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4호)
독립 열망 쏟아낸 ‘文士기자들’
– 한기악
한기악(月峯 韓基岳, 1898∼1941)
<민중의 벗으로 동아세아에/반만년 찬란한 우리역사와/삼천리 화려한 우리강산을/위하고 위해서 네가 나왔지/(중략) /너를 고대한지 이미 오래고/너에게 바람이 많고 컸도다/ 네 사명 중함은 누구나 알고/ 네 주의(主義) 바름은 누구나 안다 >
동아일보 창간 2호에 ‘월봉생’이라는 필명으로 쓴 ‘아! 동아일보야’라는 글의 필자가 월봉 한기악이다. 동아일보의 창간에 거는 민중의 기대감을 절절이 표출한 데서 월봉의 남다른 민족의식과 독립을 향한 염원이 느껴진다. 창간과 동시에 정치부 기자로 시작한 월봉 한기악의 기자생활은 사실상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게 당시 동료들의 증언이다.
훗날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이희승은 “월봉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가였고, 교육자였으며, 지사적인 감각의 언론인이었다. 우리나라 언론사에 있어서 월봉과 같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참의도는 독립운동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기악은 강원도 원성 출신으로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한 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망명했다. 신채호 김창숙 이동녕 등 독립운동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던 그는 이후 선배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유학을 떠났다. 한기악은 동경에서 2·8독립운동 준비에 참여한 데 이어 3·1운동 준비를 위해 귀국,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런 활동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1919년 4월 다시 상해로 망명을 떠났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한기악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곧 법무부 위원이 되어 입법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임정활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임정내 파벌싸움에 실망하던 그에게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자 귀국을 단행한다. 3대독자에 유복자로 효심이 지극했던 그는 귀국해 모교인 중앙학교와 인촌 김성수를 찾은 것이 계기가 돼 중앙학교에 근무하던 중 동아일보 창간에 의기투합해 동인으로 가담하게 된다.
한기악의 일선기자 활동은 얼마 가지 않았다. 1923년 5월부터 경제부장을 시작으로 사회부장, 편집국장대리를 연이어 맡게 된다. 특이한 것은 그가 평기자로서 1921년 11월부터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은 점이다. 총독부 탄압에 대비해 일선 언론인이 이런 직을 맡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다고 해도 평기자가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은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인촌과의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한기악 다음으로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된 사람 역시 평기자였던 설의식이다). 한기악은 1925년 동아일보를 떠나 시대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35년부터 중앙고보에서 감사로 재직중 지병으로 타계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