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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58 : 몽양 여운형과 동아일보

Posted by 신이 On 11월 - 19 - 2010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22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동아일보의 상해 통신원으로 있었습니다.






일정시대 퇴사직원록


 




  동아일보 사사 1권, 182쪽


  해외 상주특파원제 실시


  창간 무렵 베이징에 김동성을 파견하고, 도쿄에 있는 염상섭을 특파원으로 위촉하여 창간 축사를 의뢰하는 등 해외 취재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그 후 미 의원단 취재를 위하여 장덕준, 김동성 두 기자를 중국에 보냈고 김동성을 미국, 이상협을 일본에 일시 특파원으로 파견했다. 1922년 10월부터는 해외통신원 촉탁제를 두어 상하이에 여운형, 베이징에 박숭병(朴崇秉), 1923년 2월에는 길림(吉林)에 박춘을 각각 임명해 해외 취재망을 확충하였다. 1923년 4월에는 본사 기자를 상주특파원으로 보냈다. 장덕수를 취체역 부사장의 직함을 그냥 가진 채 미국특파원에, 사회부장 김형원을 도쿄특파원에, 사회부 기자 유광렬을 상하이특파원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11월 21일자 2면에 ‘상해통신원 여운형’의 이름으로 편지 글 형식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글은 여운형이 설산 장덕수에게 보내는 편지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축제분위기에 휩싸여있던 상해에서 울분과 서글픔이 교차하던 그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11월 21일자 2면






  호상잡신


  상해통신원 여운형


  휴전기념일 소감


  설산 형(장덕수), 오늘은 11월 11일이올시다. 4년전 오늘 새벽에 시산혈해(尸山血海)를 이루던 세계대전쟁이 종 국됨을 報하던 각 예배당 종소리에 깨여 일어나 우리도 무엇을 해보자고 의논하던 일이 어제같이 기억이 됩니다. 과거 4년동안에 세계 형세도 다소 변경됨이 없지 아니하고 우리 사업도 기록할만한 것이 적지 아니하나 평화의 소식은 아직 막연합니다. 오히려 전쟁만이 더욱 격렬하여집니다. 종전으로 하여오던 ○적 전쟁이 끝나지 못하여 새로 일어나는 인적 전쟁은 전세계에 불을 놓습니다. 항상 속아사는 인생들은 이날에 평화를 기념하며 또 그것을 몽상합니다. 상해는 각 종족이 다 모여사는 한 세계의 축도올시다. 승자와 패자 그들이 이날을 어떻게 지내는 꼴을 구경하려고 나는 아침부터 나섰습니다. 먼저 10시 30분에 강서로 중앙예배당에서 거행하는 평화기념예배회에 참석하였나이다. 회중은 모두 전쟁에 종사하였던 군인들과 또 그들의 가족들뿐이올시다. 아들 둘을 전쟁에 내보낸 노인의 흐르는 눈물 만면하여 명인한 목소리로 성경을 낭독함과 11점을 종치자 회중이 기립하여 2분간 묵념하는 것과 그외 모든 절차가 전승축하나 평화기념보다는 戰亡군인의 추도회라는 것이 합당하겠더니다. 동시에 예배당 문밖을 내다본즉 거리에 군차와 행인까지 行走를 정지하고 靜立 묵념하는 것은 나의 무한한 감상을 일으키더이다. 어떠한 종군하였던 친구의 청요로 ‘푸렌치 클럽’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나이다. 6시 반부터 모여든 각국 군복을 입고 사람 많이 죽였다는 表證이 번쩍번쩍하는 훈장을 한 군인들이 거의 6백명 가량이나 모여드는데 절룩바리 곰배팔이 등 부상한 군인들이 반수 이상이나 되옵데다. 8시가 되더니 오케스트라가 각국 각노래를 연주하고 간단한 式辭가 있은 후에는 한쪽에서는 먹고 마시며 한쪽에서는 춤추고 뛰기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9시 반쯤 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한즉 회당에서 어떠한 수사의 연설하던 말이 다시 기억됩니다. “年年이 光○은 의연히 지나가나 평화기념일은 평화의 세계보담도 전쟁의 세계, 생명의 세계보담도 ○○한 세계를 연상케할 뿐이다.” 잠은 아니오고 그리운 형의 생각은 금할수없어 다시 뛰여 일어나 정원에 나가 달을 우러러보니 심중소회를 말할 곳도 없어 종일토록 본 바와 느낀 것을 기록하여 형에게 보냅니다. 붓대를 더지는 이 순간에 나의 가슴에 맺히는 무한한 회상을 형은 알리라 합니다. (11월 11일 오후 11시)




  편지에서 보듯 여운형은 동아일보 창간 주역 중 한 사람인 장덕수와 깊은 우정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일제는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해 도쿄로 그를 초청했습니다. 이 때 여운형이 내건 요구 조건이 통역으로 장덕수와 동행하는 것이었고, 당시 일제에 의해 하의도에 억류되어 있던 25세의 장덕수는 여운형의 통역으로서 그해 12월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여운형-장덕수 합작의 명연설을 합니다.




  1923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 3면에 여운형은 이승만, 최린, 최남선, 서재필 등과 함께 그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5월 11일자 3면(압수기사)






  현대인물투표


  대환영의 신시험


  재미있는 인물 투표의 시작


  본월 25일에 본보 창간 제1천호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상금 1천원을 걸고 각종의 원고와 인물투표를 모집하는 일이 한번 발표됨에 각 방면의 환영이 매우 성대하여 매일 각종의 원고가 편집국의 책상 위에 산같이 쌓이는데 그중에도 특별히 현대인물투표는 이전에 도무지 없던 일이 될 뿐만 아니라 흥미가 극히 많은 새시험이라 하여 일반 사회에서 기대가 심히 간절한고로 요사이 어느 곳에를 가든지 이 인물투표가 반드시 이야깃거리가 되는데 10일 정오까지 본사에 도착한 제1회의 투표 결과는 아래에 기록한 바와 같이 실로 현재 조선인 중에 각 방면을 모두 망라하여 진실로 흥미가 매우 진진하며 이전 우표를 붙여서 투표지를 청구하는 사람의 수효도 날로 많아간즉 날짜가 지나감을 따라서 여러 가지로 의외의 변동이 있을 것이라 우선 명일의 투표 상황은 또 어떻게 변할는지.


  제1회(10일 정오까지) (이하 23행 가량 삭제된 채 발행)


  투표인에게 주의


  자기가 자기를 투표한 것은 채용치 아니하며 동아일보사에 관계된 사람을 투표한 것은 주최자의 처지에 있는 관계로 일체 채용치 아니합니다.




  제1회 투표 결과 3표 이상 득표자는 다음과 같았다. 이승만(49), 최린(25), 안창호(22), 최남선(18), 서재필(17), 이춘재(12), 이상재(10), 이동휘(7), 여운형(6), 강일성(6), 이승훈(4), 김원봉(4), 윤상은(4), 신흥우(4), 김좌진(3). 총독부는 이승만을 필두로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득표를 하자 이들의 명단을 삭제하였다. (정진석 편, ‘일정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Ⅱ’, LG상남언론재단, 1998, 51쪽)






  이밖에 동아일보에 실린 여운형의 기명기사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6일자 2면






  이는 임성사건(1923년 5월 6일 포구를 출발하여 천진으로 향하던 진포철도의 열차가 산동성 임성-사구 구간에서 토비의 습격을 받아 중국인 71명과 외국인 승객 9명이 납치된 사건)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여운형이 직접 임성지역을 방문한 기록으로, 그는 기사에서 “일종의 호기심이 발하야 그 진상을 탐색코저 개인의 자격으로” 취재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토비와 관병, 농민은 관계가 밀접하여 서로 형, 동생으로 호칭하고 마치 사촌과 같이 친밀하였다. 비밀히 사용하는 암호가 있어 심지어 교전중에도 포성으로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여 兵匪農을 도저히 구별할 수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임성 토비를 訪하야


  진포선 조장역에서


  여운형


  진포철로 임성역 토비사건은 세계가 떠드는 문제올시다. 그리하여 각국 영사단, 신문기자단, 중국외교부급 교통부 대표들이 이곳에 내집하여 일변 사실을 조사하며 일변 토비괴수와 교섭하는 중임은 이미 세상에서 숙지할 것이올시다.


