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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40> 이관용

Posted by 신이 On 10월 - 5 - 2020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9호) 

항일민족의식으로 무장한 해외특파원  

 

영독불일어 능통 철학박사…

1925년 소련 전방위 취재

 

 

 

 

 

 

 

<이관용(李灌鎔), 1894∼1933>

 

영국 옥스퍼드대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대 철학박사(1923). 영어 독어 불어 일어에 능통. 서울의 왕실종친 가문에서 태어나 일본 유럽에서 10여 년을 유학한 이관용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보기 드문 ‘외국통’이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때는 김규식이 이끄는 민족대표단의 독립청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현지신문이 이를 보도하게 하는 일등공신이었고, 1923년귀국해서는 연희전문 부교장이 됐다.

이런 이관용이 1924년 5월 동아일보에 논설기자로 입사하게 된다. 그와 함께 유학했던 김준연(나중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장덕수 주필에게 이관용 소개글을 보내고, 동아일보 1922년 10월 4일자에 조선인의 유럽유학에 대한 이관용 글이 게재된 것을 보면 입사경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관용이 입사해 맡은 일은 동아일보의 영문란이었다. 이관용은 넘어온 원고지가 시뻘겋도록 수정을 가했으며, 그중에서도 ‘본보가 이 영문란을 내게 된 것은 영광’이라고 ‘글로리어스’로 적힌 대목을 대뜸 ‘프라우드’로 고쳤다는 것이다. 동아일보가 영문란 내는 것이 자랑이라면 몰라도 영광일것까지야 없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1925년 2월 이관용은 러시아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당시 트로츠키의 실각과 스탈린의 집권으로, 소련이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조선에서도 소련사정에 대한 관심이 증대됐기 때문에 동아와 조선이 거의 동시에 기자를 러시아에 특파한 것이다. 이때 보내온 기사를 살펴보면, 모스크바의 날씨, 번화가의 빌딩, 건축양식과 수많은 교회, 여성참정권, 신경제정책, 들끓는 소매치기, 군경들의 불심검문, 비노동자의 생활불안, 계급차와 레닌 우상화 등등 전방위적인 관심사를 다루고 있다.

이관용은 1925년 4월 동아를 나와 ‘재건 시대일보’의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게 되나 1년여 만에 재정난에 봉착해 퇴사했다. 이후 1927년 2월 창립한 신간회의 핵심멤버가 된다. 영·불어는 물론 우리말도 잘하는 웅변가였던 그는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간회의 기본정신을 설파하던 중, 1933년 청진에서 강연회를 마치고 일행과 함께 간 바닷가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마흔을 갓 넘긴 아까운 인재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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