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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창간초기부터 이를 적극 보도하고 1면 사설로 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운동은 3.1 운동직후 일부 인사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전개됐습니다.


  “작년 이때부터 평양 유지가 조선물산장려회의 조직을 제창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모모 인사는 열성으로 찬성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 동아일보 1920년 8월 23일자 4면)




 1920년 8월 23일자 4면




조선물산장려회


평양부 유지 제씨(諸氏)의 발기로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총회를 일간(日間) 개최한다 함은 작보(昨報)에 기게(己揭)하였거니와 기(其) 취지서 급(及) 발기인은 여좌(如左)하더라…(중략)…작년 이때이다. 평양 어떠한 유지사(有志士)로 조선물산장려회의 조직을 제창한 사(事)가 있었는데 그 시(時)에 모모인사는 모두 열성으로 찬성하였다. 그러나 기회가 성취되지 못한 것은 도시 입맛이 쓰고 귓맛이 향그럽지 못하니까 욕설상심각폐진이란 말과 동히 말을 하고저 아니한다. 이제 다시 그 지사의 제창한 장려회를 부흥코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 하였든지 자각하며 자진하여 우와 여한 주의결의는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발기인 씨명…(중략)…김동원…(중략)…김성업…(중략)…오윤선…(중략)…조만식




1921년 6월 2일자 1면 광고




평양부내청년상회 (平壤府內靑年商會)


 모자양말 양(兩)공장 설립이오 조선물산장려(朝鮮物産奬勵)가 본의로다




1922년 1월 4일자 1면




경제적 각성을 촉(促)하노라


 조선민중의 힘을 갱신하여 이상을 달성하는 제일의 방법은 부력(富力)의 증진에 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조선인은 조선인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조선인 상인을 통하여 팔고 조선인이 만든 물품을 사용하며 조선인의 편익을 도모하고 이같이 하여 경제적 자립을 기하되 근면 검소 저축 협동을 하고 경제적 지식을 획득하며 과학적 경영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1922년 3월 17일자 1면




 산업상으로 자립(自立)하라


 하(何)로 이(以)하야 생활을 유지하며 하(何)로 이(以)하야 문화를 발전하리오 이에 경제적각성이 필요하며 산업상 자립이 급박하도다.




1922년 5월 17일자 1면




 산업운동을 제창하노라


 인도의 성웅 간디의 비협동운동(非協同運動)이 산업자치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산업운동의 방안으로 첫째 민족적으로 일치하여 민족적 경제단체를 조직할 것, 둘째 조선인은행을 전부 통합하여 일대 금융기관을 설립할 것, 셋째 토산물품을 소비하여 외국상품으로부터 보호하고 이를 위해 소비조합을 만들 것, 넷째 민족적 경제조사기관을 설립하여 조선의 유리한 공업은 조선인으로 경영하게 할 것, 다섯째 조선인 공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보조 장려책과 관세정책을 촉구할 것 등을 제창한다.


 이 운동을 추진한 단체로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의 조선물산주식회사, 연희전문학생들의 자작회 등이 꼽힙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운이 점차 앙양되자 서울에는 물산장려주식회사, 자작회 등이 나오고 평양에는 조선물산장려회가 조직되었는데 물산장려주식회사란 것은 3.1운동 직후 변호사 최진, 박승빈 씨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것으로서 물산장려를 주창하면서 암암리에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자작회는 1922년에 연희전문학교생 염태진, 박태화 등 50여명의 발기로서 서대문에 점포를 개설하고 순국산품만을 진열하여 애국시민에 싼 값으로 팔았다. 그리고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조선산 ‘깐디’라는 애칭을 듣던 조만식 씨와 그 동지 김동원 등이 중심이 되어…(하략)” (신태악,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신동아 1969년 10월호, 312쪽)


  “기(旣)히 보도한 바와 여(如)히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거(去) 20일 오후 8시반부터 평양 장대현예수교 청년회관내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출석회원이 50여명에 달하였다.” (‘물산장려창립’, 동아일보 1922년 6월 26일자 4면)




1922년 12월 17일자 2면




 자작회 발기-자작자급의 목적


 염태진씨 등 오십여인의 발기로 조선물산을 장려하야 자작자급(自作自給)의 정신을 양하고산업의 진흥을 도아햐 경제적 위기를 구제할 목적으로 자작회를 발기하였는데 기 취지와 방책의 개요는 좌와 여하더라.