  내가 이곳에 온 동기는 모국인이 비밀한 관계가 있다고 선전됨으로 일종의 호기심이 발하여 그 진상을 탐색코저 개인의 자격으로 어제 이곳에 도착하얏나이다. 금일 오전 9시에 떠나 토비의 굴혈에 들어가 실황을 시찰하고 오후 10시에 귀래하여 저녁밥을 기다리는 간극에 객차내에서 몇 글자 난필하나이다.


  임성역 부근에서 토비의 겁차사건이 발생한 후에 산동○군 전중옥 교통총장 오○린씨등이 조장에 와서 匪首계 미요와 담판을 하다가 관비 양방의 조건이 불합함으로 오총장은 回京하고 田督군은 무력으로 섬멸을 주장하여 그간 12차의 공격이 있어 匪黨 5, 6명의 사상을 내게 하였음으로 匪등은 피로된 外人을 포독산상으로 移置하고 요○를 고수하며 존망을 외국인과 與共하랴함으로 진퇴유곡에 在한 외인들은 할 수 없이 또 나서서 조정을 하여 금일 오후 7시 반에 미국인 포웰씨가 괴수 일인을 대동하고 조장에 와서 다시 관비 담판이 열리기를 간선하는 중인데 포웰씨의 말을 듣건대 포독산의 지세가 지극히 험준하고 방수가 견고하여 쉽게 섬멸키 불능함으로 안무하는 외에 他道가 없다 역설하나 정부방면에서는 위신과 체면관계로 匪의 요구를 응치아니할 내정임으로 본지 인사들이 산상에 孫비수를 왕방하고 조건 개수를 요구하였는데 장차 어떠한 결과가 발생할지 일반은 주목하는 중이외다.


  방금 조장에 있는 내외인사는 산동교섭사무국 훈독군대표 정사기 하봉옥 교통부대표 사역선 남경교섭사 온풍산 진포철로 관리국장 손봉종 영미법리사 국영사와 적십자회 출장원 미국사무회 대표로 구제위원 칼크로우 등 제씨와 영미신문기자 6인이 상주하고 그외 잠시 내왕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1천5백명의 관군이 此에 보호하며 5천명 가량의 관군이 비당을 포위하여 관군 합 6천여명이 주재하며 비당은 1만 이상이라 성세를 ○장하나 포독산 내에 있는 실제 수는 2천에 불과한데 비당도 건국자치군이라 자칭하고 손미요가 제일로 사령이 되어 사방에 산재한 토비를 산동으로 집중하며 동시에 관병과 농민중에서 신비들 모집하기에 노력하는 중인데 비도 관병 농민간에 관계가 심히 친밀하여 상호간에 제형으로 호칭함으로 사촌에 넘지않는 친족과 흡사하며 또 친밀히 사용하는 암호가 있어 교전시에도 포성으로 의사를 통하여 병비농을 도저히 구별할 수 없이 되어 滿山遍野가 비당같이 보이고 지금 피로된 수는 외국인 14, 중국인 1천4백여명(전후 각처에서 피래하여 현금 포독산내에 있는 자)인 바 중국인 피로자는 식료결핍으로 아사자도 많고 미친 자도 무수하여 참황을 목불인견이라 합니다.


  나는 명일 오후 이곳을 출발하여 개봉낙양 등에서 모모 주요인물을 방문하고 1주 후에는 상해로 귀환코저 하나이다.


  (5월 25일 일기)






  같은해 7월 22일자에는 한 면을 통틀어 임성사건에 대한 상세한 르포기사를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7월 22일자 5면






  임성토비 탐험기


  모국관계설과 토비의 내정


  여운형


  소위 임성사건은 중국에 在한 근래의 대실책이다. 세계의 중국에 대한 관념이 爲하여 일변하였으며 곧 나와 같은 자도 그 진상에 접하고 싶었다. 더욱이 모국인과의 관련설은 나로 하여금 아니 가보고는 마지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낙양에 吳를 訪하는 도차에 특히 임성을 탐문하게 되였나니 때는 사건이 발생한 후 삼칠일 즉 5월 24일이라.


  이날 오후 영시반에 상해를 떠나 상해남경차의 승객이 되었다. 처음으로 개인 霖雨는 孤客의 여정을 환송하는 듯하고 남풍에 누른 대소○은 처처에 황랑을 지어 양자강의 물결과 일색이다.


  어제밤에 모회의로 인하여 거의 達夜하다시피한 나는 반성반면중에 어느덧 남경강변역에 다다랐다. 나의 ○주이며 또 나의 깊이 사랑하는 우리 유학생이 백여명이나 있는 이곳을 행색의 총총으로 인하여 과문불입하게 되자니 심사 자연히 ○연함을 不覺하겠다. 더욱히 십리의 대성루와 ○○寺의 모고성은 이 인상을 더욱 심각케한다.




  굶었던 판에 대식


  2, 3인분의 양식을 먹다


  ○○선에 뛰어오름에 고색이 창연한 春秋는 한 80이상이요 명대의 ○복을 바꾸지 아니한 一老선생이 있다. 尊姓은 祝씨라는데 이 노인과 수어를 교환하는 동안에 배는 이미 항구에 매이었다. 벌떼같이 덤비는 苦力(쿨리 · 짐꾼 등의 중국인 육체노동자)동무의 수고를 저버리고 2개의 가죽상자를 들고 빨리 뛰어 정차장에 갔다. 임성사건이 발생된 후로 여객이 거의 반멸이나 된데다가 더구나 어제부터 관비간에 개전되었다는 풍설이 유포되여 행객은 희소하다. 그리하여 이 특별 급행차에는 3등칸을 제외하고 다만 일이등 침대차뿐이다. 이등표를 사가지고 차에 오르자마자 식당으로 들어가서 바로 먹기를 시작하였다. 종일 굶어 시장하던 판에 넉넉히 2, 3인분은 취하듯하다. 비로소 옆에서 먹는 서양인과 인사를 교환하였는데 한사람은 미국인 ‘밀늑씨평론’의 한 기자 ○빗이요 또 한사람은 德國(독일)의사로 모두 다 임성으로 향하는 사람이다.




  토비사촌격 군인의


  승객조사가 더욱 가소


  목적지가 같은 동행임으로 모든 것을 서로 묻게되었다. 온종일 먹지도 안코 말도 못한 나는 잔뜩 먹은 김에 너무 떠들다보니 또 밤이 깊어 오늘밤 잠도 또 밑진 모양이다. 인하여 서로 침안을 부탁하고 돌아와 꿈도 없이 한숨에 얼마를 갓던지 차창밖에 소란성에 놀라 깨어 또 토비나 아니인가 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동방이 기백하고 처처에 朝煙이 연무와 엉키었는데 차가 이미 서주에 도착함을 고지하는 소리이더라. 토비사촌쯤 되는 군인 3명이 차에 올라와 조사하는 꼴은 참 싱겁다. ○洗를 필하고 조차를 취한 후 차창에 엎드리어 토비의 겁차하던 지점을 보려고 골몰하였다. 임성역을 조금 못미쳐 걸천○교의 파괴된 것은 다 수리되었으나 아직도 여흔이 분명하다. 토비가 또 나올까봐 그러한지 차행이 너무 급하여 매시간에 거의 60마일의 속도로 달아남으로 자세히 볼 수 없다. 차가 임성역에 도착함에 역장이 나와 맞으며 떡터○○이냐 묻는다. 아마 어떠한 의사를 기다리는 모양같다.




  특별열차에 무료로


  보호병까지 6명을 주어


  나는 아니라 대답하고 교통부대표 사역선씨에게 가는 상해있는 모 친구의 소개를 보이며 史氏의 소재를 물은즉 사씨는 조장에 있다하며 나더러 그곳으로 가려느냐고 묻는다. 그리하겠다한즉 즉시 분주히 돌아다니다가 특별차에 무료로 가라하며 5, 6명의 보호병이 아니면 안심할 수 없다 하고 병정 6명을 준다. 암만보아도 匪徒인지 관병인지 특별히 알수없다. 그러나 ○길 것이 없는 나는 방심하고 같이 차에 올랐다.


