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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60> 현상윤

Posted by 신이 On 10월 - 6 - 2020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4호) 

업무직 3인 支局은 ‘민족운동 지방사령탑’ 역할

 

 

 

3·1운동 혐의 옥살이…

본보 監事 첫 高大총장도

 

 

 

 

 

<현상윤(玄相允, 1893~)>

 

1919년 1월 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은 교장 송진우와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일본 유학생 송계백을 비밀리에 만났다. 송계백은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알리기 위해 잠시 귀국한 때였다. 이날 만남을 계기로 인촌 김성수 등은 독립만세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 위해 종교계 설득에 나섰다.

현상윤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20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출소 이후에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찍혀 광복 때까지 감시를 받았다.

기당 현상윤은 평양 대성학교를 나와 와세다대에서 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일본 유학 시절 인촌, 고하, 설산, 벽초 홍명희 등과 교분을 쌓 았는데, 인촌과의 인연으로 중앙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래 교장까지 지냈고, 1925년부터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동아일보 감사를 맡았다.

기당은 한국학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학자일 뿐 아니라 민족계몽에 앞장 선 사상가이자 문학가였다. 일찍이 나라의 재목을 육성하는 교육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교육 사업에 앞장섰다. 기당은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교육의 근본의(根本義)’라는 글에서 “지금 조선의 교육은 어떠한가. 과연 우리가 우리 자손을 위해 교육을 하고 있는가”라며 교육의 가치를 설파했다.

해방된 해 9월 기당은 경성대학 예과부장으로 취임해 국립대 설립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해 말 고하 송진우가 흉탄으로 숨지자 인촌이 한민당 당수가 되고 기당이 보성전문을 맡게 된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하자 초대 총장이 됐다. 총장으로 재직하면서도 강의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당시 학문적으로 미개척지였던 ‘한국사상사’를 정규 과목으로 편성해 직접 강의했고, 그 결실을 모아 1949년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펴냈다. 그 이듬해 썼던 ‘한국사상사’는 뒤늦게 원고를 찾아 1960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펴냈다. 고려대는 6·25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3년 3월 조선유학사의 학술적 가치를 평가해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는 건국 이후 한국정부가 인정한 첫 박사학위였다.

그러나 기당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납북돼 박사학위를 직접 받지 못했다. 2005년 윤사순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기당 현상윤 전집간행위원회’가 설립돼 2년여의 활동 끝에 ‘기당 현상윤 전집(나남 전5권)’을 펴냈다. 현재천(고려대교수), 재민(KAIST교수), 재현(동양그룹 회장) 씨 등 후손들도 함께 참여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

 

 

댓글 한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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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by 토토 — 2020/10/11 @ 4: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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