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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동아일보 사람들- 최인진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최인진(崔仁辰, 1941~2016)은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후 1971년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했다. 편집국 사진부장, 조사부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신문사진의 역사 전문가로서 한국사진사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저서로 <한국신문사진사> <한국사진의 한 세기> 등이 있다.

 

최인진(崔仁辰) (나주, 1941~ ) △71.10 사원(출판사진부), 편집국사진부차장, 사진부장(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4권, 동아일보사, 1990)

 

 

 

[부고] 최인진 사진사연구소장

사진사학자인 최인진 한국사진사연구소장(사진)이 1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1971년 사진부 기자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고인은 사진부장과 명지대 한국사진사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다산 정약용의 사진 세계’ ‘멀고도 먼 길’ 등 역사와 관련한 작품 활동을 펼쳐 왔으며 사진사 연구에 매진했다. 유족으로 부인 박남희 씨와 아들 원제 씨(한아케미칼 차장), 딸 하은 고운 씨, 사위 이석찬(한국스마트카드 수석) 어진선 씨(다우기술 상무)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5일 오전 7시. 

(동아일보 2016년 9월 14일 X17면)

 

 

사진으로 본 근대사(近代史) 파노라마… 일제(日帝) 불허(不許)자료 등 200여점 게재
최인진 저(崔仁辰著)「한국신문사진사」

(동아일보 1993년 1월 20일 12면)

 

[카메라세계] 逆光(역광)땐 스트로보써라 (동아일보 1991년 11월 16일 28면)
~
[카메라세계] 해돋이촬영「달같은 태양」포착하라 (동아일보 1992년 7월 18일 28면)

 

[대망의 80년대’에 바란다] 출판국 방담, 참석자 : 황의봉 안훈 최인진 정출도

(동우(東友), 1980년 4월 30일) 

 

 

[4∙19혁명 50주년 기념 관훈클럽 세미나] 4∙19혁명과 언론

[제1세션 – 주제발표] 4∙19혁명 신문사진의 재조명

최인진 | 사진역사연구소장,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4∙19혁명이 일어난 지 만 50년이 되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신문사진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재조명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의 상황과 사진취재에 얽힌 제 문제, 사진을 통해 4∙19혁명의 중요문제는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지만, 당시의 사진게재 문제, 4∙19혁명 이후의 신문사진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밝혀보고자 한다.
4∙19혁명 당시 사진기자들은 진실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신문사진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시위 등을 취재했으며, 현장에서 포착한 사진을 신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독자들은 신문에서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된 4∙19혁명과 관련된 많은 사건을 기사와 함께 보고 읽으면서 뉴스를 보는 시각의 성장도 있었고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정의감도 불태웠다. 4∙19혁명은 기사만을 통해 사건을 보면서 현실을 개탄하던‘읽는 신문’의 시대가 아니라, 영상매체 중심의 텔레비전처럼 사진기자의 현장사진을 보면서 현실에 참여하고 분노하고 저항하는 행동을 촉발시킨‘보는 신문’의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사 중심의 신문에서 볼 수 없었던 사진을 통해 뉴스의 실상을 접할 수 있는 시대로의 대전환이었다. 물론 이 무렵에 단행된 증면 조치리든지, 신문제작의 발전적 요인들도 그 어느 때보다 신문사진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신문사진이란 무엇인가

4∙19혁명 당시의 신문사진은 6∙25전쟁 이후 전쟁으로 파괴되고 빈곤한 현실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권의 말기증상, 권력이면 다 된다고 만용에 빠졌던 자유당정권의 횡포 속에 진행된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실상과 민중의 저항 등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했다. 특히 3∙15부정선거 과정에서의 현장사진들은‘읽는 신문’에서, 뉴스와 정보의 전달에서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보는 신문 ’으로 대전환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사진기자들은 목격자로서 현장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충실하게 전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대한 감시자 역할도 했다.
서울과 각 지방에서 일어난 3∙15부정선거 항의시위 현장에는 언제나 사진기자들이 있었다. 각 신문은 사진기자들이 찍은 대규모 시위 등 생생한 현장사진을 보도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본 독자들은 자신이 마치 현장에서 시위를 목격한 것처럼 느꼈다. 이처럼 어떤 사건에 대한 사실감을 더욱 실감나게 한 것은 사진의 힘이었다.
기사 중심의 신문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하여‘이러이러한 사건이구나’하는 그림을 그리는 정도에 머물게 했으나, 사진기자가 취재한 사진을 게재하면 그 사진이 크건 작건 간에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서 전달된다. 사진은 눈으로 보는 뉴스이기 때문이다. 4∙19혁명은‘신문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뉴스’라는 말을 입증한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다.
독자들이 사진기자의 현장사진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현장감 있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도 이때였다. 독자들은 3∙15부정선거의 원흉이라고 지적했던 이기붕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사진보도를 통해 그가 어떻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자유당이나 민주당의 유세현장에 가보지 못한 사람도 유세현장은 어떻게 되어 있고, 거기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독자 자신이 거기에 참가했다면, 그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 게재된 신문을 봤을 때 임장감(臨場感)을 느꼈을 것이다. 대규모 사건이나 선거유세 현장 같은 것은 수많은 단어를 동원한 명문의 묘사보다 사진 한장이 더 정확하고 인상 깊게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4∙19혁명때의 신문사진이 잘 보여주었다. 글로 충분하게 전하지 못한 것도 사진은 아주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 4∙19혁명의 신문사진은 눈으로 보는 뉴스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전국 어디에서고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를 눈으로 보는 것같이 전달했고, 머릿속에 어디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다는 것을, 마치 그 시위대열 속에 있었던 것처럼 전달해 주었다. 특히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체 사진이나 4월 18일 서울 청계천 천일백화점 앞의 고려대생 피습사건 사진, 경무대 앞에서 총알을 피하지 않고 경무대를 향해 돌진하려 했던 현장을 찍은 사진 등은 현장의 사실성을 통해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감을 불러일으켰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선 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은 보는 신문의 시대에 걸맞게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인상을 준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진실임을 전달해 주었으며 그곳에서 일어난 사실을 모두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들

