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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59> 곽상훈

Posted by 신이 On 10월 - 6 - 2020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4호) 

업무직 3인 支局은 ‘민족운동 지방사령탑’ 역할

 

 

 

인천 기자-지국장 겸직…

신간회 등 抗日에 앞장

 

 

 

 

<곽상훈(郭尙勳, 1896~1980)>

 

제헌국회부터 시작해 5대국회까지 인천에서 내리 당선되고, 5대 민의원 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한 곽상훈 선생도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다. 부산 동래 출신인 곽상훈은 17세 때 서울대 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인천에 사는 큰형 집에서 경인선을 타고 통학했다. 곽상훈은 회고록에서 “경인 통학생으로 아침저녁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부터 인천은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고 했다. 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은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곽상훈을 선출했다. 당시 그는 야구, 축구, 농구 등 운동을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날렸다.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 한국 미술사 연구의 대가인 우현 고유섭 등이 통학생 멤버였다.

그런데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상훈은 고향 동래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인천을 기반으로 학생운동, 소년운동, 신간회와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 등 합법적으로 국민을 결집하고 실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6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에 뽑혔고, 같은 해 10월 인천지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동아일보 1927년 5월12일자는 곽상훈을 인천지국 기자로 임명한다는 사고가 실려 있다. 그는 그때부터 1940년 폐간 때까지 인천지국 기자와 지국장을 겸했다. 사회활동가로 신문에 꾸준히 등장했던 곽상훈의 이름은 1931년 신간회 해산 이후부터는 찾기 어렵다. 곽상훈의 행적을 언론을 통해 다시 확인한 것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면서부터이다.

쉰두 살 나이로 인천 갑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곽상훈은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1948년 반민특위 검찰관에 임명됐다. 1950년 인천 을 지역구에서 2대 민의원에 당선돼 전원위원장을 지냈고, 1954년 3대 민의원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고, 4·19혁명 이후 5대 민의원에서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됐다. 1961년 국회의장 자격으로 37개국 순방친선사절단을 이끌고 여행하던 중 5·16군사정변을 맞은 그는 곧바로 귀국한 뒤 5·16 지지 성명을 발표해 동지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정계를 은퇴한 그는 1969년 통일원 고문과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1979년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 사망 후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국무총리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치생활을 마감하고 1980년 1월 서울 우이동 자택에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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