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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64> 우승규

Posted by 신이 On 1월 - 27 - 2021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6호) 

 

 

 

 

 ‘나절로’ 한글을 號 사용…朴정권 비판 南山서 곤욕

 

 

 

 

 

우승규(禹昇圭, 1903~1985)

 여러 신문사에서 40년간 일했으나 동아일보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무하며 당대의 논객으로 필명을 날렸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나절로’라는 한글 호를 사용했고, <나절로> 논단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혜령전수학교를 졸업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청년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의 신문도 발행했다. 1931년에 귀국해 국내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해방 후 경향신문 편집국장, 시사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자유당 정권에 대항하는 반독재 언론투쟁에 나섰다. 1954년부터 1966년까지 13년간 동아일보에서 논설위원, 편집국장, 논설위원실장, 편집고문,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날카로운 필봉으로 자유당과 군사정권을 규탄했다. 불의와는 쉽게 타협하지 않아 언론인의 귀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문독본》 《나절로독본》 등이 있다. (동아일보 社史 5권).

  그는 동아일보로 오기 전 경향신문과 시사신문 외에도 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서울신문, 평화신문, 국도신문 등에서 근무했으나 길지가 않았다. 경향신문 편집국장 재직 때 <李承晩 대통령에 逆耳의 일언>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 등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고, 서울신문 편집국장 시절에는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서를 대신 써서 이름을 알렸다.

  동아일보에 온 그의 필봉은 <나절로> 논단을 통해 더욱 예리해졌다. 그는 신문을 만들기보다 글쓰기를 좋아했다. 논설위원 시절 편집국장을 맡으라는 말을 듣고 사표를 냈다가 9개월 후 회사 측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복직해 편집국장을 맡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동아일보에 있던 기간이 언론투쟁의 가장 절정기였다. … 동아에서의 10년 남짓한 생활은 내게 더할 길 없이 행복스런 말년의 신문생활이요, 언론 활동기였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정권을 매섭게 비판했던 그의 필봉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무뎌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글이 논설위원실장으로 있으면서 <신동아> 1964년 11월호에 쓴 ‘병든 조국은 어디로’라는 원고지 250장의 대형 논설이다. 그는 이 글에서 국회, 행정부, 공무원 등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글 때문에 신동아 일부가 압수당하고,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나절로’라는 한글 호는 상해에서 함께 일했던 한글학자 김두봉의 작품이다. 김두봉이 호를 지어주겠다며 우승규의 관심 분야를 묻자 우승규는 장 자크 루소의 자아주의와 자연주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자 김두봉은 즉석에서 ‘자아’는 ‘나’요, ‘자연’은 ‘절로’이니 ‘나절로’로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언론인 우승규가 존경받는 또 하나 이유는 재직 시나 퇴직 후에도 다른 자리를 탐하거나 기웃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5년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던 이상로는 “변함없는 논조의 필봉과 처신을 지켜온, 우승규 같은 분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글 심규선(동우회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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