  임성으로부터 조장까지는 철로는 교통부에 속한 것이 아니요 중흥공사 조장탄광에서 사설한 철로이라 한다. 임성에서 동으로 한 50리 된다 한다.


  보호병들에게 비장을 물은즉 낫낫치 我的不知라 한다. 7시 반에 발차하여 4, 5곳 정차장에 일차도 쉬지 않고 한숨에 조장에 도착하니 8시가 좀 넘었다. 정차장을 그대로 지나 약 2마일 가량을 동으로 향하여 중흥공사 탄광초두에 대인다.




  西報기자의 활동


  昨夜 포격이 又一의문


  이 탄광은 중국에서 開○탄광에 다음되는 제2대 탄광이다. 현대 총통 여원홍씨가 제1대 주왕이오 그외 여러 대관들이 주왕임으로 비록 국영은 아니나 실제상 국영 이상의 세력을 가지었다. 과연 건축기계 ○각종의 설비가 놀라울만하다. 이 지방에는 광업사무소급 기역원들의 주택을 제한 외에는 별로 여관도 없고 민가도 없다. 그래서 진포선에 소속한 각등 객차 30여량을 ○류하고 내외국인없이 다 차중생활을 한다. 재작년 겨울 서백리에서 2개월간 ○차생활을 하던 것이 회상된다. 즉시 사역선씨를 찾은 즉 회의중이라 하여 명함과 소개서만 들여보내고 식당차에서 바쁘게 타임우라잇팅(打字)을 하고있는 서양 신문기자들에게 그간 경과를 물으매 신문에 발표된 이외에는 아직 별소식이 없고 지난밤에 포격이 웅장하게 났는데 그 원인은 아직 알지 못한다 한다. 한참 이야기를 하는 중 史씨가 회의를 마치고 들어와 영접치 못함을 용서하라 하고 악수한 후 자기의 사무소로 가자 한다. 산동교섭사무국 훈진포로관리국장 손붕○남경교섭사 온세진 등 제씨에게 면면히 인사하고 그들에게 來意를 고함에 다 찬성하며 사의까지를 표한다.




  산중토굴탐험은


  극히 위험 그러나 출발


  산중 토굴에 탐험코저함을 말한즉 일제히 머리를 흔들며 불가불가라 한다. 匪徒가 극히 흉녕잔폭하여 심상히 볼수없을뿐 아니라 자당의 비밀이 탄로될까 염려하여 내용의 배포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아니하며 비수와 교섭하는 것도 직접책임자와 조약을 하려고 회의하기 전에는 도무지 볼수없다 한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匪의 본부나 혹 수괴는 볼수없더라도 외면으로 산세나 또 그 배치의 대강이나 관찰하겠다고 고집한즉 이 역시 시시로 관비간 교화로 인하여 심히 위험하다고하며 산행이 절대로 불가함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까지 왔다가 거저가기 심심할뿐 아니라 호기심이 부쩍 더 일어날서 衆人의 권고를 불청하고 토인 1명을 지로로 ○하여 포독산에 향하였다. 때는 9시반이라 침의의 저고리와 바지만 입고 중국 가죽신 한 켤레를 사신고 우리나라 삿갓만한 ○○역원들이 쓰는 초모를 얻어쓰고 굵은 지팡이 하나를 끌고 점심준비로 계란 10개 ○포 3과○ 한통을 들니여 지로를 따라 동북방으로 지령을 넘어 ○田을 끼고 시내를 따라간다. 이곳으로부터 포악산까지가 우리나라 里數로 약 40리 가량이 된다한다. 이 산은 ○, ○, ○ 3현에 반거하여 형세지험한 거산으로 可○一夫當關에 만부막개할 요○지다. 조장으로부터 7리 가량을 동으로 향한즉 상암이라는 촌락이 있고 또 5리를 더 간즉 양산구라는 동구가 있으며 또 5리에 철산○가 있고 또 북으로 5리에 반호라는 호수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포독산이 치여다보인다.




  군관의 망원경으로


  官, 匪 대치형세를 구경


  이곳을 지나면 곧 비당의 세력범위내인 고로 더 들어가기가 위험하다. 방향을 고치어 동으로 높은 산봉을 오르려할 즈음에 뜻밖에 ○전중으로 한 포수가 나오며 어데를 향하느냐고 묻는다. 당초에는 강도로 알고 잠깐 주저하였더니 제가 관병의 보초임을 말함으로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된다. 서양인의 중국말하는 흉내를 내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려고 한다. 나는 미국 군인으로 지세를 시찰하려고 변복하고 나선 길이라 하니까 이 양반이 얼른 경례를 딱 부치더니 정성껏 가르쳐주며 전○하지 말라한다. 조금 있더니 하급군관 하나 이 역시 ○림속으로 망원경을 차고 나온다.


  먼저 인사를 청한 후에 가지고 갔던 계란과 ○포를 주었더니 연해 손을 들어 사의를 표하며 감식한다. 그 김에 나도 음식 생각이 동하고 시간도 하오 1시가 넘었으므로 가지고간 식품을 다내놓고 4인이 나눠먹었다. 그 군관의 망원경을 빌리라 청한즉 조금도 서슴지않고 허리춤에서 지도 한장을 꺼내놓고 망원경을 눈에다 대어주며 관비의 대치한 각 지점을 자세히 가르친다. 생면부지 외국인에게 군사상 비밀을 가르쳐주는 정도로는 군사상 지식이 의외에 충분하다.


  약 반시간 가량을 같이 앉아 비당의 내용을 물어본즉 이 역시 꽤 상세히 안다. 비괴중 대다수는 산동군인으로 자기와 면분있는 사람이 반수 이상이라하며 그러고 그 중에 孫五는 매우 好漢이라 한다.




  총대장은 손미요


  호남독군장경요부하混人


  孫五는 匪首 손미요를 가르침이다. 포독산의 산세는 ○道之難難於上靑天이라하나 이 산에 오르기는 ○도보다 더 어렵다 한다. 사면이 다 절벽으로 되였으나 봉두에는 도로혀 수십리의 평원이 있고 게다가 地味가 ○옥하여 往時에는 다수의 농민이 거경하였었는데 우마가 능히 上山치못하고 그 초생시에 ○을 포상하여 목양하였으므로 포독산이라 칭하였다 한다. 그런데 근래에는 强人의 소굴로 변하여 농민은 다 다른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포독산상에 비수 30여명이 있어서 대본영을 作하고 산외청산 초산 흑곡 초모자등 21개소의 요새를 지었으되 塞마다 肉票(인질의 별호) 약간씩을 분치하여 관군으로 하여금 함부로 공격치못하게 한다고 한다. 육표는 부○의 별명이라. 그리고 또 非水나 용수가 초유한 곳마다 군량과 군수품을 적○하여 持久의 계획을 하며 일변으로는 다시 천하의 동지를 ○취함으로 관군의 此를 포위함은 在內의 무리를 困게함보다 차라리 외래의 적을 防하려 함이라 한다. 비당내용의 대강을 탐문하면 3천여 비수가 삼파로 ○립하였는데 기일은 전호남독군장 경요의 부하 곽기천일파요 기일은 복○거○장훈의 여당진금두요 또 기일은 전비의 총두령격인 저 유명한 손미요 일파라. 그런데 이 3파중에 세력과 인격이 손미요가 최고임으로 손씨가 이 포독산의 ‘及時雨’로 되어 衆好漢을 지휘한다. 그러니 당초부터 생사여하의 맹약이 있는 것이 아니오 불과 일시에 조합된 것임으로 주장이 各○하고 의견이 부동하며 따라서 내부의 통일이 不○되고 외계의 교섭이 곤란하다 한다.




  돌현하는 토비 2명


  담배나 한대 달라고


  그러나 협천자이령제후의 격으로 백표(백인의 육표) 10여개를 가지고 북경정부에 대하는 요구는 마치 전승국이 패자에 대한 그것의 이상이다. 또 그는 말하기를 중비중에는 英, 法, 俄의 각국어를 통하는 자가 있는데 法語를 아는 자는 ○전시에 파리에 ○○되었던 자이오 또 아라사 여자로 비처가 되어있는 자가 있다 한다. 이러한 閑話에 시간이 벌써 2시가 넘었다.


