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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47> 이상철

Posted by 신이 On 10월 - 6 - 2020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0호) 

‘일장기 말소’ 기자 개인보다 회사의 숨은 방침

 

독립운동에 젊음 바치기 위해 입사…사회부 기자로 활약

 

<이상철(李相喆), 1893~1979>

이상철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청양군 주사를 지내다 일본으로 유학 가 29세 때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 김준연, 김도연, 백관수, 유억겸, 박순천 등과 교유하며 ‘지방관리’에서 ‘조선인 이상철’로 터전을 닦는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던 중 관동대지진으로 책이 모두 불타고 동경의 분위기도 험악해 귀국한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벽초 홍명희의 천거를 받아 1924년 5월~8월까지 사회부 기자로 일했다.

1964년 3월 ‘東友’ 제 10호에 실린 ‘舊友 회고실’에서 이상철은 당시를 이렇게 되돌아봤다.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된 동기는 당시 뜻있는 젊은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민족독립운동에 정열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입사 후 사회부에 소속돼 경기도와경성부를 담당했다.

사회부장은 유광렬 씨였다. 내가 동아일보에 있었던 기간이 4개월 밖에 안 되었고 특기할 만한 중대사건도 없었다. 당시 신문은 4면 석간으로 마감시간은 오후 3시여서 오후 1시에 들어와 기사를 쓰는 일이 매일 되풀이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언론인보다는 항일지사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출입처에 나가면 朝日신문이나 每日신문 특파원들이 출입처 간부보다 우리를 상대하며 자료교환을 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민족운동의 정당성을 그들에게 설명하였으며, 그들은 일본의 입장을 우리에게 설명했다.”

이상철은 1924년 10월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 입사 전 잠깐 시대일보에 들어갔으나, 당시 시대일보는 경영난으로 내분이 일어나 다닐 수가 없었다. 놀고 있는 그를 조선일보 편집국장 민태원이 불렀다. 이상철은 메이지대 법과를 다녔고, 민태원은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당시 동경 유학생들은 도별 친목회의 결속력이 강했는데, 서산 출신의 민태원이 이상철 등의 힘을 업고 충청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동경유학생회 회장에 당선됐다.

이상철은 조선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뒤 중외일보 판매부장, 매일신보 정치부장과 영업국장을 지냈다. 1941년 신문사를 떠나 강원도 광산연맹 전무이사로 일했다.

해방 후 경성일보 재산관리인과 자유신문 부사장을 역임했다. 그 후 청양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하고, 4·19 이후 제2공화국에서 체신부장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1965년 6대 국회에서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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