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이후 월북한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허정숙(許貞淑)은 한때 동아일보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다.
경성고보(경기고 15회)를 졸업하고 20대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박헌영은 1924년 4월 15일 판매부 서기로 입사해 취송(取送 · 우편으로 독자에게 신문을 발송하는 일) 업무를 담당하다 그 해 12월 지방부 기자가 됐다.
“박헌영은 동아일보에 취직한 날 마치 날개라도 단 듯 신문사 사원의 신분을 이용해서 활동에 열을 띠었다.” <박갑동(朴甲東), ‘박헌영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인간사, 1983년>
“이를 통해(지방부 기자 발령) 박헌영은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은 채 각 지방을 돌아다닐 수 있는 합법적 신분을 획득했다. 이 직책은 그의 비밀활동에 큰 편의를 주었을 것이다.” <임경석(林京錫), ‘이정(而丁)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년>
그의 입사와 지방부 기자 발령에는 1924년 4월 ‘박춘금(朴春琴) 사건’으로 송진우 사장이 물러나게 되자 일시 사장 직무대리(1924.4.25~5.13)를 맡았던 허헌과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된 홍명희(洪命憙) 선생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다.
‘박춘금 사건’은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의 간부인 박춘금 등이 동아일보에 실린 각파유지연맹 비판 사설에 불만을 품고 인촌 김성수와 송진우 사장을 식도원(食道園)으로 유인해 권총으로 협박하며 사과할 것과 해외동포를 위해 모금한 기금 중 3천 원을 자신들에게 줄 것을 요구, 송 사장이 ‘주의 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치 못한 줄로 인(認)함’이라는 ‘사담(私談)’을 써준 것이 문제가 돼 사내외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다.
“1920년 4월 창간 사원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해서 1924년 10월(당시 사회부장)에 퇴사할 때까지 박헌영이라는 사람이 동아일보에 있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1925년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임원근이라는 기자로부터 비로소 박헌영이가 동아일보 판매부 직원으로 있다가 조선일보 기자로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임 씨는 또 3·1운동 후 김단야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 6개월 코스의 동방공산대학을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오다가 셋이 모두 신의주에서 붙잡혀 1년여 감옥생활을 하고 나왔다고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이 임원근 기자는 내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사회부 기자로 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서 그가 입사했느냐고 누구한테 들으니까 1924년 4월부터 약 한 달간 동아일보 사장 서리를 맡았던 허헌 씨가 천거해서 들어온 거라고 합디다. 그 해 임 씨는 허헌의 딸인 허정숙과 정식 결혼을 했지요.” <동아일보 1972년 3월 11일자 4면, 남북의 대화(62) – 박헌영의 과격성(하)’ 중 유광렬의 회고>
이로 미루어 당시 동지적 관계였던 임원근(林元根)이 그의 애인 허정숙에게 박헌영과 자신의 입사를 부탁, 허정숙이 그의 부친 허헌 사장 직무대리에게 말해 박헌영에 이어 임원근도 1924년 5월 동아일보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박춘금 사건’으로 송진우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던 이상협 편집국장 등 일단의 기자들이 조선일보로 옮겨가며 본사에는 기자들의 충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박헌영과 임원근은 입사 전, 동아일보 기사에도 등장한다.
1924년 1월 22일자 2면
3씨 만기 출옥
“상해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하였다는 일로 재작년 삼월에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제령(諸令)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일년 반의 언도를 받고 그동안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든 임원근 박헌영 김태연 3씨는 지난 19일에 만기 출옥하여 20일에 경성으로 왔다더라.”
1924년 3월 10일자 2면
신흥청년 순회강연
“신흥청년동맹 순회강연단은 남조선과 북조선 두 대에 나뉘어 아래와 같은 날짜로 각지를 순회하리라는데, 변사는 남조선에는 김찬, 신철, 박헌영 3씨요, 서 조선에는 박일병, 조봉암 등 제씨이라더라.”
입사 후 그들의 사외(社外) 활동도 동아일보에 실렸다.
1924년 4월 25일자 2면
조선청년총동맹의 청년임시대회
집행위원회에서는 상무위원 오명선거
집행위원선거 – 이십오명선거
(전략)…집행위원 선정이 마치고 이어서 검사위원 5명을 전형위원 10명이 선정하였는데 씨명은 한신교 박헌영 최순탁 강제모 주종건.
1924년 8월 13일자 2면
신흥청년사, 창간호는 9월 중순경에 발행
“시내 관수동에 있는 월간잡지 신흥청년사에서는 재작일(11일) 오후 8시경부터 동 회관 밖에서 동인들이 다수히 모이어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출판과 경영에 대한 여러 가지 의사를 교환한 후에 사업진행상 편의를 따라 재무부 편집부 서무부의 3부를 설치하고 상무위원으로 김단야, 박헌영, 김찬, 홍증식, 민태흥, 임규호, 임원근 7 사람을 천거하여 일체의 사업 진행할 것을 그 사람들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고 창간호는 아무리 늦어도 9월 중순경에는 발행되리라는데 아즉것 동인 중에서 주금을 보내지 아니한 사람은 속히 보내주기를 바란다더라.”
