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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동아일보 사람들- 조용중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조용중(趙庸中, 1926~2018)은 충남 대덕 출신으로 동국대학교에서 수학했고 자유신보, 조선일보를 거쳐 1960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경부 차장으로 일했다. 1962년 다시 조선일보로 옮겨 정치부장과 편집부국장을 지냈으며 이후 서울신문 편집국장, 경향신문 편집국장, 중앙일보 논설위원, 연합통신 사장, 한국ABC협회장, 문우언론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미군정하의 한국정치현장> <저널리즘과 권력> 등이 있다.

 

조용중(趙庸中) (대덕, 1926~ ) ▲ 60. 6 기자(정경부), 정경부차장, 62. 1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추모의 글] 조용중 선배와의 추억

(…)

동아일보 차장과 초년 기자로 처음 인연

필자가 조용중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첫 직장인 자유신문사에서 세계통신을 거쳐 1960년 6월, 즉 4·19학생의거 직후 필자가 근무하던 동아일보로 옮겨왔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58년 동안 그와 인연을 맺어온 셈이다. 그가 동아일보의 정경부 차장으로 부임해왔을 때 필자는 입사 2년째의 사회부 초년 기자였다. 필자는 당시 법조에 출입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5·16이 일어난 해인 1961년으로 기억된다. 어떤 야당계 인사가 의문의 테러를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필자는 출입처인 검찰의 소식통으로부터 그 테러가 모 특수부대원들의 소행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필자는 젊은 혈기에 겁도 없이 이를 기사화해서 데스크에 제출했다.
그랬더니 사회부 데스크에서는 판단하기가 곤란하다면서 정경부의 조용중 차장에게 이 기사를 넘겼다. 조 차장은 기사를 검토하더니 필자를 불러 이 기사는 출고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기사의 취지는 좋으나 기사내용과 뉴스소스가 막연하게 되어 있어 기사로서 요건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필자는 조 차장에게 한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않고 그의 판단에 순순히 따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조 선배의 판단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기사의 줄기는 맞겠지만 구체적인 사항들이 특정되지 않은 불완전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조 차장이 잘못 판단해서 출고했으면 군사통치 아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역시 선배 기자의 경험과 관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당시는 조·석간을 발행할 때여서 야근시간에 조용중 차장은 늦게까지 정경부에서 데스크 일을 보고 있었다. 필자는 출입처에서 돌아와 시국에 관해 그와 가끔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조 선배는 1962년 초 조선일보로 옮겨가 만 3년 반 동안 근무하면서 정치부장과 편집부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1965년에 서울신문 편집국장과 나중에는 제작총국장을 지냈다. 필자가 조선일보 측에서 들은 바로는 조 선배가 조선일보 재직 시 사주인 방일영 사장이 그를 편집국장으로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인 방우영 발행인이 지면혁신을 위해 민국일보 편집부장 출신인 김경환 씨를 편집국장으로 기용하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인사를 몇 달을 끌다가 결국 조 선배에게는 편집국장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

조 선배는 일선기자 시절에는 조병옥 박사 등 민주당 구파 쪽을 맡아 취재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횡포를 줄기차게 보도했다. 그중에서도 1958년 12월 24일 이른바 2·4파동은 대표적인 예였다. 크리스마스이브인 그날 저녁,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은 수라장이 되었다. 여당인 자유당의원들이 의장의 경호권 발동에 따라 무술경위 300명의 포위 아래 야당의원들이 밖으로 끌려 나간 사이에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강행 통과시킨 것이다. 비분강개한 조용중 등 젊은 국회출입기자들은 이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매달 24일 낮 12시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회고담 나누기를 60년 가까이 계속해 왔다. ‘2·4회 오찬’은 처음 20여 명이 모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줄어들더니 2017년 초까지만 해도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 이형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준하 전 동아일보 기자 겸 강원일보 사장만 남았었다. 이제는 한국일보 소속이던 이형 씨와 제재형 씨만 남게 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언론 정책 정면 비판