1922년 12월 18일자 1면




자작회-경제적 자립의 정신


 오인은 먼저 조선인이 산업의 발달을 인의적 결정적으로 장려하고 도모하기를 주장하며 일본인의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은 일치하여 조선품만 쓰고 수입품은 쓰지 말 것, 조선인의 소용품은 조선인의 손으로 제조하도록 할 것이다. 즉 일본인의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소비에 동맹함으로써 생산의 발달을 기해야 한다. 염태진 씨 외 다수 유지의 발기한 자작회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1922년 12월 1일자 4면 광고




 조선물산장려표어현상모집


 표어의 내용은 ‘조선사람은 조선 것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먹고 입고 쓰고 살자’는 의미로 할 것. 조선청년회연합회 백(白)


  “그때의 물산장려의 표어는 이 회의 발기초에 청년회연합회가 광고 모집한 일이 있었으나 쓸만한 것이 없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던 중 마침 춘원 이광수 씨가 ‘내살림 내것으로’라는 표어를 지어가지고 왔기에 심사위원 전원의 찬동으로 이를 채택하고, 또 누구의 작인가 기억되지 않으나 ‘조선사람 조선 것’이라는 표어도 아울러 채택하였다.” (신태악,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신동아 1969년 10월호, 313쪽)


  신태악의 기억에 오류가 있는데 춘원 이광수는 응모해 ‘조선사람, 조선것’으로 1등 없는 공동 2등을 차지했습니다. 




1922년 12월 25일자 4면 광고




 조선물산장려 표어 현상 당선-조선청년회연합회


 2등 내살림은, 내것으로-김두관

2등 내살림 내것으로-오동원

2등 조선사람, 조선 것-이광수

3등 조선사람, 조선 것으로-서인식

        우리는 우리것으로 살자-권병길

        우리것으로만 살기-배숙경

        불보원물(不寶遠物), 유토물애(惟土物愛)-박기연




1922년 12월 26일자 1면




 내살림은 내것으로


 금번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조선물산장려 표어모집은 예정과 여(如)히 작일(昨日) 본보 지상에 발표한 것은 이미 오인이 참조한 바어니와…(중략)…위기에 처한 우리의 자위책으로는 다시 여러 말할 것 없이 조선사람 조선 것, 우리는 우리것으로 살자는 방책밖에 다시 활로가 없을 것이다…(중략)…연합청년회에서도 이미 표어를 모집 발표함에 지(止)치 말고 실제의 운동에 위루가 없는 창안을 고출하여 일시기를 획(劃)할만한 실제운동의 촉진에 경일층 노력하기를 간망하는 바로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순강단 일행은 거 16일 의성에 도하여 17일 야에 당지 공립보통학교에서 강연회를 개하고 회장 오달세 씨 사회 하에…(중략)…연사 김철수 씨는 경(更)히 조선물산장려의 사(辭)가 유(有)하야 일반 청중으로 하여금 심절한 각성을 촉한 후 동 10시반에 폐회한 바 실로 성황을 정하였으며 연하여 만찬회가 유하였더라.” (‘청년연합경북순강’, 동아일보 1922년 12월 30일자 4면)


  “조선청년연합회 북선순회 강연단 일행이 의주 북하동에서 강연 중 연사가 구인되었다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그 사실을 자세히 보도하면…(중략)…말하는 끝에 경관의 주의를 당하고 우리 조선사람은 조선에서 나는 토산으로 입고 먹고 쓰고 하자는 말끝에 강연중지를 당하고 강연회는 할일 없이 산회하게 되었는데 그 이튿날 아츰에 강연단 일행을 주재소로 오라고 하더니 돌연히 배동수씨와 신태악(辛泰嶽)씨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하엿는대”  (‘토산장려론 중에 돌연히 중지’, 동아일보 1922년 12월 31일자 3면)


