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위건(韓偉鍵, 1896~1937)은 함남 홍원 출신으로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후 반일운동을 했고 1919년 3.1운동 당일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입학, 조선유학생 학우회 총무를 맡는 등 항일활동을 꾸준히 벌였다. 1925년 3월에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1928년 3월까지 근무했다. 동아일보 재직 중 1926년엔 조선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7년엔 신간회 발기에 참여했다. 1928년 일제의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선풍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허베이성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한위건(韓偉鍵) (홍원, 1896~ 몰 ) ▲ 1925. 3 기자, 정치부장 1928. 3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한위건 [韓偉健]
1896∼1937.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운동가.
가명은 이철악(李鐵岳)·이철부(李鐵夫)·이광우(李光宇)·이영식(李永植) 등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이다.
1914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1월 반일시위운동 학생 지도부에서 경성의전 대표로 참여해, 제1선의 학생대표가 체포될 때를 대비한 제2선의 대표가 되었다.
3월 1일 당일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4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해 내무위원과 함경도 의원이 되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비판했으며, 10월 이후 『신대한』의 발간에 관여하면서 상해 임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20년 귀국한 즉시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일본유학시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냈으며, 독립군 자금 모집 사건에 관련되어 일시 검거된 적도 있다.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 개최에 즈음해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시위운동을 시도했다.
1923년 여름 조선유학생학우회 강연대의 일원으로 귀국해 순회 강연을 했으며,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서울에서 일본유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동경지방 이재 조선인구제회 발기인 및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에 동경으로 가서 조선인 학살사건을 조사했고, 피살된 조선인 동포 추도회에 참가했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되자 재동경 조선인대회를 개최해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가을 귀국했고, 10월 『시대일보』 이사가 되었다.
1925년 3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가을에 이덕요(李德耀)와 결혼했다. 9월 구미 및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학자와 언론인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사정조사연구회에 참가해 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에 대해 조사 연구했다.
1926년 11월 정우회에 가입해 안광천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이와 병행해 제3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12월 선전부원이 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 발기에 참여했으며, 2월의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활동했다. 1927년 9월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이 되었다.
1928년 초까지 동아일보사 기자로 재직하면서 신간회 내에서 공산당의 세력 확대 작업을 추진하였다. 1928년 2월 일제의 검거로 제3차 조공이 궤멸되자, 제3차 전국대회 개최를 주도했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제4차 조공 1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참석한 후, 가을에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9년 코민테른 12월테제의 방침에 따라 당재건운동을 전개하면서, 잡지 『계급투쟁』을 발간해 당재건운동의 이론과 방침을 제시했다.
『계급투쟁』에 발표한 「조선 혁명의 특질과 노동계급 전위의 당면임무」(1929.5), 「조선에 있어서 볼세비키당의 결성과정과 사회투기주의의 박멸」·「대중적 전투적 협동전선의 결성과 신간회 및 독립촉성회의 임무」(1929.12), 「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방향전환기의 이론적 실천적 과오와 그 비판」(1930.1) 등은 당재건운동기 서울상해파와 구화요파의 운동론을 비판하면서 엠엘파의 운동론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는 문건이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동으로 광주학생운동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1930년 3월 이후 고경흠·김소익 등이 일본과 국내에서 전개한 당재건운동을 지도했다. 1930년경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이후 이철부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1931년 가을부터 북평반제동맹 내 당·공청 프랙션 서기로 활동했다. 1933년 중국 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3년 말 중국공산당 당원 장수암(張秀岩)과 결혼했다.
이 무렵 중공당 지도부의 좌경노선을 비판하기 위한 제7회 당대회 개최 의견서를 하북성위원회에 제출해, ‘우경취소주의’로 비판받았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과의 관계가 일시 단절되었다. 이후 중화민족무장자위회와 천진(天津)각계구국회 등 항일단체 조직에 참여했다.
1935년 12월 천진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항일집회를 개최하고 항일시위운동을 지도했다. 1936년 봄 좌경노선이 청산되고 모택동(毛澤東) 노선이 확립되면서 유소기(劉少奇)가 북방국 서기로 천진으로 부임하자, 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 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37년 5월 연안에서 개최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 대회에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7월 대회 기간 중 건강상 문제로 섬감녕(陝甘寧) 서북국으로 배치되었다가, 대회가 끝난 후 연안의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朝鮮前衛黨 當面の問題』(左翼書房, 1930)이 있다.
