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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동아일보 사람들- 최흥조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최흥조(崔興朝, 1918~2000). 필명은 백락 (伯樂)이다. 경기 개성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2년 중퇴하고 신춘문예 응모 등 문학작품 활동을 하다 해방 후 한성일보 기자를 거쳐 1949년 7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인 6월 27일 마지막까지 신문사에 남아 동아일보 전쟁호 발행에 참여했다. 그 뒤 남쪽으로 피난할 기회를 놓치고 석 달 동안 인신에 성공, 9.28 서울 수복이 되자 평양 종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사회부 부장을 맡다가 1952년 5월 퇴사했다. 이후 중앙일보 취재국장, ‘신문의 신문’ 창간, 월간지 ‘진상’ ‘반공’ 발행 등 언론활동을 했다.

 

최흥조(崔興朝) (평남, 1918~ ) ▲ ? 취재부차장, 52. 5 퇴사.〔「신문의 신문」사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최흥조   

▲ 1918년 11월 8일 개성에서 출생
▲ 2000년 10월 14일 서울서 별세
▲ 36년 평양고보 졸업
▲ 38년 연전문과 중퇴
▲ 45년 황해민보 편집국장
▲ 46년 2월 한성일보 기자
▲ 49년 7월 동아일보 기자, 52년 초 동 취재부장, 동년 5월 퇴사
▲ 52년 9월 <신문의 신문> 창간, 사장
▲ 56년 월간 <진상> 발간
▲ 57년 월간 <반공> 발간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문학소년

최흥조(崔興朝 ·필명 백락(伯樂))는 1918년 개성에서 최문택(崔文澤)의 3남 3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세계명은 ‘요한’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의 부친은 관립 수원농림학교(전 수원고보·서울 농대의 전신)을 졸업, 개성보통학교 훈도로 5년 남짓 근무하다 동경제대 농과대학 농학과에 진학, 학업을 마친 1917년부터 17년동안을 유독 사립학교(순안 양명중학, 개성 송도고보, 평양 광성고보, 서울의 중앙고보)에서만 교편을 잡다가, 광복후 46년부터는 연백 공립농업중학 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최흥조가 개성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초 ·중등 교육을 받은 것은 부친의 근무처와 관계가 있다.

글재주가 뛰어났던 최흥조는 12세때 일본문으로 ‘히대오의 마음’이라는 글을 ‘소년세계’에 발표했고 1936년에는 월간 ‘비판;에 시 ‘황해여 노하라’를 발표했다. 문학에 뜻을 두고 36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2년 후 학업을 중도에 파하고 국민극운동에 참여, 국민극협회와 매일신보가 공동모집한 희곡부문에 응모, 당선(‘광명의 탑… 전 5막)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일제는 징병과 징용으로 장정들을 끌어갔고 미혼여성도 정신대로 뽑아가던때,  최흥조는 43년 11월에 황해도 장연의 부농이자 기독교 가정인 양승호의 손녀(양혜순의 외동딸) 양석화(시 서울여상 졸업직후, 20세)와 중매 결혼하였다.그해 겨울 최흥조는 매일신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응모, 희곡 ‘가야(伽倻)의 집’이 당선, 상금 50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 다음해 그는 노부자로 징발돼 일본 ‘마이즈루’해군 비행장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하다 병을 얻어 사경에 이르자, 요행 징용에서 풀려나 귀국, 일단 처가에 머물게 된다.
그런중에도 최흥조는 강제노역 당시의 체험을 토대로 소설 ‘천황의 코’를 탈고 햇으나 끝내 햇볕을 보지는 못했다. 그처럼 문학에 뜻이 있었으나 광복이 되자, 그는 언론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정치활동에도 발을 들여놓아 문학과는 다른 길로 간다.

입사 두달, ‘曺奉岩 회견기’ 창작도

해주에서 8.15를 맞이한 최흥조는 그해 10월 항해일보사를 접수, 함대훈(해방전 조선일보 학예부원) 등과 ‘황해민보’로 게재, 신문을 내다가 다시 ‘자유황해’로 제호를 바꾸고 자신이 편집국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 해 12월 9일 함대훈, 김가진 등과 조민당(朝民黨) 황해도당부 조직에 참여하자 자유황해사는 최흥조를 해임하였다.
그 해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5년간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38이북에서도 반탁운동이 불붙었고, 최흥조도 반탁운동에 앞장 서썽T다. 46년 2월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만식(조민당 당수)을 방문, 돌아오는 길에 함대훈은 물론 최흥조 자신도 반동분자로 몰려 소련군사령부에서 체포령이 내렸음을 사리원에서 탐지, 그길로 38선을 넘어 서울에 온 것이 2월 중순, 생계가 막막하였다.
마침 한성일보(사장 안재홍), 편집국장 양재하, 주필 이선근이 창간(2월 26일)된 사실을 알고, 함께 월남한 함대훈의 실형 함상훈(당시 한민당 선전부장)의 소개로 이선근 주필의 자택을 방문, 이력서를 냈으나 반응이 없었다. 궁리 끝에 최흥조는 가형 최흥국의 보전 동창(법과 30회)인 안재용(안재홍사장 아들)을 통해 청을 넣어 이선근 주필을 다시 만났는데 ‘필력을 모르니 뭐든 써보라’로 하여 즉석에서 수필 두편을 써냈다. 다음날 출사통지가 왔고 3월 8일자로 사회부 기자로 발령되었다.
그런데 출사 3일kas에 안재홍 사장의 비서직까지 겸무하라는 명령이었다. 난감 했으나 최 기자는 우선 숙식문제는 안사장 사택(돈암동) 문간방이 제공되어 해결된 셈이나 비서일과 취재까지 하자니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그러던중에 입사 두달 후 이른바 ‘조봉암 단독인터뷰’로 최 기자는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미 군정청은 당시 공산당도 합법 정당의 인정, 재빨리 지하에서 나타난 ‘서울·콩그룹·의 박헌영이 공산당을 재건, 우익진영과 맞서면서 자파세력 확대에 광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1924년 조선공산당 발족 당시 거물급의 한사람인 조봉암은 그후 모스크바 노력자대학을 거쳐 중국 대륙에서 반일운동에 나서는 등 활동하였으나 박헌영 일파는 ’조봉암이 일제 탄압에 굴복한 변절자‘라고 재건 공산당에서 배제했고, 당시 조봉암은 인천시 민전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봉암은 누명을 벗기 위해 장문의 변백서를 ’자기비판‘ 형식으로 기록, 인편에 박헌영 앞으로 보냈으나 몬서를 갖고 가던 자가 부천에서 미군 MP의 검색에 걸려 그 문서를 압수당했다. 문서를 살펴보던 미국수사기관은 문서 내용중 박헌영에 대한 비판 대목도 있는데에 주목, 그것을 당시의 민주의원 비서국장이자 이승만박사 비서인 윤치영에게 넘겼다. 윤치영은 좋은 정보로 판단, 그 문서를 복사, ’박헌영 동무에게 보내는 조봉의 공개서한‘으로 제목까지 달아 각 언론사에 배포, ’한성‘ ’동아‘ 대동신문 등 우익 언론이 대서특필한 반면, 좌익지는 아예 묵살하였다. 박헌영은 큰 충격을 받았고 우익진영은 크게 고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 최흥조화 함께 월남한 함대훈이 한성일보 편집국장에 임명돼 최흥조는 힘을 얻게 됐고 한성일보의 반공논조는 한층 강화되었다. 그런데 5월10일 함국장은 최기자에게 ‘인천에 가서 조봉암을 인터뷰하라’는 취재 지시를 내렸다. 최기자는 당일 인천 민전을 방문, 조봉암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그러나 잠깐 모습을 보였던 조봉암은 인터뷰를 거절했고, 1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최기자를 밀어내 인터뷰는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신문사로 돌아온 최기자는 ‘조봉암을 만나보고’라는 제하의 회견기를 써냈고 5월 11일자부터 세 번 한상일보에 인터뷰기사(최기자의 창작)가 나갔는데, 최기자는 조봉암이 김일성이나 박헌영보다 월등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한편 최기자가 조봉암에게 내민 14개항의 질문에 직접 답변은 피했으나 ‘박헌영에게 보내는 변백서 안에 그 뜻이 담겨 있음을 암시했다’고 썼다. 조봉암과의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 조선공산당은 발칵 뒤집혔고 각 언론사도 최기자의 기민한 취재활동에 놀랐으니 우선은 인터뷰의 진부를 의심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헌영은 조봉암을 서울로 불러올려 공산당본부(소공동 정판사)에서 기자회견까지 시켰고, ‘인터뷰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시켰으나 결국 조봉암을 출당 처분, 그후 조봉암은 공산당과 결별하게 된다.
48년 인천에서 총선에 출마한 조봉암은 제헌의원에 당선, 그후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했다.
이어 50년 5.30선거에 출마한 조봉암은 재당선, 6.25때 부산피난 국회시절 그는 국회부의장이 되기도 했다. 훨씬 후 진보당 사건으로 그는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최흥조와는 ‘창작된 인터뷰’로 인한 인연으로 그후 정치인 대 언론인으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최흥조는 ‘나의 기자시절’(1975년 신문평론 8월호)에서 ‘조봉암 인터뷰 창작’과 관련 기자로서의 정도가 아니었음을 솔직히 참회하기도 하였다.
한성일보에서 기자로 활동(나중에 정치부 차장으로 승격) 하면서도 반공정치활동에도 가담, 이선근, 유진산 등과 조선청년당 창당에 참여한 최흥조는 당 선전부장으로 취임하면서 46년 12월 18일 한성일보사에서 물러났다.

동아일보 취재부장때 ‘민국당내막’ 출간 말썽

조선청년당 창당에 참여, 정치에 골몰하던 최흥조는 얼마후 내분으로 당이 와해되자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2년 남짓 고생하다 신문사에 취직하려했으나 ‘정치에 물들었다’고 모두 외명하였다. 다행히 49년 7월 동아일보에 평기자로 입사한 후 그는 거기서 일생을 바쳐야 하겠다고 결심, 부지런히 뛰었다. 입사 2주만에 ‘국제스파이 사건’을 특종, 9회에 걸쳐 내리다지로 엮는등 두각을 나타재기 시작, 그후 한달만에 취재부 차장(2명중 1명은 사회부담당)으로 발탁됐고 정치부장이 결원이라 취재 겸 정치부 데스크를 맡았다.
52년초 그가 취재부장으로 승진할때까지 제1차 내각제 개헌안(민국당 제안), 국회프락치사건 여파, 반민특위 해산 등 정치적 격동기에 처해 반독재, 민주수호의 편집방향을 설정한 동아일보의 성가를 높이는데 그는 정력을 쏟았고 지면제작 방향설정(특히 민국당 관계기사 관련)으로 간부진과 간혹 의견이 상충될 때가 있기도 했으나 반골정신이 강한 그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6.25 때 서울피침 직전 끝까지 신문사에 남아 호외를 찍어 뿌린 동아일보 사원중에 최흥조도 빠지지 않았다.
미처 피난 못간 최흥조는 9.28까지 석달동안 김포에서 숨어 생명을 건졌고 수복이 되자 곧 평양에 특파되어 취재활동을 한다. 1.4후퇴 직전 서울로 복귀, 다시 선발대로 한발앞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피난지에서 동아일보를 속간하는데 앞장섰고 비상계엄하에도 불구 김종원 대령의 언론인구타사건, 국민방위군의혹사건 등 정부의 비위와 실책을 적극 파헤쳐 보도하여 야당지 동아일보의 성가를 올리는데 힘을 쏟았다.
51년 9월 24일자 동아일보에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윤익헌의 처가 민간인을 통해 모 미국대령에게 구명운동자금을 건넸다(이것은 내무부 고위관리가 국회에서 비공개로 발설한 것)는 내용을 탐지 보도하자, 정부는 고재욱 고문과 최흥조 부장을 광무신문지법과 형법 제105조 위반(민심혹란)으로 검찰에 호출, 장기간 조사했으나 뉴스 출처를 밝히지 않자, 불구속 기소하기도 하였다(그뒤 국회에서 광무신문지법과 형법 제105조 폐기로 사건 종결)
그런데 52년 피난국회에서 민국당의 ‘내각 책임제 개헌안’과 여당의 재집권을 노리는 ‘대통령직선제 및 상하양원제 개헌안’으로 여·야가 팽팽히 맞섰고 정체불명의 청년단체(백골단 등)가 횡행, 국회의원 50여명이 타고있는 국회버스를 헌병대로 끌고가는 등 소위 ‘부산정치파동’으로 김성수 부통령이 이 대통령을 탄핵, 부통령직을 사퇴하는 정치적 긴강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때 최흥조는 ‘민주국민당의 내막’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출간 시점이 미묘한 시점이여서 여러 가지 츼혹이 제기 되기도 하였다. 문제의 초첨은 두갈래였다.
하나는 ‘과거 민국당과의 인연으로보나 또 동아일보의 창설자가 인촌 김성수라는 역사적 배경으로 보나 현직 동아일보 취재부장이 민국당의 비리를 겨냥한 책자를 낸 것은 도의상 있을수 없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정부에서 밀어 붙이고 있는판에 이를 반대하는 중심정치세력인 민국당을 공격하는 책자를 낸 것은 모종의 정치적 복선이 린 것이 아니냐‘하는 의혹이었다. 심지어 최흥조는 이름만 빌려주고 진자 필자는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억측도 돌았다.
그러나 최흥조는 ‘6.25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출판업자 이북의 권고에 따라 9백만원 고료를 받기로 했고, 책을 낼바에야 떳떳이 본명을 밝힐거싱요, 어느 신문사에 속해 있건 기자로서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언론인의 본분이므로 구애될 바 없다고 판단, 책을 낸 것(민국당의 내막 재판 때 경위 해명)뿐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최흥조는 그로 인해 동아일보를 떠나야 했다(5월31일자 동아일보에 의원해임 사고·최흥조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그만 둘 각오는 잇다고 회사측에 전했으나 사표는 안썼다고 주장)

‘비판신문’과 ‘진상’ 창간, 홀로 서기

어떻든 최흥조의 ‘민국당의 내막’은 출간되자 3만부나 팔려 3쇄, 재판까지 냈다. 부산생활을 청산한 최흥조는 서울로 이사, 52년 9월에 주간 ‘신문의 신문’(평론지 대판 4쪽)을 창간, 사장이 되었고, 이어 56년에는 월간 ‘진상’을 창간, 각종 흥밋거리를 연재하는 가운데 매호마다 ‘이승만 대통령데게 보내는 공개장’을 줄기차게 발표(필자 崔伯樂 명의), 나중에 책으로 2집가지 냈는데 그중에는 정치적 건의, 비판 등 다양했다. (예컨대 ①자유당총재 사임하라 ②언론통제 기도 반대 ③수사기관 고문 없애라 ④반대당에 자유를 주라… 등)
최흥조의 공개장에 이승만 대통령도 관심을 표명, 54년 7월 12일 경무대로 최흥조를 불러 단독회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4.19의거에 이어, 5.16쿠데타로 박정희장군이 실권을 쥔 후 ‘신문의 신문’은 폐간되었고, ‘진상’과 ‘반공’도 발간이 중단되었다.
64년 한때 중앙정보부 판단관에 임명됐던 최흥조는 상부와의 의견충돌로 구속돼 고생도 했으나, 풀려난 후 모든 것을 청산, 여생을 기독교에 의지할 결심으로 한때 삼각산 기도원에 칩거하기도했다. 그러나 결국 다시 뛰쳐나온후 ‘내가 찾은 하나님’(56년 5월 자유출판사 발행)이라는 신앙고배서을 펴내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모든 것을 청산, 전원(경기도 남양주군 마도면 누님댁 근처)에 묻혀 살다 2000년 10월 14일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부인 양석화와의 사이에 7남매(3남 4녀)를 낳아 사회 중견일꾼으로 키웠는데 거의 모두가 기독교 교회의 지군을 맡고 있다.