  “필자는 바로 그때 청년회연합회의 순회강연단으로 봉천에서 강연하고 돌아오던 길에 의주군 위화도에서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구금되어 있었으므로 그 발기인회에는 참석치 못했으나 당시 청년회연합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연합회 기관지인 ‘아성(我聲)’을 주간하고 있던 관계로 이 물산장려운동에 중요실무를 담당하게 됐었다.” (신태악,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신동아 1969년 10월호, 305쪽)


  1923년 1월 9일 20여개 단체가 전국적 규모의 국산품 애용운동을 벌이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회를 조직하려하자 동아일보는 1923년 1월5일부터 8일까지 연 4일간 조선물산장려에 관한 사설을 게재했습니다.




1923년 1월 5일자 1면




 주부에게 바라노라


 물건을 살 때는 반드시 우리 동포의 것을 사서 쓰도록 권장한다.




1923년 1월 6일자 1면




인도 스와라지 운동의 발전


 인도의 간디가 전개한 국산품 장려운동을 찬양한다.




1923년 1월 7일자 1면




 경제조사기관의 필요


 물산장려를 위한 조사기관의 설치를 주장한다.




1923년 1월 8일자 1면




 철저한 각오와 지구적 실행


 물산장려운동은 우리 생명에 관한 운동이라, 원컨대 이 운동에 대하여는 그 통폐(通弊)를 타파하고 진실로 철저한 각오 하에 지구적으로 실행성을 발휘할지어다. 이 말을 특히 조선청년의 각개 마음속에 깊이 전하고자 하노라.


  조선물산장려회의 발기를 위한 움직임도 연일 동아일보를 통해 전국에 전해졌습니다.


‘조선 물산을 장려코자 장려회 발기준비회를 조직’ (1923년 1월 11일자 3면)

‘구원일(舊元日)에 대선전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에서’ (1923년 1월 14일자 3면)

‘물산장려 발기총회를 마치고 이십삼일에 창립회’ (1923년 1월 22일자 3면)

‘이백명이 목주의(木周衣) 인천에 일어나는 물산장려운동’ (1923년 1월 23일자 3면)

‘물산장려취지’ (1923년 1월 27일자 2면)

 “이와 같은 동아일보의 줄기찬 주장에 힘입어, 1월 9일에 발기준비회가 조직되고 창립총회를 위해 10인의 위원을 선정하였으니,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유진태 정노식 김윤수 이종린 오현옥 이덕년 고용환 나경석 백관수 김혁

그리하여 1월 23일에는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총회를 열어, 이사 20인을 선출하고 거족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총회는 20인의 이사를 선정한 다음, 분정원단을 기해 일제히 본목주의를 입는다는 등 세 가지의 실행사항을 결의하였으니,

1, 의복은 우선 남자는 주의를, 여자는 치마를 본목으로 염색하여 음력 정월 1일부터 즉행할 일.

2, 음식은 사당 식염 청량음료 과실을 제한 이외에는 토산을 사용할 일.

3, 일용품에 대하여는 가급적 토산을 사용하되 부득이한 경우에 한하여 외국품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으로 가급적 절약할 일 등이다. 총회 이틀 후인 25일에는 총회에서 선출한 20명의 이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사회를 열고, 이사장에 유성준 씨가 되고, 각 이사는 3개부에 배치되었으니, 각 부별 명단을 보면,

경리부 설태희 정노식 김철수 김윤수 백관수

조사부 나경석 김동혁 이순탁 박붕서 김덕창

선전부 이종린 이갑성 박동완 이덕년 한인봉 이시완 임경호 고용환

등이다. 이사회에서는 음력 정월 1일에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대선전행렬을 가지기로 결의하고, 전국에 걸쳐 회원모집에 들어갔다. 또한 취지문을 발표하여 동포의 즉각적인 호응을 부르짖고, ‘물산장려회’의 설립목적을