1924년 10월 8일자 3면
신흥청년강연
“신흥청년동맹에서는 금번에 농촌문제 대강연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당국에 교섭한 결과 문제가 부당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므로, 그 동맹에서는 새로이 ‘청년문제’로 연제를 고쳐 가지고, 오는 13일 오후 7시부터 종로 중앙청년회관 내에 청년문제로 대강연회를 개최하리라는데, 입장료는 20전씩이며 그 연사의 씨명과 연제는 아래와 같다더라.”
– 구주(歐洲) 청년운동의 신국면(閔泰興)
– 신흥청년의 정의(金燦)
– 청년운동의 3대 표어(曹奉岩)
– 식민지청년운동(朴憲永)
– 청년과 교양(朴純秉)
1924년 11월 3일자 2면에는
‘본사 기자 박헌영(朴憲永) 군과 주세죽(朱世竹) 양의 결혼식을 오는 7일에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그 본댁에서 거행할 터…’라는 알림이 나기도 했다.
“1925년 5월 경성 내(內) 사회부 기자들 모임인 ‘철필구락부’가 임금인상 투쟁을 위한 맹휴(盟休)를 벌였을 때 박헌영은 사회부 기자 김동환, 심훈, 유완희, 안석주, 임원근에 동조해 조동호, 허정숙 등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퇴사하였다.” <경종경고비(京鍾警高秘 · 경성종로경찰서 고등경찰 비밀문서) 제5674호, 제5674호의 3, 언문(諺文·한글)신문기자 맹휴에 관한 건, 1925년 5월 22일, 5월 25일>
“동아일보를 퇴사한 이유는 당시 회사에 동맹파업이 있어 7,8명의 동료기자가 퇴사하게 되었는데 위 기자들을 동정하여 나도 퇴사한 것이다.”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 피의자(박헌영) 신문조서, 1925년 12월 17일>
1925년 5월 동아일보를 나온 박헌영과 임원근은 동아일보 영업국장이었던 홍증식(洪增埴)이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옮겨간 뒤 그의 주선으로 조선일보로 갔으나 사설 ‘조선과 로국(露國)과의 정치적 관계’ <신일용(辛日鎔) 집필>가 문제 돼 무기정간을 당하며 입사 4개월여 만에 언론계를 떠났다.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등 좌익기자들은 조선일보 영업국장이던 홍증식을 통해서 대거 들어왔는데…(중략)…이 해 9월 8일자 조선일보에 ‘조선과 노국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실렸어요. 그러자 총독부는 이것이 불온하다고 트집을 잡아 무기정간처분을 내렸다.
그 후 총독부는 당시 사주인 신석우 씨 등을 종용하여 ‘좌익기자를 모두 내보내면 무기정간을 풀어주겠다.’고 해서 좌익기자들은 회사 측에 ‘총독부와 잘 통할 수 있는 이상협(당시 이사)이가 손을 쓰지 않아 정간을 당했으니 태업의 책임을 물어 이상협이가 동아일보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도 함께 내보내야된다.’고 주장해서 나(유광렬)도 그 바람에 밀려났지요.”<동아일보 1972년 3월 11일자 4면, 남북의 대화(62) – 박헌영의 과격성(하)>
“나와 같이 조선일보사를 쫓겨난 좌익기자들의 우두머리격인 박헌영은 아주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 내가 사회부장이 됐을 때 (지방부에서) 사회부 기자로 왔는데 기자로는 별 능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글을 지독히 못썼다. … 박(헌영)은 글은 못 썼어도 셋(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중 머리가 제일 좋은 것 같았다. 비밀운동을 하는 사람답게 말이 없는 대신 아주 엉큼했다.” (유광렬, ‘나의 이력서-박헌영’, 한국일보 1974년 4월 13일자 4면)
1946년 9월 미군정(美軍政)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10월 월북한 박헌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상이 됐고 6·25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안에 총정치국을 창설하여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했으나 그 후 남로당 인사들을 숙청할 때 미국의 첩자라는 혐의를 받아 1956년 7월 처형됐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 대주주로 참여하여 1921년부터 1930년까지 감사역, 사장 직무대리, 취체역을 역임한 허헌은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남로당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한 뒤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남았다.
북한정권이 수립된 후 그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냈다.
