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8호)
미술기자 전성시대 주축…
신동아에 기사도 쓴 학구파
<이마동(靑駒 李馬銅), 1906∼1980>
고희동이 창간기에, 노수현 안석주가 1920년대 전반기에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문삽화와 만화의 초창기를 개척했다면, 청구 이마동은 최영수 정현웅 등과 함께 1930년대 중반기 동아일보의 삽화를 담당했다. 여기에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활약한 청전 이상범을 더하면 동아일보의 화려한 미술기자 진용이 완성된다.
이마동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휘문고보에서 미술선생이었던 고희동에게 그림 지도를 받았다.
그뒤 프랑스 유학 출신의 이종우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고려미술원 등에서도 공부를 했다. 1927년에는 일본에 유학, 도 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1932년에 졸업하고 귀국하게 된다.
1934년 8월 동아일보 미술담당 기자가 된 이마동의 첫 삽화는 장혁주의 장편소설 ‘삼곡선’(三曲線)으로 122회에 걸쳐 연재됐다. 이어서 주요섭의 장편소설 ‘구름을 잡으려고’를 연재했고, 이무영의 장편 ‘먼동이 틀 때’, 김말봉의 장편 ‘밀림’, 주요섭의 장편 ‘길’ 등의 삽화를 그리고 1936년 3월 퇴사하게 된다. 이마동은 재직시절 신동아에 미술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마동은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과 입선을 하며 서양화가로서 입지를 굳혔으나 관 주도의 보수성이 강한 선전에 맞서 개성있는 화가들과 1934년 목일회(牧日會)를 결성, 민족미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이마동 등은 선전에 출품을 거부하고, 민족적인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이마동은 정물화 풍경화 등을 주로 그렸는데, 1960년 이전에는 사실주의에 기반한 화풍을, 이후에는 인상파적인 점묘법을 통한 화려한 색채의 화풍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은 ‘꽃다발 있는 정물’, ‘꽃다발 없는 정원’, ‘교회 보이는 풍경’, ‘흑석동 풍경’ 등이 꼽힌다.
동아일보 퇴직 후 보성중학교 등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한 이마동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종군화가 단장이 되었고, 1956년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1958년 목우회 창립·회장, 1962년 홍익대 미대 교수·학장, 1971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