첫째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고

둘째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해야 한다

고 하였다. 이리하여 경리부에서는 회원 모집(회비 50전 이상)에, 조사부에서는 한인 산품의 조사(공고)에, 선전부에서는 강연회 개최를 위해 활동을 벌였다.” (최영식, ‘사사낙수-1923년의 조선물산장려운동’, 동우 1967년 8월호, 44쪽) 




1923년 1월 24일자 1면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단서-이론에서 실제운동으로


 원래 이 운동의 성질이 조선사람 전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일부분 인사의 찬성으로만 가지고 그 실효를 주(奏)키 난할 것이며 또 이 운동의 실시에는 다대한 난관이 유한지라. 그 성효(成效)의 수확을 기하려면 결코 단시일에 대(待)키 난함으로 반드시 전 사회 인사의 각오와 지구적 계획의 신념을 요할 것은 오인의 다언을 불요할 바로다. 이 점에 있어 아(我)조선 전도(全道)의 남녀노유가 일치 협조의 행동을 취(取)치 아니치 못할 바로다…(중략)…금번의 경제운동이 어느 정도까지 실현의 가능성이 유하며 또 초지의 관철이 철저하려면 여하한 방도와 여하한 경제적 대응책이 필요할는지는 오인이 일층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로다. 즉 물산장려의 운동이 생산 급(及) 소비의 양 방면에 공히 관련이 유한 까닭에 생산방면에 있어 자본 기술 원료 기관 등의 각종 복잡한 문제가 기할 것이요, 소비방면에 있어서는 가격 기호 습관 등의 문제가 기할 것이로다. 그 전반이 실시에 대하여는 일국의 산업정책에 긍할 만큼 범위가 광범함으로 민간사회의 독력으로는 일조 해결이 도저히 불가능한 사실이로다. 그러고 오인이 물산장려를 계획한다 함은 일체 외화를 배척하야 철두철미 의 원시산업을 복구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니 이 점에 있어 오인은 점진적 태도를 취치 아니치 못할 것은 다언을 불요할 바로다. 좌우간 이 운동의 대세는 이미 이론을 떠나 실제의 착수에 지하는 단서(端緖)를 개하였도다. 오인은 차제에 다대한 각오와 동성상응(同聲相應)의 태도를 취하기를 절망(切望)하는 바로다. 


 1923년 1월에 조직을 끝낸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2월에 들어서자 실행에 힘을 쏟았습니다.


 ‘물산장려극 계획’ (1923년 2월 1일자 4면)

 ‘물산장려 대강연’ (1923년 2월 3일자 3면)

 ‘대성황의 물산강연’ (1923년 2월 5일자 3면)

 ‘동래의 물산장려’ (1923년 2월 5일자 3면)

 ‘토산장려와 마산기생의 동맹’ (1923년 2월 5일자 3면)

 ‘대전 중호계 발기’ (1923년 2월 6일자 4면)

 ‘대전에도 장려회’ (1923년 2월 8일자 3면)

 ‘장려회원팔백 칠일에만 사백명’ (1923년 2월 9일자 3면)

 ‘강서지방 금주단연’ (1923년 2월 12일자 3면)

 ‘노동동맹도 참가 평양선전행렬에’ (1923년 2월 13일자 3면)

 ‘보천교도 참가 물산장려운동에’ (1923년 2월 13일자 3면)

 ‘우리물산장려’ (1923년 2월 14일자 4면)




