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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동아일보 사람들- 함상훈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함상훈(咸尙勳, 1903~1977)은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1928년 3월~5월, 1929년 5월~1933년 9월 근무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고, 재입사한 후에는 4년 동안 논설위원으로 큰 활약을 했다. 총독부 검열의 잣대를 교묘하게 피해가는 논리적 수사법이 뛰어나 필화사건 없이 사설 지면을 빛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3년 조선일보로 옮겨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정계에 진출해 활동했다.

 

함상훈(咸尙勳) (송화, 1903~) ▲ 1928. 3 기자(정치부), 1928. 5 퇴사. ▲ 1929. 5 재입사, 논설반, 1933. 9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携石 咸尙勳

▲ 1903년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하리 출생
▲ 77년 1월 2일 별세
▲ 일본 동경 와세다대학 졸업
▲ 28년 3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동년 5월 퇴사
▲ 29년 5월 재입사 논설반에 근무
▲ 33년 9월 동아일보 퇴사
▲ 38년 1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어 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때까지 재직
▲ 8.15이후 정계에 진출, 한국민주당 선전부장 역임.

□ 유서깊은 고을 풍천(豊川) 태생

일제하의 암울한 시대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 논설반원으로 필봉을 휘두르다가 조선일보 정치부장으로 옮겨 앉은 후 편집국 차장, 편집국장의 중책을 맡았으나 동지가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의 비운을 맞이하였을 때 「최후의 편집국장」으로 피눈물을 뿌린 지사형(志士型) 언론인이 함상훈이다.
그는 1903년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에서 함보국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함상훈의 부친은 소농으로서 가세가 넉넉지는 못하였으나 한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였으며 일찍이 개명하여 노백린 장군과도 친교가 두터웠다. 그러므로 나라가 기울자 석훈, 상훈, 대훈 세 아들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하여 모두 외지에 나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껏 뒷받침했던 것이다.

□ 동아일보 논설반에 4년여

함상훈은 3.1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보다 10년쯤 맏이가 되는 인촌 김성수, 해공 신익희, 설산 장덕수와 현상윤, 최두선, 양원모 등은 이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국내외에서 크게 활동하고 있는 무렵이었지만 함상훈은 와세다 선배들이 남긴 발자취를 남달리 흠모하면서 「학생지사」로서의 심지를 곧게 세웠던 것이다.
이와 같은 「와세다 학연」은 그의 사회생활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1928년 3월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은 송진우, 편집국장은 김준연, 정치부장은 국기열이었다.
그러나 함상훈의 정치부 기자 생활은 3개월로 그치고 말았다. 편집국장 김준연이 ML당사건으로 체포되는 바람에 인사파동이 일어 본의 아니게 퇴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송진우 사장은 그의 자질을 아깝게 여겨 재입사의 여건이 조성되기를 기다리다가 29년 5월 논설위원(당시는 논설반원이라고 불렀다)으로 맞아들였다. 그때 주요한이 편집국장대리였으며 얼마후에 춘원 이광수가 두 번째 편집국장으로 재입사했다.
함상훈은 33년 9월까지 4년반동안 논설위원으로 재직하였는데 당시 동아일보 논설반에는 주요한이 1년간 재임했을 뿐이었고, 주필도 공석이었으므로 함상훈이 곧 논설실의 유일한 논객이었던 것이다.
29년 11월의 광주학생사건, 31년 5월의 충무공 유적보존운동, 동년 7월의 만보산사건, 32년 1월의 이봉창 의거사건, 동년 4월의 윤봉길 의거사건 그리고 31~32년에 줄기차게 전개된 「브나로드 운동」 등 굵직한 사건과 시대적 이슈를 당하여 동아일보가 정론을 편 필봉의 주인공은 바로 함상훈 논설위원이었다.
그의 논설은 해박한 지식과 사안의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직관력이 특징이었으며 총독부의 검열망을 교묘히 피해가는 수사법도 일품이었다. 그의 재임기간중에 동아일보에 게재된 사설이 필화사건을 별로 빚지 않은 것은 소위 「함상훈수사법」이 총독부 검열관의 두뇌보다 한단수 높았기 때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 폐간 당시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함상훈은 논설위원으로 4년 남짓 지내는 동안 하나의 꿈이 있었다. 편집국 중견간부로 옮겨 앉아 신문제작의 편집실무를 익히고 그 솜씨를 발휘해보고 싶은 꿈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진용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대신할 논설위원을 찾기 어려운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송진우 사장은 그를 논객으로 아끼면서 장차 때가 되면 주필로 올려 앉히려고 내심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상훈의 잠재적 욕망은 「엉뚱한」 곳에서 탈출구를 얻게 되었다. 그동안 경영난에 시달려온 조선일보사가 방응모 사장에 의해 주식회사 체제로 바뀜ㄴ서 중흥의 깃발을 쳐들고 언론계의 유능한 인재들을 다량 영입하게 된 것이다.
33년 8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가 퇴사와 함께 조선일보사 부사장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함상훈도 이광수와 거취를 같이 하여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전직했다.
그는 오랜 숙원이었던 정치부장을 맡았으며 얼마 후에는 편집국 차장으로 승진했다. 그동안 편집국장은 이광수에서 김형원으로 교체되었으나 그는 편집국의 실무작업에 보람을 느렸다. 이 무렵 편집국 평기자로 홍종인, 성인기, 유봉영, 우승규, 홍기문, 이원조 등이 있었으며 그의 동생인 대훈은 학예부장을 거쳐 출판부 편집주임을 맡고 있었다.
함상훈은 38년에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편집부장 이상호, 정치부장, 한보용, 경제부장 이건혁, 사회부장 홍종인, 조사부장 이갑섭, 학예부장 홍기문 등 쟁쟁한 진용을 거느리고 조선이보의 중흥을 다져 나갔다. 방응모 사장, 이광수~이훈구 부사장, 주요한 전무, 서춘 주필 등 상층부는 함상훈 편집국장에게 절대적 신임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40년 1월에 취체역 편집국장이 되어 그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다. 당시 나이 37세, 형역 언론인으로서는 득의의 황금시대에 접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의 모진 바람이 조선, 동아라는 두 민족지에 불어닥쳤다. 소위 전시통제체제를 강화하고 한국어를 말살하려는 악독한 정책이 맞물려 두 민족지의 폐간을 강요한 것이다.
40년 8월 10일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나란히 폐간사를 고하며 깃발을 내렸다. 그때 조선의 마지막 편집국장이 함상훈이었고 동아는 고재욱이었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인생항로에도 종지부를 고하는 것이 되었다.

