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5호)
본보 창간 때 8천여원 거금 출자…
사장대행, 이사 맡아 – 허헌
<허헌(許憲), 1885~1951>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국회의장에 해당)까지 역임한 허헌이 일제강점기에 사회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인권변호사 활동이었다. 보성전문과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허헌은 노동자들의 부당해고와 고용·임금문제, 조선인의 기본권 옹호 등에 발벗고 나섰으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료변론으로 신망이 높아져 이인 김병로와 함께 3대 민족인권변호사로 꼽혔다.
1919년 조선변호사협회장으로 선출된 허헌은 특히 손병희 등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호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조선독립을 주창 선언한 것은 민족을 위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행동한 것으로서 범의가 없으며, 따라서 처벌할 필요가 없고 무죄가 되어야 한다”며 일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박한 법이론과 지식으로 3·1운동 지도자를 변호해 일제에 맞섰다.
허헌이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창간시 8천여 원의 거금을 출자하고 감사(1921.9∽1924.5)를 맡으면서 였다. 1923년 11월에는 당시 경영이 어려웠던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4년 4월 송진우가 동아일보사장직에서 물러났을 때는 한 달간 사장 직무대행을 맡았고, 이어서 1930년까지 취체역(이사)으로 동아일보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허헌이 보성전문과 동아일보 경영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의 친분이 작용했다. 그가 메이지대학에 유학할 무렵, 도쿄에서는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백남훈 등이 유학생 신분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허헌은 이들과 함께 한일병합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면서 유대관계를 맺었다. 허헌과 인촌과의 관계는 1930년대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 그가 곤궁한 처지에 놓였을 때 인촌과 송진우 윤치호 등에게 생계를 의존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료변론에 나서면서 허헌은 차츰 사회주의 성향으로 기울었다.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동조자적인 변론, 공산주의자들과의 폭넓은 교우, 그리고 딸 허정숙과 사위 임원근이 모두 조선공산당 간부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되자 허헌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피선돼 민족단일당 결성과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신간회가 중심이 되어 일제만행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기로 했으나 사전에 발각, 체포되는 바람에 4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황해도에서 요양 중 해방을 맞은 허헌은 여운형 주도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 건준 부위원장이 된다. 이어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의 국무총리로 이름을 올리는 등 여운형 노선을 따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 결성에도 참여, 여운형에 이어 제2대 남로당 위원장이 된 허헌은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내리는 등 좌익의 거물정치인으로 부상했다. 1948년 남북협상차38선을 넘어간 허헌은 남으로 내려오지 않은 채 그해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헌법위원, 의장으로 선출됐고, 10월에는 김일성종합대 총장을 겸임하기에 이르렀다. 1951년 청천강에서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