1923년 2월 6일자 1면




 조선인 산업운동의 발흥




1923년 2월 7일자 3면




토산애용부인회

경성부인의 새로운 부르짖음, 토산물을 숭상하자는 새 모임


죽어가는 우리 목숨을 살리는 길이 무엇보다도 남의 나라의 빚꾼이 되지말고 스스로 살림을 충실하게 함에 있다하여 최근에 이르러 토산장려의 운동이 일어나 캄캄한 우리의 앞길도 다소의 밝은 빛이 보이는 터인데 이 운동으로 말하면 각기 스스로 또는 제각기 가정으로부터 실행하여야할 것임으로 가정의 주부가 특별히 이에 깨달음이 있어야하며 더욱 사치하는 악습으로 말하면 실로 부인계급이 심함으로 부인들의 철저한 깨달음이 없고는 이 운동도 완전하게 이를 수 없는 터인바 천행으로 아낙네들의 깨달음이 깊어…(하략) 




 1923년 2월 8일자 1면




 토산애용부인회의 성립


  이 운동이 점점 확대되자 일제경찰은 1923년 2월 12일 장려회 간부들을 불러 2월 16일(음력 설)의 가두대행진은 옥외집회이므로 금지한다고 말하고 강행할 경우 경찰과의 충돌을 각오해야한다고 협박했습니다. 동아일보는 2월 15, 16일자에 잇달아 사설을 실어 경찰의 처사를 비판했습니다. 이와 함께 16일자 3면 상단 반면을 물산장려운동 기사로 채워 이 운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1923년 2월 15일자 1면




 물산장려의 행렬금지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자는 그 취지가 무엇이 불가하며 또 이 취지를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혹 회도 조직하며 강연도 하며 또 혹은 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시가에 대(隊)를 지어 행렬을 행함이 무엇이 불가한가. 만일 일본사람으로서 일본사람의 물산을 장려함이 불가하다 할진대 그 논법으로 써 물론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함도 불가하다 하려니와 그러면 과연 일본 경관은 그 일본 사람이 일본사람의 물산을 장려하자는 운동 취지를 불가하다 하는가. 아니라 우리의 관찰하는 바에 의하면 일본 국가정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곧 어찌 하였으면 일본 사람의 ‘산업’을 발달시킬 수가 있을까, 어찌 하였으면 일본 사람의 산출하는 물화의 수량을 증가할 수가 있을까 함에 심(心)을 경(傾)하고 역(力)을 주(注)하여 연구하고 행하려 함에 있는 듯하니…(중략)…그러면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지 아니하고 외타인(外他人)이 지은 것만 사 쓰고서 어찌 그 생활을 유지하며 그 문화를 발달할 수가 있을까. 농업에 의지하여 산출하는 근소의 부(富)로써 일상에 사용하는 옷값 사발값 심지어 물값 전기값까지라도 모두 외타인에게 주고 말게 되면 조선 사람은 무엇으로써 학교를 경영하며 생활을 향락하며 사회를 발달할 수 있을까. 혹은 말하되 일본과 조선은 합병하였은즉 그 한 나라 안에서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자 함은 곧 비망(非望)을 포(抱)함이요, 야심을 장(藏)함이라 도저히 용허키 난하다 하는 자가 있으나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조선 사람에게 학교를 지어주며, 교회를 지어주며, 밥과 옷을 주고 또 그 집을 지어주려는가. 이와 같이 하여 조선 사람의 생활을 그 일본 사람의 생활 하에 예속케 하려는가. 아니라.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 밥을 주지 못하는도다. 옷을 주지 못하는도다. 학교와 교회를 주지 못하는도다. 주려 할지라도 그 능력이 없도다. 진실로 이와 같을진대 그 조선 사람에게 대하여 물산을 장려하지 말함은 곧 조선 사람에게 대하여 자살을 권함이 아닐까. 물산장려의 취지가 이와 같이 당연하고 또 신성하다하면 이 당연한 취지, 신성한 목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시가에 행렬을 행함이 무엇이 불가한가. 