  군인과 작별하고 동으로 향하여 일소산에 향하려한즉 그네들말이 북으로 대로를 좃츰이 오히려 안전하다 함으로 다시 舊路로 내려가 포독산으로 통한 대로로 약 일영리가량을 전진하였다. 노변에 3, 4집의 촌락이 있어서 나만 촌인을 찾아 전로를 부르려할 즈음에 한집으로부터 2명의 비초가 뛰어나와 길을 막고 묻는다.


  나는 영국인의 구제원으로 식량을 운반하여 오다가 중간에 낙후되였는데 그 전행을 보지못하였느냐 반문한즉 약 반시전에 지났다하며 심히 의심하는 태도로 상하를 훑어보면서 연초가 있거든 조금 달라한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나는 이런 불시의 수요를 생각못하고 일즉이 예비한 것이 없었다. 할수없다고 대답한즉 옆에 있던 일비가 왈칵 달려들며 전신을 검색한다. 담배를 찾음인지 귀금속이나 혹 기타 유가물을 찾음인지 逢人則搜하는 저희들의 예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같이 한참 힐난을 받는 중에 포독산 방면으로 5, 6인의 일행이 내려온다. 그중 2인은 말을 타고 있었고 6인은 총을 가지고 있었고 또 1인은 무엇인지를 잔뜩 졌다. 그들이 何種人인지 匪인가 官인가 하고 바라보는 사이에 벌써 앞에 다달았더라. 자세히 본즉 말탄 1인은 상해 ‘밀늑씨평론’의 총주필 포웰씨요 또 일인은 비당의 대표로 포씨가 함께 북경대표와 교섭하려고 조장에 가는 자이오 나머지는 보호병과 짐꾼이다. 금명간 포씨가 비도의 대표와 함께 하산한다는 말은 조장에서 대강 들었으나 이곳에서 이같이 만나기는 의외이다. 20여일 간이나 면도를 아니하여 전면이 수염에 묻히었고 또 심히 파리하여서 졸지에 알아볼수가 없다.




  중국인을 강도시하는


  西報기자들의 보고담


  나귀에서 뛰어내려 나의 손을 잡고 웬일이냐 묻는다. 먼저 건강 여하를 물은후 포독산에 탐험하러옴을 고하고 계속하여 이야기하는 사이에 붙잡고 힐난하는 자는 나를 과연 영국인으로 알았는지 아무말없이 살며시 물러선다. 포웰씨의 말이 자기가 20여일을 비굴중에 있었으나 그 내정은 미상이라 하며 산상에는 도저히 갈 수 없고 설령 가더라도 내정을 탐득할 수 없다. 날이 이미 하오 3시이니 지금 빨리 내려가야 황혼 전에 조장에 도착되겠다 하며 같이 돌아가기를 역권한다. 나도 별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동행하여 내려오면서 여러가지를 물어본즉 그의 태도와 감정이 전일과는 아주 딴사람이다. 물론 20여일 동안을 평생에 몽상도 아니하던 고초를 겪었음으로 신경도 다소 날카롭고 감정도 얼마쯤은 불쾌하였겠지만은 말마다 중국 전체를 야만시하며 중국인 전부를 강도시함은 너무도 듣기에 불쾌하다. 그의 심리를 얼마쯤 이해함으로 고청지하면서 그의 경험담도 듣고 상해이야기도 하여주노라니 부지중에 벌써 조장에 도착되었다. 시간은 이미 7시반이 넘었다. 中西인 전부가 한곳에 모여 포씨의 보고를 듣는 동안에 나는 식당차에 들어가 그동안 견문을 약초하여 동아일보에 붙였다. 조금 있더니 사군급손국장풍교섭사제인이 와서 만찬을 청한다. 식탁에 둘러앉아 당일의 所經을 약설한 후 화제는 일변하여 한국독립운동에 이르렀다. 좌중이 모두 한국인의 자유를 위하여 희생됨을 탄복하며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나의 가슴은 어쩐일이니 뻑뻑하여진다. 말할수없는 무엇이 안색에 보이는 모양이다.


  일좌가 고요하다. 사씨의 지도를 따라 그의 차간에 가서 밤을 같이 지내게 되었다. 사씨는 영국유학생으로 예수교 신자이오 연태(중국 옌타이)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우국의 思가 심절하다.




  교전단체 같은 匪徒


  외교단은 직접교섭을 주장


  형편이 동무○○같아서 서로 서러운 사정을 말하며 한국의 장래 중국의 현황 내지 동양평화 세계문제까지를 담론하였다. 12시가 넘은 후에 비로소 각각 취침하였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보니 가는비가 부슬부슬 온다. 8시쯤 되어 조식을 필하고 다시 포웰씨를 방문하여 비도의 새로 제출한 조건을 물은즉 대답하기를 지난 17, 18일 양일에 당지 중흥공사 내에서 관비가 담판을 개시하였다가 조건의 불합으로 파열된 이래로 비도의 외인 대우는 매우 악화되었으며 관군도자로 방포시위함으로 외국인 ○, ○, ○ 이현신상들이 다시 무슨 불측의 화가 생길까 두려워하여나서 쌍방의 양해를 구한 결과 금번에 비측이 다시 신조건으로 교섭케 되었다.


  一, 각지에 피수된 비도를 해방하고 포독산을 포위한 관군을 제남까지 철퇴할 事


  二, 현재의 비도로 兩個族團을 편성할 事


  三, 6개월분 군봉을 일시금으로 선출할 事


  四, 부근 6현의 지방을 割하여 새로 편성하는 군대의 주둔지로 정할 事


  등이다. 그러나 다소 양보할 기색이 보인다 한다. 영사단의 내용을 들으면 혹은 ○토를 주장하고 혹은 초무를 주장하는데 영국과 이태리에서는 절대로 초무(불러서 달램)를 주장함으로 금번 교섭에는 외국인이 간섭을 하여서라도 결코 결렬되지 아니하리라 한다. 정부에서는 초무할 생각이 조금도 없지마는 울며겨자먹기로 외국인의 간섭이 들어오기만 하면 비도의 요구에 복종 아니할수 없겠다. 외교단은 북경정부를 신임치않고 비당과 직접 교섭하리라 성언한다. 이리하여 비당은 엄연히 일교전단체같이 되었다.




  중국정부의 무력


  통분한 사이비 애국자


  외국인에게 코를 꿰어서 끄는대로 끌리는 중국정부의 꼴은 참 한심하다. 아니 통분하다. 그중에도 정부를 대표하였다는 외교부 교통부 ○군부원들의 호상충돌은 더욱히 가증하다. 외국인이 피로되였으니 事가 외교에 관한 것이라 하여 외교부원이 독당하려하고 사고가 교통관내에서 발생된 것이니 교통부에서 처리하여야 可하다 하고 또 독군부원들은 매국 외교관○금교통원들은 다 물러가거라 우리 애국군인이 토비를 섬멸하겠다 한다. 어찌보면 위국하는 성의로 각자 효충하려 하는것 같으나 기실은 이것을 기회로 하여 무슨 전매특허와 같이 승관○패를 도모하려는 야비한 행동으로 나온 것이다. 참 기가 막힌다. 이 현상에 접한 후에 나도 얼마쯤 감정이 변하려 한다. 지리상 역사상 또 일전의 이해상 여러가지 심절한 관계를 가지고 또 처지와 형세가 상동한 우리로야 사랑하기를 심히 하기때문에 동정을 더할지언정 타의야 조금도 있을수없다. 그러나 침략으로 목적을 삼는 호시탐탐하는 포독산의 비도와 그 수단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심리로는 일층 더 음독한 피강대국 소위 문명하였다는 자들이 시호시호를 부르면서 막 덤빌 것이 의외의 일이 아니다. 임성사건이 발생되던 그 열차에 일본인 승객이 하나도 없었고 또 비도의 휴대한 총이 일본제의 三八식이라 하여 직접간접으로 일본인이 관계가 있지 아니한가 하고 일시는 의논이 자못 낭자하더니 중국에 대한 감정이 너무 악화됨에 따라서 다른 생각은 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음험한 英人의 黑手


