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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동아일보 사람들- 최원순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최원순(崔元淳, 1896~1936)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과를 졸업하고 192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정치부장, 광주지국장, 편집국장대리를 역임했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했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22년엔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논박하는 장문의 글 <이춘원에게 問하노라>를 6월 3일과 4일에 걸쳐 동아일보 1면에 발표했다.

 

최원순(崔元淳) (광주, 1896~1936) ▲ 1923. 5 정치부장, 전남특파원 겸 광주지국장, 정치부장, 논설반, 편집국장대리, 조사부장 겸, 1928. 5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석초 최원순 씨(石樵崔元淳氏) 금조 별세(今朝別世)

한동안 웅변가로、조선조고계(操觚界)에서 색채가 잇게 활동을 하든 석초(石樵) 최원순(崔元淳)씨는 다년간 신병으로 인하야 전남 광주읍 누문외(光州邑樓門外) 자택에서 복약중 이든바 약석의 효과없이 41(四十一)세를 일기로 6(六)일 새벽에 별세하엇다한다.

씨는 일즉이 경성 고등보통학교부속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교원생활을 2(二)년쯤 하다가 대정 7(七)년 봄에 동경으로 건너기서 조대 정경과(早大政經科)를 대정 11(十一)년에 마치고 동 5(五)월에 본사에 입사하여 정치부장(政治部長)을 역임하고 한동안은 편집국장대리(編輯局長代理)로 편집사무를 취급한 일도 잇엇는데 소화 3(三)년에 신병으로 직을 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요양중 그와 같이 별세하게 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현덕신(玄德信)씨와 그의 유자 12(十二)세 된 장남이 잇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6년 7월 7일자 2면)

 

 

학우회 주최(學友會主催)-동아일보 후원(東亞日報後援) 하기순회강연대회(夏期巡廻講演大會)
강연지 32처(講演地三十二處), 변사 18명(辯士十八名)

(동아일보 1920년 6월 28일자 1면)

 

 

이춘원(李春園)에게 문(問)하노라 (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개벽 5월호 소재(開闢五月號所載))을 읽고
재동경 최원순(在東京崔元淳) 기(寄)

(동아일보 1922년 6월 3일자 1면)

 

李春園(이춘원)에게 問(문)하노라 (二)

민족성 개조(民族性改造)의 윤리적 근거(倫理的根據가 무엇인가?

(동아일보 1922년 6월 4일자 1면)

 

 

소식(消息)

▲ 최원순 씨(崔元淳氏)(본사 편집국장대리(本社編輯局長代理) 신병(身病)으로 정양(靜養)키 위(爲)하야 금번(今番) 사직(辭職)하고 작야 10시 20분(昨夜十時廿分) 차(車)로 고향(故鄕)인 광주(光州)로 출발(出發)

(동아일보 1928년 5월 7일자 1면)

 

 

전조선 유지 인사 총망라(全朝鮮有志人士總網羅) 궁민구제대책(窮民救濟對策)=지상좌담회(紙上座談會)【其一】

광주(光州) 최원순 씨(崔元淳氏)

(동아일보 1932년 7월 3일자 4면)

 

 

횡설수설(横說竪說)

부내 종로서(府內鍾路署)에서는、계속적(繼續的)으로、대검거(大檢擧)를、행(行)하는 중(中)이라고
평온무사(平穩無事)하다는、총독정치하(總督政治下)에서、또 무슨 중대사건(重大事件)이 속출(續出)하엿나
주의자(主義者)는 검거(檢擧)、언론기관(言論機關)은 정지(停止)가 아니면 금지(禁止)、집회(集會)와 단체(團體)는 위압(威壓)、그래도、간판(看板)만은、문화정치(文化政治)
봉천왕 장작림(奉天王張作霖)은、남구(南口)의 점령(占領)으로、인(因)하야、적적(赤賊)을 섬멸(殲滅)하엿다고、호어(豪語)를 한다지
마적출신(馬賊出身)으로선 누구다려、적적(赤賊)이라 하나
엇던 친구의、총독정치(總督政治)에 대(對)한 비평(批評)이야말로、정말 기발(奇發)하다
현하(現下)의 총독정치(總督政治)는、조선인(朝鮮人)을 이(利)케 하고、익(益)케 하는 인사(人士)는、박해(迫害)하고 배척(排斥) 하면서도、조선인(朝鮮人)을 해(害)케 하고、불리(不利)케 하는 놈들은、절대적(絕對的)으로 보호(保護)하는 방침(方針)이라고
시고(是故)로、왈(曰)、총독정치(總督政治)는 악당보호정치(惡黨保護政治)라고

