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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82> 최호

Posted by 신이 On 11월 - 12 - 2021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81호)

 

 

 

 

 

정권과 세태 꼬집은 촌철살인 풍자

 

 

 

 

최호(崔皓, 1924∼2005)

 

  최호는 동년배인 이혜복보다 7년 먼저 사회부장이 됐고, 또 다른 의미에서 명 사회부장이었다. 동아일보의 지가(紙價)를 올린 사회단평 ‘공기총’이 최호의 작품이다.

  함남 함주 출신인 그는 일본 와세다고등학원을 졸업하고 1949년 언론계에 입문했다. 1952년 동아일보로 옮겨 3년 만에 사회부장이 됐고, 이후 조사부장, 편집국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도쿄지사장, 편집국장, 방송국장, 이사를 지냈다. 동아일보를 떠난 후에는 연합통신 상임감사, 한국정치PR연구원장으로 일했다.

  ‘공기총’은 백광하 기자의 정치논평 ‘단상단하’, 김성환 화백의 시사만화 ‘고바우’와 함께 50년대 동아일보 독자를 견인한 3대 간판 연재물이었다. ‘공기총’은 ‘黨訓―三大自由’ 1.分黨自由 2.內紛自由 3.聲明自由―自由黨(1953년 5월 2일, 개점휴업인 국회 비판),  ‘改憲案續出’ 내 얼굴이 그렇게도 못났는지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있습니다―憲法(1954년 3월 21일, 이승만 정권의 종신집권 개헌시도 비판)이라는 식으로 정권과 세태를 꼬집었다. 촌철살인의 풍자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황야의 건맨’이었다.

  ‘공기총’은 1953년 4월 1일에 시작해 1961년 1월까지, 1963년 8월에 재개해 이듬해까지 실렸다. 사회부 기자, 사회부장,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며 혼자서 10여 년간 매일 공기총을 ‘발사한’ 것은 가히 초인적이다.

  최호도 역시 현장을 중시한 사회부장이었으되, 일찍부터 사진의 효용을 강조한 것이 여느 사회부장과 다르다. 이명동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은 최호에게 시달리다 못해 “저 독종 찔러 직여(죽여) 버릴까부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0년 인촌상 언론부문 수상자가 된 이명동이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최호가 살던 집이었다. 그리고 장남 준권에게 말했다. “내가 인촌상을 받게 된 것은 자네 아버지 덕분일세. 최 국장은 우리나라의 보도저널리즘을 실재화하는데 큰 기여를 한 ‘참 언론인’일세.” (정구종, 한국언론인물사화)

 

심규선 (동우회보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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