참고자료
<韓國新聞 百年史>
<新聞評論 75년 8월호 ‘나의 記者時節’
<민국당의 내막- 이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崔伯樂지음>
<내가 찾은 하나님>
<月刊 ‘眞相’> 등

집필: 이혜복 <대한언론인회 명예회장>

<한국언론인물사화 제6권> (255p~264p)

 

서울最終列車
崔伯樂 記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제 다하고 떠났다. 정든 우리의 수도 서울 그리고 우리들의 일터와 살던 집과 우리가 아침저녁 거닐던 거리와 작별하여야 하는가…지축을 흔드는 포격이 은은히 들려오는 1월 3일 하오 3시 30분 우리들 동아일보 잔류 동인 일행 20명은 쓰다 남은 용지들을 등에 지고 서울 최종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적이 운다, 슬프다는 소리냐 억울하다는 소리냐 무섭다는 소리냐 무섭지 않다는 소리냐…기차는 떠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세기적 비극임에는 틀림없으나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아니하고 내 목에서 명인(鳴咽)이 터져 나오지 아니 하는 가운데 잔류 정부 및 각 기관 요원을 만재한 서울 최종열차는 객차 17량을 끌고 승리를 향하여 남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필(筆)봉 부대 활약 괄목   중대사명 등지고 최후까지 잔류

아 처절한 이 광경! 병든 늙은이들까지 지금 지팡이로 동결한 한강 어름판 위를 두들기며 남으로 향하고 있고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은 아낙네들이 한 손으로 큰 아기를 잡아당기며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판단한 정세에 비추어 크리스마스인 25일을 기하여 비상태세를 취하기로 하였다. 최소한도의 필요 인원을 잔류시키고 나머지는 선발대로 부산에 파송하여 동아일보 속간 준비에 착수케 하는 한편 동인들의 가족도 소개(疏開)시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잔류 동인들이 최종의 순간 철수할 차량의 준비가 되지 아니하여 도보로 남하하기로 계획한 당시 전원 잔류는 오히려 지혜로운 처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잔류도 명령, 선발도 명령, 명령에 의해서 잔류 부대는 25일 선발대와 결별하고 합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다시 긴박해졌다. 서울 각 일간신문 통신사들은 협의하여 27일부를 최종호로 남하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사실 서울시는 이미 공허화하여 독자의 수는 격감하였으며 1월 1일 현재 조사에 의하면 42만 명에 불과한 정세에 있었다. 그러나 서울 사수의 결의가 가장 공고해 보인 내무부장관 조병옥 씨의 간곡한 요청에 응하여 각사들은 더 체경(滯京)하기로 하여 쓸쓸한 서울거리에서 낡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29일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포성은 새해에 접어들자 2일 밤이 새도록 치열해 갔다. 또 아공군의 활동도 맹위를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는가? 드디어 ‘철수’령이 나린 것이다. 가자! 승리를 향하여 일시 뒤로 물러가자.

우리의 무기는 한 자루 붓이니 우리가 쓰던 이 붓을 총인 양 꼭 걸머지고 또 우리가 쓰다 남은 용지를 짊어지고 철수하는 정부를 따라 가자.

서울 최종열차는 한강을 도하하여 영등포역에 이르렀다. 황혼이 깃들어 어두워 캄캄해진 영등포역에는 수만에 달하는 피난민이 언제 떠날런지 모르는 기차를 타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서울 최종열차는 밤을 새워 이튿날 새벽 5시 30분에 대전 역에 도착하였다. 캄캄한 밤 눈 내린 경부국도를 남하하는 전용차들의 헤드라인은 마치 땅 위를 흐르는 별인 양 찬란하다.

남으로 남으로 뻗치는 자동차들의 불빛을 벗 삼아 서울 최종열차는 다시 부산을 향하여 달렸다…”

(동아일보 1951년 1월 10일 2면)

 

공산당의 철쇄(鐵鎻)(상) – 수난 90일의 기록 / 최흥조(崔興朝)

버림을 당한 시민들과 함께 살아날 수 잇는 길을 차즈면서 사(死)의 운명을 가치하기로 뱃장을 정한 우리들 몃몃 동인(同人)들은『정의와 신념을 위하여 냉연한 멸시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안흔』직장인 동아일보사 편집국을 일생의 직업으로 택한 신문기자의 비애를 한아름 그러안코 적이 포성이 유리창을 무례스러ㅂ게도 녹크하는 6월 27일 밤 10시까지 사수하느라고 햇다

그것은 생명의 신화가 가두(街頭)의 요술쟁이의 손수건속에 잇는것과 갓다고 느껴지는 허무한 몃시간이엇다

우리들은 차침 가까워오는 적군의 야수성이 들리는 것만 가튼 착각을 부벼버릴 셈으로 손수 최후의 호외를 집필 문선식자(文選植字) 인쇄하여 가두에 뿌렷다 어두ㅁ이 깃드는 그 전날밤 10시 기적을 밋지안는 서울시민들이 우리가 가두에 뿌리는 호외를 집어보지 안는 무서운 사실을 목격한 나는 나 이외에 밋고 의지할데가 업는 처자가 나만을 밋기 때문에 잠들어 말업슬 내집이 그리워 이제 마각(馬脚)이 드러난 사기수와도 가치 당황해하는 건물들이 보기실허 다름질치듯 내집이 잇는 원효로로 갓다 안해는 충혈한 동공을 진주처럼 균형잇는 눈물로 시츠며 장차 어리ㄴ것들을 데리고 고모부가 무슨 위원장으로 잇다든가 하는 북황해도 친정으로 가면 먹고 살수잇으니 나더러 한강을 넘어 일본으로건 미국으로건 달아나라고 하는 것이다

백악이라는 필명으로 그리고 결국은 알려지는 무기명으로 글올 써서 생계하되 공산당을 증악하고 그 증악를 고취하는 글을 쓰ㄴ나에게 대한 인민재판예연에서 압해는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세ㅁ이다

『하늘이 문허저도 솟아나을 구멍이 잇다드라』춘향전의 이도영은 아니나 절망의 윤리가 그런법이다

시각을 악필요가 업다 돗이 톨려면 한참 더잇서야 할 그런무려ㅂ 절망의 혼수상태에 빠진 내몸을 담은 목조가옥이 춤을추며 고막근처에서 낙뢰성(落雷聲)이 일어낫다 한강철교폭파 이어서 고압선 작렬…나는 그러한 계획들을 미리 알고 잇섯다

『만세 만세 만세』마포나루터로 가는 길거리를 뚫린 규문을 방싯열고 내다보는 휘언한 길에는 폭음을 지르며 거대(?)한 전차가 내다르고 집집이 적기를 꼬즌 처마미를 피노(疲勞)한 병정과 순경이 삼삼오오 동화의 세계를 동경하는 말업은 소년처럼 한강을 차자가고 잇다

『망햇다 이제 완전히 망한 것이다』하늘이 문허저도 솟아나올 구멍이 잇다고? 후천성 주류 중독에 걸린 바보 그러치 너는 바보다 과연 너는 처자를 사랑하는거냐? 너는 이승만대통령의 뒤를 따라갈 수 잇지 안흐냐? 너는 너의 과거에 사과인 권력잇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는 최종선에 탈 수 잇지 안흐냐? 네 목숨만 살아잇다면 너는 다시 더 절믄 안해를 어들수잇고 또 자식을 나을수 잇지안흐냐?

담배와 술의 휴식이업는 감옥이다

『마후라』로 뺨 올싸ㄴ『카추샤』가 실련의 방황을 한 도형수(徒刑囚)들의 백설지옥서백리아(白雪地獄西伯利亞)다 아오지(阿吾地)탄광이냐 순안수리조합(順安水利組合)이냐? 아니다 총살이다『그러치 인민재판이다』너는 사(死)의 운명의 방문을 현관에서 보기조케 사절해야한다 나는 가장의 위엄을 일치안흘려고 천연스럽게 웃으며 안해에게 내가 시켜 그가 정성끗 수집해둔 동아일보지『국제스파이 사건진상』『대한정치공작 대사건』올 비롯한 여러잡지게재글 전부를 내가 가지고잇던 신분증명서들과 함께 아궁이에 너허 불지로도록 하엿다. (계속)

(동아일보 1951년 6월 25일 2면)

 

공산당의 철쇄(鐵鎻)(중) – 수난 90일의 기록 / 최흥조(崔興朝)

아ㅂ집의 어중이도 붉은 완장을 두르고 나섯고 뒤ㅅ집의 뜨증이도 총을메고 나섯고 우(右) 옆집의 건달과 좌(左)엽집의 바보도 나서서 인민을 위하여 인민에 의한 인민의 공포 기아정치가 시작되엇다 나는 가장람누한 옷에 혹물칠을해서 입는것으로 인민정치에 순응하기로햇다 저공을 날르는 B29공중요새에 향하여 딱콩□을 쏘는 무식한 병정놈들은 나ㅈ밤을 가리지안코 푸른하늘로 총탄을 발사햇다 옆집 할머니가 유탄에 쓰러젓고 건는 동리(洞里) 어린애도 마저죽엇다

동리인심을 일치안헛스니 설마 동리서 나를 인민재판에 부치지는 안흘것이라고 은근히 자신을 가젓스나 형편을 살피려나갓다가 뜰어오는 안해는 누구가 붙들렷고 누구는 총살당햇다는 말뿐이다 29일부터 농립(農笠)을 폭 눌러쓰고 형진운동화를 줄줄끌며 죄업는 사람이라는 표정을 하면서 생존의 가능성을 위한 형세탐색의 방황이 시작되엇다

구물옷을 입은 털털이 병정들은 홍수처럼 북에서 서울로 흘러드러와 남으로 남으로 가는것만갓다

붉은병정들은 여기저기서 시민들을 모아노코 담배를 주면서 이북정치를 예찬하는 45분간의 좌담을 한다 어느놈이나 무식한 놈들이 꼭가튼말을 외운다 6월30일 한강을 사이는두고 전투는 격렬햇다 포탄이 날러오거나 폭탄이 떠러지거나 총탄이 흘러들어오면 내가죽던지 자식이 죽을것만갓다

저녀ㄱ에 나는 내가족과 떠러저사는 어머니를 뫼시고 효창□원으로 피난햇다 어머니는 김구씨 무더ㅁ옆으로 가야만 안전하다고 주장햇다 미군이 김구씨 무더ㅁ을 폭격할리 업다는것이 크리스챠ㄴ인그의 신념이다 수만의 피난민들이 김구씨 무덤주위에 자리를 깔고 공포에 사로잡혀잇다

다음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를 차자오는 엽집처녀를 맛낫다

『아저씨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어제밤에 인민군 열아믄놈이 아저씨이름을 적은 수첩을 들고와서 동리를 발카ㄱ 뒤젓서요?』안해의 입술이 파라케떠ㄴ다 나는 등에업엇던 어린것을 내려노코 그자리서 안해에게몃마디 말을 하고는헤여젓다 나는 이친구 저친구를 차저가서 밥을 어더먹고 방공구뎅이에서 잠재워달라고 애걸햇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자수하도록 권하는 우정을 베풀지언정『반동분자』인 나에게 한그릇의 리죽과 한장의 가마니를 줄려고 하지안헛다

유엔의 비행기가 서울상공에 나타나는 도수가 빈번해짐에 따라 고난을 격그면서 내가 살수잇슬것가튼 자신이 튼튼해젓다 우리들 동아일보 동인들은 거의 연락을 이루엇다 한장소를 정하여 매일 정보를 논핫고 사우들의 소식을 종합하엿다 지금은 놈들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몰으게된 장인갑 편집국장도 그장소에 나왓다 정균철 업무국장과 백운선 사진부장이 체포되어 악형을 밧고잇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무력무능한 우리들은 아무것도 할수업섯다

7월 16일 비나리는아침 유엔공군편대는 용산조폐공장과 부근일체를 맹폭하엿다 그날 오후5시에 책임인쇄를 명한 20억의 조선은증권을 반출할 예정이엇다는 정확한 정보가 일본 송에 의한 국제정세와 전황과 함께 우리들의 장소에오면 알수잇엇다 안해는 새벽에 오류동 20리길을 젓메ㄱ이를 업고 걸어가서 참외나 호박을 사다가 팔기도하고 용산경찰서 아ㅂ에서 부치게 장사도햇다 그수입으로 보리쌀을 살수업는때에는 치마와 저고리를 팔앗다