언론인 조용중의 진면목은 김대중·노무현 두 진보좌파 정권 때 여실히 증명되었다. 당시 신문협회 소속 공정경쟁심의위원회를 맡고 있던 조용중 선배는 2001년 4월 한국신문협회에 공문 한 장을 보냈다. 그 내용은 김대중 정부가 신문을 옥죄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신문고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므로 신문협회 차원에서 이에 대한 강력한 저지활동을 벌여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문협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조 선배가 책임을 맡고 있던 공정경쟁심의위원회는 항의의 표시로 2주일 후 긴급회의를 열고 위원장 등 위원 5명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조 선배는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에 비판적인 보수계 언론사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끝내 세무사찰을 단행하자 동아일보에 ‘권력, 왜 신문시장 흔드나’라는 칼럼과 ‘신문 욕보이기’라는 칼럼을 연속 기고해 김대중 정부를 정면 비판했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4년에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신문부수 상한제와 소유지분 제한제도를 강행하려 하자 조 선배는 TV토론, 각종 토론회에 나가 이를 저지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벌었다. 이 시기는 논객 조용중의 전성기였다.

(…)

조 선배는 4년 전부터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세상을 뜨기 몇 달 전까지 펜을 놓지 않고 건필을 휘둘렀다. 그는 작년 9월 대한언론인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대한언론에 ‘박근혜와 언론 동반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촛불시위 당시 한국 언론의 지나친 편파보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남시욱 화정평화재단·21세기 평화연구소 이사장, ‘추모의 글- 조용중 선배와의 추억’, 관훈저널, 2018년 3월 20일)

 

 

<나의 取材 經驗談>

最高委員과의 會見
—제대로 取材도 못하고  虛偽로 몰릴뻔한 이야기—

趙庸中 <朝鮮日報社 軸副局長>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이제껏 소위 特種이라 할만한 記事를 한번도 써본 記憶이 없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물론 特補記事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 懷古談이 여기 등장하는 特定人物을 비난하고자 해서 쓰는 것은 전혀 아니고 다만 ‘이런 일도 있었다’는 가벼운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율 미리 밝혀둔다.>

「찦」車로 달리는 記事의 追跡戰

五.ᅳ六 革命이 나던 六ᅳ年 九月 당시 東亞日報 政治部에 있던 나는 退溪路에 자리잡은 最高會議(지금 援護處 자리)에 드나 들었다. 드나 든대야 순전히 記者室을 지키고 앉았다가 알맹이 없는 發表文울 나르는 단순한 「메센저」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았었다.
九月 十六日 土曜曰의 午後였다.

『趙兄、내일 法司委員長네 집에 가붑시다。公民權制限 같은거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죠』

당시 合同通信에 있었던 李慈憲 記者(지금 朝鮮日報 政治部)가 제의한 것올 나는 선듯 받아드렸다。그래서 軍部에 안면이 있고 따라서 最高委員들과도 안면이 있다는 京鄕新聞의 金猜來 記者(지금 特信部長)와 셋이서 다음날 아침 일찍 牛耳洞인가 어디라는 -확실한 주소는 몰랐었다- 李錫濟 法制司法委員長 자택율 찾기로 약속이 이루어졌다.

民政復歸의 예정을 밝힌 八.一二 성명이 발표된지도 한달、다른것보다도 舊 政治人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法的措置의 내용이 가장 궁금하던 때였으니까 이러한 생각은 물론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最高委員들과 記者의 접촉이 最高會議 건물 안에서조차 일체 금지되다 싶이 해있고 더구나 革命 직후인 만큼 記者들이 적지않게 위축 돼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생각은 퍽 당돌한 것이기도 했다.


약속한 시간 (十七日 아침 八時半)에 만난 세 사람은 東亞日報社 r짚」에 타고 牛耳洞을 향해 떠났다. 中央廳 앞을 지나 한국일보社 앞을 지나려는데 아차하는 순간 全速力으로 우리 차 옆으로 달려 지나가는 「짚」 안에서 李 委員長의 옆 얼굴을 발견、곧장 우리 차를 돌려서 李 委員長의 뒤를 따랐다.뒤에서 보기에 그는 陸軍大領의 正服올 벗고 가벼운 平服 차림이었다.