  일본은 一杯羹에 만족할가


  그래도 영국인은 무슨 증거를 얻지못하여 열중한다. 일영동맹이 끝난 후로 양국의 감정과 이권충돌이 날로 심해지며 더욱이 중국에 있어서 그러하다. 미국인은 항상 떠들 따름이오 실속은 적다. 그래서 종래 외교무대상에서 실패만 계속하였고 영국인은 이에 반하여 암암리에서 남을 잘골린다. 불원의 장래에 동양에 있어서 일영의 충돌은 면치못할 사실이며 또 정치상 상업상 일본이 지리를 득하였지만 필경 영국에게 견패할 것도 명백한 일이다. 금번 임성사건으로 인하여 표현된 것만 보아도 일영의 감정이 악화됨은 현저하다. 이 사건이 일본과 직접의 교섭은 없으나 만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외국인이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게 되는 경우에는 일본을 제외치 못하리라. 이때에 일본은 一杯羹의 분○에 만족할는지 또 기타의 주장을 제출할는지 나는 주목하고 있다. 아! 중국의 전도에는 흑암뿐이다. 大厦가 장붕하는데 부광하려는 자도 뵈이지않고 모두 연목(서까래) 한개라도 뜯어가려는 자 뿐이다. 양개초군은 조선망국사를 지어 4천년 古國이 합연히(갑자기) 장○함을 吊하였다. 그 벽두에 章○柳章○柳하여 昔日依依 今安在오 從使長條似舊時라도 也應○折他人手라는 고어를 인용하였다. 금일 중국의 현상은 꼭 장○유이다. 꺾을 자가 너무 많아서 못꺾더니 이제는 한가지씩이라도 다 꺾어버리고 말려한다. 어쨌던지 버들은 결단났다.




  토비의 장문선언은


  관리의 죄악을 歷數


  나는 이 기록을 마치려할 즈음에 비당의 세력포치에 대하여 조금더 말하려 한다. 중국의 토비는 수천년 역사를 가진 저 영국의 ‘나잇’당 비슷한 세계의 일특색이다. 자고로 영웅호한이 시기를 만나지못하면 매양 강호에 유락하여 법외에 도○하나니 저 양산백의 諸養士가 다 그들이라. 금번 산동의 토비도 역시 단순한 打家劫舍하는 강인 뿐이 아니오 정치적 의미가 자못 농후한 일종 중국의 현상이다. 그들은 건국자치군이라고 자칭하고 제일로 총사령 손미요의 명의로 양차의 선언서를 발포하였는데 모두 관리의 실정과 인민의 참상을 통론하여 엄연히 봉천승운황제가 替天行○하는 조서와 같다. 내눈에 띄이기는 出示安民이라 제목한 일문으로 정부의 죄상을 역수하고 자기의 자기의 주장을 포명한 것인데 전문이 심장하여 일시에 ○초하지 못하고 다만 그 요점을 적기하였다. 탐관오리가 표리위간하여 가세, ○연, 공채, 인지 등의 ○정으로써 방○, 병상, 해국, 차민 등의 악행을 감히 함으로 우리가 분무가설에 ○○녹림하여 평민으로 주의삼고 균산으로 목적하여 민적을 제거하고 정치를 쇄신한다 운운이라.


  그 내용이 참으로 이러한지 모르겠으나 외면만으로는 매우 堂皇하다. 20일 하오에 다시 율표선으로 남하하여 서주에서 낙양으로 향하는 도차에 잡기하는 것이다.






  여운형은 동아일보와 함께 러시아 타스통신의 통신원으로도 근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선 기자로 활동하거나 논설을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조선중앙일보’의 경영을 맡아 사장을 역임하는 등 일제하 언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여운형은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5월 상해의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1932년 7월 만 3년 만에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했습니다.  그 전말은 동아일보 지면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5월 7일자 2면




  呂運亨씨는 도망


  崔火雲씨는 피착


  蔣介石의 좌파 斷壓의 여파


  한인청년회의 간부를 체포해달라고


  일본형사가 불란서 영사에게 요구중




  상해방면을 손에 넣은 장개석이 右傾하여 공산당을 압박하기 시작한 뒤로 상해로서 온 통신에 의하면 상해재류동포는 대부분 무사하나 조선공산당 수령인 여운형은 신변이 위험하므로 한구방면으로 피신하였으며 한인청년회의 집행위원 최화운은 불란서 조계에서 잡혀 일본영사관으로 넘어갔는데 그 몸에서 露國으로 가는 보고서가 발견된바 그 중에는 한인청년회를 공산당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보고한 문구가 있다더라.







동아일보 1927년 7월 15일자 2면






  上海의 반동정치 횡액당하는 재주 동포


  이사온지 2, 3일 청년 4명의 횡액


  6월 27일 중국 상해에 있는 한 집을 중국순경과 법조계공부국 순경 다수가 포위하고 조선청년 김도현 오기성 이현상 김용석을 체포하고 다수 공산서적과 모종의 중대서류등을 압수하여 일본영사관에 인도하였다. 본래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살던 자를 잡으려던 것인데 주인은 이미 떠나고 조선청년들이 2,3일 전에 들어온 것을 모르고 덮쳤는데 공산서적 등 중요문서들이 나오자 중대시하고 불란서 중국 일본순경 10여명이 연이어 여운형 김종상 김보연 현정건 최석순 한진교 김렬 염온동 안락생씨등의 집도 포위하고 종일토록 수색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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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9년 7월 13일자 2면




  피체된 呂運亨씨


  조선이송설 유력


  상해서 야구 구경하다 검거되어


  관할은 장기재판소


  상해 ○○정무의 중요인물로 ○○운동에 진력하고 최근에는 공산운동에도 관계를 한 여운형씨는 10일 상해 대마로경마장에서 주최된 제국대학대 상해구락부 야구시합을 구경하다가 일본영사관 경찰의 손에 검거되었다.







동아일보 1929년 7월 19일자 2면




  海外風霜 十五년만에


  自由일흔 身上으로 故土에


  家族과 親知에 默然한 目禮交換


  부산상륙하자 일직선으로 경성에


  呂運亨 再昨夜入京


  지난 10일 상해에서 야구구경을 하다 체포된 여운형은 5일간 취조를 마치고 16일 일본 장기를 거쳐 17일 부산에 도착, 15년만에 몽매에 그리던 조선땅을 밟았으나 남에게 잡힌 자유잃은 몸이 되어 경성으로 끌려와 경찰 유치장에 수용되었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15일자 2면




  여운형 체포 인도는


  英관헌의 불법행위


  반제국연맹이 각지부에 發檄


  지난 5월하순 상해 공동조계에서 영국관헌에게 검거돼 즉시 일본관헌에게 인도돼 현재 경성지밪법원에 치안유지법위법 및 제령위반등의 죄명으로 취조를 받는 여운형사건에 대해 독일 백림에 본부를 둔 반제국주의연맹에서는 영국관헌이 여운형과 같은 정치범을 체포인도한 것은 국제법상으로 보아 위법이라하여 세계각국에 산재한 동연맹지부에 격문을 발하고 일대 반항적 시위운동을 단행하리라더라.






 
동아일보 1930년 3월 12일자 2면






  呂運亨豫審決定


  制令違反으로 공판에


  海外活動前後 十六個星霜


  예심에 걸린지 일곱달만에 겨우 종결


  조선의 ○○을 위하여 해외 풍상 15, 6년동안 불철주야로 혁명의 도시 상해에서 조선민족운동에 일관한 운동을 하다가 작년 7월 11일 야구장에서 검거돼 조선으로 이송된 여운형이 11일 예심에 회부된지 7개월만에 예심종결됐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28일자 2면




  철창 3년만에 여운형 출옥


  만기 4개월 두고 가출옥


  작일 대전 감옥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으로 3년징역에 처형돼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여운형은 26일 가출옥되어 동일 특급으로 경성에 올라와서 가회동 73번지 자택으로 들어갔다.