사진을 많이 게재한 동아일보는 1960년 3월 1일 민주당 대구 유세 사진으로부터 4월 20일까지 90여 장의 사진(3월 1~30일 약 30장, 4월 1~20일 무렵까지 60장 정도)을 보도했다. 이보다 적지만 조선일보도 많은 신문사진을 실었다. 4∙19혁명에서 사진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최초의 시위 사진은 1960년 3월 1일자에 게재된 대구학생들의 시위였다. 그 뒤 마산 3∙15부정선거 항의시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체, 4월 18일 청계천 천일백화점 앞 고려대학생 피습사건, 서울 종로 효자동 경무대 입구에서의 발포사건 등을 찍은 현장사진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신문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된 이러한 사건들이 4∙19혁명의 기폭제였다.
“4∙19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자유당정권에 대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누적된 국민들의 울분과 정치적 불신감 등 많은 요인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발단은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규탄한 학생과 시민의 봉기에서 촉발되었다. 이 항거는 1960년 2월 28일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결렬한 시민봉기가 일어났고, 김주열군이 숨진 마산사태는 4∙19 분화구가 되었다.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이 마산사건의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던 중 정치폭력배의 무자비한 피습사건으로 서울시민은 물론 대학가가 술렁거리고, 마침내 서울시내 대학들이 총궐기하게 된 것이 4∙19 총궐기의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4∙19혁명기념사업회, 《4∙19혁명사》)
그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증언이 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경무대 앞 발포로 시위대원이 희생되면서 분기한 시위대가 총을 쏘는데도 경무대로 돌진했다는 것이다.
“경찰관이 소방차를 버리고 헌병들과 같이 퇴각하자 전 정부관사 담을 무너뜨리고 몇 명의 청년이 소방차를 점거하려고 바리케이드 뒤쪽으로 들어가자 수발의 실탄이 경무대경찰서 쪽에서 발포되었고, 1명이 허벅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2, 3명의 학생이 그 쓰러진 청년을 업고 그대로 군중 속을 지나가며‘총 맞아 죽었다!’고 외치자 질서 있게 땅에 앉기 시작하던 학생들은 모두 일어섰고 노기가 충천하여졌다. 찰나! 약 20명의 청년들이 다시 동관사 담을 뛰어넘어 바리케이드 뒤로 뛰어들었으며, 그들은 소방차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4대의 차를 경무대 쪽으로 돌려 한대는 철조망의 바리케이드를 물리치고 성난 데모대들의 길을 열어주었고, 3대는 차례로 경무대 쪽으로 사이렌을 불며 돌진하였다. 바로 그때다. 빗발치는 총성이 터졌다.” (유일연 당시 코리아타임스 기자,《 나는 최초의 포로였다》)