『…나는 모릅니다… 』

五十 내지 六十마일의 速力으로 漢江橋까지 뒤따랐으나 李 大領은 우리가 뒤쫓는것을 눈치챈 듯 더빨리 달릴뿐이었다。앞 자리에 앉았던 나는 金 記者와 바꾸어 앉아 車를 李 大領 車 옆으로 몰아 손짓을 했다.

『얼굴 모르면 어때、新聞社車란 것만 알면 서겠지』

이런 말율 하면서 손짓을 한 것을 본 李 大領은 그대로 달리기가 안됐는지 鷺梁津水源池 앞을 조금 지나서 車를 세웠다.

私服 차림의 그는 車에서 내리자 革命을 한 軍人 답지 않게 (적어도 그 당시엔 그렇게 보았다) 얼굴에 가득 웃옴을 담고 번갈아 우리 세사람과 握手를 나누었다.

『지금 댁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도중에 뵙고 뒤쫓아 왔습니다. 잠깐 여쭈어볼게 있어서…』

내가 맨처음 말을 건냈다。

『 朴 議長(당시의 最高會議議長)께선 舊政治人에 대해서 어떤 法的制裁를 할 必要가 있다고 말했는데 (八.一二 聲明올 가리킴) 構想이 어떠신지?』

『 그거 난 모롭니다。議長께서 하시는 일이라 난 알수가 없어요。』

短驅의 李大領은 如前히 상냥한 웃음을 띠우면서 가벼운 기분으로 말했다.

『 그려나 議長께서 하시는 일이라도 法司委에서 미리 案올 만들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우선 李大領의 私見이라도 좀…』

『 지금 議提께서 檢討하고 계실겁니다. 정말이지 난 이무것도 모릅니다. 대개 이런 武의 문답이 계속되고 있는데 검은 r찦」 한대가 우리 바로 앞에 急停車를 했다. 역시 私服 차림의 吳致成 大領(당시 運營企刷委負 현재 國會議長) 이 차에서 내리더니 약간 難處한듯한 表情이다.

『오랫만입니다』 그는 우리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잡혔군、잡혔어…』李委員長율 보고 弄삼아 말하고는 먼저 가버렸다.

그러잖아도 어렵게 된 路上 問答이 第.三者의 介入으로 아주 망가져 버렸다.

적당히 우리를 뿌리치고 車에 몸을 실으려는 李大領한테, 같은 이야기를 몇번이고 따지듯 물어 보았으나 李大領은 어색할 정도로 연상 손올 내밀어 세사람에게 악수만올 청할뿐이었다.

결국 虛事가 됐다. 도대체 一方的인 發表이외에는 公私間에 만나길 싫어하는 最商委員한테 無謀한 桃戰을 한 것이 後悔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도 車에 올랐다.

『그냥 돌아갈게 아니라 뒤따라 봅시다. 吳大領하고 行方이 같은 모양인데 따 라가 보면 뜻밖에 「革命主體, 某處서 重大會談」라는 記事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이렇게해서 우리는 다시 李大領을 뒤따랐다.

서늘한 가올의 낮바람이 아주 상쾌하다. 별로 붐비지않은 넓은 길을 두대의 「찦」車는 全速力으로 달린다. 永登浦驛 앞 로타리에 다달았을때 李大領의 차는 갑자기 오던 길로 핸들을 돌렸다。

『우리가 뒤따르는 것을 잡아떼려는 거야 秘密會議가 있는건 分明한데… 야단났군.』

아까와 같이 全速力으로 노량진까지 돌아왔다. 梁津驛前에 와서 李大領은 廣 場에다 車를 세웠다. 두 대의 「찦」차에서 네 사람이 거의 똑같이 내렸다. 아까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表情으로 李大領은 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왜들 이려슈? 記者 양반들 너무 심한데… 난 지금 個人 用務로 가는 건데…』

『뭘 그러십니까? 吳大領도 이미 갔고 무슨 會議라도 있는거 아닙니까.』

『그런거 없습니다. 자 그럼…』

『아니 그러시지말고 이야기 좀 더 합시다. 改正된 革栽 · 革檢法에 依하면 革裁判決에 대한 최종 결정은 最高會議 議長이 確認하도록 돼 있는데 그 基準은 무업니까.』

