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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동아일보 사람들- 양원모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양원모(梁源模, 1893~1986)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법정경제과를 졸업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선생과는 일본 유학생 시절부터 지인관계였다. 1921년 창간 다음해에 동아일보 서무경리국장으로 입사했다. 영업이사, 동경지국 지국장, 전무이사, 사장직무대리까지 두루 역임했다. 1966년 동아일보 감사를 끝으로 퇴직했다.

양원모 전 감사의 회고 일부 발췌 :
“1924년에 가서야 겨우 회사가 제대로 운영이 되는 실정이었지요. 발행부수는 말인즉 십만이지만 7,8만 정도였지요. 이걸 평판인쇄기로 찍어냈어요. 1940년 폐간 때까지도 전사원이 백 명밖에 안됐어요. 20만부가 될 때까지도 손수레로 신문을 운반하고 밤늦도록 야근을 하며 야근비 달라는 소리도 없고 ‘우리는 독립투사다, 신문을 만드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다’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장도 걸어다니고, 화동서 이리로 이사 와서야 사장전용 인력거를 샀으니까요. 우리가 진실로 민의를 대변한다면 국민이 우리를 지지해 줄 테고 신문이 잘 팔릴 테니 우리 동아가 융성할 것입니다.”
-출처: 東友 제28호 [퇴임중역 대담기] 동아를 떠나며

 

양원모(梁源模) (담양, 1893~ ) ▲ 1921. 9 서무경리국장, 취체역영업국장, 발행인, 도쿄지국장, 취체역영업국장, 10년근속표창, 전무취체역 겸 영업국장, 사장직무대리, 취체역, 1940. 8 폐간. ▲ 1949. 7 감사역,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양원모(梁源模) (담양, 1893~ ) ▲ 폐간전 전무취체역. ▲ 49. 7 감사역, 66. 7 사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퇴임중역 대담기] 동아를 떠나며

7월30일 본사 제40기 주주총회에서 양원모 감사, 김승문 이사, 우승규 이사 세 분이 정년퇴임 하셨다. 양 이사, 김 이사 두분은 동아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40년 이상을 일선에서 또는 경영의 측면에서 활약, 오늘의 동아를 길러내셨다. 이제 두 노장은 동아의 밑거름이 되기를 자처하고 중진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동아를 떠났다. 그들의 소회의 일단을 물어 동우 여러 분에게 전한다, <편집자 註> 

양원모(梁源模) 감사(監事)

기자(記者): 더운 날씨에 이렇게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월급(月給) 없어도 불평(不平) 없어

기자(記者): 입사(入社)하신게 언제신지요.

양감사(梁監事): 1921년 창간 다음해요. 학교 나오고 광주(光州)에 있으면서 미국(美國)에 가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참가(參加)하려고 도미(渡美)수속을 했지요.

기자(記者): 네, 경위를 좀 자세히.

양감사(梁監事): 그런데 내가 소위 ‘블랙리스트’에 올랐대서 도미(渡美)가 거부됐습니다. 그래 상해(上海)를 통해서 도미(渡美)하는 길이 있다기에 그때 돈 만(萬)원을 작만해가지고 서울로 왔습니다. 일본유학시절(日本留學時節) 지인(知人)이던 인촌(仁村), 고하선생(古下先生)과 상의(相議)를 했습니다. 두 분은 자꾸 미국 가지말고 같이 신문을 하자고 권하시거든요. 내 심정은 일본 사람 치하(治下)에서는 살지 않을 작정이었지요. 광주 있을 때 군수임관 교섭을 받았지만 이걸 거부했으니까요. 결국 두 분 권유에 따라 도미(渡美)는 포기하고 돈 만(萬)원을 신문사에 투자하여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무 겸 경리국장으로 입사했지요.
기자(記者): 그때 사정을 좀 말씀해주세요.

양감사(梁監事): 격세의 감입니다. 우선 재정이 말이 아니었지요. 일년씩 월급을 못탄 사람, 일년치를 선불해간 사람, 여기저기 빚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924년에 가서야 겨우 제대로 운영이 되는 실정(實情)이었지요.

기자(記者): 그때 부수(部數)는 얼마나 됐습니까?

신문제작(新聞製作)이 곧 독립운동(獨立運動)

양감사(梁監事): 말인즉 십만이지만 7,8만 정도였지요. 이걸 평판인쇄기로 찍어냈어요. 1940년 폐간때까지도 전사원이 백명 밖에 안됐어요. 20만부가 될 때까지도 손수레로 신문을 운반하고 밤 늦도록 야근을 하며 야근비 달라는 소리도 없고 ‘우리는 독립투사다, 신문을 만드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다’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장도 걸어다니고, 화동서 이리로 이사와서야 사장전용 인력거를 샀으니까요.

