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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74> 변영권

Posted by 신이 On 7월 - 9 - 2021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9호)

 

 

 

 

6·25때 號外 발간한 후 납북됐다 탈출

 

 

 

 

 

변영권(邊永權, 1920∼1977)

 

  변영권은 1950년 2월 동아일보 취재부장으로 입사해 정경부장, 사회부장, 편집국 부국장, 편집국 국장 대리, 편집국장, 심의실장을 거쳐 1971년 11월 퇴사할 때까지 21년간 근속했다. 편집국장 대리로 8개월, 편집국장으로 3년을 근무하는 등 편집국 최고책임자로 꽤 오래 일했다.

  그는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살에 당숙인 변성열을 따라 도쿄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학교와 일본대(니혼대) 전문부를 졸업했다. 변성열은 교토(京都) 삼고(三高)와 동경제대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 동맹통신 영문부 차장, 만주국 통신참사를 거쳐 전후에는 동경대 교양학부 교수를 지냈다. 변영권은 기자인 당숙이 고향에 오면 군수나 경찰서장의 대접까지 받으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기자를 꿈꾸게 됐다고 한다.

  변영권은 대학을 졸업하고 당숙의 소개로 1943년 10월 일본의 국책통신사인 동맹통신의 대륙부 기자로 일하던 중, 1945년 7월 동맹통신 자매회사인 신경(新京·長春)의 만주국 통신사로 발령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근무도 못 하고 점령군인 소련군을 피해 고생 끝에 신의주, 평양을 거쳐 고향인 회령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공산당의 감시가 심해지자 단신으로 서울로 와 연합통신 사장으로 있던 변성열의 소개로 합동통신 지방부 기자로 취직한다. 1948년 7개월간 잠시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신생 국민신문 정치부장, 한국일보 정경부장을 거쳐 1950년 2월 다시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변영권은 6·25전쟁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하루 전날인 6월 27일, 피난을 가지 않고 정인영(전 한라그룹 회장), 이동욱(전 동아일보 사장), 김성열(전 동아일보 사장) 기자 등과 호외를 발행한다. 결국 인민군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가다 함남 영흥군에서 홍원군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인민군과 현지 우익청년 봉기군이 전투를 벌일 때 탈출했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신문을 만드는 것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과 1·4후퇴로 피난 열차에 올라 부산에서 민주신보 시설을 이용해 동아일보를 속간했다. 그는 우직하게 일만 한다고 해서 ‘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변영권은 편집국장 대리로 있던 1965년 9월 9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7가의 자택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변영권은 4·19혁명 때 사회부장으로 일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날의 감격은 마치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의 날을 다시 맞는 듯 그렇게 감격스럽고 벅찬 것이었다. 우리는 호외를 만들어 신문사의 옥상에서 광화문 네거리의 인파를 향해 뿌렸고 비행기로 하늘에서 뿌리기도 해서 민권의 승리를 마음껏 기뻐했다.” (변영권, 「나의 기자 시절」, 신문과 방송 73호, 1976.12)

 

 

– 글 · 심규선 (동우회보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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