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진(李彦鎭, 1909~1985)은 평양 출신으로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공장 차장, 기계과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 동아일보 복간 당시 공무국장으로 재입사해 전무이사 부사장을 역임하고 1975년 퇴사했다.
이언진(李彦鎭) (대동, 1909~ ) ▲ 1937. 9 사원(공장근무), 공장차장, 기계과장 겸, 1940. 8 폐간. ▲ 중간후 재입사,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이언진(李彦鎭) (대동, 1909~ ) ▲ 폐간전 공장차장. ▲1945.12 공장장, 인쇄인, 공무국장, 이사 공무국장, 상무이사, 전무이사, 부사장, 공무국장 겸 1975. 2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백관수 사장은 동경에 사람을 보내어 사태수습을 꾀하려고 하였으나 마땅한 인물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 당시 큰 글자를 주조할 수 있는 대형주조기 1대와 6·3 포인트 본문자모를 발주 중에 있어 일본 왕래에 의심을 받지 않을 조건이 갖춰져 있던공장 차장 이언진을 사장실로 불러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그 전달을 의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편지가 전달되었을 무렵에는 편집국까지 마비시키기 위하여 백관수 사장을 다시 구속하였는데, 그때가 7월 중순이었다. (…)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사장 송진우(宋鎭禹), 주간 설의식(薛義植), 편집국장 고재욱(高在旭), 총무국장 김동섭(金東燮), 영업국장 김승문(金勝文), 공장장 이언진(李彦鎭) 등의 진용으로 폐간전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발행인은 김승문, 편집인은 설의식, 인쇄인은 이언진으로 등록되었다.
옛 동지들이 다시 모였으나 규모는 크지 못했다. 편집국에는 고작 25명 내외의 기자밖에 없었고 공장에는 서울공인사(경성일보사의 개칭)의 직공을 거느리고 공장장 이언진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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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쯤 외근기자가 모두 편집국에 모여들었다. 전황은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취재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텅 빈 공장으로 내려가 호외를 발행하기 위해서 문선을 시작했다. 공무직원은 단 한 사람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정인영이 일본유학시절 문선으로 아르바이트한 경험이 있어 간신히 문선은 끝냈으나 조판을 할 공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공무국장 이언진이 손수 조판을 하여 300장 가량의 호외를 수동기로 찍어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중’이라는 마지막 호외는 이처럼 기자들의 손으로 찍혀 나왔고, 그들은 시경에서 찦차를 빌어다가 이것을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의 코스로 시내에 살포하였다. 이미 적의 포탄이 산발적으로 서울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호외를 뿌리고 나서, 무교동 ‘실비옥(實費屋)’이라는 대중식당(설렁탕집)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이언진(李彦鎭) 장인갑(張仁甲) 이동욱(李東旭) 조인상(趙寅相) 변영권(邊永權) 김성열(金聖悅) 권오철(權五哲) 최경덕(崔慶德) 김준철(金俊喆) 김상흠(金相欽) 최흥조(崔興朝) 김호진(金浩鎭) 정인영(鄭仁永) 백광하(白光河) 김진섭(金鎭燮) 등이 서울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어느 신문보다도 최후의 호외를 박아낸 면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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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시설한 활판인쇄기 3대는 이언진 공무국장이 1951년 6월과 9월의 2차에 걸쳐 상경, 을지로 2가 서울공인사 별관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었는데 그 3대의 활판인쇄기는 국판전지 1대, 46판반절 1대, 국판반절 1대였고 기타 재단기 2대와 소손(燒損)된 만능활자주조기 2대외에 제목용 대형활자케-스 등이었다. 이 기계류는 해체운반 도중 많은 부분품이 파손되어 그 수리에 곤란을 겪었고 특히 주조기는 소손(燒損)을 입은 것이었는데 김진환(金鎭煥)이 천신만고끝에 수리에 성공, 본문용 6호활자주자가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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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보급부장 조병윤(후에 理事, 현재 미국 거주)은 이 무렵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수복후 제일 기뻤던 일은 뭐니뭐니 해도‘마리노니’윤전기를 샀을 때였습니다. 항상 남의 인쇄소로 돌아다니며 일을 하려니까, 어찌나 고생스러웠는지 지긋지긋할 지경이었어요. 술에 밥에 사먹여도 인쇄공들이 항상 말썽을 부리고 비협조적이었습니다. 한번은 지형을 떠야겠는데 솔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 내가 인쇄공을 데리고 연합신문사로 솔을 빌리러 가는데, 통금위반으로 걸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순경이 나는 가도 좋지만 인쇄공은 잡아 가야겠다는 겁니다. 막상 난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인데, 사람을 바꿔서 잡아가라고 순경에게 애원조로 얘길해서 솔을 빌어다가 신문을 낸 일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인쇄공들이 내 속을 썩였는지, 스스로 내가 인쇄기술을 배우려고까지 마음 먹었었습니다. 그런데 기계를 산다니까 날을 것 같더군요. 그게 ‘마루노니’기계였는데 나하고 이언진국장이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시운전도 안하고 그냥 돌렸습니다. 그 이듬해 부산에서 주문한‘하마다’를 또 들여왔고, 점점 독자가 불어나는 통에 인쇄능력이 모자라 또 ‘마루노니’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렇긴 했어도 인쇄능력이 모자라 신문이 늦게 나왔어요. 