1923년 2월 16일자 1면




 옥외집회도 색색(色色)인가




1923년 2월 16일자 3면




 “‘토산장려’ ‘자작자급’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2천만 민중의 일치 합세로 성취할 자활운동’ 등 표어를 큰 활자로 눈에 띄게 하고 경찰탄압으로 중지된 이날의 행사계획을 소상히 보도하였다. 가두행렬 계획은 이날 오후 2시에 천도교당에 집결하여 회원 간친회를 갖고, 회원들의 가슴에 자주질의 근성도(한반도)가 박힌 ‘장려회’ 휘장을 달고, 조선 악대의 고악(古樂)을 선두로, 팔도 연합을 의미하는 여덟 폭으로 된 ‘장려회’기와 각도의 특산을 바탕으로 만든 팔도기가 그 뒤를 따르게 하여, 시민들의 눈을 끌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특히 팔도기는 향토의 특산물을 상징하는 바탕으로,


경기도는 강화반포(江華班布)

경상도는 안동갈포(安東葛布)

전라도는 전주우견(全州牛絹)

충청도는 한산세저(韓山細苧)

강원도는 철원명주(鐵原明紬)

황해도는 해주백목(海州白木)

함경도는 육진환포(六鎭環布)

평안도는 안주항라(安州亢羅)

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각 가정과 거리에 뿌릴 선전지를 만드는 데는, 신문관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5, 6만장을 무료로 인쇄하여 주었는바, 그 내용을 보면,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제일 세상에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은 오늘이야 우리가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쓰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계획되었던 가두행렬은 중지되었으나, 간친회와 강연회는 진행되었고, 평양에 위시한 수개처에서는 제한된 가두행렬과 각가지 행사들이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는, 처음에는 50명씩 2대로 나누어 행진하게 되었으나, 뒤따르는 군중이 만여명에 이르러, 행렬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서울에서 있은 회원 간담회에는 본사 송진우 사장도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고, 천도교당과 청년회관에서 1시에 있은 강연회도 대만원을 이루어 성대히 끝마쳤는데, 강연에 등단한 이는 다음과 같다.

이승훈 유성준 설태희 이종린 박승빈 김필수 이순탁 김철수 김홍식 이강” (최영식, ‘사사낙수-1923년의 조선물산장려운동’, 동우 1967년 8월호, 44쪽)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경성에는 상설기관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설립되고 지방에는 청년회 부인회를 중심으로 이 운동이 퍼져나갔습니다. 동아일보는 이 물산장려회 간부와 사회 유지의 발언을 싣는 한편 관련기사를 봇물처럼 게재했습니다.


  “민중사업-일반이 다같이 꾸준히 합시다.” (장려회  유성준, 1923년 2월 18일자 3면)


  “최후까지 노력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동양물산 장두현, 1923년 2월 20일자 3면)


  “신념제일-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나아가라.” (중앙고보 현상윤, 1923년 2월 21일자 3면)


‘남원청년임원회’ (1923년 2월 16일자 4면)

‘성천청년토론회’ (1923년 2월 16일자 4면)

‘작일 오후의 물산장려간친회 즉석에서 신입회원 이백여명’ (1923년 2월 17일자 3면)

‘연합선전 대구 육 단체가 작일 크게 선전’ (1923년 2월 18일자 3면)

‘쌍구(雙口)로 토한 화설(火舌)’ (1923년 2월 18일자 3면)

‘근검 상조회 조직’ (1923년 2월 18일자 4면)

‘경찰의 간섭으로 단체 선전은 중지’ (1923년 2월 19일자 3면)

‘영흥학생도 장려 총회에서 결의해’ (1923년 2월 19일자 3면)

‘김천에 물산장려회’ (1923년 2월 20일자 4면)

‘마산에도 장려회 금일창립총회’ (1923년 2월 21일자 3면)

‘물산장려선전’ (1923년 2월 21일자 4면)

‘물산선전 대행렬’ (1923년 2월 23일자 3면)

‘경주 물산장려회’ (1923년 2월 23일자 4면)


  “군산시내 이십여 단체의 발기로 조직된 ‘우리물산장려선전회’에서는…(중략)…당국의 제한한 오십여명의 각 단체 대표 중 선전위원 열사람은 일제히 토목으로 두루마기를 입고 토목버선에 조선집석이를 신었는데 더욱 가상한 것은 보성예기(藝妓) 한호예기 이십여명은 명주저고리 백목치마 버선에 조선 미투리를 신고 수백명의 군중은 뒤를 이었다.” (‘군산 각 단체의 물산선전’, 1923년 3월 4일자 3면)