안해는 이리케해서 두되의쌀과 3천원의 현금을 동생을 시켜 내가잇는 장소로 보내어왓다 한강을넘어 달아나지안키로 작정할때 나는 내힘으로 서자를 부양하티라 생각햇스니 이제나의 존재는 안해의 부담을 가중하는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중학교사를 하던 동생은 하로아침 아무러치도 안흔듯이『어머니 안녕히 게십시요』라는 한마디의 인사를 남긴채 돌아오지 안헛다 어머니는 그날밤 동생이하는 수업시 의용군으로 붓들려나간 사실을 알엇다

8월 3일 돌아간 아버지의 1주기를 별빗아래서 어머니와 둘이서 치루고 나는 폭탄과 강제의용군을 피할려고『최동일』이라는 변명으로 처자를 데리고 8월 5일 새벽 마포에서 피난선을 타ㅅ다 UN공군기가 한강교와 용산철도공장을 맹폭하는 유쾌한 폭음과 흑연(黑煙)을 바라보면서 순풍에 돛을 단배는시체가 떠내려가는 한강을 흘러내려갓다

(동아일보 1951년 6월 26일 2면)

 

공산당의 철쇄(鐵鎻)(하) – 수난 90일의 기록 / 최흥조(崔興朝)

수로 백리를 와서 MI총을 멘 붉은 치안대에게 부들린것은 그날 저녁 어둠이 스며들 무려ㅂ이엇다 불심검문에 응답하는 내용과 내얼고ㄹ생김이 어울리지 안으며 남대문시장에서 파지장사를 햇다는『동무』의짐이 지나처 호화로운 점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김포군 하성면 봉성리가 예정한 피난지엿고 붓들린 나루터가 거게서 5리가량 떠러진 전류정이엇길래 우는안해와 어린것을 나루집에 두고 치안대본부로 끌려가서 하로밤 신문당하고 다음날 면소재지 인 마곡리 내무서로 송치되엇다

정규의 서원인 내무분주서주임이란 놈은 치안대원보다는 관대하여 비위에 맛도록 주서대엇더니 장차 거주할 형명(泂名)과 최동일이라는 성명과 가족원수를 요감시인명부에 적어노코 석방하는것이다 숨을 장소래야 송림(松林)과 논뚝박게업는 손바닥처럼 반드름한 70호미만의 강변부락에서 공산당의 철의 감시하의 수난의 생활이 시작되엇다 평양이 고향이 나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가장하엿스나 오다가다 한두마디 사투리가 나올적엔 불안햇다 방을 구하지 못하는동안 나루집 오양깐에 멍석을 깔고 잣다

20리이상 되는길을 왕복하여 안해가 옷과박구어오는 보리쌀로 하로 두끼니의 죽 외에 먹는것이 업는 어린것들은 논뚝에서 뫼뚜기를 잡아먹엇스나 영양부족으로 여위ㄹ대로 여위어 마침내 발병햇다 지게와낫을 빌려 논뚝의풍을비어 말리거나 강변에 떠내려오는 목편을주어 밥을지엇다 8월9일 전류정에서 피난선이 유엔공군기의 기총소사(機銃掃射)의 밥이되어 승객 50여명중 12명이 즉사하고 20여명이 중상한일이 잇슨후로 유엔공군기는 연일1척의 쪽배도 노치지안코 강변을 기총소사햇다 인천에 가까운 한강남안을 피난지로 택할직에 인천상륙작전을 예기하고 하로라도빨리 공산당의 철쇄에서 해방될려고 할것이지만 기총소사를 당할적마다 어린것들이 아우성치면 술그머니 후회조차햇다

밤마다 김포비행장과 인천과 서울과 문산방면 하늘에 붉은신호부ㄹ이올라ㅅ다 마치 지상을 흘으는 별이양 신호탄이 하늘로 올으면 어데선가 내다르는 유엔공군기는 그지점에 폭탄의 세례를 주는것이다

새벽네시서 네시반 사히에 반드시 한나의 경폭격기가 봉성리뒤ㅅ산을 저공으로 돌아가는 사실에 주의하기 시작한나는 새벽의 비밀을 알엇다 푸로페ㄹ러소리가 멀리사라진다음 개뚝을 쏜살가치 지나가는 검은그림자를 본것이다

뒤ㅅ산에서 소나무구루에 무든『파라슈트』를 발견한후로 내무서와 치안대는 봉성리에잇는 피난민을 의심하기 시작하엿다

강제보국대동원 이날르 심해갓다 낫이면 무성한 논가운데 숨어서 새쪼ㅅ는 아동들과 해를보냇고 발이면 저녀ㄱ에 서울로 돌아갓다고 일러두고 집뒤수ㅂ속으로 은신하는 방법도 한두번이지 하는 수업시 9월이 된후로 전후7회 저녀ㄱ에 강제동원되어 20리길을 걸어 캄캄한밤중에 굉이나 삽으로 산허리에 산병호를 파고 새벽이면 집으로 돌아왓다 내가잇는 동리 뒤산도 요색지대로 지정되어 인민군 열아믄놈이 주재하게되자이미 한치(일촌(一寸))정도로 자란수염과 근시경을 벗은 정기일흔 눈으로 더욱 바보처럼며대며 무식하고 가난하고 병들엇스나 유순한 인간으로 보일려고 노력햇다

인민군놈들은 동리는 발카ㄱ뒤저 위협발포를 하면서 12세이상의 남녀노소들 뒤ㅅ산으로 총동원시켯다 8월하순부터 인민군은 김포서 강화로가는 도로를따리 매일수천명이 북으로 이동햇다 가까워지는 포성과 치열해가는 폭격과 UN공군기들의 동향으로 인천상륙의 날이 임박해오는것을 추측한 나는 양의때처럼 쫓기며 무언의 항거를 여실히 표시하는 농민의 틈에 외어 산으로갓다

놈들은 이제 백서에 백의의 남녀노소를 산허리에 일렬로 세워노코 무지의 반항인 산병호를 파고 잇는것이다『그라밍』함재기(艦載機)들이 산붕오리를 스치듯 지나가며 손수건을 흔든다 농민들은 비행기를 처다본다 9월16일 캄?한새벽 천명에 달하는 인민군놈들이 봉성리를 거처 한강넘어로 패주(敗走)햇다

다음 17일 하오 남로당면당부부위원장이란놈이 동리에와서 군경의 가족과 피난민의 명부를 만들어갓다 학살을 올치 이놈들이 이제 할일이란 학살뿐이렷다 나는 동민들에게 10리발루산리로 치료를 바드러간다고 말하고 논뚝을발아 뒤산 골작이를 헤처 어부정 서방의집 방공호에 피신햇다 전표의 하로밤이 지낫다

『만세 만세 만세』어데선가 만세소리가 들려들온다 설마 인민군놈들이야 아니려니 햇스나 철쇄 90일 억눌릴대로 억눌린 나는 방공호속에서 더욱 몸을 움추렷다

『아버지 나오세요 태극기를 달앗서요』일곱살난 큰아들이 나르찻는다 9월18일 아, 공산당의 철쇄는 끈허젓다

(동아일보 1951년 6월 28일 2면)

 

비화(秘話) 제1공화국 <445> 第16話 언론(言論)탄압 ②

「방위군(防衛軍)」김대운(金大運)사건으로「동아(東亞)」필화(筆禍)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 적용 기자(記者)·주필(主筆) 기소(起訴)

〃미측(美側)에 구명자금(救命資金) 제공〃

1952년 5·26정치파동(政治波動)에 이르는 한 햇 동안에는 숱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51년 3월 하순 전시비상계엄(戰時非常戒嚴)이 풀린 직후부터 1천여 명의 장정(壯丁)을 얼어 죽고 굶어 죽게 한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을 비롯,거창 양민(良民)학살사건 벽보(壁報)사건 등이 잇따라 터진 것이다.

권력자(權力者)의 힁포와 정부(政府)의 부패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필봉은 더욱 날카로와졌다. 「국민방위군사건」의 여파(餘波)로 일어난 김대운(金大運)사건 필화(筆禍)도 그 하나였다.

이 필화(筆禍)는 51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東亞日報) 2면(面) 톱에「김대운조서발표사건(金大運調書發表事件)-중대(重大)한 국제문제제기(國際問題提起)」제하(題下)의 기사(記事)에서 발단되었다.

1천여 명의 장정(壯丁)을 엄동설한에 굶어 죽게 하고 급기야는 이시영(李始榮)부통령의 사임(辭任)까지 가져온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사건에서 사형(死刑)이 확정된 윤익헌(尹益憲)(방위군(防衛軍)부사령관)의 구명운동비(救命運動費)조로 방위군 정훈공작원(防衛軍政訓工作員)인 김대운(金大運)이 윤(尹)의 처(妻)로부터 7천만 환을 받아「무초」주한미대사(駐韓美大使)를 비롯한 미(美)8군(軍) 부사령관「콜터」중장(中將) 등 5명의 미 고위층(美高位層)에 주었다는 내용의 김대운(金大運) 진술의 경찰조서(警察調書)를 내무부(內務部)가 국회(國會)에 보고(報告)했는데 이에 대해서「무초」미 대사(美大使)가 우리 정부(政府)에 항의서한(抗議書翰)을 보내왔다는 것이 기사(記事)의 내용이었다.

공보처(公報處)는 즉각 동아일보(東亞日報)에 항의공문(抗議公文)을 보내 29일자 2면(面)에 그 기사와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크기로 기사를 취소(取消)하도록 요구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이러한 취소 요구를 묵살했다. 그렇다고 당국(當局)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검찰(檢察)은 10월 4일과 8일 두차례에 걸쳐 고재욱(高在旭)주필과 담당기자인 최흥조(崔興朝) 기자를 소환했다. 이 필화(筆禍)사건은 고(高) 주필과 최(崔) 기자의 소환에만 그치지 않고 바로 정가(政街)로 비화(飛火)했다. 5월 28일에는「김대운조서발표(金大運調書發表)사건」을 놓고 이순용(李淳鎔) 내무장관과 장택상(張澤相) 국회부의장 사이에 성명전(聲明戰)이 벌어진 것이다.

〃공식발표(公式發表) 안했다〃 발뺌

이(李)내무-『김대운고백서(金大運告白書)는 국회(國會)의 요청에 의하여 참고자료(參考資料)로서 극비(極秘)로 국회에 송부(送付)했을 뿐이지 공식(公式)으로는 발표한 일이 없다. 외국대사관(外國大使館)에서 본건(本件)에 관하여 항의(抗議)가 있었다고 모 신문(某新聞)(東亞日報)에 보도됐으나 내무부(內務部)나 외무부(外務部)로서는 이런 항의서(抗議書)를 접수한일이 없으니 일반은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

이러한 이(李) 내무의 발언에 장택상(張澤相) 부의장은 펄쩍뛰었다. 『내무장관(內務長官)이 발표한 담화(談話)를 보면 김대운고백서(金大運告白書)는 국회(國會) 요청에 의하여 참고자료(參考資料)로 국회(國會)에 극비(極秘))로 송부한 것이고 공식으로 발표한 일이 없다고 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묵과(黙過)하기 어렵다. 내무장관(內務長官)이 국회 공개회의(公開會議) 석상에서 보고한 것을 극비(極秘) 운운함은 무슨 소린가. -국회속기록(國會速記錄)을 보아도 알지만 내무장관(內務長官)이 말하기를 김대운자백서(金大運自白書)는 서면(書面)으로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그 서면(書面)이 문제의 자백서(自白書)가 아닌가. 』

내무부(內務部)쪽은 발뺌을 하려 했지만 미대사관(美大使館)「라이트너」참사관(參事官)이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을 방문, 항의(抗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때 개입한 것이 검찰(檢察)이었다.

〃취재원(取材源) 밝힐 수 없다〃

검찰(檢察)은 최(崔) 기자에게 누설한 정부(政府) 관리의 성명을 밝히도록 끈질기게 요구했다. 「동아(東亞)」의 최(崔)기자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취재원(取材源)(뉴우스 소스)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취재원을 보호하는 것은 언론(言論)의 초보적(初步的) 상식이기 때문이었다.

20여일이 지난 10월31일 정부(政府)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고재욱(高在旭) 주필과 최흥조(崔興朝) 기자를 다시 여러차례 소환, 신문한 끝에 11월 9일 광문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 제11조와 제25조 및 형법(刑法) 제105조 3항을 적용, 두사람을 불구속기소했다. 사건자체는 덮어둔 채 신문을 허위사실 유포로 몰아 붙였다.

도대체 이들에 대한 기소(起訴) 이유는 무엇인가.

『소위 방위군(防衛軍)사건에 관련됐던 윤익헌(尹益憲)을 구출하기 위하여「무초」주한미대사(駐韓美大使)「그린」대령(大領) 등을 움직여 이들로 하여금 대통령(大統領)에게 윤익헌(尹益憲)의 구명(救命)운동을 하도록 의뢰할 목적으로「그린」대령(大領)에게 금품(金品)을 제공했다는 현재 공판(公判)에 계류 중인 피고인 김대운(金大運)에 대한 심문조사 내용이 지상에 발표되자 9월 21일경「라이트너」가 이순용 내무장관(內務長官)을 방문,「지금 무초 대사(大使)는 일본(日本)에 가고 없는 때에 김대운(金大運) 조사 내용이 지상(紙上)에 발표됐는데 이 기밀(機密)이 어떻게 누설됐는가」라고 조회 정도의 문의를 했던 것에도 불구하고-미국(美國)과의 국제감정(國際感情)을 일으키어 원조와 참전(參戰)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하는 인심혼란(人心混亂)을 유발케 하는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는 동시에 미국(美國)과의 국제(國際)교의(交誼)를 저해할 사항을 기재한것이다. 』기소(起訴) 이유는 대체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면 검찰(檢察)이 고재욱(高在旭) 최흥조(崔興朝) 두 언론인에게 적용한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과 형법(刑法)의 조항들은 어떤 것인가.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가 제정(制定)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 ▲제11조 황실(皇室)의 존엄(尊嚴)을 모독하고 또는 국헌(國憲)을 문란케 하고 혹은 국제(國際)교의를 저해하는 사항을 기재(記載)할 수 없음. ▲제25조 제11조에 위반한 경우에는 발행인(發行人) 편집인(編輯人) 인쇄인(印刷人)을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고 그 범죄(犯罪)에 공용(供用)한 기계를 몰수(沒收)함.