기자(記者): 일제(日帝)의 박해와 동아(東亞)의 항거를 통해서 뼈저린 일들을 많이 겪으셨을 텐데 몇가지 말씀해 주세요.

양감사(梁監事): 2차정간 때지요. 코민테른에서 ‘조선(朝鮮)의 독립운동자 및 노동운동자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전문(電文)이 왔는데 이의 게재문제로 사내(社內)의 공론(公論)이 벌어졌지요. 편집국장 이하 대다수가 이걸 싣기를 꺼려했는데 고하(古下)가 단독으로 게재했습니다. 고하(古下)는 신문은 안중(眼中)에도 없었습니다. 목표(目標)가 독립운동(獨立運動)이었지요. 또 그때 국경지방(國境地方)에 독립단(獨立團)이 출몰해서 경찰서를 습격한다, 일인(日人)을 살해(殺害)한다, 하는데 이걸 보도(報道)하는데 총독부에서는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이라 하라는 거에요. 古下는 독립단(獨立團)이라 고집하고 몇 달동아 싱갱이 끝에 ○○團
이라 낙착됐지요.

기자(記者):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때(4차停刊때) 사장직무대리(社長職務代理)로 취임(就任)하셨지요?

양감사(梁監事): 아, 그건 일경(日警)이 고하(古下)가 후임사장(後任社長)을 추천하는데 의견(意見)이 안맞고 나중에는 고하(古下)를 상대(相對) 안하려고 하거든, 그래 일경(日警)과 절충하기 위해 내가 임시로 사장대리가 됐지요. 다음 해 내가 백관수씨(白寬洙氏)를 사장에 추천하고 사장직무대리(社長職務代理) 겸 전무(專務)를 사임했지.

기자(記者): 폐간당시(廢刊當時)를 말씀해 주세요.

양감사(梁監事): 일경(日警)은 ‘자진폐간(自進廢刊)’을 강요(强要)하고, 우리는 ‘너의가 권력(權力)있는 사람이니 폐간(廢刊)을 시켜라 맞섰지요. 나중에는 우리 전원(全員)을 잡아 가두고 저으들 말을 안들으면 고하(古下), 백관수씨(白寬洙氏), 나 셋을 예심에 부쳐서 3,4년 고생시키겠다고 협박이라,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경기도경에서 8월 10일 주주총회를 열고 ’자진폐간‘을 했지요.

기자(記者): 끝으로 떠나시는 소감과 사우(社友)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을 해주세요.

동아논조가 둔화(鈍化)?

양감사(梁監事): 옛날 같이 일하던 분들이 이젠 거개(擧皆)가 고인(故人)이 됐고 서너 명밖에 안계시지. 이 점(點)이 좀 섭섭하고 난 평생을 여가 외에는 별로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으니 떠났다고 해서 별다른 감회(感懷)가 없지. 이 기회를 빌어서 몇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근래 우리 신문이 기개(氣慨)가 저하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인데 옛날의 기개(氣慨)를 되찾아라 이겁니다. 내게도 동아(東亞)의 논조(論調)가 어째 자꾸 둔화(鈍化)해 가느냐 하고 항변(抗辯)하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는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집권층(執權層)의 부정부패(不正腐敗)를 과감하게 비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독립(獨立)이 됐다고는 하지만 국토(國土)가 통일(統一)된 완전(完全)한 독립(獨立)이 못되었으니 앞으로 통일(統一)도 해야겠고 재건(再建)도 해야겠으니 우리는 재건투사(再建鬪士)의 기개(氣慨)를 가지고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왜정(倭政)때처럼 정부(政府)를 적대시(敵對視)하자는 건 아니고, 우리가 밀어줘야할 우리 정부(政府)인데 공격만 해서 넘어뜨려서야 되겠느냐고 반문(反問)도 하겠지만 신문이 좀 매질을 한다고 해서 정부(政府)가 넘어간답디까? 귀여운 자식 매 한대 더 때리는 격이지요. 정부(政府)가 나쁜 짓 못하도록 국민을 대신해서 매질을 하자 이거요. 동아(東亞)가 요새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서 활로(活路)를 찾는 길도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국민(國民)을 대신(代身)해서 우리가 도맡아 하자 이겁니다. 우리가 진실로 민의(民意)를 대변(代辯)한다면 국민(國民)이 우리를 지지(支持)해 줄테고 신문(新聞)이 잘 팔릴 테니 우리 동아(東亞)가 융성할 것입니다.