  “동래(東萊)에서는 각 단체가 물산장려와 소비절약을 선전한 후로 동래권번 기생들도 수일전에 임시총회를 열고 조선물산장려와 소비절약을 실행하기로 하여 의복은 물론 토산을 사용하고 담배까지 끊기로 동맹하는 동시에 물산장려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로 하였다더라.” (‘기생의 장려가’, 1923년 3월 6일자 3면)




1923년 3월 6일자 3면




 토산부인의 열규(熱叫)

청중 이천오백명에 달한, 성황을 다한 아낙네 강연


 동아일보는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도 적극 보도했습니다.


 “1923년 초의 시점은 바로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분화가 뚜렷해진 시기로서, 3월 말에 열린 조선청년당대회는 물산장려운동 타도를 결의하는 등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이로써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은 본격화되었는데, 이 논쟁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23년 2월 16일 조선물산장려회의 강연회에서였다. 이날 한 청중은 연사를 향해 “우리 절대 다수인 무산자에게 어떠한 의의가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박찬승 한양대교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3권 언론운동’, 독립기념관, 2009년, 128~129쪽)


 “1923년 물산장려운동 논쟁을 통해 전위조직을 중심으로 노농 대중이 결합한 볼셰비키적 ‘변혁’ 방법을 인정하는 서울청년회계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생산력’의 고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상해파 국내 책임자인 나경석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존재했다. 이는 특히 물산장려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첨예하게 나타났다. 논쟁이 일어났다. 나경석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는 생산력의 발전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물산장려운동 이끌며 독립 사회주의 꿈 꾼 혁명가’, 경기일보 2009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는 먼저 물산장려회의 이사인 나경석의 ‘물산장려와 사회문제’를 1923년 2월 24일자부터 3월 1일자까지 1면에 6회 연재하고 3월 3일자에는 ‘CKW생’이라는 필명의 ‘조선물산장려에 대하여 나군에게 고하노라’를 역시 1면에 실었습니다. 이어 역시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인 설태희의 ‘물산장려에 관하여’를 3월 4일부터 12일까지 1면에 9회 연재하고 3월 20일자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이성태의 글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을 4면에 게재했습니다. 또 3월 26일자 1면에 물산장려운동 지지자 조중용의 ‘물산장려운동과 오인의 관찰’을, 3월 30일자 4면에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이자 연희전문 경제학 교수인 이순탁의 ‘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이성태씨의 논문을 비평함’을 실었습니다.


  1923년 3월 31일자 1면 사설로는 “조선인의 경제적 실력을 도모하고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23년 3월 31일자 1면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논쟁-사실을 직시하라


