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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28> 현진건

Posted by 신이 On 5월 - 28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6호) 

 

 

 ‘빈처’의 작가 일장기 말소 고문받고

 붓 꺾인 경성 3대 미남  –  현진건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

 

 단편소설 ‘빈처’ ‘운수 좋은 날’의 작가 빙허 현진건도 동아일보에서 활약한 기자였다.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세이조중학(成城中學)과 중국 후장대학(?江大學)에서 수학한 현진건은 1919년 귀국 후 문필활동부터 시작한다.

 

 1920년 ‘개벽’ 잡지에 ‘희생화(犧牲花)’를 발표한 데 이어 다음해 ‘빈처(貧妻)’로 문명을 얻었다. 또 홍사용 이상화 나도향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조 선일보, 동 명사, 시대일보를 거쳐 동아일보에 입사한 것은 1927년.   

 

 입사 이듬해에 사회부장이 된 그는 주로 사회면 편집을 했으나 직접 국토순례에 나서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 첫 번째가 1929년 신라고적과 유물들을 순례하고 돌아와 ‘고도순례·경주’ 시리즈였다. 이어서 ‘단군성적순례’를 연재했는데, 모두 평범한 기행문을 뛰어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명문들이었다.

 

 현진건은 뛰어난 문장력은 물론, 기사제목 잘 붙이기로도 유명했다. 총독부 관리들의 폐부를 찌르는 제목,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유형의 제목을 곧잘 짜냈다.

 

 저녁이면 으레 요정을 드나들던 빙허는 두주불사로 유명했다. 동아일보 기자에 미남 소설가로 알려진 그가 요정에 나타나기만 하면 기생들이 서로 그 방에 들어가려고 앞을 다투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진건의 요정출입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일제 고등계 형사들의 눈을 피해 취재원이나 요시찰 인물의 연락책을 술마시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고도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아무튼 이상화 한기악과 함께 당시 경성의 3대 미남(‘인물평론’ 1940년 4월)이라는 말이 나돌던 현진건은 술과 관련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술에 취한 현진건 사회부장이 사장의 뺨을 쳤고, 이튿날 사장이 그에게 술을 사주었다는 전설적인 사건이다.

 

 현진건의 언론활동은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급작스레 파국을 맞게 된다. 이 사건으로 현진건을 비롯한 이길용(운동부 주임), 최승만(잡지부장), 신낙균(사진과장), 서영호(사진부원) 등 8명이 구속돼 40여 일간 문초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네 번째 무기정간을 당했다.

 

 현진건 이길용 등 사건의 직접 책임자로 지목된 5명은 언론기관에 일체 참여하지 않을 것 등 총독부가 작성한 서약서에 서명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퇴사하고 언론계를 떠나야 했던 현진건은 병마와 가난에 시달리다가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 역사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민족혼을 다시 되살려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역사 속에 살아있는 보통사람들의 거룩한 혼을 찾아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1938년 7월20일자부터 16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무영탑’이었다. 무영탑에 이은 역사소설 ‘흑치상지’가 일제의 탄압으로 52회로 연재가 중단된 것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접은 현진건은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술로 소일하던 중 결핵에 걸려 1943년 44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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