기자(記者): 더우신데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양원모, ‘퇴임중역 대담기- 동아를 떠나며’, 동우(東友), 1966년 8월 31일)

 

 

東亞 그때 그 시절-舊友 回顧記 ① 梁源模(東亞日報 初期 멤버)

내가 동아일보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21년 봄입니다. 60년 전의 얘기라서 記憶이 흐려집니다. 仁村先生께서 동아일보를 創設하기 위한 주식을 公募한지 1년쯤 되던 해였죠. 일본 와세다를 仁村과 함께 졸업하고 나는 美國人들이 경영하고 있던 光州 숭일학교에 내려가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美國人들과 친하면 美國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망에서였죠. 반년을 교사로 봉직하면서 여권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허사였습니다. ‘要視察 人物’로 지목되어 여권을 받지 못하게 된 때문입니다. 그때 나의 생각은 미국에 가서 工夫나 하려고 했던 것이죠.

美國行의 꿈이 가실 무렵 秦學文등이 東亞日報에 와서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해왔어요. 그래서 나는 전무취체역이었던 愼九範과 같이 仁村을 찾아갔읍니다. 仁村은 반갑게 맞아주며 東亞日報社 경영이 어려운 지경이니 좀 도와줄 수 없느냐고 했어요. 그때 仁村은 各道 저명인사들을 상대로 一人一株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입니다.

一人一株 운동은 말이 그렇지 사실은 民族운동을 일으키자는 깊은 뜻이 숨어있었던 것이었읍니다. 어쨌든 이 운동 결과 四百여명의 주주를 모았읍니다. 그러나 당시 주식은 받기만 했을뿐 불입이 되지않아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읍니다. 대부분 주식값을 仁村이 내고 (내 기억으로는 17만5천원 중 12만원~13만원을 仁村이 부담) 나머지는 주주 모금으로 충당했읍니다만 그것도 仁村이 先拂한 셈이었죠. 이때 내가 동아일보사에 入社, 서무경리국장직을 맡고 주식회사를 創立했읍니다. 서무경리국장직을 맡아 ‘동아’의 살림을 하기 시작했는데 經營의 주름살이 깊어 쉬 펴지지가 않았어요. 기자들은 1년 가까운 月給을 못 받아 가불로 生活을 하고 신문종이 값이며 책상 의자 등 비품값도 밀려 빚장이들이 끊일 날이 없었답니다.

그때 기자들은 월급장이가 아니고 독립운동을 하는 志士들이었지만 월급이 말이 아니어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죠.

그래서 하루는 會社方針으로 채권자를 모두 소집, 못받고 있는 돈의 3분의 1을 언제까지 몽땅 줄테니 나머지는 탕감을 하라고 했읍니다. 그랬더니 시간만 가봐야 못받을 공산이 크니 그것이라도 받는 것이 좋겠다는 公論이 돌아 3분의 1로 회사의 빚을 말끔히 청산했읍니다. 이때부터 사원들에 대해서도 가불은 일체 없애기로 했으며 대신 月給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날짜에 주기로 했읍니다. 신문부수 2만여 부(당시 ‘每日’은 7천~8천부로 기억)에 구독료는 한달에 60~80전밖에 안되고 광고는 보잘것이 없어 신문사 경영이 정말 어려웠읍니다. 그래서 東京과 大阪支局을 개설, 광고 확장에 나섰읍니다. 내가 동경지국장직을 맡아 일본으로 떠났읍니다(1923년 봄).

創刊 5년여 세월이 지나자 수지타산이 맞기 시작했읍니다. 국내 지국장들은 모두가 독립운동가로서 社勢를 확장하는데 全力을 다했으며 이같은 노력이 하나둘 보탬이 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죠. 그때 유명한 지국장들로는 平壤의 金性業씨, 大邱의 徐相一씨 등이 기억납니다. 이때 동아일보 사원은 70~80명쯤 되었으며 경영은 그런대로 되었으나 갖가지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읍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새로운 것은 朴春今사건입니다. 朴은 倭人들의 앞잡이로 무지한 在日동포들을 모아 相愛會를 만들었으며 이 조직을 활용, 못된 일을 너무나 많이 했읍니다. 하루는 동아일보사에 들러 在外동포 위금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읍니다. 권총까지 차고 경무국장 지프를 빌어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란 눈뜨고 볼수 없었던 민족적 비극이었읍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關東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동포를 돕고자 해서 모금운동을 벌여 피와 땀이 밴 돈을 상당히 모은바 있었읍니다. 朴은 이 돈을 相愛會에 보태주면 동아일보를 위해 무든일이라도 해주겠다고 했읍니다. 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우려내려고 했죠. 송진우 사장을 명월관으로 불러 내놓고는 요리상에 단도질을 하면서 협박도 했읍니다. 이때 동아일보사에서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처한다는 강력방침을 고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건장한 청장년 30여명을 명월관 대담장소 뒷방에 은밀히 배치해서 불상사가 생기면 우리도 지지않고 폭력으로 맞설 각오까지 했었읍니다.

