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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61> 최두선

Posted by 신이 On 11월 - 24 - 2020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5호) 

重刊과 함께 중흥 이끈 ‘CEO 3총사

 

 

     六堂 동생…   인촌에게 신문발간 권유 16년간 사장

 

 

 

 

 

 

 

 

최두선(崔斗善, 1894~1974)

서울 태생으로 호는 각천(覺泉)이다.  육당 최남선의 동생으로 일본 와세다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학교 교원을 거쳐 1919년 이 학교 교장에 올랐다. 1922~25년까지 독일 마르부르크대, 예나대, 베를린대 등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32년 김성수가 인수한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를 맡았다. 각천은 동아일보 설립 주역의 한 사람이다. 각천이 인촌에게 처음으로 신문 발간을 권했고, 각천과 유근 두 사람의 설득으로 인촌이 동아일보 설립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최두선이 와세다 대학을 거쳐 독일 유학을 가게된 것도 모두 인촌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인촌과 각천은 특별한 관계였고, 인촌 생전에 가장 신임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각천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조병옥 등과 함께 3개월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에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육계를 떠나 경성방직에서 일했다. 각천은 1947년 2월부터 1963년 7월 사임할 때까지 해방 후의 혼란기와 6·25 동란, 4·19 의거 등 어려운 시기에 사세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동아일보 사장 재임시 두 차례에 걸쳐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으로 활약했고, 1960년부터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일도 맡으며 여러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제3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정치에 뜻이 없다며 완강히 거절했으나, 결국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겸한다는 조건으로 총리직을 수락했다. 비록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하루에 한번은 반드시 적십자사에 나가 총재 직무를 수행했다.
각천은 1971년 7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부탁으로 대한적십자사 총재 자격으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안한다. 북측이 이에 호응해 판문점에서 남북접촉이 있었고, 그 결과 남북적십자회담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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