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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동아일보 사람들- 피효진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피효진(皮孝鎭, 1918~1994)은 서울 출신으로 협성실업학교를 마치고 1937년 고모부인 매일신보 부사장 하몽 이상협의 천거로 매일신보(해방 후 서울신문으로 제호 바뀜)에 입사, 조사부 기자로 있다가 1960년 동아일보 조사부 차장으로 옮겼다. 1975년 정년퇴직하면서 언론계 조사부 기자로만 38년 가까이 근무하는 기록을 남겼다.

 

피효진(皮孝鎭) (서울, 1918~1994) ▲ 60.10 조사부차장, 75. 2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피효진(皮孝鎭)

<약력>
▲ 1917년 4월 9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서 출생
▲ 1994년 7월 28일 별세
▲ 1933년 협성실업 졸업
▲ 1937년 매일신보 조사부 입사
▲ 1948년 2월 서울신문 조사부 차장
▲ 1960년 10월 동아일보 조사부 차장
▲ 1975년 2월 동아일보 퇴사

조사부에서 40년, 청춘 바쳐

신문사에 입사한 후 오로지 조사부 한 부서에서만 자그만치 40년 동안이나 일하며 청춘을 고스란히 조사업무에 바친 피효진과 같은 언론인도 아마 드물 것이다.
그는 1917년 4월 9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서 피교설의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청진동에서 약국을 하던 어의 피주부였고, 아버지 피교설은 8.15전 종로 네거리의 명소 화신상회(당시 사장 박흥식, 화신 건물이 헐린 자리에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국세청이 입주)의 상무취체역을 맡고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수송보통학교를 거쳐 협성실업을 졸업한 후, 37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입사할 당시 약관 20세였다.
피효진이 매일신보에 입사하게 된 것은 그의 고모부 하몽 이상협이 매일신보의 부사장으로 있어 그의 천거로 처음에는 광고부에 배속되었으나, 곧 조사부로 자리를 옮겼다는데 그의 성품이 광고부에서 일하기에는 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매일신보는 원래 일문(日文)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에 예속돼 있었으나, 38년 분리 독립되면서 제호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어 한글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창립총회에서 최린이 사장에, 이상협이 부사장에 선임되어 피효진의 배경은 든든하였다.
그런지 7년후 8.15 해방이 되어 매일신보는 일제 총독부 기관 신문지의 탈을 벗어던지고 제호도 서울신문(국민의 정부가 들어선후 ‘대한매일’로 다시 개제)으로 바뀌고, 사장 오세창 이하 경영진이 몽땅 바뀌었으나 원체 일에 성실했던 피효진이라 계속 조사부에 머물렀다.
1960년 10월 피효진이 동아일보 조사부로 옮길때까지 그는 같은 직장 매신(每申)-매신(每新)-서울신문 같은 부서(조사부)에서 꼬박 23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는데, 서울신문을 떠날 때 그의 직위는 조사부 차장이었다.
당시 피효진은 집을 나서 버tm를 타건 전차를 타건 직장으로 출근할 때 광화문 네거리에서 내려 직장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23년동안 매일 같은 길을 걸어 오갔으나 광화문 네거리 근처까지만 가면 눈을 감고서도 신문사까지 다다를 수 있을만큼 피효진은 그 길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울신문에서 동아일보로 직장을 바꾼지 얼마후 아침 출근때 그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서울신문 쪽으로 가게 되었고 동아일보를 지나쳐 서울신문 정문까지 가서야 “아차! 하고 되돌아 선 적도 몇 번 있었다”고 친구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신들린 사람같이 일에만 심취

