르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트래머리하고 구두만 신으면 여학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학교물을 마시고 나온 말하자면 신여성을 가르켜서 여학생이라 하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자신이 포함되어있는 신여성의 생활을 반성하는 태도로써 두어 말씀 드리려 합니다. 우리 조선에 여학생이 생겨난 역사는 극히 짧은 30여 년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 수도 재적생과 졸업생을(보통학교 생도는 제외함) 통틀어 본대도 만명 이외에 불과하였습니다. 서양에 어떤 학자가 그 사회, 그 나라의 문명 정도를 계량하는 기게는 여자교육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것이 어떤 정도까지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우리 조선의 문명 정도가 어떠하다는 가련한 느낌과 한가지로 만명 내외 여학생의 사회 중요성이 어떠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겠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가정은 비위생적이오 비과학적입니다. 우리 일천만 여성은 문맹이오 인간적 생활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남보다 뒤떨어졌습니다. 이 가정의 착실한 주부가 되고 일천만 여성을 지도하며 조선문화를 향상케하는 책임이 여학생에게 있지 아니합니까?(하략)




1935년 1월 1일자 2면




가정으로부터 출발할 우리의 신생활 운동

신생활은 가정으로부터


손을 청할 때에는

간단하고 성의있게

황신덕


첫째로 손님을 대접할때 만반성찬을 차려야 대접이 되는줄 알고 수십가지를 벌려놓아 마치 내 솜씨는 이렇게 좋습니다 하는 자랑 비슷한 식상을 차려놓는 것은 실로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보다 비교가 되지않는 서양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청함을 받았을때 얼마나 단순하고 간단하게 대접하는 것을 경험하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손님과 저녁이나 함께 먹으려면 큰 짐이 되는 것같고 거페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청함을 받은 손도 오히려 미안하고 누가 밥먹으러 오라면 또 저집에서 야단이 나겠구나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하략)




신가정 1936년 1월호 60~65쪽




주택문제 좌담회


출석자

연전(延專) 수물과(數物科) 강사  이만학 씨

건축가                                         박길용 씨

이전(梨專) 가사과 교수         김몌비 씨

협성여신 교수                           고봉경 씨

동덕여고 교유                           송금선 씨

여자고보 교유                           손정규 씨

【본사측】변영로, 황신덕, 박승호

일시-11월 23일 오후 6시




 “12월 한달을 송두리채 집어삼키고 출근 시작한지 미만 10일에 편집여언을 쓰게 되었으니 어리둥절 할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산고! 이것이 비록 부득이한 일이었다고는 할지라도 나 개인의 사정으로 공사(公事)에 불충실한 결과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은 사(社)와 독자여러분께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습니다.…(중략)…우에 말한 바와 같은 동인들의 사정으로 인하여 2월호는 세사람이 하던 일을 자연 수주 선생 혼자 담당하시게 되였건마는 이만큼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여러분 앞에 나가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3월호는 벌써부터 여러분의 환영을 기약하는 기사들이 책상머리에 점점 많이 쌓여집니다. 기쁘게 기다려 주십시오.”(황신덕,  ‘편집여언(編輯餘言)’ 신가정 1936년 2월호 204쪽)




동아일보 1935년 7월 6일자 4면




여성시론

조선여성과 야심

황신덕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일이다. 내가 고향인 평양에서 진실한 크리스찬이 되어 매일 엄숙한 기도의 생활을 계속하고있는 어떤 일요일 바로 아침 예배시간이었다. 미국에서 새로나온 젊은 선교사의 강화(講話)가 있었는데 ‘조선청년은 야심을 가지라!’하는 연제이었다.…(중략)…‘조선여성이여! 야심을 가지자!’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도록 무기력하게 또 아무러한 욕망과 야심이 없어 보인다. 쓸데없는 명예나 지위에 야심이 없다든지 부정당한 금전에 야심이 없다는 것은 찬성할 일이지마는 그것과도 달러 여학교를 마치고 전문학교에까지 입학을 하였으되 아무러한 목적이 없고 다만 결혼할 배우자가 생기는 날까지 세월을 보내기 위해서 하는 것, 음악이나 문학을 전공하지마는 그것은 수학이나 물리학보다 쉬울듯하니 머리 썩이기 싫어서 휴양겸 하는 것, 가사과나 상과 출신은 취직이 쉽다니 할 수 밖에 없다는 태도—금일 일반 여성계를 본다면 ‘내가 이것을 배워서 어떤 사람이 되어보리라’ ‘어떠 어떠한 사업을 성취하고야 말리라’하는 확호(確乎)한 목적과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하략)




1937년 7월 9일자 3면


일인일언(一人一言)

거지

황신덕


(전략) 이러한 불우한 사람들을 그대로 돌보아주는 이가 없이 눈보라 치는 겨울이나 괴로운 여름날에 오척 단신을 둘곳없이 헤매이게 하는 것은 한땅의 물마시며 같은 조상의 피를 받은 사람들의 수치라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인류애를 잃어버린 크나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중략)…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자선심을 가진 일부분의 사람만의 할일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급선무로서 적당한 시설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으로 믿는다.




1938년 10월 7일자 4면


여성과 창조력


여성에게 과연 창조력이 있느냐? 세계의 대발명가는 모두 남성이다. 여류 과학자 대문호가 몇이나 있는가! 이러한 반박을 남녀평등이니 동등이니 하는 사상이 발달되었다는 오늘에 있어서도 면치못하는 현상이다. 아닌게아니라 여성 스스로 생각해볼 때에도 풀리지 않는 숙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3년 묵은 칼을 갈지도 않고 들지 않는다고 버리는 자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머리는 열두대문 안에서 겹겹이 쌓은 담장안에 오래도록 갇혀있었으니 어찌 예리하게 이용되기를 바라리오.(하략)




  신문사를 떠난 뒤 교육사업과 여성운동에 앞장섰던 황신덕은 8.15광복 후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선임되는 등 정치무대에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1946년 12월 8일자 2면




입법진두에 이채

네분 여성대표에 기대


해방의 종소리 울려 어언 1년 반에 오는 12일에 열리는 임시 입법의원의 민주진두(民主陣頭)에 이땅 여성을 대표하여 활동할 네 명의 부인의원이 나서게 되었다. 1면 보도와 같이 입법의원 관선의원이 7일에 발표되었는데 이중에는 전 여성의 주시속에 네 명의 부인의원이 있어 민주조선 건설의 새날을 위하여 이채를 던지고 있다.…(중략)…이번 선거된 부인의원은 황신덕, 박승호, 신우경, 박현숙 네 씨다.(중략)

▲황신덕 씨

동경 일본여자대학 사회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본보 부인기자로 활약하였으며 전에도 여성운동에 나섰으며 현재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정치부장이다.




1948년 3월 27일자 1면




 선거에 대한 제언

 여권옹호할 입후보자로

 여성 출마를 희망

 황신덕


 우리는 먼저 총선거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중략)…중앙이나 지방에 있어서 우리 여성도 여권을 옹호할 입후보자로서 많이 출마하여야할 것이며 또한 우리 여성들은 이 입후보자에 많이 투표하여야 한다. 특히 우리 여성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서서 활약한 예가 없었으므로 이번 총선거를 계기로 정치무대에 나설 우리 여성의 대표를 선출하기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4 Comments »

  1. 시대를 앞서, 자신의 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낸 몹쓸 교육자이자 악덕 친일파.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305

    Comment by Vendetta — 2016/01/28 @ 10:50 오전

  2. enfin nu point de vue diffé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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