신문과 신문사진의 역할

1960년 4∙19혁명 때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은 신문기사와 신문사진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궐기했다고 증언했다.《 4∙19혁명사》에 나오는 사례들을 일부 소개한다.
“1960년 자유당의 3∙15부정선거로 온 나라가 격분하고 있었으며, 그때 마산 고등학생들이 3∙15부정선거 항의데모를 하다가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변사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자….”
“1960년 자유당 독재정권하에서 만행된 3∙15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마산고교생들의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앞장섰던 김주열 학생의 변사체 발견의 신문보도로 격분하게 되었다.”
“대학캠퍼스 내에서는 3∙15부정선거 항의시위를 해야 된다고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을 때, 4월 18일 고대생들이 시가시위를 하고 시민들의 환성속에 귀교하다가 청계천에서 임화수, 이정재 등 자유당 깡패집단으로부터 각목 등으로 습격을 받아 청계천 길바닥에 쓰러진 사진이 실린 일간신문 보도가 터져 나오자 온 국민은 이에 분개하고 자유당의 깡패정치를 더 이상 참고견딜수없게되었다. ”
“3∙15부정선거 항의시위를 하던 마산고교 김주열 학생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변사체 사진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보도되었다. 이를 본 고대교정과 고대 앞 하숙가는 의분에 찬 규탄의 목소리가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4∙19혁명은 4월 18일 고대생들이 청계천에서 깡패들의 습격을 받은 사건의 신문보도로부터 혁명의 봉홧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여 4월 19일 전국이 궐기하여 이뤄진 혁명이다.”
“4월 18일 고대생들이‘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자유당 깡패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끝내고 귀가하다가 청계로 5가에서 자유당 깡패집단에 피습당한 사건이 난 신문을 보고 4월 19일 나는 중동고교 간부들과 시내로 몰려나가 경무대 앞까지 갔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은 3∙15부정선거 항의시위 중 실종되었던 마산고 김주열 학생이 끔직한 모습의 변사체로 발견된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면서부터였고, 4월 18일 시위 후 귀갓길의 고대생들을 정치깡패인 임화수 집단이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기습하여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려진 학우들의 기사와 사진은 나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이를 정리하면 마산 3∙15부정선거 항의데모,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 4월 18일 고대생 피습사건 등이 사진과 함께 보도된 신문을 보고 궐기했다는 것이 당시 대학생들의 증언이었다. 증언을 남긴 대부분의 당시 대학생들은 3∙15부정선거에 분노하고 있었으며, 특히 마산의거나 김주열군 시신 사진에서 큰 충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4월 18일 자유당 정치깡패들이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학생들을 천일백화점 앞에서 습격한 사건을 촬영한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면서 4월 19일 대학생들의 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4∙19민주혁명은 신문사진이 결정적 역할

앞서 말했듯이 4∙19혁명은 신문을‘읽는 신문’에서‘보는 신문’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자들은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며 기사를 읽음으로써 사건을 더욱 생생하고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장사진의 중요성이 커지며 각 신문사들은 마치 오늘의 영상 중심의 텔레비전처럼 풍부한 정보를 담은 사진기자들의 사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신문제작을 지향하게 되었다.
4∙19혁명 당시의 신문지면을 살펴보면 중요한 사건의 현장사진들을 모두 게재했다. 동아일보는 조간 4면, 석간 4면을 발행해 지면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중요사건의 현장사진을 가장 많이 게재했고, 화보도 시도했다. 조선일보도 적지 않은 현장사진을 실었고, 특히 4월 18일 고려대학생 귀굣길에 일어난 자유당 정치깡패들의 습격사건 현장사진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을 촬영한 사진은 부산일보가 4월 12일자 시회면에‘바다 위에 떠오른 총에 맞은 소년 시체’라는 설명과 함께 최초로 보도했다. 이보다 조금 늦었지만 배에 인양되어 있던 김주열의 시신 사진은 이날 서울의 일간지들도 지사에서 전송한 전송사진을 게재해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경무대 발포사건이라든지 그 외 중요한 사건들도 전부 사진기자들에게 포착되어 그날그날의 신문에 빠짐없이 게재되었다. 중요한 사건들의 현장사진이 거의 모두 신문에 게재되었기 때문에 신문을 보면 마치 현장에서 사건을 직접 보는 듯했다.
각 신문은 특히 3∙15부정선거 현장에서부터 마산사건, 김주열 시신 인양, 고려대생 시위 및 천일백화점 앞 정치깡패 습격사건, 경무대 발포사건 등의 현장사진을 적극적으로 크게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사건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신문에 실린 현장사진을 통해 3∙15부정선거의 실상과 무자비한 시위진압, 정치깡패의 잔혹한 폭력 등을 더욱 실감 있게 알게 된 시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여 자유당 타도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4∙19혁명이 일어났다.

4∙19혁명에 대응했던 신문사진의 반성과 새로운 모색

4∙19혁명은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사건일 뿐만 아니라 신문사진에서도중요한사건으로여겨왔다. 신문사진의큰변화를가져왔기때문이다.
우선 취재장비에 대한 문제인데, 카메라의 기본장비만 제공해 주었던 신문사들은 다양한 취재를할수있는장비의도입을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신문사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신문사만 새로운 카메라 장비를 구입했다. 카메라 취재장비의 개선을 서둘러야 했던 중요한 이유는 광각렌즈로 4∙19혁명의 신문사진을 취재함으로써 시위현장을 방관자와 같은 입장에서 촬영했던 상황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망원렌즈를 사용해 드라마틱하고 보다 현장감 있는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반성이었다. 망원렌즈를 이용해야 할 취재원, 광각렌즈를 이용해야 할 취재, 변화된 사진술을 익히고 도제 같은 기술자가 아니라 창조적인 사진기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자각도 이때 나타났다.
4∙19혁명 당시 사진취재활동을 하면서 사진취재에 많은 문제들이 노정되었다. 사진전송의 문제, 사진지면 제작과 사진부에 대한 제도적인 문제가 나타났고, 사진기술자의 시대에서 창조적인 사진기자의 시대로의 전환을 위한 사진기자 선발제도 도입 등이 필요했다. 정보요구가 확대되며 신문의 지면을 늘리고 우수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새로운 취재장비를 이용하는 상업시대에 대비해야 했다. 이는 사진부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신문이 당면한 중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최인진, ‘4∙19혁명 50주년 기념 관훈클럽 세미나- 4∙19혁명 신문사진의 재조명’, 관훈저널, 2010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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