  아래의 ‘옥중기’는 그가 출옥하던 1932년 ‘신동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여운형! 그의 이름은 조선인의 귀에 언제나 쟁쟁히 남아있을 것이다. 때는 1919년 여운형은 당시 상해에 나가서 ××운동에 종사하다가 ××운동자를 대표하여 일본 정부와 ○접××와 의견교환을 하기 위하여 동경까지 건너갔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때 조선인으로는 누구나 여운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 결렬되자 그는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이래 10년을 하루같이 ××운동에 종사하였다.


  여운형은 1929년 7월 8일 상해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동 17일 조선으로 이송되어와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징역의 형을 받고 이래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이다가 지난 7월 26일 가출옥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형무소에서는 집필의 권리가 거부되어 있음으로 옥중기를 쓸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옥중기는 그가 출옥한 후 이야기 한것을 기자가 다시 옮겨써놓은 것이다. 


  감옥에 처음 들어갈때 얼떨떨하였다. 경찰서나 형무소에 관해서는 고생하고 나온 동지들로부터서 그 생활이 얼마나 괴롭더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으나 그안 생활절차와 풍속이 어떻다는 것은 전연 물어 알아두지 않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퍽 서툴러서 곤란하였다. 그런 것도 미리 좀 알아두었더라면 퍽 요긴히 쓰였으리라고 자탄하였다.


  영어의 몸이 된다는 것은 나(여운형)같이 성미 급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첫 한주일 동안은 밥한술 떠넣을 수가 없었다. 기가 막히고 안타까워서 심화만 나서 혼났다.


  조선으로 이송되어오자 날까지 몹시 뜨거워서 냉수만 자꾸 들이켰더니 그만 소화불량이 되었다. 그때 얻은 소화불량병을 이때까지 고치지못하고 계속하여 앓았다. 맨처음 상해서 잡힐 적에 운동장에서 경관과 격투하다가 귀를 몹시 얻어맞았는데 그때 고막이 상하여 한쪽 귀는 아주 병신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서 이 한개가 고만 부스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잇몸 전체가 상하고 염증을 일으키어 퍽 괴로웠다. 출옥한 후에 첫날 한 20분을 계속하여 말을 했더니 턱이 아파서 혼이 났다. 차차 나아가기는 한다.


  우에도 말했거니와 소화불량은 대단하다. 얼굴이 이처럼 수척해지고 늙어졌으며 나왔던 배가 쏙 기어들어간 것이 모두 그때문이 아닌가 한다. 체중도 잡히기 전날까지 175파운드 이던 것이 지금에는 135파운드 밖에 아니된다. 그러니 40파운드를 잃어버린 셈이다.


  옥에 갇힌지 며칠 못가서 신경증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통에 머리와 수염이 이렇게 하얗게 쉬어버렸다. 들어간지 6개월 이내에 이처럼 쉬여버린 것이다. 코아랫수염은 흰털이 많기는 많지만은 이전 모양으로 다시 길러 버칠려고 생각한다. 신경관계인지 불면증도 대단하였다.


  하루 3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이 퍽으나 애를 썼다. 출옥 이후에도 별로 차도가 있는 것 같지않다. 여전히 잠을 이루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안에서는 누구나 다 앓게되는 치질에 걸리어 퍽 고생하였다. 네번이나 수술을 했는데 그것은 완치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옥살이 3년에 나는 병쟁이가 되여버린 셈이다. 청년은 몰라도 성장기를 지난 中老급 사람은 옥에 갇히면 참으로 속히 늙어버리는 모양이다. 


  독방! 그것이야말로 獄속의 獄이다.


  독방이 사람을 늙히는 곳이다. 독방생활 1천95일! 우스운 일이 있었다. 한번은 교회사가 불러다놓고 훈계를 하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학식 많고 하니까 앞으로는 ‘타카이토쿠호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였다. 일본어 지식이 얕은 나는 그 말을 듣고 ‘높은 독방’이란 줄로만 알고 학식이 많은 사람은 어째서 높은 독방으로 가야하느냐고 항의를 하였었다. 사실인즉 ‘高ィ德望’이란 말이었던 것이다.


  교회사말이 났으니 말이지 형무소안에서 가장 불유쾌한 감을 주는 사람이 이 교회사이다. 더욱이 한달에 한번씩 하는 그 훈계는 딱 질색이다.


  더욱이 囚人이 요구하는 서적의 차입허가권이 이 교회사에게 있는데 너무도 몰상식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내가 들여다본 영문서적으로 보더라도 란싱이가 쓴 ‘和平會議’에 취, 지, 웰스의 역사서 같은 것은 차입을 허가하면서 셰익스피어 전집은 도리어 불허가한다. 심하여는 구운몽이란 소설이 영역본을 불허가하는데는 기가 막혔다. 형무소에서 주는 책은 그 대부분이 불교서적이었고 기독교서로는 예수재강림에 관한 책이 두어권 있었다. 읽고싶은 책을 마음대로 못읽는것도 안타깝지마는 읽기싫은 책을 억지로 읽는 것처럼 기가 막히는 일은 또 없다. 


  감옥안에서는 간수가 왕이다. 典獄이니 간수장이니 하는 사람들은 수인들에게는 별무관계이다. 수인생활의 편불편은 전수히 담당간수와 간수부장의 손에 달렸다. 좋은 간수를 만나면 생활이 좀 낫고 몹쓸 간수를 만나면 그야말로 지옥이다.


  대전형무소는 서대문형무소에 비하여 훨씬 상등이었다. 설비도 훨씬 잘되었고 간수도 비교적 유상식자이어서 좀 나았다.


  운동도 하루 40분 가량 허락되는데 마음씨 좋은 간수를 만나면 1시간여씩 허락되는 때도 종종 있었다. 특히 사상범 감방에는 간수도 좀더 교양이 있는 이로만 임명한 모양인데 조선인 간수는 1인도 없고 전부 일본인 뿐이었다. 


   일은 그물 뜨는 일과 조희(종이) 꼬아서 치중 만드는 일 두가지를 배웠다. 그물도 남에게 빠지지않게 잘떴거니와 조희 꼬기에는 대전형무소중 가장 잘하는 3인중 1인에 끼일만치 빨리 만들고 곱게 만들었다. 조희를 꼬아가지고는 그것으로 활촉을 담아두는 광주리며 아이들 책꾸럭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일을 잘한다고 그 상으로 목욕도 남보다 좀 자주 얻어할 수 있게 되었었다. 


  저술을 해볼 생각이 나서 붓과 조희를 두어번 요구해 보았으나 거절되어서 여의치 못하였다. 하도 심심할때에는 한시도 몇 수 지어보았으나 어데 써둘데는 없고 그냥 기억해두고 몇번씩 읊어보았다.


  가을 바람은 소슬하고


  구슬픈 비는 주룩 주룩 뿌린다.


  그 비를 감옥 마당에 흘러가고


  그 비소리 이내 가슴에 숨여를드네


  대강 이 비슷한 시를 생각해놓고 조희가 없으면 석판이라도 한번 옮겨써보고 싶어서 교회사에게 석판이라도 하나 차입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것 역시 거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무엇 생각한 것은 퍽 많았으나 하나도 글로 옮겨 놓지를 못했고 서적도 순전히 차입허가되는 것만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고로 역사서류만 많이 읽었다. 철학사 문학사 따위! 경제와 정치에 관한 서류는 절대금물인 고로 청하기는 많이 하고 전부 ○각되어버렸다.






  여운형 선생은 동아일보 상해통신원도 지냈지만 인촌 김성수 선생과 인간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여운형은 인촌을 만나기 위해 해동(海東)농장을 찾았다.…(중략)… 인촌은 해동농장을 찾은 여운형을 반갑게 맞았는데, 여운형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자네를 보러 온 것이 아니고 상만을 보기 위함일세.’


  ‘내 친구가 온 게 아니라 내 아들 친구가 왔군.’ 


  인촌 역시 빙그레 웃으며 진객의 손을 잡았다. 


