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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주역으로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 · 1892~1920)과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 1894~1947) 형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장덕준은 ‘민족지’ 창간을 적극 추진, 참여했고 장덕수는 신문 사상 길이 남을 동아일보의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들 형제는, 그러나 어두웠던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제물이 됐습니다.


 


  형 덕준은 만주 일대의 조선족 학살 현장을 취재 갔다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해(1920년 11월)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됐으며 동생 장덕수는 해방 후 혼돈의 와중에서 빚어진 정치적 암살의 세 번째 희생자가 됐습니다(1947년 12월). 막내 장덕진(張德震 · 1898년생)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다 중국인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1924년 8월).




  이들 형제는 황해도 재령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장덕준은 재령학교 2학년 때 1학년을 가르치기도 했답니다. 그는 중학교 강의록과 일본 와세다대학 강의록으로 밤을 낮 삼아 공부해 평양일일신문(平壤日日新聞)의 기자가 됐습니다. 평양일일신문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어 신문으로 그 신문의 조선문판 부록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조선인 기독회관 부간사로 있다가 결핵으로 요양하고 있던 중 3·1운동을 맞았습니다. 이후 조선인 신문 발간 계획이 알려지자 ‘민족지’ 창간에 뜻을 두고 적극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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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6월경에 장덕준 씨는 나에게 신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계획을 이야기해서 나에게 하기휴가 중에 귀선(歸鮮)하여 주선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하등의 수확을 거두지 못하고 그 해 가을에 동경으로 돌아갔었는데… (중략) … 익년 하기방학시 경성에 와서 장씨를 만났는데 ‘대중계몽상 신문이 학교보단 더 긴급하다는 것을 역설해서 김성수 씨의 전문학교 설립 계획을 일단 중지케 하고 동아일보의 발간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김준연의 회고담, 동아일보 1950년 4월 1일자 2면)




  “훈춘에서 일본군이 우리 동포를 대량학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군이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독립군에게 섬멸당한 것에 앙심을 먹고 무차별로 어린아이 할 것 없이 2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그 때 동아일보는 정간 중이라 취재를 하여도 낼 데도 없는 때다. 그러나 덕준 씨는 뛰어가 보겠다고 하였다. 비록 가서 역시 학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동포가 대량 학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보도기관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고 하였다.  그는 필자에게 평소의 지론인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정의를 위하여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이번 길에 자기가 죽고 못 돌아오더라도 자기로서는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창간 기자 유광렬의 회고)




  “그 후 판명된 바에 의하면, 현지에 도착한 장 특파원이 학살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가지고 일본군사령부로 가서 엄중 항의하자 답변에 궁한 일본군 측에서 ‘그러면 공동조사를 하자’고 하여 그 이튿날, 수명의 일본 헌병과 함께 현지답사를 하였다.  그 후 헌병은 돌아왔건만 장 특파원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것은 필시 일본 헌병이 조사를 빙자하여 어디로인가 데리고 가서 학살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그의 나이는 28세, 한창 살 시기였다. 그와 같이 동아일보의 초창기 활약은 참으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김을한, ‘신문야화 ‘, 일조각, 1971년,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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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







  동생 장덕수는 고학으로 와세다대학 정경학과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로 문재(文才)였으며 일본 전국 대학생 웅변대회(1915년)에서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해 1등을 하기도 한 웅변가였습니다.  일본말을 일본 사람보다 잘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12원, 13원 내지 15원짜리 하숙에 있는데. 장덕수는 6원짜리 하숙에서, 그러게 밥을 많이 굶어. 그렇게 고학을 했는디.  그 때 무렵 1반이 많이 나왔어.  이광수가 2반이고, 예과의 1반은 백점이요, 물어볼 것도 없이 장덕수, 이광수가 97점. 그러니까 공부 참 잘했어. 최두선이가 1반, 문과에서, 현상윤이가 1반. 이병도가 또 성적이 좋았어.” <지운 김철수(遲耘 金錣洙)의 구술>




  졸업 후 그는 총독부 관리 등용 제의를 거절하고 상하이(上海)로 가 김규식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1918년)  3·1운동 발발 직전 국내에 들어왔다 체포돼 하의도로 유배됐습니다(1919년 2월, 당시 25세).




  3·1운동 발발 후 일본 각계의 요인들이 민심수습책의 하나로 상하이에 있던 열혈 운동가 여운형(당시 33세)을 도쿄로 초대했습니다.




  “여운형이가 장덕수 통역을 시켜 달라. 그러니 못 헌다고. 장덕수 귀양갔는디. 못 헌다고.  다른 사람 말 잘하는 사람으로. 안 간다. 그러믄 안 간다. 여운형이 꼭 장덕수 통역을. 왜 그런고 하니. 가서 자기가 혹 실수 하는 말을 하더래도, 장덕수가 임시변통이 있어 말을 해 주려니… 장덕수하고 상해서 친했어. 그런 게 그럴 것 아녀? 그런 게 여운형이가 장덕수가 통역을 해주어야 내가 말을 허겠다.”(지운 김철수의 구술)




  여운형의 강변으로 그는 하의도에서 방면돼 그해 12월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여운형-장덕수 합작의 명연설을 합니다.




  이 같은 활약으로 그는 26세에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창간하려는 동아일보의 주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우 덕수 씨가 이지적인데 비하여 형 덕준 씨는 정열적이었다. 감정이 예민하였다.   ‘가명인두상(假明人頭上)에 일봉(一棒)’과  ‘조선부노(朝鮮父老)에게 고하노라’는 글이 유림의 반대를 사서 사장 박영효 씨가 사직하였을 때에 열렸던 사원회의(社員會議)에서 그는 격분하여 상기가 되어 절규하면서 혈담을 토하니 사원들이 그의 신병을 염려하고 힘써 위로하였다.”(창간 기자 유광렬의 회고)




  “설산(장덕수)은 앉으면 허리를 빳빳이 펴지 않고 앞으로 굽히고 머리만을 잔뜩 젖히고 속히 두 손으로 무슨 장난을 하면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도무지 점잔을 뺄 줄을 몰랐다. 어린애 같았다. 꾸밈이 없었다… (중략)… 정직과 무욕(無慾)은 국사(國士)의 근본 자격이요, 우리 중에 많지 못한 덕이다.  그런데 설산은 정직과 무욕에다가 학식과 열성과 웅변까지 구비하였던 인물이어늘 이 사람을 잃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광수의 술회)




   “장덕수 암살사건이 더 이상의 배후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채 종결된 뒤 생전에 장덕수가 예견하고, 대책까지 세웠던 총선을 통해 정부가 수립됩니다… (중략) … 대한민국 건국 후에 정치드라마가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김구의 몰락, 그리고 한민당의 세력 약화로 특징지어진다면 바로 그 기점에 설산 장덕수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미 흘러간 역사에 ‘만일’이라는 가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장덕수가 암살당하지 않고 정치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해방 정국과 건국 전후의 우리 역사가 지금과는 다르게 기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 암살의 희생자들’, 1994년 2월 20일 방송, 해설자 고원정의  마지막 멘트)




   1947년 12월 2일 서울 종로구 제기동 자택에서 설산 장덕수는 송진우(1945년 12월 30일), 여운형(1947년 7월 19일)에 이어 피살됐습니다.




   20여 년 전 32세의 장덕수가 미국 유랑시절, 당시 25세 그 후 ‘철혈 처녀’ 초대 이대 총장이 된 김활란에게 구혼했다 거절당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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