□ 한국민주당 선전부장이 되어

그로부터 5년 후에 8.15 해방이 찾아 왔다. 온 겨레가 환희작약하고 사람마다 새로운 지표를 가늠하는 속에서 함상훈은 옛 인맥이 결속하는 무대를 당연히 찾았다. 송진우, 김성수, 김준연, 장덕수, 백관수, 양원모 등이 결집하여 발기하는 한국민주당이었다.
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창당되고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면서 11개부서 임원이 선정될 때 함상훈은 선전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부서장인 당무부장 이인, 조직 김약수, 외무 장덕수, 재무 박용희, 정보 박찬희, 노농 홍성하, 문교 김용무, 후생 이운, 조사 유진희, 연락 최윤동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는 박찬희와 함께 가장 연소한 부서장이었다.
함상훈 선전부장 밑에 부원으로는 백남준, 송남헌, 이하윤, 유기원 외 10인이 포진했다.
한민당 8.15 해방직후 남한에서 조직된 가장 강력한 우익 보수정당이었고 좌익(공산당, 인민당 등)과의 건국노선투쟁이 곧 닥쳐 왔으므로 선전부의 역할이 중차대하였다.
함상훈 선전부장은 매일 발표되는 성명서는 물론 한민당의 정강정책을 알리는 해설문과 신문 잡지에 게재될 원고를 거의 도맡아서 기고했다. 탁월한 이론가인 장덕수 외무부장이 그의 와데다대학 선배일뿐 아니라 같은 황해도 출신이었으므로 스스럼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함상훈은 동아의 논설위원, 조선의 편집국장으로 문필의 경륜이 깊었으므로 선전부장으로서는 안성맞춤이라는 평을 들었다. 특히 해방정국을 주도하며 헤쳐나가는 한민당의 주장을 내외에 천명하고 전파하는 주요 문고가 주로 함상훈 선전부장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목록들이 그 당시의 그의 행동반경과 족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 한국민주당의 정견(대조(大潮) 제2호)
△ 아당(我黨)의 주의 정책(개벽(開闢) 제1호)
△ 비상국민회의에 대하여(동아일보)
△ 좌익측 합작5원칙에 대한 비판(신천지 제8호)
△ 보선(普選)문제와 우리 당의 태도(민주조선 제2호)
△ UN과 한국독립문제(백민(白民) 제4권 2호)
그가 집필해 발표한 수많은 논고들 중에서 손쉬운대로 소개하는 것이지만 이 몇 개의 표제만 보아도 함상훈 선전부장이 한민당의 「입」이 되어 불철주야 노력해 온 것을 집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선전부장으로 맹활약하면서 한민당의 농촌대책분과위원장도 겸임했다. 그는 한민당의 요직 인사 중에서 사랑받는 소장파였고 국민 일반에게는 상당한 지명도를 축적해 나갔다. 더욱이 설산 장덕수가 47년 12월에 피살된 후에는 한민당의 손꼽히는 이론가로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 김지웅 모략극에 빠져서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불운했다. 민주정치국가의 정치가란 국회에 진출해야만 본령을 발휘할 수 잇는 법인데 함상훈은 제헌의원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며 그 후의 수차 도전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출마지역이 수도권일 수 밖에 없엇는데 이 지역에서의 한민당(그후의 민국당)도 인기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출생지가 이북이엇으므로 지연적 기반이 취약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불운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는 일생일대의 「실족사(失足事)」를 자초하고 말았다. 동아일보 시절의 선배인 김준연과 밀착하여 정치적 운신을 하고 있던 중 천하의 「모략사」인 김지웅의 흉계에 말려든 것이다.
해방정국에서부터 자유당 시절에 이르는 10여년 동안 이 땅의 엽기적 정치사건에 감초처럼 끼여들였고, 때로는 모략각본(謀略脚本)을 직접 꾸며댄 김지웅이 해공 신익희를 정치적으로 매장하려고 소위 「신익희 조소앙 뉴델리 밀회설」을 조작했을 때 함상훈이 그 발설, 하수인으로 「놀아난」 것이다.
54년 10월에 함상훈이 「뉴델리 밀회설」을 발설하자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국회는 진상규명을 위해 함상훈을 증인으로 출두시켜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해 개헌을 기도하던 자유당으로서는 함상훈의 증언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함상훈의 국회증언은 빈 강정이었다. 애당초 아무런 근거없이 꾸며낸 허구의 모략극이었으므로 증언 내용이 요령부득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인의 조소 대상이 되었고 민국당에서 제명되는 바람에 정치적 입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제하에서는 민족지의 명논설위원이요, 명편집국장으로 동포들의 아낌을 받았고, 해방정국에서는 한민당, 우익진영의 명선전부장으로 이름을 드날린 함상훈은 거듭되는 선거에서의 낙선과 보수정당 내부의 반목 음해에 길들여져서 종당에는 정치인으로서의 낙상(落傷)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재기불능 지경에 전락한 것이다.
그의 인생 만년은 한마디로 낙백지경(落魄之境)이었다. 참으로 재주좋은 사람의 한번 실족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를 잘 말해주는 「그 사람 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일제하의 암담한 시대에 동아, 조선에서 함상훈이 보여준 찬란한 발자취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일이다.

