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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34> 이은상

Posted by 신이 On 7월 - 29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7호) 

 

 

동아 원고료로 학비 충당 …1933년 창간

‘신가정’ 편집장 맡아  –  이은상

  

 

 

< 이은상 (鷺山 李殷相, 1903∼1982)>



“이은상은 단군 모자를 쓰고, 세종 두루마기를 입고, 이순신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나무를 보아도 조선, 돌을 보아도 조선, 거의 조선미치광이여!”. 1932년 총독부 출입을 하던 동아일보 임봉순 기자에게 니시무라(西村) 신문검열관이 내뱉었다는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이은상이란 인물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저명한 시조시인이자, 민족의식을 고취한 사학자요 문필가였으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된 항일운동가 이은상이었다.

 

 

이런 이은상은 일찍부터 동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내가 동아의 신문지상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 때의 일이다. 동경유학시절에도 동아의 원고료를 가지고 학비에 보탰다. 26세에 귀국한 뒤로도 국내의 명산답파 기행과 손대는 이 드물었던 국문학 연구 등으로 한때 동아의 문예란은 그야말로 나의 득의한 무대처럼 여겨졌다. 어느 의미에서는 사원 이상으로 친밀감을 가졌다.”(이은상, 여성동아 1967년 11월 복간호)

 

 

이은상이 정식으로 동아의 일원이 된 것은 1932년 10월로, 신동아 기자로 입사했다. 이화여전 문과 교수가 된지 1년만의 일이었다. 노산은 곧이어 1933년 1월부터는 새로 창간한 여성잡지 ‘신가정’(오늘날의 여성동아)의 편집장이 된다. 회사는 만 30세의 이은상에게 신가정 편집의 실질적 권한을 주었고, “그때의 내 정열은 거의 이 잡지 편집에 쏟아부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들에게 민족정신을 전도하는 것으로써 새 조선운동의 첩경을 삼았다” 고 회고할 정도로 그는 ‘신가정’ 일에 몰두했다.

 

 

시조시인으로서의 이은상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하고 있다.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 그의 시조작품은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도 많이 불려지고 있다.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에 35회에 걸쳐 빼앗긴 조국의 국토와 문화재에 얽힌 심정을 술회한 ‘향산유기’(香山遊記)를 연재,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이나, 1938년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던 시절 일본군의 명칭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으로 표기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사직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은상은 일제강점기 애국의 기상이 넘치는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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