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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 서항석

Posted by 신이 On 5월 - 28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6호) 

 

 

‘지식청년의 본보기’ 학예부 근무…

한국 연극계 초석 다지 태두 – 서항석

  

 

 

<서항석(耿岸 徐恒錫), 1900∼1985>

 

 경안 서항석은 1900년 3월18일 함경남도 홍원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신동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소년기를 보낸 서항석이 당시 최고명문인 동경제대 독문과를 졸업했으니 선망의 대상이자 지식청년의 본보기였다. 이런 그가 무대예술에 대한 인식이 보잘 것 없었던 1920년대 연극계에 뛰어든 것은 일종의 이변이었다.

 

 

 서항석은 대학시절부터 해외문학파에 가담하여 독문학의 한국소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1929년 동경에서 귀국하여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가 된 후에는 문예비평 활동에도 몰두했다. 대학시절 독일희곡에 심취했던 그는 점차 연극운동에 뜻을 두기에 이르렀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 조직으로 구체화됐다.

 

 

 극예술연구회 창립공연 작품인 고골리 작 ‘검찰관’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제3회 공연작품인 ‘우정’(카이젤작)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극예술연구회에서 연기나 번역보다는 비평과 강연 등 연극계몽활동에 주력했다. ‘하우프트만 연구’ ‘괴테와 그의 사회사상’이 초기에 쓴 대표적 논문이다.

 

 

 서항석은 30세가 되어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당시 언론계 분위기에 비춰보면 나이가 꽤 들어서 기자가 된 셈이다. 1933년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이 되면서 그의 연극활동은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동아일보는 독문학 전공의 인텔리였던 서항석의 연극활동에 큰도움을 준 것 으로 보인다. 동 아일보 시설을 빌어 연극영화전시회를 열었던 것도 그 한 사례다. 서항석은 동아일보를 통해 서구문학과 연극을 대중에게 전했고, 동아일보는 기꺼이 그의 활동무대가 되어준 것이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1,3등을 차지하자 동아일보 8월12일자 조간4면에는 ‘손·남 양군 승전사(勝戰詞)’가 실렸다. “지화자 조흘시고 이겻고나 이겻고나/ 형아 아으아 2천만 다나와서/승전고 두리둥치며 어깨젓고 춤추자”며 감격의 노래로 조선민중들을 격동케 했는데, 바로 서항석의 글이었다.

 

 

 1938년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후 서항석은 연극활동에 집중했다. 1940년대에는 연출에도 손을 댔고, ‘견우직녀’ ‘콩쥐팥쥐’ 등의 희곡도 썼다.   

 

 

 해방후 국립극장 설립에 앞장섰고, 7년간 국립극장장을 지냈다. 서 항석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번역, 1960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 후일 독일정부로부터 괴테훈장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기도 했다. 예술원 부회장을 역임하고 1985년 사망.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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