 <필자 李敬南 동화연구소 소장>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p.305~312

 

한국신문 100인의 얼굴 (6) 함상훈

▲함상훈(咸尙勳) (月山(월산)·1903~1977) 일본 조대졸(日本早大卒) .  28년「동아(東亞)」기자,  정치부장 논설반 기자로 33년에 이름. 그뒤 「朝鮮(조선)」 편집국장이 되어 강제폐간을 당한. 해방후에는 정계로 나감 .

(동아일보 1964년 4월 18일 3면) 

 

창간 50주년 기념특집 ‘반세기 쌓인 일화, 민족의 표현기관’ 

장곡천여시한(長谷川如是閑) 기고로 ‘발금(發禁)’

이태로의 후임으로 신호균(申浩均)이 동경지국장에 부임한 다음해인 1930년 동아일보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그 기념특집의 하나로 일본인 기고를 받도록 동경지국에 지시했다. 신호균은 본사의 지시대로 진보적인 정치평론가인 장곡천여시한(長谷川如是閑) 와세다대학의 안부기웅 교수 등 몇 사람의 원고를 얻어 보냈다. 이들 원고는 대부분 그 내용이 전진적인 것이어서 특집지면에서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같은 일본 사람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날로 발매금지를 시키고 곧 발행정지처분을 내렸다. 당일 발매금지조처를 하고도 총독부는 이들 기고의 경위를 캐러들었다. 원고를 수집한 신호균과 취재를 맡은 정치부기자 함상훈을 인책 면직시키도록 요구했다. 이에 함상훈은 사표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신호균은 업무직원임을 들어 무사했다. 사직한 함상훈은 그 뒤 동아일보사에서 동경으로 여행시켰고 일본을 다녀온 뒤 복직되었다.

(신호균)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 22면) 

 

함상훈씨 별세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한민당 선전부장을 역임한 함상훈(咸尙勳·사진)씨가 2일 오전 종로구 누하동 186자택 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74세. 발인은 6일오전10시 자택서、장지는 一山기독교공원묘지.
(동아일보 1977년 1월 4일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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