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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66> 김삼규

Posted by 신이 On 1월 - 28 - 2021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6호) 

 


 

 

서울대 교수서 복직…이승만 탄압 日망명 비운의 논객

 

 

 

 

 

 

김삼규(金三奎, 1908∼1989)

  김삼규의 생애는 세 가지 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문학운동가, 언론인, 망명 및 재일활동가가 그것이다.

  전남 영암 출신인 그는 도쿄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1928년 도쿄제국대학 독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재학시절과 졸업하고 서울에서,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무산자(無産者) 운동과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검거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언론계 입문은 1945년 동아일보 조사부장이었다. 1947년 잠시 서울대 문리대 독문학과 주임교수로 일하다 1948년 동아일보로 돌아와 편집국장 겸 주필,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사설 등을 통해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특히 6·25전쟁 당시 부산 피란 시절에 ‘국민방위군사건’(1·4후퇴 때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거액의 예산을 횡령해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한 사건)을 파헤쳐 동아일보의 지가를 높였다. 이런 일들로 인해 이승만 정권의 미움을 사게 되자 그는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한다(그의 아내는 일본인으로 당시 아내와 자식들은 일본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일본에 다녀오겠다”고 했으나 결국은 망명객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이 그의 입국을 불허하는 바람에 9년이 지난 1960년 4·19 직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고, 군사정권이 그를 좌경용공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일시 귀국해 통일 관련 글을 쓰고, 세미나 등에도 참석했으나 1980년 광주에서 5·18사건이 벌어지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삼규는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부터 한국의 통일방안으로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창해 관심을 끌었다. 한반도 분단이 주변 강대국의 이해 때문에 빚어진 만큼 통일도 이들 강대국의 지지를 얻어야 하므로 4(미 소중 일)+2(남 북)=6자 회담을 열어 통일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1957년 일본에서 ‘조선중립화운동위원회’를 설립했고, 같은 해 <월간 코리아평론>을 창간했으며, 1963년 ‘민족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한일 간에 지적 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에 이를 위한 기반 조성에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 심규선(동우회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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