그렇지만 독자들은 신문이 밤중에 나가도 아무 군말을 않고, 신문을 갖다 주면 고마워했었죠. 모두가 우리 신문이 나오기만을 고대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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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반경 인쇄가 시작된 지 10여분이 지난 뒤, 한창 돌아가는 윤전기를 지켜보고 서 있던 공무국장 이언진에게 문선과장 윤석홍(尹錫洪)이 방금 인쇄된 신문 1매를 들고 와서 이 ‘오식’을 지적하여 처음으로 실책을 알았다. 크게 놀란 공무국장은 즉각 윤전기를 정지시키고 편집책임자와 연락하여 해당부분을 삭제하고 인쇄를 재개하였다. 당시 고위층은 통상 대통령을 의미하였으니 ‘괴뢰 고위층’은 ‘괴뢰 대통령’과 같은 말인지라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동아일보는 창간서부터 일제에 의한 강제폐간에 이르기까지는 1단 15자 13단제의 신문이었다(폐간 직전에 14단제로 바꾸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방 후 복간되면서부터 타블로이드 및 1단 12자 16단제가 되었던 것이다. 선진일본의 신문계도 여러 차례 변경은 있었으나 오늘날 유력지들은 모두 1단 15자 15단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들은 다년간에 걸친 연구 끝에 1단 15자 15단제가 현 체재의 신문으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동아의 구자모는 본문 자모를 빼놓고서는 너무 헐었고 별로 자랑스러운 것이 못 됐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본사는 66년 9월 이언진 상무의 제안으로 제목활자를 개체키로 하고 새 제목활자에 맞도록 본문활자도 바꾸기로 사방침을 세운 것이다. (…)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이번 주총에 이어 열린 이사회는 김두일 이언진 김상기 전무이사를 부사장으로 선출했다. 김두일 부사장은 부산출신으로 1932년 경성고상을 졸업하고 상업에 종사하다 1948년 본사 총무국 부국장겸 경리부장으로 입사, 6․25 사변 때 사(社)를 떠났다가 61년에 총무국장으로 재입사,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부사장이 되었다. 이언진 부사장은 평양출신으로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전기기사생활을 하다 1937년 본사 공장차장으로 입사, 40년 본보 폐간으로 사(社)를 물러나 경성방직에 근무하다가 45년 본보 중간시 공장장으로 재입사, 공무국장 인쇄인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부사장이 되었다. 김상기 부사장은 전북 부안출신으로 본사 설립자 인촌 김성수선생의 차남이며 1941년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조흥은행에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아 면업(綿業)관계 사업에 종사했다. 1957년 본사 출판부장으로 입사, 업무국장 초대 방송국장 출판국장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부사장이 되었다. (…)
1971년 김상만 사장이 취임하고부터 사옥신축은 본궤도에 올랐다. 한창 개발 중인 여의도에 터를 잡고 1971년 7월 20일에 본사와 서울시 간에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국회의사당과 서울시 청사가 들어설 자리에 인접한 시유지 3,689평을 1억9754만3230원에 매입한 것이다. 이해 9월 10일 서울시로부터 건축허가를 받고 서울건축기술연구소(소장 김창우· 金昌右)에 설계를 의뢰하였다. 9월 11일 건설본부(본부장 이언진 전무)가 발족되어 본격적으로 건설작업에 들어갔다.
(동아일보사사 4권, 동아일보사, 1990)
본사 전 부사장이었던 이언진씨가 85년 1월6일 오전 10시5분 서울 용산구 용문동 자택에서 향년 76세의 나이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 전 부사장의 유해는 18일 자택에서 발인하여 천주교용산교회에서 영결미사를 마친 뒤 다음날 장지인 경기도 광주군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
(동아일보사사 5권, 동아일보사, 1996)
조국광복(祖國光復)과 함께 부활(復活)한 동아일보(東亞日報) 8·15 중간(重刊)
동아일보(東亞日報) 복간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45년 11월초 일제하(日帝下) 동아일보(東亞日報)를 이끌어왔고 8·15후 건국준비에 심혈을 기울여온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씨가「혼란」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때부터였다. 김승문(金勝文) 설의식(薛義植) 고재욱(高在旭) 이언진(李彦鎭)씨 등이 중심이 돼 동아일보(東亞日報) 복간을 서두르라고 당부한 것이다.
이들은 11월 중순부터 활자주조에 착수했고 11월 하순「뿌리 깊은 나무는 잘라도 움이 튼다」는 복간예고 전단을 만들어 서울을 비롯, 전국에 뿌렸다.
복간자금의 일부는 폐간당시 지국 분국장들의 모금으로 충당했고 조선총독부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 시설을 사용키로 하는 등 복간준비를 끝냈다.
동아일보(東亞日報) 중간이 이렇듯 지연된 것은 조선총독부가 4차의 정간조치로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압살을 획책해오던 중 40년8월 백관수(白寬洙) 사장 등을 구금 악형을 하면서까지 강제폐간 시켰고 복간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인쇄시설을 강제매도토록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8·15후 좌익계열에서 서울의 대부분 신문인쇄시설을 접수하는 바람에 달리 인쇄시설을 갖출 능력이 없는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복간엔 애로가 있었다.
일제(日帝)의 이 같은 철저한 민족지 말살책략 때문에 구 경성일보(舊京城日報) 사옥인 서울공인사(公印社)를 빌어 찍어낸 중간호(重刊號)는 타블로이드판 2면(석간)으로 1부에 30전(錢)이었다.
중간호(重刊號)를 낼 때 진용은 사장(8대) 송진우(宋鎭禹) 발행인 김승문(金勝文) 편집인 설의식(薛義植) 인쇄인 이언진(李彥鎭) 편집국장 고재욱(高在旭) 총무국장 김동섭(金東燮) 사회부장 곽복산(郭福山) 정치부장 백남교(白南敎) 조사부장 김삼규(金三奎) 편집부장 이유근(李有根) 사업부장 이길용(李吉用)씨 등이었다.
(동아일보 1975년 8월 14일자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