『그런거 모릅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그거 다 議長께서 하실일인데…』

결국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두번에 걸친 그와의 會見에서 우리가 질문한 허다한 문제들에 대해 『아직 結論을 못내렸다』느니 그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라느니 하는 정도의 말이 있었으니 『이 가뭄에 이 정도라도 하는 뜻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언제 당신을 만났단 말이오?』

十七日字 夕刊、東亞日報는 一面 三段(公權制限與否未結論、革裁判決議長 確認問題도未定、李法司委長言及)
京鄕新聞은 ᅳ面 가로 題目 r톱」(公權制限問題親意蒸議、李法司委提談, 民主箱關係도 愼重檢討)으로 취급이 됐다. (朝夕刊을 내던 그 때는 日曜日엔 夕刊만율 냈었다.)

o
다음날 (九月十八日) 夕刊 마감 時間에 社에 들어갔더니 中央廳을 「카바」하던 李雄熙 記者(지금 政治部次長)가 『당신 어제 李錫濟 만났지. 그거 間題 되겠던데, 오늘 吳在璟(당시 公報部長官〕이가 그러는데 李錫濟한테서 「虛偽記事 쓴 놈올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電話가 걸려왔더래、李錫濟 말로는 자기는 新聞記者 같은거 도대체 만난 일이 없다고 그러더라는거야.』

『별소리를 다-、뭐가 안만나? 세사람씩이나 떼를 지어서 만났는데:.』

좀 險口에 가까운 나는 대뜸 이렇게 대꾸하고선 대충 어제의 經過를 李 記者한테 알려주었다.

『그사람 돌았군、 그렇지만 왜 안만났다고 그럴까?』 李 記者도 한몫 끼어들었다.

속으로 싱거운 사람 다봤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일을 위해서 어제의 경과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았다.

점심을 먹고. 午後 三時쯤 됐을까、우중충한 最高會議 建物안에 있는 명색 記者室엘 들어갔더니 元忠淵 公報室長(당시)한테서 여러번 전화가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바로 그 일 때문인게다고 생각하면서 電話를 했더니 公報室 將校가 와서 室長한테로 데리고 갔다.

『어제 記事는 어떻게 된 겁니까? 李 委員長이 아주 화를 내고 있는데?』

『안만났다는 건가요? 나도 間接으로 이야긴 들었읍니다만 直接 다시 만나면 李 委員長도 어제 생각이 날겁니다』

『그럼 직접 가서 만나보실까요? 李 委員長 말은 그렇지가 않던데…』

그래서 나는 六層인가에 있는 法司委員長室에 들어간 최초의 新聞記者가 됐다.

같은 大領이면서도 元 公報室長은 李 大領 앞에서 깎둣이 禮儀를 차리고 나를 소개했다.

심부름하는 士兵 한사람이 도어 바로 옆에 앉았고 누군지 모를 大領 한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李 大領은 어제와는 正反對의 굳은 표정으로 바럭 소리를 지르다싶이 따지고 들었다.

『당신이 東亞日報 記者요? 이름은 뭐요? 도대체 내가 언제 당신을 만났단 말이오? 당신네들은 아직도 精神을 못차리고 있어요。당신네들 생각에는 自由黨이나 民主黨의 그 썩어빠진 놈들이 다시 政權을 잡았으면 좋겠지?』

전혀 말을 건넬 틈도 주지 않고 大領은 탁자를 치기도 하면서 협박을 하기까지 했다。

『당신은 아직 中央情報部가 뭐하는 곳인지 모르지. 그런게 다 당신처럼 옛날式 虚偽記事를 쓰는 자들을 다스리는데요.』

威勢가 대단한 李大領 앞에서 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될지를 몰랐다。

『지금 委員長 말씀을 들으니까 어제 記憶이 나질 않는 모양인데요. 그러면 제가 그 經過를 소상히 설명하죠』

『뭐 記憶이 없다고? 그래 말 좀 해보쇼. 도대체 당신이 언제 날 만났다는거요?』

도저히 씨가 안먹는 판국이 돼버렸다. 그려나 어제 그와 만나기까지의 경과、우리가 질문했던 말 그가 대답했던 말、또 吳 大領이 지나간 이야기、永登浦驛前에서 되돌아와서 驚梁津驛前에서 만난일 등을 자세히 설명하자 이번엔 그의 말이 달라졌다.

