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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55> 고형곤

Posted by 신이 On 10월 - 6 - 2020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3호) 

잡지기자 3인 ‘손기정 다리’만 게재…일장기 말소 ‘묘수’

 

 

 

초면 송진우 사장 찾아가 대학등록금 해결

신동아 입사

 

 

 

 

 

 

 

<고형곤(高亨坤, 1906~2004)>

 

“신동아는 이번에 영업국 증원을 하였고, 편집국에도 새로이 금년 봄에 성대(城大)를 마친 고형곤 씨가 기자로 입사했습니다.”(신동아 1933년 6월호 편집후기)

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은 일제하 ‘동아 식구’였다. 신동아 1991년 11월호에 실린 고 전 총장의 회고에 따르면 동아일보 입사는 송진우 사장 덕분이었다. 경성제대 철학과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못내 쩔쩔매던 그는 일면식도 없는 송진우 사장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는데, 송 사장이 영업국 직원을 불러 “고 군 등록금을 대주도록 하게”라고 지시해 무사히 대학을 마쳤다고 한다. 졸업 후 인사차 찾아간 그에게 송 사장은 대뜸 “자네 오늘부터 여기서 근무하게”라고 해서 일하게 됐다는 것. 전북 임피, 지금의 군산시 근교 농촌에서 태어난 고형곤은 서당을 다니다 뒤늦게 신교육을 받았다. 만학도였음에도 5년 만에 보통학교와 이리농림학교를 끝내고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머슴 문성이’라는 단편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했다.

고형곤 기자는 신동아 시절 기억에 남는 일로 허헌 인터뷰를 꼽았다. 나중에 북한 부수상을 지냈던 허헌은 1930년대에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왔다. 그런데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더니 인왕산 밑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하느라 돈을 다 써 오막살이 신세라는 것이었다.

당시 신동아는 해외소식을 많이 실었는데, 이는 긴박한 국제정세를 다루려는 취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원고 부족으로 인해 ‘번역물로 땜질하기’위한 측면도 있다. 전문 지식인이 드물어 원고 청탁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신동아 기자들은 보통 서너 개의 필명으로 같은 호에 겹치기로 등장하는 일이 많았다. 고형곤의 경우 형고은(荊古銀), KHK 등을 필명으로 사용했고, 최승만 씨는 인왕산인, 필운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썼다. 변영로 씨는 수주(樹州)라는 이름으로 시를 발표하는가 하면, 변영로라는 이름으로 수필을 게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동아에서 2년을 일한 고형곤은 경성제대 조교로 갔다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한국 철학계에서 서양철학을 연구한 1세대 학자인 그는 후일 불교철학에 심취해 서양 실존주의 철학과 불교 선(禪)철학을 접목시킨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6·25가 터지자 양식 대신 칸트전집 10권을 챙길만큼 그는 학문에 집착했다.

전북대학교 총장을 지낸 그는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북 군산 옥구에서 야당인 민정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초선의원으로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공직에 나서는 아들 고건에게 ‘남의 돈 받지 말고, 술 잘 마신다는 소문 내지 말고, 누구의 사람이라는 말 듣지 말게 하라’는 목민관 수칙 3계명을 내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학술원 종신회원을 지내고 2004년 98세로 별세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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