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2호)
지식과 필력 갖춘 ‘근대여성의 선봉’
춘원 이광수 부인…
의사 출신으로 전문적 기사 인기
<허영숙(許英肅) 1895~1975>
춘원 이광수 부인 허영숙은 1925년 12월부터 1927년 3월까지 동아일보에서 근무했다. 허영숙을 학예부장으로 발탁한 것은 병치레가 심해 결근이 잦았던 춘원의 원고수발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가 썼던 ‘화류병자의 혼인을 금할 일’(1920년 5월 10일자)이라는 글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도 계기가 됐다. 그는 재직 중 의사라는 전문성을 살려 ‘가정 위생’ ‘부인문제의 일면, 남자할 일 여자할 일’ 등의 기사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의 부잣집 딸이었던 허영숙은 당시 양반집 규수들만 다니던 진명소학교, 경성여고보를 거쳐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 1918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의사시험에 조선 여성으로는 첫 합격자가 된다. 의대생으로 대학병원에서 실습 중이던 그는 어느 날 각혈로 병원을 찾아온 조선청년 이광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허영숙은 1920년 5월 서울 서대문에 조선 최초의 산부인과 병원 ‘영혜의원’을 개업했다. 병원은 크게 명성을 얻었으나, 남편 이광수가 병으로 눕자 대신 원고정리를 해줄 요량으로 신문사에 나갔다 기자가 되고, 곧이어 조선 최초의 신문사 여성부장(학예부장)으로 승진한다. 당시 그를 도운 차장은 ‘불놀이’라는 한국 최초의 자유시를 쓴 주요한이었다.
그녀의 기사와 논설은 의학지식에 기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정위생’ ‘각오하여 두어야 할 조선여자의 천직’ ‘민족발전에 필요한 아이 기르는 법’ 등의 연재물은 여성의 월경, 임신, 육아지식 전파에 기여했다. 신문사 퇴사 후 본업인 의사로 돌아간 이후에도 허영숙은 동아일보를 통해 ‘소비생활의 합리화-의복’ 등을 기고했다.
해방 이후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회부되자 두 사람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합의 이혼한다. 1963년 자식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 허영숙은 1975년 이광수기념비 건립을 위해 귀국했다가 폐렴 증상으로 서울 중구 백병원에 입원 중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춘원과의 사랑, 여기자 등 당시 ‘신여성’의 대명사였던 허영숙은 납북된 남편과는 생이별했으나 세 남매를 물리학박사, 영문학자, 생화학자로 키워냈다. 명동성당에서 영결미사를 치른 고인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천주교묘지에 안장됐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