『그래 내가 언제 審議中이라고 했오?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하지 않았오? 도대체 당신은 말만 번지르하게 늘어놓고…』

『李委員長께서 檢討中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記事에 없읍니다。引用符號 안에 쓴 말만 李委員長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는 뜻이죠.』

『그따위 소리가 어디 있어?』

결국은 처음과는 딴 판으로 입장이 거북하게 된 李大領은 이번엔 딴일로 新聞을 공격해댔다.

당시 最高委員들이 公式非公式問에 新聞에 대해서 하던 말들이 다 나온뒤 그는 舊怨(?) 을 한가지 털어놓았다。

얼마전 東亞日報는 最高會議 公報室을 통해서 法司委員長애게 書面質問을 냈더니 回答이 나와서 報道한 일이 있는데 왜 答辯을 全文 그대로 싣지 않았느냐는 것이며 新聞은 紙面에 제한이 있어서 깎는수도 있다니까 가로 一 段짜리 컷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따위 것은 무슨 소용이 있어서 이렇게 크게 했느냐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다시 話題가 本論으로 돌아가서

『하여튼 나로서는 虛偽記事를 썼다고 몰릴 理由는 하나도 없습니다. 必要하시면 同行했던 記者들과 함께 만나 보시죠.』하고 말하자 그는 생각난둣이 그게 누구냐고 했다. 그리고 士兵을 시켜서 京鄕新聞을 가져오게 했다.

京鄕新聞은 마침 문제의 記事를 오려서 스크랩북에 붙여 놓았었다. 그걸 손 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읽던 李大領의 표정이 다시 굳이졌다.

『이거 왜들 생사람 잡는거요? 내가 언제 鋭意檢討中(京鄕의 標題)이라고 했다는 거요? 이거 안되겠는데… 、公報室長 당신도 좀 생각해 보시오…』

그러나 나는 그의 표정에서 그가 완전히 敗北를 自認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럭저럭 한 時間쯤을 지낸뒤 나는 釋放(?)되어 記者室에 내려왔다. 큰 關心을 갖고 기다리고 앉았던 수명의 記者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나니 공연히 아까보다 더한 화가 치밀어올랐다.

『李大領、어제 記者한테 잡혔더군…』

그로부터 한두時間 뒤 社에 돌아갔더니 中央情報部에 .여러번 電話가 있엇는데데 곧 某處로 오라는 것이다. 지정된 場所에 갔더니 문제의 記事가 실린 東亞日報를 책상위에 펴놓은 搜查官이 取材經緯를 審問했다. 그런데 붉은 연필로 그 記事에 줄을 친 그 新聞의 餘白에다가는 역시 같은 붉은 글씨로 「拘東」이라고 써놓지 않았는가.

『제대로 걸렸나보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왜 하필이면 세사람중에 나만이 문제가 될까』하는 생각이들었다.

결국 세時間 가까운 審問을 받고 拘束은 되지않은채 會社에 돌아왔고 그 다음날엔 金 . 李 두 記者도 역시 같은 審問을 받았으나 더 확대되지는 않은채 끝났다. 그 무렵 法司委員會의 專門委員이었던 劉敏相씨 (지금 法制處次長)는 新聞倫理委員會에 와서 提訴用紙를 얻어갔다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났을가 한때 새로이 마련된 世宗路의 最高會議室에서 朴 議長의 記者會見이 있었다. 朴 議長 옆에 앉아 있으면서 記者團의 맨앞자리에 앉은 나와 視線이 마주치는것을 회피하는 듯한 눈치였던 李 大領은 會見이 끝난 뒤 내 앞에 걸어 와서 『오래간만입니다』하며 악수를 청했다.


李 大領이 그 記事를 문제 삼았던 것은 朴 議長에게서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 뒤에 들었다. 月曜日 아침마다 있었던 最高會議의 各委員長 회의에서 朴議長 『李大領、어제 記者한테 잡혔더군』

그때까지 新聞을 보지 못했는지 망설이고 있는 李大領에게 朴議長은 『東亞日報에 뭐라고 났읍디다』고 했다는 것이고 李大領은 그제서야 문제의 三段짜리 記事를 읽었다는 것이다.