(동아일보 1926년 8월 22일자 1면)

 

본보필화사건(本報筆禍事件) 3개월 판결(三個月判决)
즉시 상고해

본보필화사건(本報筆禍事件)의 최원순(崔元淳)씨의  공소공판은  재작 이십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삼개월의 언도가 잇섯는데 작 이십일일에 즉시상고하엿다

(동아일보 1926년 12월 22일자 2면)

 

 

수난(受難) 속 의(義) 지킨 정론(正論)과 풍자(諷刺) 동아필봉(東亞筆鋒) 60년(年) 회고
횡설수설… 초창기엔 해학적인 촌평(寸評)형식 정곡찌른 비판에 협박받기도…

26년 3월 1일 3·1운동7주년을 기념하여「러시아」국제농민회본부에서 조선(朝鮮)농민에게 보낸 축전을 실었다하여 3월 6일부로 정간(停刊)과 함께 송진우(宋鎭禹) 주필 김철중(金鐵中) 발행 겸 편집인이 구속되었다。

이 재판의 부당성을 공격하며 최원순(崔元淳) 논설기자는『◆주의자(主義者)는 검거(檢擧)、언론기관(言論機關)은 정지(停止)가 아니면 금지(禁止)、집회(集會)와 단체(團體)는 위압(威壓)、그래도、간판(看板)만은、문화정치(文化政治) ◆현하(現下)의 총독정치(總督政治)는、조선인(朝鮮人)을 이(利)케 하고、익(益)케 하는 인사(人士)는、박해(迫害)하고 배척(排斥) 하면서도、조선인(朝鮮人)을 해(害)케 하고、불리(不利)케 하는 놈들은、절대적(絕對的)으로 보호(保護)하는 방침(方針)이라고 ◆시고(是故)로、왈(曰)、총독정치(總督政治)는 악당보호정치(惡黨保護政治)라고 썼다.

이 기사가 압수당한 것은 물론 집필자 최(崔) 기자는 종로(鍾路)경찰서에 구속돼 징역 8월의 실형을 받았다. (…)

(동아일보 1980년 4월 1일 23면)

 

 

第一 미운 일 第一 보기 실흔 일

廻避述에 能한 人間들

崔元淳

솔직하게 말하면 거짓말로 남을 살살 꾀여 먹으려는 자도 가증하고 엇던 권력이나 금력의 뒤에 딱 부터서서 산양개 모양으로 헤를 흘근흘근 하는 놈도 可憎하지만 그것보다도 나는 廻避述에 怜悧한 인간들이 제일 가증하다고 생각함니다.

보십시오. 우리 社會에서 소위 무엇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하는 인간들이 그 언으것이 회피에는 능하지 안슴닛가. 뒤에 안저서는 떠들고 당면하야서는 회피하고 입으로는 大河를 드리킬 듯하고 발로는 細川 하나를 못 건너뛰는 인간이 얼마나 만슴닛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질적, 自力的, 强骨的, 투사적 기풍은 업고, 氣分的, 依他的, 屈從的으로 始終되고 마는 것이 거의 전부 임니다. 가증하다기 보다 통탄한 일임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들은 정말 相當者와는 싸우지 못하고 싸울 의사도 못내고 자기편끼리 싸우려 드는 것이 가장 가증함니다. 이뿐 말해둠니다. 

(최원순, ‘第一 미운 일 第一 보기 실흔 일- 廻避述에 能한 人間들’, 별건곤, 192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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