◇형법(刑法) ▲제105조 3항 전시천재(戰時天災) 기타의 사변(事變)에 제하여 인심(人心)의혹란(惑亂) 또는 경제상(經濟上)의 혼란(混亂)을 유발할 허위의 사실을 유포(流布)한 자(者)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또는 3천원(千圓) 이하의 벌금에 처함.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이란 한일합병(韓日合倂) 전인 1907년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가 이완용내각(李完用內閣)을 시켜 만들어낸 법률(法律) 제1호였다.

내부(內部)대신의 허가제(許可制)는 실시되고 있던 것을 법제화(法制化)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그 벌칙(罰則)에 있어서 발행정지권(發行停止權)을 비롯, 벌금형(罰金刑)과 동시에 체형(體刑)을 제정한 것과 기계를 몰수한다는 가장 혹독한 것으로 사실은 통감부(統監府)가 한국민(韓國民)의 언론(言論)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해방된 지 6년이나 지난 이 땅에서 식민지시대(植民地時代)의 악법(惡法)이 그대로 살아 다시 언론(言論)을 괴롭힌 것이었다.
(이부영(李富榮)기자)

(동아일보 1974년 12월 25일 4면)

 

[나의 기자시절] 그때와 지금의 記者像_ 崔興朝

力테스트에 合格하고 漢城日報에 入社

나는 波觸이 많은 生涯를 살았기에 젊어서 술한 職場을 轉轉하는 동안 거의 20餘에 達하는 職種의 경험이 있지만 1945년 8.15 解放 되던 해에 新聞記者가 된 後로 지금은 他意에 依해서 은퇴를 강요당한 狀態에서도 60生涯를 회고한 적에 新聞記者가 天職이었다고 생각하며 어느 갸륵한 言論企業人이 있어서 지금 나를 雇傭 한다며는 옛날처럼 一線取材記者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돋보기 안경을 끼고 能히 校正記者로 從事하되 20代 靑年에게 뒤지지 않을 情熱과 意欲이 있다。
『우리는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뭐 어쩔 도리가 있겠소? 이제 우리의 세상은 끝난 것이 아니겠소?』
歲月도 가고 親舊들도 하나 둘 가고 우리의 영광도 다 가버린 虛無속에서 自歎하는 말 들이었다。
그러나 不死鳥의 傳說을 想起할 때에 新聞記者로 終身하는 方法으로 나는 나의 「新聞記者截悔錄」을 써서 自費出版할 計劃을 세우고 스스로. 나는 新聞記者의 天職에 忠實하였노라고 自負하기로 하였다 。
내가 海州에서 黃海民報에 參與하다가. 共産黨에 對抗하는 民主黨組織에 主導的 役割을 하고 反託鬪爭의 끝에 咸大動 金嘉鎭과 함께 共産黨과 蘇聯主屯軍司令部의 逮捕令에 쫓겨 線을 南下해서 서울로 온 것은 解放 다음해인 1946年 2月 中旬이었다.
無事히 脫出에 成功한 우리들은 各自 圖生하기로 하여 나는 그달 洲日에 創刊된 漢城日報의 記者로 入社하였다. 社長은 安在鴻이고 主筆에 李這根、編輯局長은 梁在厦로서 지금의 大韓公論社인 前京城日報 社施設을 引受하여 東亞日報、朝鮮日報 와 함께 3社가 서울 公印社라는 機構를 編成하여 新聞을 發刊했는데 社屋이 있는 朝鮮日報社는 自社에서 編輯하여 印刷施設만 利用하다가 곧 輪轉機 1臺를 自社로 옮겨 떨어져 나갔으므로 서울 公印社는 漢城日報와 東亞日報의 兩社만이 남아서 新聞을 發刊하였다。
나는 海州에서 함께 南下한 咸大動의 實兄인 當時의 韓國民主黨 宣傅部長 咸尙動 氏 의 紹介로 李這根 氏를 그의 自宅으로 찾아가 만나서 履歷書 한통을 내놓고 漢城日報의 記者로 採用해 달라고 請했다。
며칠이 지나갔건만 李 主筆에게서는 아무련 消息도 없으므로 나는 人社交涉이 잘 안된 것으로 짐작하고 家兄을 通하여 普成專門(高麗大學) 同窓인 安在鴻 氏의 長男 最鋪 氏를 내세워 다시 李 主筆에 차請을 넣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卽日 連絡이 오기를 筆力을 알아야 하겠으니 무엇이든 몇 篇의 글을 提出하라는 것이다 。나:는 卽席에서 짧은 隨筆文 몇 편을 써서 주었더니 그 다음날 出社하라는 通知가 와서 李 主筆을 만난즉 그것은 3月8日이었다.

安在鴻社長의 秘書兼務

그런데 出社한지 사훌째 되는 10日에 李 主筆은 나를 그의 방으로 부르더니 대뜸 社會部 記者로 일하면서 社長 安在鴻 氏의 秘書를 雜務하라는 것이다。
나는 당황하였다。海州에서 朝鮮民主黨을 創建하여 政治活動에도 參與해 보았으나 이제 앞으로 一生을 記菩生活에 專念하며 餘裕가 생가면 文學活動을 하리라고 마음에 작정한터에 新聞社 社長이기는 하나 차라리 政治活動에 더 執中해있는 安在鴻 氏의 秘書가 된다는 것은 내 人生設計圖에 커다란 修正을 加하는 것이라고 判斷할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卽席에서 可否를 定하는 대신에 3日間 餘裕를 請하고 물러나왔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한 나는 38線을 알몸으로 南下한 처지에서 社長의 秘書를 兼하면 우리집에서 값없이 宿食의 提供을 받는다는 點이 당장 生計에 도움이 될 것을 計算하에 受若하기로 하고 이틀만에 安在鴻氏의 敦岩洞 自宅 문간방을 얻어 入住하고 政治活勤과 新聞社社長일을 合쳐 寸暇도 없이 오고가는 그의 身邊올 지키며 漢 城日報記者로서 每^! 記事를 쓰는 일에 餘念이 없는 奇異한 生活이 시작되었다.
두달이 지난 5月10日에 漢城日報 記者이던 나는 1924年 第1次 朝鮮共産黨의 劍黨멤버로서 解放後大韓民國政府의 農林部長官과 國會副議長을 歷任했고 뒤에 進步黨을 創黨하여 反李承娩 鬪爭의 先鋒이 되던 曹奉岩의 運命을 바꾸는 衝激的이며 觸情的인 特派員 리포트를 漢城日報 紙上에 執筆揭載하는 契機를 만들었다.
共産黨의 合法活動을 許容하는 美軍政 下에서 朝鮮共産黨이 領導하는 左翼과 韓國 民主黨을 主軸으로 하는 反共右霞間의 政權鬪爭이 하루도 쉴 날이 없이 피를 훌리며 深化되어 가던 때에 朴憲永의 「서울 콩구릅」이 黨權을 쥔 朝鮮共産黨은 大先輩 이기는 하나 日帝下에서 變節墜落하여 朝鮮總督府警務局의 課者도 되어있다는 嫌疑로 曹奉岩은 解放祖國의 再建共産黨 中央組織에서 脫落시켜 仁川市民戰에서 命脈을 維持하게 되었으므로 害奉岩의 存在는 共産黨界에서는 勿論政界에서 全혀 擧論이 되지않는 無名의 人物이었다. 그런데 江華島 出身으로서 일찌기 日帝 江華郡廳의 臨時雇員이기도 하다가 1924年 서울 中國料亭 雅敍園에서 發起한 所謂 第1次朝 鮮共.黨에 加擔하여 뒤에 「모스크바」 勞力者大學에 進學하고 中國大陸을 轉轉하며 責任있는 共産黨일꾼으로서 反日運動에 從事하였으나 日帝의 彈壓과 轉向政策에 屈하여 方向轉換을 官一言하고 朝鮮總督府에 屈從한 때문에 墜落幹部로 轉落하여 빛을 보지 못하던 書奉岩이 政界에 頭 角올 나타내는 劇的 契機가 만들어 졌다.
卽 解放祖國의 政治中央 舞臺에 進出하지 못하고 仁川에서 懲憤의 날을 보내야했던 曹奉岩은 再起의 길을 열 생각에서 그에게 加해지는 一切의 嫌疑에 對한 辯白書를 自己批判의 形式으로 記錄하여 黨을 領導하는 朴憲永에게 人便으로 傅達하게 되었다. 무던히 긴 書翰文을 품에 지니고 仁川을 떠나서 서울로 가던 曹 奉岩의 메신저가 京仁街道로 富平에 當到하였을 때에 美軍 MP가 이 殊常한 靑年을 檢問하다가 품에 지닌 朴憲永에게 보내는 편지 뭉치를 押收하게 되었다. 美軍 MP에게 押收된 曺奉岩의 自己批判文은 그 內容이 朝鮮共産黨의 歷史的 內紛에 言及하였고 또 朴憲永의 黨指導路線에 對한 批評도 包含되어 興昧津津한 바가 있는데 美軍 MP側은 或 參考로 하라고 이 押收書翰文을 當時 昌德宮에 事務所를 두었던 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의 秘書局에 주었다.
秘書局長은 民主議院의 議長이던 李承晩 博士의 個人秘書이기도 한 尹致喫이었는데 그는 卽時 曺奉岩의 書翰文을 油印하여 「朴憲永 동무에게」 題下의 公開書翰인듯 꾸며 都下 新聞社에 配布하였고 在麗 新聞들인 漢城日報 大東新聞 東亞日報 等에는 特請하여 書翰 全文을 揭載하도록 하였다.
新聞通信界도 左翼이 그 豐富한 財源을 驅使하여 거의 靈斷하던 때이었으므로 害奉 岩의 書翰 公開가 反共政略임을 알아서 모두 黙殺한가운데 右翼新聞으로 自處하는 漢城、大東、東亞 等의 3個紙는 備情的으로 報道한 것이다.
그것은 左輿에게는 衝激이었고 右翼에게는 鼓舞的인 缺報이었다。

曹奉岩의 運命轉換시킨 나의 特派員리포트

漢城日報의 編韓局長은 나와 함께 海州에서 反共反託鬪爭을 하다가 南下한 小說家 咸大動 氏였다. 3月8日에 漢城日報社 記者로 入社하여 安在鴻 社長의 秘書를 兼한 나는 곧 編 輯局長梁在厦와 그가 經營하던 新朝鮮報에서 모두 데리고 온 編輯局記者들이 거의 全員이 共産黨員이거나 그 指令에 움직이는 푸락치임을 알게되었고 서울에 온 後로 할일 없이 生計의 길을 찾던 咸大動 氏가 元來 安在鴻 社長과는 朝鮮日報에서 같이 있으며 사랑을 받아온 愛弟子였으므로 그의 請에 應하여 나는 安 社長을 움직여 梁在厦一 派를 退陣케 하고 咸大動 氏를 編輯局長에 앉게 함으로써 그등안 灰色的 論調로 消極的 反抗의 빛을 감추지 못하던 漢城日報를 急轉直下에 猛烈한 反共前衝 新聞으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咸大動 氏의 反共情熱은 可觀일 때가 있어서 나중에 左右合作運動이 시작되있을 적에 그는 決코 左在合作라 하지 않았고 右左合作이라고 固執함으로써 대개가 亦是 左翼影響下에 있던 工場植宇工과 衝突하는 일조차 있었다.
平日과 다름없이 아침에 敦岩洞 自宅을 나와 昌德宮 民主議院 會議에 參席하고 正午가 지나서 新聞社에 들려 點心食事를 하고 또 몸소 社說을 執筆하기도 하는 安 社長의 도시락가방을 들고 民主議院에서 待期하다가 함께 新聞社에 當到하자 編輯局長 咸大動은 나더러 仁川에 가서 寶奉岩을 인터뷰해 달라는 것이다. 編職局 記者가 많지만 政略的 記事를 만들서야 할 曹奉岩 探訪은 꼭 내가 맡아야 하겠다는 것 이 다. 나는 아무래도 좋지만 安在鴻 社長은 잠시도 나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拒絶하였으나 咸 局長의 說得하여 當日 歸京한다는 條件下에 나는 未知의 共産主義者 曹奉岩을 만나 그가 朴憲永에게 보낸 書翰이 公開된 後의 狀況을 取材하려고 것 곧 仁川으로 出發하였다。
初行인 仁川에 到着한 나는 곧 民主主義民族戰線 仁川支部가 있는 中町을 찾아 갔다. 午後 2時40分- 그러나 曺奉岩은 不在中이었다. 기다리기 20分만에 나타난 그는 來意를 告하는 내게 對하여 自己는 曺奉岩이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하고는 事務室안으로 들어갔고 뒤따라 들어가려는 나를 10餘名의 靑年들이 가로막고 暴力을 쓸 姿勢로 나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曺奉岩 인터뷰는 完全히 失敗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足하다고 計算하고 곧 서울로 돌아오자 新聞社 社長室내 자리에 앉아서 r曹奉岩 氏를 만나 보고」 題下의 連載 3回分의 會見記를 썼다.