<그뒤로 李大領과는 한 두차례 公式的으로 접촉했으나 서로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용중, ‘나의 取材 經驗談’, 신문과방송, 1965년 4월호)

 

 

[미니회고록] 비주류 풍운기자 방랑기

趙庸中(전 연합통신 사장)

(…)

흥분 잘했던 비주류기자

나는 기자사회의 출신성분으로 따지면 비주류였다. 대학을 마치지 못했고, 공채 몇 기 입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동창과 입사동기가 없는 외톨이고, 그래서 주류에 낄 수 없는 비주류였다. 여러 군데를 부지런히 옮겨다녔다는 점에서 잡초였다. 당당한 주류 틈에서 때때로 눈에 안 보이는 업신여김과 흔적 안 나는 짓밟힘을 당하면서 혼자 힘으로 안간힘을 다해 버텨야만 했다.

(…)

정치를 구경만 한 정치부 기자

나는 주로 정치부에서 일했다. 정치를 취재하면서 얻은 교훈은 정치를 보고 전달하는 ‘정치부 기자’와, 정치라는 무대에서 스스로 기사를 통해 정치플레이를 하는 ‘정치기자’가 엄연하게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부는 취재방식이나 기자들의 처신도 다른 데와는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말이 정치기사지, 사실은 정치인의 동정, 좋게 말해서 정계동향을 전하는 게 정치기사의 전부다. 겉에 드러나는 정치현상보다 그 현상을 있게 하는, 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작용이랄까, 힘이나 실체를 밝히고 보도 평가하는 정치기사는 찾기 어려웠다. 싫어도 그들과 한통속이 돼서 이해관계까지도 같이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흘리는 것을 뉴스라는 이름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의 경우 기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더구나 대변인을 통해서 얻는 기사는 잘 포장된 정치의 겉모양만 전하는 데 그칠 뿐, 정치 그 자체는 아니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노련한 정치기자 데이비드 브로더(David Broder)가 정치보도는 정치인끼리만 통하는 내부거래와 같다고 한 것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었다.

(…)

그때는 민주당 신파, 구파의 싸움이 차츰 심해져서 기자들도 편을 가르고 있었다. 나는 ‘구파 기자’로 구분됐다. 동아일보가 워낙 분명한 친 구파였기 때문에 경쟁관계인 조선일보는 자연스럽게 친 신파가 된 환경에서 소수파인 내가 친 구파기자로 분류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 때문인지 동아일보에서 교섭이 들어왔다. 동아일보는 정치·경제가 한 부장 밑에 있을때였다. 신문사 가운데 유일하게 제 날짜에 월급을 줄 뿐 아니라 연말이면 보너스까지 또박또박 주는 동아일보는 월급쟁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다. 다만 조선일보와 달리 떠들썩하거나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동아일보에서 1년 남짓 있었다. 김성열(金聖烈) 부장의 해외출장 때문에 차장으로 데스크 일을 보았다. 그 사이 5·16을 만났다. 얼마나 일이 서툴렀으면 5·16 당일의 기사출고를 하면서 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을 빠뜨릴 정도였다. 중징계받을 만한 실수였지만 그냥 넘어간 이유를 모르겠다. 동아일보에서는 신파 기자로 분류되었다. 모두가 당당한 구파 행세(?)를 하는 판에 소수파인 내가 신파로 몰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신파는 관료출신과 흥사단계가 주류를 이루었고, 구파는 한민당 이래의 보수세력이 주류였다. 신·구파 다 같이 정치부 기자도 자기들 편의대로 신·구파로 구분해서 편가르기를 해야만 직성이 풀렸고, 기자들도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그 무렵 신·구파의 전위였던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이철승(李哲承) 씨 등과는 많이도 싸우면서 친해진 사이였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두 김씨의 나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였다. 김영삼 씨는 ‘저놈은 신파 앞잡이’라고 평가했고, 김대중 씨는 ‘저놈은 구파’라고 경멸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두 김씨의 어느 쪽 장학생에도 끼지 못한 얼치기가 나의 위상이었다.

(…)

(조용중, ‘미니회고록- 비주류 풍운기자 방랑기’,  관훈저널, 2003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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