1940년 ‘철부노선’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식 결정이 내려졌다.
2005년에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2(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불굴의 투사: 리철부동지를 추억하여』(김형직 편역, 료령민족출판사, 1982)
『朝鮮問題資料叢書』第七卷(朴慶植 編, 三一書房, 1982)
「韓偉健」(水野直樹, 『朝鮮民族運動史硏究』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 전국 확산의 주역 한위건 선생
님 웨일즈가 극찬한 독립운동가 김산은 1931년 중국경찰에 체포됐다 풀려난 이후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다닌다는 한 사람을 찾아간다. 동지들을 위해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만난다.
품고간 칼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5분 내에 우리 둘 중 하나가 죽게 될 것”이라며 그를 노려보고 말했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 김산은 칼을 두고 그의 집을 빠져나온다. 김산이 만난 그 사람은 한위건이었다. 한위건 역시 한국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뛰어난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한위건은 현재 중국공산당의 문헌에서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며, 그의 빼어난 인품을 증언하는 기록들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끼리 서로 의심하며 반목해야 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든 상황하에서 진행되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며 한위건과 김산의 악연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김산보다 9살이 많지만 라이벌 관계였던 그는 1896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1917년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 사전 모의에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로 참석해 당시민족대표와 연계하여 서울 탑골공원 시위 및 3월 5일 2차 학생시위를 주도하는등 학생들의 참여와 전국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위원이 되었다.
김산과 라이벌…사회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에 입학한 뒤,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이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결성한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가입했고, 이때 독립자금 모금에 연루돼 검거됐다.
1923년 7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국내 순회강연대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강연했으며,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재일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도쿄로 가서 이재민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귀국해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일제의 식민통치를 조사 연구하기도 한다.
1926년 11월에는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 등의 통합단체 정우회에 가입해 정우회 선언을 주도한다. 정우회선언은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협동전선운동이 전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그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12월에 중앙위원직을 맡는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고 간사에 선임됐으며,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다. 이때 조선공산당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는데 김산이 한위건의 책임이 크다고 여겨 그의 중국공산당가입을 반대하면서 두 사람 간의 악연은 시작된다.
민족협동전선 토대 마련한 ‘정우회선언’ 주도
한위건은 김산이 중국경찰에 체포돼있던 193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러나 김산이 이듬해 풀려나오자 그를 역시 탐탁지 않게 생각하게 되고 조국독립을 위해 매진하는 동지끼리 사생결단의 직전까지 가게 되는 비극적 상황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한위건은 1920년대 후반부터 북경반제동맹에서 활동하면서 1933년 중국 경찰에 체포됐다가 석방된 뒤 허베이성 위원회 선전부장이 된다. 이후 1936년에 류사오치(劉少奇)에 의해 중국공산당 허베이성 위원회 서기의 자리까지 오르나 이듬해 옌안(延安)에서 생을 마감한다.
(국정브리핑, 2005년 8월 26일)
[역사 속의 인물] ‘아리랑’ 김산의 라이벌, 한위건
“동지들을 위해서 우리 둘 중 누구 하나가 죽게 될 것이다.”
중국 경찰에 체포됐다 풀려난 독립운동가 김산은 1931년 같은 조선인 혁명가인 한위건에게 비장한 한마디를 던진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은 조국독립전선 동지를 찾아가 사생결단의 직전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한위건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 김산은 품고 간 칼을 두고 그의 집을 빠져나온다.
한위건은 한국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뛰어난 독립운동가로 중국공산당 문헌에서도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끼리 서로 의심해야 했다는 사실은 당시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진행되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896년 함경남도 흥원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3`1운동 사전 모의에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로 참석해 서울 탑골공원 시위 및 3월 5일 2차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위원이 되었다. 조선공산당, 신간회 등 사회주의 노선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는 1937년 오늘 중국 연안 중국공산당대표회의에 참석 중 병사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배성훈 편집2부장
(매일신문 2016년 7월 10일)
일제하 사회주의운동 최고 이론가
발굴 한국 현대사인물 (89) 한위건 1901~1937
전국 학생세력 결집 3·1만세시위 주도 중국공산당내 좌경 비판 독자 노선 펼쳐
내용 생략
(한겨레 1991년 11월 15일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