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2호)
지식과 필력 갖춘 ‘근대여성의 선봉’
신가정 대표기자로 활약…
퇴직후 추계학원 설립
<황신덕(黃信德 1898~1983)>
일본여자대학을 졸업하고 시대일보와 중외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던 황신덕은 1929년 동아일보 회의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신랑은 동아일보 기자 임봉순(任鳳淳), 주례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였다.
1935년 6월 ‘신가정’(여성동아 전신)편집책임자 수주 변영로가 황신덕에게 입사를 권한다. “내외간에 같이 출근하는 것도 좋지 않겠소. 신가정 기자 한 사람이 출가해 자리가 비었으니 와서 일 좀 해주시구려.”
황신덕은 일본 유학중이던 1920년 6월부터 도쿄 여자유학생 친목회인 학흥회 활동을 했고, 1921년에는 여자기독청년회를 조직했던 여성운동가였다. 1926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잠시 들렀던 시대일보는 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기자 발령을 냈다. 사장은 홍명희, 편집국장은 한기악이었다. 경영난으로 직원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올 때였지만, 당시 학예부에는 김팔봉, 안석경, 김동환 씨 등이 일해 신문사 생활은 즐거웠다고 말한다.
경영난으로 신문사들이 문을 닫자 경성실업여학교 교사로 옮겼던 그는 학교가 분쟁으로 폐교해 어쩔 수 없이 쉴 때 동아일보가 그를 불렀다. 그렇게 동아가족이 된 황신덕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가정’이 없어질 때까지 신가정의 대표 부인기자로 자리를 지켰다. 이후에는 정리부로 옮겨 1940년 폐간 직전까지 일했다.
일제시대 여기자로는 가장 오랫동안 언론계에 종사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황신덕은 동아일보 퇴직 후인 1940년 10월 의친왕의 아들 이우가 희사한 2만원으로 경성 가정 의숙(현재 중앙여중고)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광복 후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선임되는 등 정치무대에서도 활약했던 황신덕은 중앙여중고 교장(1945~1961)을 거쳐 1961년 자신의 호 추계(秋溪)를 딴 추계학원을 설립해 유치원에서부터 추계예술대학교에 이르는 종합학교 법인으로 성장시켰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