  송진우가 일민(김상만)을 친아들처럼 대했다면 여운형은 친구처럼 대했다. 여운형 특유의 호방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일민은 여운형에게 송진우와는 다른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일민 역시 송진우와는 다른 존경과 애정을 여운형에게 품고 있었다. 아버지뻘 되는 여운형과 함께 농장 부근 냇가에서 즐겁게 천렵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정치신념의 차이로 여운형이 인촌과 멀어지자 일민은 가슴을 태웠다. 아버지와 멀어진다는 것은 곧 자신과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촌과 송진우의 정치신념이 확고했듯이 여운형의 정치신념도 확고했다.” (‘일민 김상만 전기’, 동아일보사, 2003, 104~105쪽)


 


  그러나 이 같은 민족지도자들 간의 정치적 신념의 차이가 민족지도자, 나아가 민족의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나만이 아는 비밀’ –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과 해방 정계 – (김준연, ‘독립노선’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257~272쪽)  



 


  (전략)…송진우(宋鎭禹) 씨는 나를 만나면 항상 대담하게 얘기 하였었다. 동아일보를 경영하던 우리는 그것이 폐쇄당한 후부터는 입장이 더욱 불리하였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태도를 강경하게 하였고 송진우 씨는 일본과의 일체의 타협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필망(必亡)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감정이고 그의 신념이었다. 그의 태도가 이러 하였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에게도 그 선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권하였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켜서 진주만을 기습하고 영국 동양함대를 전멸시켰을 때 우리 조선 사람들은 낙심천만(落心千萬)하여 일본제국의 팔광일우의 대 이상이 실현되어서 아시아 전부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고 한국은 영원한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까지 생각하는 자가 많았었다. 소위 명사 지사 급에 속하는 이들도 대개 이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그래서 소위 명사라고 하던 이들이 보기 싫게도 그들의 태도를 굽혀서 뜻있는 사람의 울분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시종일관하여 친구들에게 권하였다. 그때 일본은 모든 방법으로 송진우 씨를 순회강연 학병 권유에 이용하려 하였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엔 송진우 씨는 거절하다 못해서 한번 라디오로 방송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전곡(全谷)에서 들었다. 그이는 말하기를 “우리 동포들이 다 부지런히 일해서 저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송진우 씨와 그 동지들에게 대해서 박해를 가하려고 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피신할 것을 결심했고 촌에 있으면 도리어 들어나기가 쉬운 때문에 서울로 오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송진우 · 안재홍 논쟁


  전례대로 하면은 청량리 정거장에 내려 바로 원동(苑洞)에 있는 송진우 씨 댁으로 향했을 것이지만 나는 특별히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곳에 가지 아니하고 돈암동에 있던 서상국(徐相國) 군의 집으로 갔었다. 그 이튿날은 서 군과 함께 북한산 밑에 있는 별장이라 할까 농막에 가서 하루 종일 유쾌하게 놀고 다음날은 동대문 밖 제기동 박석윤 군을 찾아갔다. 그리고 13일 밤에야 송진우 씨를 찾았었다. 그랬더니 송진우 씨는 말하기를 자기는 총독부측으로부터 네 번이나 교섭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 교섭은 무엇인고 하니 총독부 측에서는 자기들이 가졌던 권력의 대부분을 넘겨줄 터이니 총독부에 대신해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일본인의 생명을 보호하며 그들의 거주권을 인증해 달라는 것이었다. 송진우 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불리하게 되면 우리에게 자치를 준다할 것이요 더 불리하면 우리에게 독립을 준다고 하여서 우리를 꾀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우리가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불란서 페탕 정권, 중국의 왕조명 정권, 비율빈의 라우웰 정권 등이 결국 적국의 괴뢰정권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일본의 권유에 따라 나서다가는 결국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연합군의 손에서 우리 정권을 받아야지 일본인의 손에서 받아서는 안 될테니 결코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송진우 씨의 생각을 증명하는 한 가지 좋은 재료가 있다. 그전 해 가을에 안재홍 씨가 송진우 씨를 찾아와서 민족유신회(民族惟新會)라는 것을 만들자고 하였을 때에 송진우 씨는 그에 응하지 않고 도리어 안재홍 씨를 친구로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나서지 말라고 만류를 하였다. 그랬더니 안재홍 씨는 말하기를 “우리 학병들이 피를 흘렸으니 우리가 그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때 송진우 씨는 분개해서 “피는 다른 사람이 흘리고 값을 네가 받겠느냐?”하고 힐책하였다. 그러자 안재홍 씨는 “고하(古下)는 참 로맨틱하오. 이승만 박사가 미국군함이나 타고 인천항에다 들어올 줄 아오?” 라고 송진우 씨의 완강한 태도를 조소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일본이 꼭 망하고 조선이 꼭 독립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체의 타협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정권이양 교섭  


  그래서 안재홍 씨와의 사이에 논쟁이 있은 후에는 더욱 몸을 조심하는 의미로 이불을 펴고 1년 동안이나 칭병을 하고 들어 누워 있었다. 그랬었는데 13일 밤 그는 나를 만나서 총독부와의 4차에 걸친 교섭에 있어서 그전에 나에게 말한 대로 일본과의 타협을 일체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나에게 말하기를 “경기도 생전(生田)지사와 오까 경찰부장을 만나서 강경히 거절하였더니 오까 경찰부장은 그러면 김준연 군을 만나게 해줄 수 없겠소? 김 군이 청년 간에 신망이 있다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여보게 하겠소!”라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송진우 씨는 “낭산(朗山)이 여기 와있는 것을 경찰이 정보망을 통하여 다 알고 있으니 안 만나면 도리어 좋지 않을 것이니 한번 가보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그러면 만나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송진우 씨는 전화로 바로 연락하기를 “김 군이 여기와 있는데 내일 오전 중에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하자 저편에서도 내일 오전 9시경에 경기도청으로 와달라는 대답을 하여왔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경기도청으로 찾아가서 지사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오까 경찰부장은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나와 생전(生田)지사의 이야기는 5,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서울 상공에 미국 B29폭격기가 날아왔었다. 한번 오고 또 오고 두 번이나 왔었다. 그래서 나는 생전(生田)지사와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두 번이나 경기도청 길 건너편에 있던 체신부 방공호에 지사와 함께 피난하였었다. 나와 생전(生田)지사는 점심도 같이 하였다. 점심은 빵 두개와 물 뿐이었다. 이래서 5, 6․시간 이야기하는 도중 그의 근심하는 바는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일인의 생명을 위협하지나 아니할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 학생들은 결코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장담하였다. 그리고 흔연스럽게 대하였었다. 물론 생전(生田)지사도 일본이 항복 한다는 말은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의사는 표시할 수 없었고 전쟁이 계속된다는 전제하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으로 5, 6시간이나 이야기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점심을 같이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지사와 작별을 고하였다.  



  작별시 지사는 내게 묻기를 ‘당신이 송진우 씨를 만났습니까?’ 라고 하기에 나는 ‘만났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러면 당신도 송진우 씨와 같은 의견이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때 정백(鄭栢)이라고 하는 나의 ML당 옛 동지가 나를 찾아와서 “일본이 곧 손을 드니 우리가 뒷일을 담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국내서는 여운형 씨와 송진우 씨가 악수를 하면 그에 대항할 세력이 없을 것이니 그대가 송진우 씨와 김성수 씨에게 말해서 연락을 취해 달라.”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송진우 씨는 “총독 측에서 네 번이나 교섭하여 왔는데도 거절하였는데 지금 여운형 씨가 말한다고 해서 되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 길로 나는 김성수 씨를 만났는데 그이는 막 연천(漣川)으로 떠나려고 옷을 갖추어 입고 마당에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갖지 못하고 경기도지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만 하였다. 그리고 밤에 돌아가 송진우 씨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자니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내일 정오에 일본천황의 중대방송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공산혁명을 말하던 여운형  


  우리는 그것이 일본의 항복 선언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와 송진우 씨는 일본 세력이 물러가고 조선이 독립되는 것을 생각할 때 기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하였다. 그랬더니 이튿날 아침 어떤 친구가 ‘오늘 아침 7시 반에 여운형 씨가 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이 앞서 총독부에서 송진우 씨와 나에게 하였던 교섭을 여운형 씨와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침을 먹고 10시쯤 돼서 전일 정 군이 나에게 송진우 씨와 김성수 씨에게 교섭해달라고 하던 사건에 대해서 회담하기 위하여 창덕궁 경찰서 쪽으로 내려왔다. 그때 계동 초입 우측에 장일환 군이 살고 있었는데 정군 이 거기 머무러고 있는 고로 거기에 가서 소식을 전하려 하였던 것이다. 원동 송진우 씨 댁을 출발해서 창덕궁 담을 지나 창덕궁경찰서 앞에 다달았다. 그때 저 남쪽으로부터 활발히 걸어오는 여운형 씨를 발견했다. 서로 만나니 여운형 씨는 평소의 그 활발한 태도로 악수를 청한 후 나에게


   “고하는 어떻게 하오?” 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여



   “고하는 나오지 않고 김성수 씨는 어제 오후 연천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야기할 틈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여운형 씨는



   “동무는 어떻게 하겠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여운형 씨는 나를 만나면 동무라 불렀다. 그것은 내가 ML당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그이도 또한 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나도 나서지 않겠소.” 라고 분명히 대답했다.