曺奉岩 會見 拒絶 당해도 만들어낸 會見記

이것은 全혀 政治的 謀略劇에 말려든 報道요 妄發이었다. 한 瞬間 본 曹奉岩을 내가 이미 만나 본 金曰成과 憲永에 比較하여 越等히 그 人物을 讚揚했고 曹奉岩을 기다리던 20分 間에 民戰 仁川支部事務所에 있던 靑年들과의 對話를 記錄하고 寶奉岩에게 提示할 14個 項目의 質問을 列擧하고 結局 曺奉岩은 朴憲永에게 보낸 私 信이 公開된 後로 難處해진 그의 立場에서 答辯을 保留하며 公開된 그의 私信 內容에 서 14個 質問에 對한 答을 推斷할 수 있다고 暗示한것처럼 꾸몄다.
嚴密히 따지면 내가 거짓말을 꾸민 것은 아니고 巧妙한 붓장난으로 曲筆을 한셈 이었다.
漢城日報는 11日宇부터 3日間에 걸쳐 1面紙上에 大大的으로 그리고 煽動的으로 揭載하였다.「曺奉岩을 만나보고」 題下에 「仁川에서 本社 特派員 崔興範가」 署名한이 會見記는 旋風을 일으켰다。朝鮮共産黨은 발칵 뒤집혔다. 激怒한 朴憲永은 曺奉岩을 呼出하여 前京鄕新聞社屋인 精販社黨 本部에서 國內記者들을 招請하여 曺奉岩의 記者會見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曹奉岩은 漢城日報의 崔興朝라는 記者가 나를 만났다고 新聞에 會見記를 쓰고 있지만 自己는 만난 일이 없고 또 앞서 朴憲永에게 보낸 私信을 中間에서 奪取하여 新聞 紙上에 公開하게 한 美軍憲兵隊를 國際裁判所에 告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漢城日報가 自信이 있는 態度로 會見 記2回와 3回分을 連載하자 참을수 없는 激怒에 사로잡혀 曹奉岩을 不信하는 方向으로 黨論을 集約한 朴憲永의 朝鮮共産黨은 曹奉岩을 離鐵處分하고만 것 이다。
朝鮮共産黨에서 쫓겨난 曹奉岩은 上京하여 民主主義獨立戰線을 만들어 獨自的 政治活動을 하다가 1948年 總選擧에 仁川에서 立候補하여 制憲議員에 當選되고 곧 李承晩 大統領에 依하여 初代 農林部長官에 任命되었다가 1950년 5.30 總選擧에서 다시 第2代 國會議員에 當選되었고 6.25動亂으로 釜山避難後에는 國會副議長에 當選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政界에서 異質的 存在로 恒時 警戒를 받아왔다。
1952年 2月의 일이다。
當時 東亞日報 取材部長이던 나는 國會 副議長室로 曺奉岩을 訪問했다. 「長官을 그만둔 뒤」 題下의 企劃記事를 쓰기 爲해서 異質的 存在로서 企劃記事의 양념이 될 수 섰기에 曹奉岩을 들먹이는 것은 新聞商術上 有利한 것이었다.
曺奉岩과 나는 그後 1도 決코 敵對位置에 서지 않았고 때로는 그의 招請으로 酒席에서 對座하는 關ㅡ係를 維持했다。그러나 끝내 그는 進步黨事件이라고 불리는 對南間課事件에 걸려 絞首臺의 이슬로 波爛많은 ㅡ生에 幕을 내렸다.
曺奉岩 自身이 다를 怨妄하듯 漢城日報 特派員으로 仁川에서 만났던 一瞬間의 對面을 潤色하여 쓴 나의 謀略的인 一文은 그가 朝鮮共産黨에서 獄黨處分當하는 契機가 되었고 그의 政治行路를 뒤바꾸어 놓은 셈이다.
나는 이제 나 스스로 이 일에 對 한 評價를 내릴수는 없으나 鐵悔하려는 것이며 내 徵悔는 世上을 사는 어느 사람올 向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眞實로 믿는 나의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 이다。

東亞日報 記事로 「光武新聞 紙法」과 鬪爭

波漏이 겹쌓이는 내 生涯이고 보니 新聞記菩로서도 決코 順坦하지 못했고 解放 後의 激動期에 一麗 記者를 하는 가운데서 내가 겪은 事件은 거의 모두가 衝激의 壓縮版이 있다。漢城日報의 政治部長을 지낸 一年間은 政治하는 安在鴻 社長의 秘書를 兼하여 그의 政治文書의 代筆과 地方遊說의 代役도 맡아야 하였으므로 1946 年 當時의 政界의 面을 무던히 깊이 알았고 또 許多한 事件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制限된 紙面에다 記錄할 수가 없으므로 내가 計劃하고 있는 「新聞記者職悔錄」에 收錄하기로 하고 남는 紙面에 東亞日報 取材部長 當時에 겪어야 했던 숱한 受難 中에서 光武新聞紙法에 걸린 筆禍事件과 6.25戰時 非常戒嚴令下에서 軍이 施行하던 新聞檢閱制를 李承晩 大統領과 談判하여 卽日 解除시킨 일을 적기로 한다。
1952年 2月26日에 釜山 地方法院 判事 姜顔熙 氏는 東亞日報社 取材部長인 나와 新聞紙에 署名한 編輯人인 主筆 高在旭 氏를 光武新聞紙法과 刑法第 百五條(人心惑亂罪) 違反嫌疑의 裁判을 하고자 四號法廷에 召喚하였다.
當時의 檢察總長이던 徐相懼 氏의 特命으로 이 事件을 樹當하여 起訴한 大邱地檢의 次長檢事 金仕龍 氏가 立會하였고 우리 兩 被告人의 篇護人으로 東亞日報社長 崔斗善 氏가 依賴한 表廷炫 梁炳日 두 辯護士가 出席하고 新聞記者들과 政府機關員 들이 傍聽하는 가운데서 公判은 進行되었다.
判事는 먼저 나에 對한 人定訊問을 하고 이어서 高在旭 氏에 對하여도 人定訊問을 하였다。約 40分이 所要되었다.
이때 우리 辯護人은 判事에게 辯論 準備가 되지 않았다는 理由로 公判을 延期할것을 要求하자 判事는 檢事의 同意를 얻어 卽席에서 休廷을 宣布하였다。
이것은 나의 法廷鬪爭의 한 方法이었다. 왜냐하면 檢察緣長의 特命으로 우리들을 억지로 起訴하자 憤激한 國會는 나에 對한 全혀 不當한 彈壓을 除去하는 方法으로 나를 起訴한 光武新聞紙法과 刑法第百五條를 廢棄하는 法律案을 國會에 提案하였는데 當時의 政治 및 輿論의 趣勢로 보아서 이 두個의 法律이 廢棄될 것이 自明하므로 나는 이 따위 日本植民統治의 殘津 法律로 裁判을 받을 理由가 없다고 內心 코웃음을 치고 있었으므로 公判前에 두 辯護士에게 公判延期를 申請하도록 依賴하였던 것이다。

國民防衛軍事件의 救命運動 費報道와 그 波紋

果然 3月 19日에 開會된 國會本會議는 東亞日報를 彈壓하려던 光武新聞紙法을 在席1 1 8名中 贊成 85 반대 o票로 廢棄시킴으로써 東亞日報를 起 訴한 法 의 하나는 永遠히 사라졌고 나머지 日本刑法 第百五條에 對해서는 그 當時草 案한 우리나라의 新 刑法案에 넣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判事가 굳이 이 法條文하나를 固執하여 裁判을 强行할 理由가 없다는 것이 世論이고 보매 동아일보에 對한 訴追는 第1回 公判에서 人定訊問을 한 것로 끝난 셈이다. 그後 3年餘가 지난 1955年 9月 24日에 이르러 釜山地方法院은 公訴 廢却處令을 通告해 옴으로써 東亞日報는 獄苦를 치르거나 停刊, 廢刊處令을 當하는 일이 없이 許多한 左翼新聞을 廢刊시키는데에 傳家寶刀처럼 活用해온 光武新聞紙法의 亡靈은 退治된 셈이다.
그러면 東亞日報의 光武新聞紙法筆禍事件의 顚未은 어떠한가.
그것은 정녕 光武新聞紙法에 依한 橫幅을 極한 테러리즘이었다.
나중에 다 밝혀진 일이지만 1952年의 政治波動이 다가오던 즈음에 當時의 內務部長官은 東亞日報를 去勢懷柔하는 手段으로 나를 彈壓할 것이냐 買收할 것이냐의 두 方法 中에서 온당한 方法으로 懷柔策을 쓰기로 하여 매달 5百萬圓 程度의 돈을 주어 무마하기로 方針을 세웠었다고 하지만 나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나를 不法監禁하고 죽여버릴 計劃이었는데 내가 獨斷하여 東亞日報社를 물러나왔으므로 天運이 强하다고 빈정거린 일도 있었을 程度로 敏治的 葛藤이 激化하면서 東亞日報에 對한 彈壓은 加重되었고 그 彈壓들은 모두가 取材部長인 내가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主筆 兼 編輯局長이던 金三奎 氏가 日本으로 건너간後 좀처럼 돌아올 氣味가 보이지 않아 10餘名의 記者로 構成되는 東亞日報 編輯局은 取材部長인 내가 實質的責任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고 그 貴任이라는 것은 참으로 힘에 겨운 일이었다。激務 가운데서 關係處의 問招와 脅迫을 받아야 했는데 그것은 平均 1週에 한번이다가 5月 政治波動이 臨迫하면서는 두번으로 倍加된 것이다 。
그 當時에 取材部長이던 나는 東亞日報社에서 月給 38萬圓을 받았는데 그 金額은 百對一貨 幣改革으로 3,800百圖이고. 지금의 貨幣는10對1이 되었으니까 380원인데 그 當時의 쌀값은 한가마에 20萬圓이었다. 지금 回顧하더라도 나는 實로 너무나 엄청난 心身의 苦役을 당했고 그러한 苦役이 쌓이고 쌓인 끝에 내 六體는 比較的 빨리 老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問題의 筆禍事件은 政治波動이 일어나기 前해인 1951年 9月 24日 午前에 發端하였 다. 나는 平素와 다름없이 집에서 곧바로 臨時中央廳인 慶南道廳舍에 取材하러 나갔다.
거의 每日 만나며 또 그는 官吏이고 나는 新聞記者이기 때문메 서로 利用하는 關係로서가 아니고 그런 것을 떠나서 무척 親하고 서로 信賴하는 사이인 한 高位官吏를 만나서 그가 내게 귀뜀해주는 重大한 뉴스소스를 잡았다. 그 內容은 國民防衛軍事件에 關聯하여 金大運이라는 사람이 死刑囚 尹益憲의 妻에게서 巨額의 救命運動費를 받아서 實際로 美軍人 某大領에게 주었다는 金大連의 一方的인 警察 陳述內容을 內務部 次官이 9月8日의 國會 本會議에서 報告한 結果로 이 事實이 公開된데 對하여 駐韓美大使館에서 外交上 抗議를 提起하였으므로 內務部長官이나 次官中의 한 사람이 貴任을 지게 되었다는 事實이다. 이것은 當時 國民防衛軍事件의 後績 뉴스를 要求하는 讀者들에게 알려줄 價値가 있다고 判斷한 나는 이 소스가 親舊이면서 또 그 職位上 信賴할수 있는 官吏가 은근히 報道해 줄 것을 請하는 눈치로 내게 말하는 것이길래 東亞日報 2面 紙上에 大大的으로 報道한 것 이다.
新聞이 나가자 內務部長官이 펄펄 뛰며 抗議해 왔고 公報處長은 公翰으로 이 記事가 虛傷報道이니 取消하되 指定하는 날짜에 指定하는 位置에 指楚하는 크기로 全文을 取消하라고 要求해왔다.
『흥! 東亞日報가 政府에 識屈된 官報인줄 아는가?』
코웃음을 친 나와 東亞日報는 沈黙으로 對抗하였다.
10月2日이 되었다。
釜山地檢은 나와 高在旭 氏에 召喚狀을 보냈다. 檢察은 內務部長官의 要求에 應하여 公報處長이 正式으로 檢察總長에게 提出한 告訴狀을 接受한 것이다. 나와 編輯人 高在旭 氏는 指定된 4日에 檢事廷에 나갔다。서울高檢 次長檢事 朴天一、著山地檢部長檢事 金績沫 雨氏로 된 合同搜査班은 愼重하고도 强力하게 나를 訊問하되 여러가지 追窮끝에 結局 뉴스 소스를 대라는 것이다. 나는 頑强하게 拒否하였다. 合同搜査班은 8日에 다시 나와 高在旭 氏를 召喚하여 亦是 소스를 대면 그것으로 모든 일을 圓滿히 解決지을 터이니 대라고 타이르고 얼르고 간청하는 온갖 手段을 쓰는 것이다. 나는 如前히 頑强히 拒否하며 新聞記者가 뉴스소스의 秘密을 지켜야만 하는 原則에 對하여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說明함으로써 應酬하였다.
그런데 단 두번을 召喚하여 끈질기게 追窮하며 소스를 알아내려던 合同搜奄班은 깨끗이 斷念하였는지 그 後로는 다시 召喚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달 31日에 가서 이번에는 大邱地檢에서 온 金仕龍 檢事가 召喚하는 것이다。나는 혼자서 檢事廷에 나갔다. 나중에 안 일인데 朴天一 金續沫 兩 檢事는 2回에 걸쳐 나를 召喚訊問한 結果 不起訴意見을 붙여 檢察總長에게 報告하였더니 徐相懼 總長은 怒發大發하며 이번에는 멀리 大邱에서 檢寓를 불러다가 如何間에 起訴하라고 號令한 것이었다.
나는 11月3日에 다시 召喚되어 茶山地方 檢事長室에 나갔다. 金仕龍 檢車는 亦是 나에게 「소스」룰 밝히라고 要求하였는데 내가 始終如一 拒否하자 그는 난데없이 빙그레 웃으며 나와 握手를 나누고 鄭重히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달 9日宇로 不拘束起訴된 것이다.
내가 起訴된 事實이 東亞日報에 報道되자 激憤한 國會는 起訴된지 한주일째 되는 15日에 金正植 議員 外 26議員의 渾箸로 「光武 11年 新聞紙法廢棄에 關한 法律案」을 提案하였고 이어서 20日에는 徐珉濠議員 外 38韻員의 連署로 日本刑法 第百五條를 없이 하려는 「刑法中改正法律案」을 提案하였다 。
이리하여 내게 加해진 光武新聞紙法의 테러리즘은 끝난 것이다.
1950年 6.25動亂에 釜山으로 避難하였던 李承晩 大統領은 9.28 서울收復으로 그의 官邸인 景武臺로 되돌아왔다. 그때에 몇몇 新聞이 서울에서 復刊 되었다. 그해 10月 中旬의 일이다.
國軍과 유엔軍은 38線을 넘어 平壤을 占領하고 乘勝長驅 鳴綠江을 向해 進擊하여 國土 統一의 부푼 꿈이 막 實現되려던 무렵이었다。織熱한 戰爭이 進行되고 있던 때이라 全國土는 非常戒嚴令下에 있었으므로 國防部政節局 管掌下에 新聞檢閱制가 嚴格화게 實施되고 있었다.