일찍이 법률가를 꿈꿨던 허헌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를 수료한 뒤 1908년 제1회 변호사시험을 합격하였고 3·1 독립운동 관련 47인 재판 때는 변호인으로 참여해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허헌은 동아일보 창간을 위한 주식모집 때 7935원을 불입하여 대주주가 되었고 1921년 9월 14일 열린 주식회사 동아일보 창립총회에서 감사역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4월 ‘박춘금 사건’으로 송진우 사장이 물러나자 사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난마(亂麻) 같은 외부의 논박이 펼쳐지자 이 난국을 수습한 이로 법조계의 거성 허헌 씨가 있었으니, 씨는 비록 사장대리로 재임기간이 수삭(數朔)에 불과하였으나 사회인사의 대(對) 동아일보 공분(公憤)을 해소케 한 중대한 치적을 남기어놓고 이승훈 씨에 제5대 사장 지위를 송(送)하였다.” (삼천리 1933년 4월호 23쪽)
이후 허헌은 1930년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취체역으로 있었다.
1923년 11월부터 24년 8월까지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1년 8월 16일 당시 김일성대학 총장이었던 허헌은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김일성대학 임시교사 개교식에 참석하러 배를 타고 대령강을 건너던 중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북한에서 문화선전상, 법무상, 최고재판소 소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을 지내고 1991년 6월 5일 세상을 떠난 허정숙은 허헌의 딸로 1925년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여 본사 학예부 기자로 있었다.
허정숙은 입사전인 1924년 여름 본사 사회부 기자 임원근(1924. 5~1925. 5)과 결혼,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부가 한 신문사에서 한때 근무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박헌영과 같이 ‘철필구락부’의 임금인상 투쟁에 동조해 1925년 5월 두 사람 모두 퇴사했다.
허정숙은 학예부 기자 시절 1925년 3월 9일자 부록 1면에 ‘수가이(秀嘉伊)’란 필명으로 ‘국제부인(國際婦人)데이에 – 3월 8일은 무산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28년 1월 3일자부터 5일자까지 본지에 연재한 ‘부인 운동과 부인 문제 연구 – 조선 여성 지위는 특수’라는 허정숙의 글은 당시 조선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조선 민중 전체가 무산계급화한 상황과 결합하여 분석한 것으로, 마르크스 사회이론으로 여성문제를 파악한 대표적인 글로 꼽힌다.
“두번째 남편인 최창익과 결혼하기 전에도 임원근이 감옥에 있는 사이, 북풍회의 송봉우와 동거하는 등 허정숙은 당시 흔치 않은 자유연애, 사회주의사상,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동지애에 뿌리를 둔 ‘붉은 연애’로 화제를 모았다. 남편 최창익은 연안파 숙청 때 몰락했으나, 허정숙은 최창익과 헤어지고 김일성을 지지하면서 계속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 (위키백과)
“두 번째로 평양을 갔을 때(1972년)였다. 환영파티에서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웬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6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그 여인이 은근히 나에게 ‘소감이 어떻소’ 하길래 나는 ‘평양도 많이 발전했고 서울도 발전했는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6·25전쟁을 우리가 한 겁니까. 외세에 의해서 한 거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옆에 앉아있던 동아일보 주필<논설위원의 오인(誤認)- 편집자 주> 송건호(宋建鎬) 씨가 자기를 상대하고 있던 북적 대표에게 저 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허정숙(許貞淑) 여사라고 했다.…
그러자 송씨가 큰 소리로 ‘나는 동아일보 송건호라고 하는데 선생님 동생을 내가 잘 알고 친합니다’.라고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허 여사는 ‘그래요’라고 한마디 하더니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이 되었다.
송씨의 실수였다. 그의 이복 여동생 허근욱 씨는 북한 체제가 싫다고 애인하고 남쪽으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서영훈, ‘나의 이력서 – 평양에 가보니’, 한국일보 2004년 4월15일자 22면)
허영숙의 이복 여동생 허근욱은 ‘내가 설 땅은 어디냐’ (1961년)는 자전 에세이를 썼다.
1921년 9월부터 1924년 5월 퇴사할 때까지 동아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홍증식(洪增植)은 사회주의 운동가들 중 베일에 가려 있었던 인물로 광복 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 등을 지냈다.
홍증식은 동아일보를 퇴사한 뒤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영업국장을 차례로 지내 일제시대 발행된 3개 민간신문의 영업국장을 모두 역임하는 기록을 세운 수완가이기도 했다.
1936년 3월 동아일보 정리부 기자로 입사해 194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정경부 기자로 있다가 광복 후 중간(重刊)때 재입사한 노일환(盧鎰煥)은 5·10선거에 출마, 제헌의원이 됐으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됐다. 6·25전쟁 중 북한군의 서울 점령으로 풀려난 그는 월북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등에서 활동하다 1982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이들 외 1923년 5월 본사 기자로 입사, 경리부장을 역임한 이봉수(李鳳洙), 조사부장을 지낸 이여성(李如星 · 1932. 10~1936. 12 재직기간)도 월북, 한때 요직에 있기도 했으나 모두 숙청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