   그랬더니 여운형 씨는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좋소. 나 혼자 나서겠소.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소.” 라고 결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여운형 씨의 이 한마디 – ‘공산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소’-는 해방 직후 우리 정국을 재는데 극히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나의 ML당 시대


  물론 나는 동경제국대학에 다닐 때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였고 독일 유학 시에도 칼 맑스, 엥겔스의 모국인 고로 공산주의 문헌이 풍부하였던지라 나는 독어로 공산당선언이며 공산문헌 등을 공부할 기회를 가졌었다. 귀국 후 1925년 2월 8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향리 영암에 가서 부모처자를 잠시 상봉한 후에는 바로 소련을 시찰하게 되었었다. 1925년 1월에 독일 영국을 거쳐 일본 신호(神戶)항에 도착하였을 때는 백관수 씨가 마중을 나와서 그분들이 경영하던 조선일보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는 또한 일본정계 사정을 알 필요가 있어 1개월 동안 체류한 후 2월 8일 서울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전에 일본은 소련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조약에 서명하였고 조선일보사에서도 ‘혁명의 나라’ ‘컴컴한 나라’ ‘흰곰이 사는 나라’인 러시아를 시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작정하게 되였던 것이다. 나는 모스크바특파원이 되는 것을 즉각 승낙하고 여행권을 총독부에서 얻어 가지고 행리를 수습하여 2월 28일경 서울을 떠났던 것이다. 4월초에 러시아로 가서 5월 20일경 모스크바를 떠나 6월 초에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에다 러시아 시찰기를 약 50회에 긍하여 연재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조선 제3차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는 ML당이 결성되고 나는 그 책임비서(당수 격)로 있었는데 2년 후인 28년 2월에 검거되어 6년 징역을 살고 34년 7월에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당시 조선공산당의 최고책임자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세력이 물러가고 우리 동포끼리 국가를 경영할 것을 생각하니 나는 송진우 씨와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영미의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것이 조선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송진우 씨는 여기에 대하여 확고부동한 태도를 가졌었다. 그렇기 때문에 송진우 씨는 총독부측의 4차에 걸친 정권 담당 교섭을 거절하지 않았던가?







  모스크바 특파원 추상록


  반면에 여운형 씨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하였다. 조선의 장래를 이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맡겨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여운형 씨와의 악수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여운형 씨가 나에게 ‘공산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소’ 라고 말한 것은 그 본체를 여실히 폭로하였던 것이다. 해방 전의 우리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싫어하지 않고 자기들은 감옥에 가기 싫어 투신은 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투신하거나 혹은 죽고 혹은 감옥에 가는 것을 칭찬 존경했다. 그것은 우리 조선 사람 생각이 공산주의도 역시 조선을 일본의 손아귀로부터 독립시키자는 운동의 일종으로 보았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그와 같이 생각했었다. 어려서 부모 슬하에 자라 별 부자유스러움을 느끼지 않았고 한문을 많이 공부하여 지식을 얻었으며 학교를 순수대로 다닌 나에게는 조선을 독립시켜 크게 활동을 해보겠다는 욕망이 앞섰고 무산주의를 연구하고 러시아를 소개하고 그것에 접근하게된 것은 그 당시 세계정세로 보아서 영미는 일본과 친선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안전제일주의를 택하고 있는 대신 오로지 소련만이 철저하게 일본을 견제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세력을 전복하기 위해서는 쏘聯과 제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한 된 후 독립을 획득하고서도 쏘聯과 제휴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나는 1925년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소련에 가서 공산혁명후의 소련 실정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 7년 동안이나 공부하였고 독일에서도 4년이나 공부했을 뿐더러 다시 영국을 거쳐 인도 홍콩 등지를 구경하였었기 때문에 나의 눈에 비친 소련의 생활 정도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혁명 후의 소련─그 국민생활은 참으로 궁핍하여 그에게서 무슨 흠모할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하였으나 이것은 장래의 대 발전을 위한 파괴이며 진통이라고 보고 또 일본의 제국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대소 친목을 유지해야겠다는 선의 해석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시찰한 결과는 판이 하였다.







  내가 본 소비에트 대회


  나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대회 광경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때 의장은 칼리닌이었다. 나는 그 대회의 광경을 보니 러시아 말을 이해 못하여 잘 알지 못하나 의장 칼리닌이 말만 하면 ‘허로쇼’ (옳소)가 있을 뿐이었고 모든 사건이 ‘옳소!’ 로 진행되고 그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서 자유를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 하였었다. 당자의 자유의사가 얼마나 중요한 가는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증명될 수 있다. 내가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있을 때는 월급 백 원을 받았는데 그제야 처자를 데리고 와서 동대문 밖 제기동에 집을 구하였다. 나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교동보통학교 6학년에 다니게 되는 아들에게 책상하나를 사주었었다. 나는 사무실용 흑갈색 책상을 사주었는데 아들은 그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던지 직접 나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저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왜 이런 책상을 사주었어?” 하고 불평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투옥된 후 1932년에 그 아이는 경기중학 5학년을 다니다가 그만 19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었다. 그런 후에 나는 그 죽은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유의 귀중성을 느끼는 것이다. 어린 아이일지라도 당자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외부로부터 강제로 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불평을 초래한 것이 아니던가?







  여운형과 결별


  그러므로 나는 한때 조선 공산당 책임자였지만 송진우 씨와 의견을 같이하였고 그래서 여운형 씨를 만나 이런 말을 듣고도 나는 그길로 張씨 집에 가서 정백(鄭栢) 군을 만나 ‘송진우 씨는 거절했고 김성수 씨는 총총히 연천으로 떠나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고 말했고 ‘나도 그러지 못 하겠다’ 는 것을 여운형 씨에게 말 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나는 송진우 씨 댁으로 돌아가 정오에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방송을 듣게 되었다.





  <자 일은 이제부터로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오후 2시경 정백 군은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말하기를





  “여운형 씨를 만났더니 송진우 씨가 확실히 거절하였다니 송진우 씨의 의견은 다시 물을 것 없고 동무만은 꼭 같이 일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하겠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못 하겠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다시 다져서 말하기를 ‘그러면 동무가 후회하지 않겠소’ 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이 때 분연히 ‘후회하지 않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었다.





  그 후 여운형 씨는 안재홍씨와 연락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6일에는 박헌영과 함께 경기여고 강당에서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다 송진우 씨는 이를 일소에 부치고 9월 7일 동아일보 강당에서 국민대회준비회의 결성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결당 준비 중에 있던 한민당에서는 9월 8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통격하였었다. 9월 16일 드디어 한민당이 결성되고 국민대회 위원장인 송진우 씨는 한민당 수석총무 자리도 겸하게 되었었다. 나는 국민대회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송진우 씨를 도왔었다. 10월 16일에는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생각하면 안재홍씨는 1년 전 송진우 씨를 조소해서 “고하는 로맨틱하오.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항에나 들어올 줄로 아오?” 라고 말하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그 후 1년이 지나지 못해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 군함 아닌 미국 군용비행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으니 그들 두 사람의 식견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292년 7월호, ‘眞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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