新聞檢閱撤廢하라던 李承晩大統領

長官의 談話文이 同一 紙面에 들어갔는데 東亞日報는 慣例대로 大統領의 것을 五段標題 머리記事로 하고 長官의 것을 四段標題中 央部位에 둔 組版大帳을 떠서 檢閱을 받으러 갔더니 當務者는 長官의 것을 톱으로 하여 大統領의 것과 바꾸어 놓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밖에 없으니 新聞社는 版을 고쳤다。
다음날은 豫定된 李 大統領의 記者會見이 景武毫 官邸에서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收復後 最初로 열리는 것이었다.
李 大統領이 먼저 반가운 語調로 회포를 푸는 말로써 시작한 記者會見은 까다로운 形式을 빼고 興겨운 對談式으로 進行되었다. 必要한 話題가 다 끝났다고 생각될 즈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釜山까지 避難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 凄絶한 戰爭을 하는 동안에 新聞을 만드는 저희들도 愛國心에 불타고 있습니다. 共産黨을 利롭게 하고 우리나라를 害치는 報道를 할埋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國防部政訓局이 모든 新聞에 對해서 檢閱을 實施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사람의 大尉가 앉아서 마음대로 大韓民國의 言論을 左右하는 結果가 됩니다. 그는 어떤 記事는 新聞에 넣으라고 하고 또 어떤 記事는 新聞에서 빼라고 합니다。題目도 自己 비위에 맞도록 고칩니다。어제같은 날은 大統領의 談話文과 國防長官의 談話文을 놓고 長官의 談話文 內容이 重要하니 大統領의 것보다 더 크게 報道하도록 要求 하였습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저희들이 좋은 新 聞을 만들수가 없읍니다.』
脾間 李承晩 大統領은 顔面筋 경련으로 두볼을 실룩거리는가 하더니 嚴肅한 語調로 憤然히 宣言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共産黨과 戰爭을 하고 있는 까닭은 民主主義를 하기 爲해서야. 民主主義 國家에서는 新聞을 檢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는 옆에 앉은 公報處長 金活蘭 女史를 돌아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國防部의 政訓局長이라는 사람이 누구요? 國防長官에게 訓令하여 卽時 新聞 檢閱을 中止하도록 해요.』
新聞檢閱制는 卽日 廢止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後로 實로 견디기 어려운 報復的 挑發을 받아야 했다. 公文書로 東亞日報社에 對하여 나를 罷免하고 그 事實을 回報하라고 까지 肉迫해 왔다。
1951年 1.4後退로 다시 蓋山으로 避難해서도 나에 對한 그들의 初志는 굽혀지지 않았다.
東亞日報 主筆 金三毫 氏는 나와 함께 挑發의 策源池인 小領과 大尉를 酒席에 招待 하여 新聞記者 側의 場立과 眞意를 說明하여 說得工作을 폈다. 單純率直한 그들은 금시에 感情을 풀고 後로는 多情한 親交關係를 維持하게 되었다.

<筆者略歷>

▲ 1918년 開城市 高麗洞에서 出生하여 다음해 平壤으로 移住, 光成普通學校 萬壽 公立普通學校, 平壤公立高等普學校를 졸업
▲ 1938년 京城 延喜專門學校 中退
▲ 1945년 黃海民報 編輯局長
▲ 1946년 漢城日報 政治局長 1年
▲ 1949년 東亞日報 取材部長 3년
▲ 1952년 中央日報 取材局長
▲ 1952년 新聞의 新聞社 創業 社長 10年 月刊眞想, 月刊反共 發刊

《신문과방송 57호, 1975.8 》 1975년 8월

 

[구우회고기(舊友回顧記)] 그리운 사람들 – 장인갑 김삼규 두 선배
 글 최흥조 <1949.7~1952.2 취재부(장)>

내가 동아일보사에 재직한 것은 1946년 7월에서 1952년 2월까지의 약 3년간으로 기억한다. 재직중에 저 6.25 동란을 당하였으므로 동아일보와 함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동아일보는 8.15해방 후에 내가 해주에서 38선을 넘어 서울에 온 후에 두 번째로 관계한 신문이다. 서울에 온 나는 1946년 2월에 창간된 한성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하여 안재홍(安在鴻) 사장의 비서를 겸하는 정치기자로 일하기 반년만에 정치부장이 되었으나 이선근(李瑄根) 주필과 함께 청년운동에 투신하노라고 신문기자의 직책을 소홀히 하기 두어달 만에 마음이 괴로워 안 사장에게 사표를 내고 직무에 태만한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했더니 대선배이며 대기자인 안재홍 사장이 굳이 사표수리를 거부하며 하는 말이 신문기자는 1년동안을 신문사에 출동하지 않드래도 1년에 단 한건의 보람있는 기사를 쓰면 그것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할 것이니, 청년운동에 헌신하노라고 장기결근한 것이 자진사표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내게 대한 위안이 아니고 진정으로 하는 일반론이라는 것을 안 나는 더욱 마음이 괴로워 안 사장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성일보사를 퇴사하고, 청년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해방후의 정치적 혼란기에서 방황하는 지성이 한때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몸부림이었지 나는 청년운동에서 아무런 보람도 찾지 못했고, 또 나 자신의 인생설계에 손실을 자초한 결과임을 깨달아 알고 다시 신문기자의 천직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신문사를 찾아 친지를 두루 방문하고 다시 기자에 복귀할 길을 부탁하였으나 모두가 허사이었다. 그런 중 우연히 김상흠(金相欽)군을 만나게 되어 당시 동아일보사 편집기자이던 그에게  입사주선을 부탁했다.  그는 내게 대한 호기심과 우의(友誼)로 즉석에서 응낙하고 최두선(崔斗善) 사장에게 길을 얻어 청을 넣으면 자기는 사내에서 반대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나는 내 선친이 중앙고보에서 최두선 사장과 함께 교편생활을 한 일이 있어서 지면(知面)의 사이임을 생각해 내서 이력서 한 통을 써서 드리고 동아일보사로 최 사장을 찾아서 부탁드리도록 말씀 드렸다. 선친께서는 곧 최 사장을 만나서 내 입사 부탁을 했더니 측석에서 결락(缺落)하고 한가지 조건은 타사(他社)에서 부장이었드래도 동아일보사는 수하(誰何)를 막론하고 처음에 평기자로 채용하는 관례인데 양해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던히 힘이 들게 기자로 복귀하여 천직의 터에 선 나는 동아일보사 취재부 기자로 입사한지 한달만에 남로당의 간접조직의 내막을 파헤치는 연재물을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취재하여 ‘國際스파이事件眞相’ 제하에 동아일보 2면에 연재하였다. 당시의 동아일보는 석간으로 배대판 2면이었다.

내가 취재집필한 기사는 의외로 인기를 얻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의 가판은 4,5백부 선에 머물렀는데 ‘國際스파이事件眞相’이 실리자 일약(一躍) 8천부의 가판성적을 올리게 된 것이다.

전무는 고 국태일(鞠泰一)씨고 김상만(金相万) 현 사장이 총무국장이었는데 내게 특종상으로 5천원의 상금을 주었고, 이 연재기사를 끝내고 얼마가 안돼서, 그러니까 내가 동아일보사에 평기자로 입사한지 한달만에 나는 취재부 차장으로 승격하여 1면을 맡게 되었다.
나는 공연히 청년운동에 가담하여 근3년이라는 세월을 허송한 일을 후회하면서 앞으로 천직인 기자로 종신하리라고 결심하여 매일의 직무에 열성을 다하였다.

내가 동아일보사에 들어간지 채 1년이 못되어 다음해에 6.25동란이 일어났다.
6.25동란과 동아일보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가 없고,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언제나 회상하면서 그윽한 감회에 젖어서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는 선배 두분의 이야기만을 대강 적기로 한다.

한분은 6.25당시의 편집국장이던 장인갑(張仁甲) 씨에 관한 이야기이고 한분은 지금 일본에 있는 당시 주필이던 김삼규(金三奎) 씨에 관한 이야기이다.
똑똑한 체 하지만 기자처럼 어리석고 약한 사람도 없다. 전황(戰況)을 알아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또 분석도 하고 전망도 한다면서 저 자신의 갈길을 바로 골라잡지 못하는 것이 신문기자이고, 특히 6.25동란때의 동아일보 기자이었다. 몇 시간 후이면 수도 서울이 함락(陷落)할 판국인데 무슨 오기로는 나는 텅빈 동아일보사(현 대한공론사옥) 편집국을 자리하고 권오철, 정인영, 백광하, 변영권, 임운들과 함께 손수 공장에 내려가서 활자를 주어 마지막 호외 몇장을 찍어서 권오철이 서울시경에 부탁하여 빌린 경찰 찦차로 서울시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거리에 뿌렸으나 길가던 사람이 아무도 주워보려고 하지 않은 무서운 현실에서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신문사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마침내 한강을 넘어 남하할 기회를 놓친 나와 대부분의 동아일보 사원들은 공산군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천행만고(千幸萬苦)로 체포되지 않으며 숨어다니며 사우들과 연락을 취하던 7월 중순경의 일이다. 중구 삼각동에 있던 취재부장 조인상(趙寅相) 씨 집에 서울에 잔류한 사우들이 매일 한차례 들러서 소식을 나눈다는 말을 뒤늦게 안 나는 몹시 반가운 생각으로 찾아갔다.
과연 거기에는 몇몇 사우들이 매일 들려서 소식을 나누고 있었고 조인상 씨는 그 무서운 환경에서 큰 희생정신으로 자택을 공산당의 적이라 할 동아일보 기자들의 지하연락장소로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장인갑 씨도 하루에 한번씩 들리는데 오늘은 들리지 않고 곧 바로 집합소로 가겠다고 했으니 이제 함게 그리로 가면 만나게 되리라고 한다. 조인상 씨의 설명은 이러했다.

설의식(薛義植) 씨가 서울에 잔류한 반동언론인들을 규합하여 그 신분을 보장하기로 하여 북창동에 집합장소를 마련하고 널리 반동기자를 찾고 있는데 설 씨와 친한 장인갑 씨는 동아일보 기자들을 책임지고 규합중이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나를 찾고 있는데 오늘 나타났으니 이제 함께 가서 가입하고 설의식 씨의 계획에 따라가면 활로가 열리리라는 것이다.

나는 조씨의 설명을 들으며 내심 섬칫하여 전율을 느꼈으나 겉으로 평온한체 하고 따라갔다. 조 씨는 시청앞 북창동 4층빌딩으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가 들어간 방에는 출입문에 수상한 청년 한 명이 테이블을 놓고 앉아서 출입자를 감시하고 있는데 실내에는 장인갑 씨가 백남교(白南敎)와 담소하고 있었고, 한성일보 편집국장 김찬승(金燦承) 씨가 옆에서 천정을 쳐다보며 연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장인갑 씨는 나를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내 손목을 꼭 잡고 내 얼굴을 주시하였다. 나는 조인상 씨와 함께 멀찌기 멀어져 앉아서 담배꽁초를 종이에 말아서 피웠다. 장인갑 씨와 이야기하는 백남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엿들으니 어디서 ‘볼세비키’당사(黨史)를 구해다가 반동언론인들을 재교육해야 되겠다고 하고 설의식 씨의 말이 곧 매일 점심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했다.

나는 조인상 씨에게 눈짓으로 뜻을 전하고 슬그머니 방을 나왔다. 출입문에서 청년이 제지하길래 변소에 간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와서 도망을 치듯 빌eld을 빠져나왔다. 나는 다시는 거기 가지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에 청계천3가 다리위에서 장인갑 씨를 만났더니 그는 나를 몹시 나무라며, 왜 집합소에 나오지 않느냐고 따졌다.
“장선생, 그게 집단감시 아닙니까? 어쩌자고 제발로 거길 찾아간답니까?”
집합장소의 명칭도 반동언론인동우회(反動言論人同友會)라고 설의식인가 백남교인가가 명명(命名)했다는 것이다. 장인갑 씨는 극구 설명을 하면서 결코 불리한 것이 아니니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서 같이 참가하자고 권하는 것이다. 나는 굳이 거절하고 헤어졌다. 헤어져서 청계천을 걸어가며 나는 속으로 장인갑 씨를 위하여 울었다.

나는 그후 김포로 피신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9.28에 서울로 돌아와서 동아일보 복간에 참여했는데 설의식 씨를 믿고 반동언론인동우회에서 호신책을 찾아보려던 장인갑 씨는 납북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동아일보를 복간한지 얼마 안되어 다시 전세가 불리하여 우리는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었다.
민주신보사 시설을 빌려서 다브로이드 2면을 발행하던 때의 일이다.

외무부 정보국장이던 유태하(柳泰夏)씨가 나와 서울신문사 기자 두 사람을 택하여 약 1주간 예정으로 일본 시찰여행을 주선해 주겠으니 사(社)의 승낙을 맡으라는 것이다. 나는 주필 김삼규 시에게 이 뜻을 전하고 며칠 다녀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삼규 주필은 몹시 난처해 하였다. 다브로이드 2면 전시판(戰時版) 신문을 발행하는데 사설은 김 주필이 쓰나 기사는 불과 몇 명이 안되는 기자를 데리고 취재부장인 내가 거의 쓰다시피 하는 형편에서 2주간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라서 거절할 수도 없으니 좀 생각해 봐서 되도록 해보자고 말하고 헤어졌다.

나는 바쁜 가운데 일본여행건을 잊어버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편집이 끝나자 김 주필이 나를 불으더니 국제시장으로 대포를 마시러 가자는 것이다. 그를 따라서 갔더니 거기에 서울신문사 주필 오종식(吳宗植) 씨가 먼저 와서 기다릭 있었다. 우리 셋은 빈대떡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오종식 씨가 말을 꺼냈다.