朴은 東亞日報社의 이같은 강경태세를 알았었는지 宋사장 앞에서 갖은 못된 짓을 다하다가 물러났읍니다.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질 않았죠. 이때 동아일보 간부진이 취한 태도는 정말 生과死의 갈림길에서 내린 의연한 결단이었읍니다. 이같은 결단은 한두번이 아니었읍니다. 한번은 소련을 비롯해서 40여개국의 농민조합으로부터 동아일보 창간기념일을 맞아 독립운동의 선두에서 매진을 하고 옥고를 마다 않고 고생하고 있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격려 전보가 동아일보사로 왔었읍니다. 이때 회사 간부진이 구수회의를 열었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같은 전문을 신문에 실었다가는 당장 폐간이 될 것이니 아녜 엄두도 내지말라고 했고 어떤 간부는 그렇다면 신문의 役割이 무엇이냐고 반박을 하기도 했읍니다. 이때 편집국장 李相協씨는 게재하지 말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宋사장께서는 신문을 내는 것은 獨立운동의 하나라고 말하고 電文을 게재하라고 했읍니다.

그때는 오후 2시경 윤전기가 돌았읍니다. 그러나 그날만은 오전 11시경 윤전기를 움직여 감쪽같이 서울 一圓에 배달을 해버렸읍니다 대단한 용기와 결단 아니고선 감히 행할수도 없는 일이었읍니다. 내가 28살이던 1921년 봄에 ‘동아’에 몸을 담아 20년간을 ‘동아’에서 일했으며 부산피란시절과 수복후에는 감사역도 맡았읍니다. 이제 내 나이 87세가 되었읍니다. 내 나이만큼 세상도 변했읍니다.

내가 ‘동아’를 일으키던 때는 日帝의 쇠사슬 아래였읍니다. 오직 독립만을 위해 온 민족이 몸부림쳤읍니다. 동아일보는 그중에서도 으뜸이었읍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할 소리를 다했읍니다. 그 같은 책임감 뒤엔 비장한 각오가 있었읍니다. 민족이 가려운 델ㄹ 긁어주고 백성의 숨결을 잊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대한의 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동아일보를 좋아했고 동아일보 하면 民族의 魂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한번 정간을 당하거나 압수를 당하면 다음부터는 구독자가 배가되고 그 人氣 또한 天井不知로 솟구쳤읍니다.

그때 경영자들은 어디 정간시켜 보려거든 해보라는 기세였읍니다.

앞서 말했듯 세월은 흘러 이젠 상대가 벼했고 환경이 많이 달라졌읍니다.

그러나 신문이란 항시 백성의 편에 서서 민중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써야할 글을 과감하고 아낌없이 써야합니다.

요즘 東亞日報는 너무 잔잔하고 無力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돋보기를 걸치고 신문은 봅니다. 봐보니 ‘동아’가 너무 침체해 있어요. 신문이 여러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비판기능이 뒤져서는 안돼요. 정부가 잘하는 일은 잘한다 써주고 못된일을 하는 것은 잘못했다고 기탄없는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어서는 신문으로서의 비판기능을 다했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仁村기념일이 되면 묘소에 나가 그분이 명복을 빌고 그때 知己들의 깊은 뜻을 되새기곤 했읍니다.

그러나 재작년부터는 움직이는데 자신이 없어 묘소에도 못가게 됐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仁村 古下 등 先覺同志들의 氣蓋世가 더없이 그리워집니다.

春秋筆法으로 말한다면 與黨紙가 어디 있고 野黨紙가 어디 있겠읍니까?

신문이 與黨紙일수도 野黨紙일수도 없읍니다. 오직 신문이 가야할 길을 가면 됩니다.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을 체제에 反對한다거나 政府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가 될 것입니다.

(양원모, ‘東亞 그때 그 시절-舊友回顧記①’ 동우(東友) 1979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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