 일(一)은 일본인측이나 또는 관청의 일부분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일종 일화배척의 성질로 간주하고 그 불온한 사상인 것을 공격하는 것이오, 우일(又一)은 소위 사회주의자중의 일부 논객이 논하는 바인데 물산장려운동은 유산계급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요 무산계급에는 아무 통양이 없다는 까닭에 이 운동을 일부 유산계급에만 방임하자는 논거에 재하도다…(중략)…조선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각 자립하여 혹은 소비를 절약하며 혹은 식산에 힘쓰는 것이 곧 물산장려운동의 근본정신일진데 조선인의 생활복리를 조장 도모한다는 관청의 취지와 무엇이 모순 될 바 있는가. 물론 오인이 인정하기는 물산장려운동의 철저한 실행으로 일본 물화에 다소 영향이 있을 것을 아는 바로다. 그러나 이것은 피치 못할 필연의 대세라. 조선 사람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이것이 피치 못할 점이라 하면 이 역 희생에 공치 안을 수 없는 바로다…(중략)…조선의 무산계급이 먼저 힘쓸 바는 무엇인가. 즉 계급의 분열투쟁을 책하는 것보다는 먼저 조선 사람의 경제적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당면의 문제가 아닌가. 만일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조선인 자체의 경제력을 증식하는 데 일조가 된다면 우리는 백난(百難)을 돌파하고라도 이 운동의 실현에 주력치 않을 수 없는 바로다. 그러고 조선인 전체의 경제력 증식에 유효한 이 운동이 어찌 일부 유산계급에만 이익이 되고 일반 무산계급에는 아무 이익이 없다 하는가. 설혹 논자의 주창과 같이 물산장려의 결과 그 이윤의 대부분이 일부 유산계급에 농단된다 가정하더라도 조선인의 부력(富力)이 얼마만큼 집중되면 소위 혁명계단의 대세를 촉진하는 데 유력한 소인(素因)이 되지 않을까…(중략)…요컨대 오인의 주장하는 바는 조선인의 경제적 실력을 도모하는데 이상이 있으며, 이 이상의 실리(實理)에는 조선인 자체의 생산증식이 제일 급무인 것을 자신하는 동시에 그 필요한 방법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적절한 것을 단언하는 바로다.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사설, 기사, 투고 등을 게재하면서 이 운동에 대한 민족의 호응과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비록 폭넓고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국가 없는 한민족에게 국산품 애용의 구호를 높이 외치고, 동포의 가슴마다에 동족애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데 앞장선 본보는, 당시로서는 정부에 대신하는 한민족의 정부의 구실을 다하였다 할 것이다.” (최영식, ‘사사낙수-1923년의 조선물산장려운동’, 동우 1967년 8월호, 45쪽)


  “3.1운동은 우리에게 생기와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경성방직은 작으나마 눈에 보이는 그 희망의 하나입니다. 경방이 여기서 문을 닫는다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감히 근대적 산업에 손을 대는 사람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얼굴을 들고 한길을 다닐 수 있겠습니까? -김성수, 파산위기에 몰린 1920년 봄의 경성방직 중역회의에서” (주익종, ‘대군의 척후-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 김연수’, 푸른역사, 2008년, 131쪽) 


  “그러나 우리나라의 면방직공업이 1920년에 대발전을 보게 된 것이 이러한 사정과 크게 관련되어 있음도 사실이다. 그중에서 특히 일례만을 들면 현재 영등포에 있는 1919년 10월에 설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가 1911년 설립된 경성직뉴회사를 인수하여 오늘의 대성을 보게 된 것도 3.1운동 직후의 기업붐속에서 민족자본가로서 적극 진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해방 후 민족자본의 토대를 구축한 근본원인도 된다…(중략)… 이 물산장려운동도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이 인도의 ‘수아라지’ 운동에 자극되어 이것이 결합되어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항거한 투쟁이다.” (신태악 변호사,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신동아 1969년 10월호, 315~316쪽)


  “또한 보조금 지급을 한국인 부르주아지에 대한 지원 및 회유책으로 해석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일본 재벌계 자본이 세운 조선방직도 거액의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20년대에는 조선방직과 경성방직이 낮은 수익금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보조금은 조선내 공업 발달을 촉진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지급되어, 조선내 방직업체가 일본의 업체에 대해 경쟁력을 갖기까지 그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판단된다.” (주익종, ‘대군의 척후-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 김연수’, 220쪽) 


  “그 후 이것(물산장려운동)이 더욱 확장되어 민립대학설치운동으로 발전하여 그 기성회가 결성되었으니 이것은 한민족의 날카로운 민족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한 커다란 힘도 기실 민간신문에 그 공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처럼 이때의 민간신문 특히 동아일보의 역할은 컸다. 그러므로 이 때의 신문경영은 민간산업의 하나이기는 하였으나 영리만을 추구하는 상업적인 것이 아니었고, 민족적인 대변기관인 동시에 민족운동의 가장 유력한 무기로서 나타났다.” (최준 전 중앙대교수, ‘신보판-한국신문사’, 일조각, 1990년,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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