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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67> 김상만

Posted by 신이 On 3월 - 23 - 2021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7호) 

 

 

 

 

 

 

사정권 독재·불의에 항거 ‘백지광고’ 사태 이겨내

 

 

 

 

 

 

 

김상만(金相万, 1910∼1994)

 

  일민 김상만 명예회장을 짧은 글로 소개하기는 힘들다. 다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4년 1월 26일 김 명예회장이 별세했을 때 동아일보에 게재한 글을 재록하고자 한다. 김 명예회장의 업적을 잘 정리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요즘 표기법에 따라 일부 글자를 고치고, 긴 문장은 나눴다).

  “1910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서 태어난 일민은 영국 런던대(LSE)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9년 동아일보 이사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45년간 동아일보에서 상무(55년) 전무(61년) 부사장(66년) 사장(71년) 회장(77년) 명예회장(81년 이후)을 역임하면서 신문경영의 일선에서 우리나라 민주언론 창달에 헌신해 왔다.

  일민은 특히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전대미문의 광고탄압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언론정도를 지켰으며, 계속된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인권옹호와 언론자유쟁취에 앞장서 민주언론을 선양하고, 그 기틀을 다졌다.

  일민은 고려대와 중앙고, 고려중고교 재단인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55년) 및 이사장(82년 이후), 재단법인 동아꿈나무재단을 설립해 그 이사장으로서 교육발전과 인재양성에 헌신했으며, 민족문화창달사업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문화 예술 체육 사업을 폭넓게 주관하고 지원하는 등 문화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아일보사 사업으로 항일의병기념탑과 3·1운동기념비를 전국각지에 건립하고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 55주년 기념행사추진위원회 회장을 맡아 민족정신 고취사업에 진력했다.

  일민은 한국신문협회 이사, 한국신문윤리위원 등으로 우리나라 언론계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국제적인 언론교류, 민간외교 활동도 활발히 벌여 아시아신문재단(PFA)회장(76∼90년) 및 명예회장(90년 이후), 국제신문협회(IPI)본부이사(78∼86년) 및 종신명예회원(86년 이후), 한영협회회장(64∼78년) 및 종신회원으로 한국언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언론 문화 교육 국제교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69년 연세대에서 명예법학박사, 72년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문학박사, 85년에는 일본 와세다대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82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독재와 불의에 대항하여 언론자유를 지킨 공적으로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로부터 ‘자유의 금펜상’(1975년)을, 미국 미주리주립대에서 ‘85년도 언론공로상’을 수상했으며, 민간외교에 대한 공로로 영국 정부의 명예코만도훈장(1974년)과 명예기사작위(81년), 중화민국 문화훈장(82년), 프랑스정부 공로훈장(89년), 독일정부 공로훈장(93년)을 받았다.”(동아일보, 1994년 1월 27일 자)

  그런데 이런 글에는 온기가 없다. 일민의 비서부장을 지낸 문명호, 강인섭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쓴 회고담에는 인간적인 면모가 꽤 등장한다. 김 명예회장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유지를 잇는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였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으며, 광고나 판매 업무는 꼼꼼하게 챙기면서도 신문제작은 편집국장 등에게 거의 일임했고, 의외로 속정이 깊었으며, 매우 검박하게 생활했다는 것이다. 문명호 전 비서부장은 회고의 글을 맺으며 “김상만 선생은 이 시대 한국 언론을 이끌고 대표한 ‘큰 나무’였으며, ‘거인’이었다. 때때로 나는 그 ‘큰 나무’의 그늘을 생각한다”고 했다. (관훈저널 통권113호, 2009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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