“이봐, 최 형, 최 형은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으니 이번에 외무부에서 일본 보낸다는 것 나하고 김 주필하고 둘이서 갔다오게 해줄 수 없겠어?”
나는 두 사람의 의중을 알았다. 그 보다도 김삼규 주필의 의중을 환히 알 수 잇었다. 나는 즉석에서 그러자고 했다. 김삼규 주필은 서둘러 서류를 만들었다. 외무부가 발의한 것이니까 약식으로 되었다. 서류라는 것이 별로 까다롭지 않았다. 며칠 후 김 주필은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동행 한다던 서울신문사의 오종식 주필은 갈 생각이 없었던지 서류도 내지 않고 다시 내게 부탁하는 일도 없었다.

동경으로 건너간 김삼규 주필은 먼저 귀국한 부인과 장남들을 만나서 일본에 정주(定住)할 방침을 굳히고 동아일보사에 대하여 동경지사장을 발령해 달라고 여러차례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그가 오종식을 내세워 꾸민 빈대떡집의 일막극의 이면도 알았고 또 처자를 찾아가려는 그의 심경도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일절을 모르는 체하면서 그가 쉬운 길을 얻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한 것을 지금도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4.19후에 한번 서울에 왔었는데 잠시 전화로 통화하였을뿐 만나지 못한 것을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

(동우 제83호,  1975년 10월 31일)

 

최흥조 (동아일보사사 2권)

전란 초기의 동아일보

6월 25일은 일요일이라 느긋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사원들은 이른 아침, 비상소집을 받고 신문사로 달려 나왔다. 거리에는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이 북으로 질주하여 가고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시민들은 불의의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원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적침(敵侵)을 알리는 호외 1보를 만들어 가두에 뿌렸다.
당시 본보에서는 10여명의 기자가 중앙청, 검경, 군, 외국공관 등을 취재했는데 이들이 출입처에서 얻은 정보는 일시적 도발이 아니라 전면전쟁이며 전세가 매우 위급하다는 데 일치됐다. 그러나 당국은 ‘아군, 적을 격퇴 중’이라는 지극히 낙관적인 발표만 하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편집국 전원은 사내에서 밤을 새우며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과 해외 동향을 계속 호외로 발간했다.
이튿날인 6월 26일 새벽에는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적군은 전차를 앞세워 물밀 듯 쳐 내려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적의 진격은 너무나 급속히 진행돼 27일에는 의정부를 거쳐 선봉은 미아리 근처까지 육박해 왔다. 외국기관에 출입하던 정인영 기자는 27일 아침 ‘재경 외국기관들이 서울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아침 호외를 낸 후 최두선 사장은 전 사원을 모아놓고 “우리는 적에게 몰려 일단 해산한다”고 선언하고, 신문사의 은행예금을 전액 찾아 상하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줬다. 정오 무렵 북쪽에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농우(農牛)를 끌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동북과 서북 두 방면에서의 포격 소리는 시내까지 울려왔다.
오후 4시쯤 외근기자가 모두 편집국에 모여들었다. 전황이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취재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텅 빈 공장으로 내려가 호외 제작을 시작했다. 공장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 정인영이 일본 유학시절 문선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어 간신히 채자 작업을 끝내고 공무국장 이언진이 어렵게 직접 조판, 300장 가량의 호외를 수동기기로 찍어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마지막 호외는 기자들의 손으로 찍혀 나왔고, 그들은 시경에서 지프차를 빌려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을 돌며 뿌렸다. 적의 포탄이 산발적으로 서울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호외를 뿌린 사원들은 무교동의 설렁탕 집 실비옥(實費屋)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이언진(李彦鎭) 장인갑(張仁甲) 이동욱(李東旭) 조인상(趙寅相) 변영권(邊永權) 김성열(金聖悅) 권오철(權五哲) 최경덕(崔慶德) 김준철(金俊喆) 김상흠(金相欽) 최흥조(崔興朝) 김호진(金浩鎭) 정인영(鄭仁永) 백광하(白光河) 김진섭(金鎭燮) 등이 서울에 마지막까지 남아 최후의 호외를 만든 면면들이다.

(…)

필화사건
전시 하 언론 보도에 어느 정도 제약은 불가피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국익을 위해 감춰서는 안 될 보도까지 제약하려 했다. 전쟁을 치르는 군인이 관련된 사건이라는 이유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 때 이의 보도를 제약하려 했으나 본보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실상을 파헤치는데 앞장섰다.
백광하(白光河)기자는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각계에 뇌물을 공여했는데 그중에는 국회의원들도 있다는 기사를 최초로 특종 보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국회에서는 그 같은 보도가 국익을 해치고 있다며 조진만(趙鎭滿)법무장관에게 책임자의 문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 장관은 법률상 보도를 금지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본보의 보도 중 사실과 부합되는 부분이 있다고 답변했다.
또 사형이 확정된 윤익헌(尹益憲)국민방위군 부사령관의 부인이 김대운(金大運·방위군 정훈공작원)에게 거금을 줘 미대사관 고위 관계자에게 전달, 구명운동을 벌였다고 김대운이 경찰조사 과정에서 진술했다고 내무부가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무초 미 대사가 우리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 외교문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문제 삼았다.
1951년 9월 25일자 2면에 실린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김대운 조서발표사건
중대한 국제문제 제기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홍범희 전 내무부차관이 보고한 소위 7000만원 사건에 관한 김대운(일명 김대현) 진술 내용은 경찰조서발표사건으로서 중대한 국제문제화하고 있다.

심대한 명예손상
무 대사 우리 정부에 항의서한
즉 국회의 결의에 의하여 발표하였다고 하지만 국민방위군 사건을 수사 중에 있는 서울지검의 수사 활동을 방해하려는 기도 밑에 암약하고 있는 일련의 의원들이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파생된 일사기(一詐欺) 사건의 경찰조사 내용을 공개하려고 책동한 이면 의도는 이미 김대운이 일건 서류와 함께 구속 송청되어 부산지검이 예의 수사 중에 있는 때에 발표된 점으로 보아 검찰청의 수사를 견제하려는 동기임을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검찰 측에서는 당혹하여 불쾌하였을 따름 본시 아무런 견제도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소정대로 엄중한 수사를 완료하여 17일에 이르러 김대운을 기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내무부가 그 책임 하에 성급히 발표한 김대운 진술 내용에 김의 진술로서 김이 윤익헌을 구출하기 위하여 운동하되 주한 미 대사 무쵸, 미 제8군 콜러, 미군 군법회원 2명, 미 제8군의 크린 대령 등 5명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이대통령에게 윤익헌의 구명운동을 의뢰할 생각으로 윤익헌의 처로부터 받은 금패물을 방매한 미불화 6070불 중 5900불을 크린 대령에게 수교하였다는 김대운의 일방적 진술이 드디어 거대한 국제적 파문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미국은 한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원칙으로 견지해 오든 것이므로 주한대사 무쵸 씨가 한국의 내정에 속하는 사형수의 구명운동에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법원이 그 진부를 심리하지 아니하여 김대운의 진술 자체를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무부가 그 책임 밑에 발표하였다는 것은 크린 대령이 5900불의 운동비를 받았다는 진술 자체의 진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결과에 있어서 김대운 진술 내용 발표는 명예를 생명으로 하는 외교관인 주한 미 대사 무쵸 씨와 한국동란을 통하여 거대한 공로 있는 미 제8군 부사령관 콜러 중장의 명예를 심대히 훼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쵸 씨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엄중히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어 온바 그 처리 여하가 극히 주목되고 있다.

공보처에서는 즉각 항의공문을 본사에 보내 이 기사는 사실무근의 허위이므로 동일한 크기로 취소기사를 게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검찰은 10월 4일과 8일 두 차례 걸쳐 편집인 고재욱과 최흥조 기자를 소환 조사했다.

그러나 미대사관의 참사관이 내무장관을 방문, 항의했다는 내용이 사실로 밝혀지자 검찰은 최 기자에게 누설한 정부관리가 누구인지를 추궁했다. 최 기자는 이를 거절하였고, 그 후 다시 소환 요구가 없어 일단락된 것으로 본사에서는 생각했다.
그런데 10월 31일 다시 두 사람을 소환, 강압수사 끝에 11월 9일 광무신문지법 및 형법 제105조를 적용,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다. 적용 법조항은 다음과 같다.

광무신문지법 제11조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고 우(又)는 국헌을 문란하고 혹은 국제 교의를 저해할 사항을 기재할 수 없다.
동법 제25조 제11조에 위반할 때에는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을 3년 이하 역형(役刑)에 처하고 기 죄에 공용한 기계(器械)를 몰수한다.
형법 제105조 3항 전시 천재 기타의 사변에 제하여 인심의 혹란 또는 경제상의 혼란을 유발할 허위의 사실을 유포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우(又)는 30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함.

이 기사로 파문이 일자 내무장관 이순용(李淳鎔)은 문제의 조서를 참고자료로 극비리에 국회에 보냈을 뿐 발표한 일도 없고 미국대사관의 항의를 받은 바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국회의 공개회의에서 내무차관이 보고했고, 조서도 제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만든 광무신문지법까지 동원, 두 사람을 기소하자 국회에서 문제가 제기됐다. 다음은 11월 11일자 본사 기사의 전문이다.

본사 기자 고발 사건 등
어제 국회 대정부 질의전 활발
본사기자 고발사건〓본사에 관하여는 김광준 의원으로부터 공보처장(이철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즉 듣는 바에 의하면 동아일보 최흥조 기자가 9월 25일부 동아일보 지상에 내무부에서 일방적인 진술을 발표한 김대운 7천만 원 사건은 외국인 관련 문제로 미국대사관에서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어 국제문제를 기하였다고 보도한 데 대하여 이 공보처장은 이를 사실무근한 허위 기사라 하여 최 기자를 검찰청에 고발하였다는데 그 후 검찰청에서의 증언에 있어 이순용 내무부장관은 미대사관 참사관 라이트너 씨가 동 문제에 대하여 내무부장관을 찾아온 것은 사실이니 국제적 항의는 서한이 아니고 구두로서는 효력이 없는 것이라고 서한이 아닌 것만 주장하였고 이 처장 역시 라이트너 씨가 구두 항의한 것은 인정하고 서한이라는 것만 부인하고 있다 하니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일선기자가 보도하는데 대하여 여하한 법적 근거로 고발하였는가?
그리고 양우정 씨의 신당노선 발표에는 마치 자기가 주장하는 노선에 반대하는 자는 전부가 민족을 분열하는 공산당과 동일하다는 발표를 하여 대내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의 민주발전을 의심케 하고 있으니 이러한 언론의 발표에 대하여 어떤 대책이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 공보처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나로서 동아일보 최흥조 기자를 고발한 사실은 전혀 없다. 그것은 검찰청에서 독자적으로 한 것이고 단 검찰청에서 책임 있는 증언을 요구하므로 나는 동지에 보도된 기사 내용과 같이 미대사관에서 서한으로서 항의해 온 일은 없다는 공한을 보낸 것뿐이고 고발한 일은 전연 없다.
양우정 씨 발표문에 대하여는 원고를 얻어 조사하여 온바 이는 사실을 보도한 것이고 허위가 아닌 만큼 신문이나 통신사에서는 책임이 없고 이는 양씨 개인 문제에 속한다. 언론자유는 민주정치의 기본조건인 만큼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둘째에 가는 언론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라고 외인들이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허위 보도로 민심을 현혹하는데 적용할 법률이 없어 곤란하다. 광무11년 신문법은 헌법에 저촉되어 적용할 수 없으니 적당한 법을 제정하여 주기 바란다.
본보는 11월 15일자부터 3회에 걸쳐 사설을 통해 잘못된 정치의 근본적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무관심의 위험(상)
본보 기사 사건에 제하여
격류의 비말(飛沫)이 물의 본질은 아니다. 물의 본질은 깊이 묵묵히 흐르는 그것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는 상층부의 비말(飛沫)과 같은 움직임이 아니다. 깊이 묵묵히 흐르는 물의 본질과 같은 민중의 마음의 흐름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럼으로 인류의 역사는 허다한 경험을 통하여 옳은 정치 방식으로 민주정치를 쟁취하였다. 신생의 이 나라는 입국의 정신을 민주주의 지향에 두고 있다. 이 부동의 원칙 밑에서 행하여야 할 이 나라의 정치라고 보매 정치하는 자는 마땅히 민중의 뜻을 받들고 존중함을 요체로 삼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형식만을 갖추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실제 운영함에 있어서 그 정신이 흘러야 할 것을 민중은 엄중히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나라의 정치는 민중의 뜻을 받들었고 존중하였든가. 그럼으로써 이 나라 정치가 민중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든가. 불행히도 현실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아니 유심자(有心者)는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아직 연천(年淺)한 관계도 있으리라. 또한 전쟁의 타격도 크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나라 정치를 담당하는 자에게 민중의 뜻을 받들고 존중함으로써 진정한 민중의 공복이 되고자 하는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면 또한 이 나라 정치에 대한 민중의 비판과 감시가 자유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면 우리나라 정치는 오늘날보다는 좀 나은 질서와 업적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민중은 민족적인 역경을 비탄하면서도 희망에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보라. 우리나라의 정치는 항시 권력을 앞세우고 독선적인 경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위에서는 위에대로 아래서는 아래대로 권력은 남용된다. 그리하여 독선을 배태한다. 그 반면에 그 정치에 대한 민중의 비판과 감시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정치는 더욱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이 나라의 뜻있는 자 붓대를 꺾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 민중은 정치에서 무관심하려 한다. 요컨대 자포자기하는 셈이다. 얼마나 한심스러운 현상인가.
민중이 불평불만을 한다 하자. 그 불평불만을 위정자가 귀담아 들음으로써 이 나라의 정치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계기가 된다. 그럼으로써만 민중이 원하는 정치가 행하여질 것이며 민중은 자기의 생활로서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 그럼으로 불평불만은 민중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오히려 없어서는 아니 될 그 불평불만임에도 불구하고 위정자의 귀에 거슬리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다름 아니라 그 불평불만을 들음으로써 반성할 계기로 삼으려는 위정자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 허다한 위정자의 실책이 족출(簇出)하는 근본 원유(源由)가 있는 것이요 그 실책을 민중에게 은폐하고 만일 이에 대한 민중의 불평불만이 있다면 그것을 독선적으로 누르려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책은 시정되지 못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에 민중은 정치와 유리된다. 즉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권력남용의 폐단은 심상치 않되 의례히 그런 것이니 한다. 민폐는 극도에 달하되 피골만 남아 있는 민중은 할 수 없는 일이거니 한다. 오직 보가보명(保家保命)할 생각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국가 민족의 운명을 도하여 전쟁을 하고 있으되 청년의 정열은 시들어지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가능도 없고 불가능도 없다는 것이 통념이다. 오직 권력에만 아부하면 불가능도 가능케 할 수 있고 가능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리는 그 부패함을 공연히 합리화하려고 한다. 어찌 이 뿐이리오. 일일이 매거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위정에 대한 민중의 무관심이 아니고 무엇일까. 참으로 위험을 느끼는 현상이다. 이러한 위험한 현상이 우리의 안전(眼前)에 전개함을 보고서 유심자 어찌 안여(晏如)할 수 있으리오. 붓대를 꺾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민중의 무관심과 아울러 위험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필설이 다하도록 이 위험에서 우리 민족과 국가를 광구(匡救)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중의 무관심을 돌리어 불평불만을 말하고 말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민중의 불평불만을 배격하고 봉쇄하는 정치를 시정시키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여기에 언담(言談)을 하는 자 붓을 멈추지 않고 몇 번이고 위정자에 대하여 충고를 게을리 하지 않는 소이(所以)가 있는 것이니 민중의 뜻을 받들고 존중하는 위정자라면 역이(逆耳)의 충고를 받을 의무가 있지 않을까.

폭압의 상징(중)
본보 기사 사건에 제하여
민중의 뜻을 받들고 존중하는 위정자는 먼저 언론의 존귀성을 느끼리라. 언론은 민중의 소리를 집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여론을 반영하고 조출(造出)하며 위정자의 시책을 민중과 더불어 비판하고 감시함으로써 위정자를 편달하여 그 나라의 민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흔히 민중의 편에서 위정자를 공격하되 위정자는 그 언론을 통하여 민의가 어디 있는가를 알고 그것을 알므로 반성하여 민중의 뜻을 받들고 존중하는 정치가 된다. 그러나 권력을 남용하고 독선에 흐르는 위정자는 언론을 기피한다. 언론이 민중을 대신하여 권력을 경계하고 독선을 배격함으로서 일 것이다. 이 나라의 실정이 이것이다. 이 나라의 위정자는 언론으로 하여금 권력을 찬양하고 독선을 합리화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려다가 그 기대에 어그러지면 언론을 사갈시(蛇蝎視)하는 것이 통폐(通弊)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필연적으로 언론을 압박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다.
언론을 결박하기 위하여 위정자의 머리에는 광무11년 신문법과 형법 105조의 적용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러나 광무11년 신문법과 형법 105조라고 하면 듣기만 하여도 몸서리치는 폭압의 상징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 법률이 신생 민주국가인 우리나라 언론의 신성한 임무를 결박한다는 것은 그 법리적인 해석은 차치하고라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광무11년 신문지법은 일제가 이 나라를 병합하고 이 민족을 폭압하기 위하여 만든 악법이다. 이 악법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신음하였던 쓰라린 경험을 상기하지도 않을 것인가. 이 민족이 일제의 무수한 난타와 강탈을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게 하였다면 이 악법의 전위적 역할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민족은 이 악법에 대하여 강력한 투쟁을 하였고 왜인은 이 법률을 끝끝내 지속하여 왔던 것이다. 이러한 악법 광무11년 신문지법인지라 우리가 받을 해방의 첫 선물로 마땅히 그 악법은 폐기되어야 하겠거늘 오늘까지도 이 법률의 적용이 운운되어 있다는 것은 다만 언론탄압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을 모독하는 것으로 우리의 분노는 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형법 105조 2항 3항은 일제의 군국주의적 침략성이 그에 대한 비판을 발악적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전쟁 중에 만들어 낸 산물이다. 만들어 내기만 하였지 아물아물하게도 남아있었든 그들 양심은 한번도 쓰지 않았든 것이며 신생 일본은 즉시 폐기해 버린 것이다. 이것을 신생한 이 나라의 위정자는 좋은 유산이나 남겨 주었다는 듯이 민주언론의 탄압의 무기로 삼으려 하니 이 나라의 민주정치의 장래에 일말의 불안과 의혹을 느끼지 않을 자 누구이리오. 이와 같이 우리의 민족적 감정과 민족적 정의를 모독하는 악법이다. 그러고 또한 이 나라의 입국 정신인 민주주의에 배반하는 악법이 언론을 결박하여 이 민족의 감정과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고 이 나라의 입국 정신을 짓밟아야 할 것인가. 그럼으로써 이 나라에 권력과 독선이 난무하여야 할 것인가.
더욱이 광무 11년 신문지법은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자유의 대전제를 침범하는 것으로 헌법 공포와 동시에 자연 소멸될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며 형법 105조 2항 3항 또한 그 적용이 법리적으로 의점(疑點)을 남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검토에는 생각도 없고 정치 의도에서 언론을 결박하기 위하여 나온 듯하며 이 두 가지 악법을 들춘다는 것은 경솔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 경솔한 적용으로 언론은 과거에도 몇 번이나 이 악법 때문에 유린되었고, 또한 앞으로 몇 번이나 언론을 유린하려 한다. 언론은 이 유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이 유린의 씨부터 파버려야 하겠다. 그럼으로서만 언론은 창달될 것이오. 창달된 언론만이 우리 민족주의와 아울러 우리의 입국정신을 발양시킴으로써 이 나라의 전도는 축복될 것이니 우리는 이 폭압의 상징인 두 개의 악법에서 벗어나고 또한 그 악법 자체를 뽑아내는 것을 언론의 당면 과업으로 삼지 않으면 아니 된다.

수난의 자약(自若)(하)
본보 기사 사건에 제하여
민족의 폭압의 상징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은 광무11년 신문지법과 형법105조 2항 3항은 이제 본보를 결박하려 한다. 그리하여 본보의 전통적인 사명을 말살하려 한다. 따라서 권력을 찬양하고 독선을 합리화시키는 전위적 역할을 하는 언론의 추락을 본보에 요청하려 한다. 본보는 의연히 이를 거부하였다. 그럼으로써 본보 기사사건은 발단한 것이다. 본보 기사사건은 이미 보도되었는지라 만천하 독자 제위는 지실(知悉)하리라마는 요약하여 보면 김대운사건 조사내용 특히 외국인이 이 사건에 관련된 듯한 김대운의 일방적 진술의 부분이 확인도 되지 않은 채 발표함을 마땅히 삼가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무부에서 경솔히 발표하였기 때문에 당해 외국인 측의 항의를 받았다는 기사를 본보에 게재하였는데 그 항의에 대한 본보 및 일반 상식과 견해를 달리함으로써 또한 그 기사 게재의 본보 의도를 의식적으로 의심하고 기사의 미치는 영향을 필요 이상으로 천착함으로써 이 민족의 증오의 대상인 저 악법 즉 광무11년 신문지법과 형법 105조 2항 3항에 의하여 본보 편집인 및 취재기자를 기소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제기된 사건은 당초에 있어서 본보가 공보당국의 권고, 지시, 통고 등을 받은 일은 있지마는 맹종할 수 없었다. 그것이 본보의 체면 문제나 본보 기자의 신분 문제에 그치고 만다면 혹 모르되 한걸음 나아가 언론압박의 전례가 되어진다면 본보는 언론계에 한 개의 피할 수 없는 범과(犯過)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본보는 수난을 각오하였다. 이에 문제의 광무11년 신문지법과 형법 105조 2항 3항을 발동하였다. 그러나 본보는 그 옛날을 회상하면서 감개무량한 심경으로 그 악법과 먼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전 언론계에 호소하며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민족감정과 정기를 간숙하고 입국의 정신을 단속하고 또한 언론자유를 창달하여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공헌하려 한다. 또한 본보는 광무11년 신문지법의 합헌 여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형법 105조 2항 3항의 적용성에 대한 법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입법부는 모름지기 헌법 정신에 입각하여 법의 정리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될지니 광무11년 신문지법과 형법 105조 2항 3항에 대한 선량(選良)의 양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본보는 본보의 수난을 이 나라의 민주 발전의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다.
설령 백보를 양(讓)하여 광무11년 신문지법과 형법 105조 2항 3항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손 치자. 그렇다 할지라도 본보는 보도 임무에 성실치 못하였다는 책임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
(1) 항의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본보가 출처를 밝히지 않더라도 각 관계자의 유력한 입증으로 들어난 것으로 생각되며
(2) 규탄 서한과 구두의 차이 항의, 조회(照會)의 차이에 대한 견해의 다름이 있을지 모르나 본보는 그것을 엄연한 한 개의 항의 사실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며
(3) 본보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함으로써 당국의 반성을 촉구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도도 없었던 것이며 (4) 이미 그 조서 내용의 경솔한 발표로 말미암아 민심이 의혹되었고 국교에 악영향이 미치려던 것을 그 기사는 오히려 민심의 의혹을 풀어 주었고 양 국민의 감정을 부드럽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사직(司直)의 냉엄한 조리(條理)가 판정하리라고 굳게 믿는 바이지마는 본보는 이 수난을 당하여 다음의 명언으로서 위정자의 정문(頂門)에 일침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나라의 민중이 얼마나 악 정치에 전율하고 있는가를 위정자는 알아야 한다. 적 치하 본보는 본보의 제1주지 ‘민족의 표현기관이다’의 사명을 사수하기 위하여 피투성이의 투쟁을 하였다. 이에 대한 왜적의 대가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러나 본보는 칠전(七顚)하여 팔기(八起)하였다. 이제 본보는 본보의 제2주지 ‘민주주의를 고조한다’의 사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니 될 시기에 도래하였다. 이 땅은 이 민족의 것이니 이 민족이 이 땅을 찾을 때까지 본보는 이 민족에게 바쳤고 이 땅은 이 민중의 것이니 이 민중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서 이 나라의 정치가 이 민중의 피와 살이 될 때까지 본보는 이 민중에게 가담할 그 신성한 임무를 자각할 때에 본보는 금반 기사사건에 관한 허다한 타기할 인수(因數)를 분해할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오직 이 수난에 자약(自若)하는 바이다.

다른 언론기관들도 일제히 광무 신문지법과 형법 제105조 3항의 반민주성과 위헌성을 지적했다. 일간신문 통신사 기자들로 구성된 중앙청 기자단, 국회 기자단, 중앙법조 기자단 등은 11월 17일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에게 두 법은 즉시 헌법위원회에서 무효로 선언되어야 한다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3천만 전 국민이 한결같이 멸공혈투(滅共血鬪)를 계속하고 있는 이 때에 지난 11월 9일 부산지방검찰청에서 소위 동아일보사 필화사건을 반민주주의 악법인 ‘광무 신문지법’과 ‘형법 제105조 3항’을 적용하여 기소하였음은 민주주의 기본원칙으로 헌법에 명백히 보장된 언론자유를 침식하고 헌법정신을 모독하는 처사이므로 정부, 국회, 법조, 3 기자단은 숭고한 호헌정신에 입각하여 이에 공동으로 그 부당성을 적하여 엄중히 항의하는 동시에 선처를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
1. 광무 신문지법은 그 입법 목적이 사실상 일제 식민지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언론탄압에 있었으므로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명백히 배치됨. 따라서 해법(該法)은 자연 그 효력이 말살되었다고 간주됨.
2. 형법 제105조 3항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최후 발악으로 언론을 억압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어서 일본 자신도 적용한 예 없이 종전 후 폐기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구 악법을 적용하는 것은 진정한 언론창달을 저해하는 것이므로 이 역(亦) 헌법에 위배됨.
이상으로서 해(該) 양법은 헌법정신에 저촉됨이 명백하므로 응당 법적 실효를 상실하는 것이니 조속 헌법위원회에 제청되어 무효선언이 있어야 할 것임.

이 사건은 해를 넘겨 다음해인 1952년 2월 26일 제1회 공판이 열렸는데 기소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위 방위군사건에 관련되었던 윤익헌을 구출하기 위하여 무쵸 주한 미 대사, 그린 대령 등을 움직이어 동인(同人) 등으로 하여금 대통령에게 윤익헌의 구명운동을 하도록 의뢰할 목적으로 右 그린 대령에게 금품을 제공하였다는 현재 공판에 계류 중인 피고인 김대운에 대한 심문조사내용이 지상에 발표되자 1951년 9월 21일경 라이트너가 그의 사적 친분이 유한 이순용 내무장관을 방문하여 “지금 무쵸 대사는 일본에 가고 없는데 김대운 조사내용이 지상에 발표되었는데 해(該) 기밀이 여하히 누설되었는가” 의 사적 조회 정도의 문의를 하였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최흥조는 ‘김대운 조사발표사건 중대한 국제문제 제기, 심대한 명예훼손 무 대사 我정부에 항의서한’ 등 제목하의 지상게재하의 원고를 당일 편집국장대리(편집인)인 피고인 고재욱에게 수교하여 그들 책임 하에 서기 1951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사가 발간하는 동아일보 지상에 전기 원고대로 발표하여 我 한국의 대공산 침략자 섬멸전에 중추적 원조와 참전하고 있는 미국과의 국제 감정을 일으키어 원조와 참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인심혹란을 유발케 하는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는 동시에 아국과 미국과의 국제 교의를 저해할 사항을 기재한 것이다.

그 후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6월 1일 오후 3시반경 갑자기 경남경찰국 수사관들이 나타나 편집국에서 편집인 고재욱을 연행했다 3일 밤 9시경 대통령의 특명으로 석방됐다. 4일 공보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작일(昨日) 이대통령께서는 동아일보 편집인 고재욱 씨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보시고 곧 원용덕 장군에게 즉시 석방하도록 명령하시었다. 고씨는 체포되었던 것이 아니라 조사를 위해 구속되었다가 후에 석방된 것이다.

느닷없이 연행했다 석방한 경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필화사건은 그 후 더 이상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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