지그은 거의 모든 조사자료가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기에 필요한 자료의 검색은 일일이 조사부원의 수고를 거치지 않더라도 컴퓨터 조작을 통해서 입수 가능케 되어 있지만 80년대까지도 사정은 전혀 달랐다.
편집국에서 필요한 자료를 입수하자면 우선 조사부원들의 수고를 거처야 되었고 조사부에서는 편집국 요청에 따라 자료함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내어 제공해야만 했다. 일단 사용한 사진이나 자료는 다시 회수, 분류하여 자료함속에 되돌려 넣는 작업으로 조사부원들은 번거로웠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료는 그때 그때 선별하여 그것을 조사자료대장에 풀로 붙이는 작업을 계속해야 했으니 참을성이 있고 끈기가 있는 사람이 아닐 경우 조사부는 배겨내기 힘든 부서였다. 그러나 피효진은 그 번거로운 일을 마다않고 신명들린 사람처럼 하루종일 가위와 자료, 풀과 씨름하는 작업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자료요청이 있을때 관련 부수자료나 필요한 통계숫자, 곁들여진 사진자료까지 미리 미리 챙겨주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어느덧 ‘조사부’하면 피효진이 생각날만큼 편집국에서 아끼는 존재였다.
그런 까닭에 화려할 수 없는 조사부 근무였지만 피효진은 편집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늘었고, 그래서 술을 배워 주호(酒豪)라는 호칭도 따라 붙게 되었던 것.

일제침략 산 증거 4.19때 잿더미로

그런데 자유당 말기 3.15 부정선거로 군중데모가 일어난 60년 4월 19일, 성난 데모군중의 물결이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으로 밀려들었고 그중 한 청년이 윤전기에 부을 질렀다. 그 불이 삽시간에 서울신문 사옥 2~3층까지 옮겨붙어 급기야는 맨위 4층의 사진부와 조사부로까지 번졌다(지금은 서울신문 건물이 헐리고 프레스센터 20층 건물이 들어서 옛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그 화재로 8.15 훨씬전 일제 총독부 시절부터 조사부에 축적,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많은 자료 모두가 불길에 휩싸여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실로 아까운 일이었다.
서울신문 사옥이 불타던달 거리로 피해 나와 멀찍이서 화재 광경을 지켜보던 서울신문 여러 직원들 사이에 피효진도 끼여 있었다.
그때 “30년동안 내가 정성껏 모아온 자료들, 나의 핏땀이 배어있는 값진 자료가 몽땅 불쏘시개가 되어 버렸구나”하고 한탄하던 피효진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 얼마후 옛 사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피효진은 서울신문 방화사건을 이렇게 회상한 적도 있다.

30년간 모아온 자료 없어져…

“그때 조사부에는 정말 값진 자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 삼천리, 신가정, 조광, 개벽, 어린이 별건곤 등 8.15전에 발간된 수많은 월간지들의 창간호부터 값진 단행본 등 출판물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서춘(每新의 주필) 선생과 함께 안국동 네거리의 고서점 한남서림까지 나가서 그때 돈으로 5백원이란 거금을 주고 사들였던 <한서이십사사(漢書二十四史)>, 그리고 일제때 총독부에서 사진으로 수록한 <낙랑화보(樂浪畵報)>, <신라화보(新羅畵報)> 등 지금은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보물급 서적들이 아주 많았지…., 특히 일제 36년동안 꾸준히 수집, 보관되어 이던 인적자료, 특히 인물사진과 역사적인 기록이 담긴 사진자료가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더라면 후세에까지 귀중한 역사자료로 값지게 활용될 수 있었으련만…, 무사려한 발화행위로 회신(灰燼) 된 것이 정말 원통하다”고 애석해 했다.
그리고 그가 한 또 한마디는 참으로 뼈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울신문이 불탄 것을 아쉬워 하는 우리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서울신문이 불탄 것을 다행하고 속시원해 할 사람들도 있단 말이야!” “그게 누구일까?” 의아해 하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에 듣는 사람도 공감이 갔다.
“히히… 그것은 바로 그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었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등, 그리고 그자들의 후손들이이 누구야…. 우리 역사를 욕되게한 저들 매국노들의 행장의 사진과 기타 자료가 가장 많이 보과되어 있던 곳이 바로 ‘서울신문 조사부’ 아니었던가? 그러니 그들은 서울신문이 몽땅 타버린 것이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 그런 말이지…”하면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던 피효진의 얼굴이 지금도 눈이 선하다. 그런 점에서 피효진은 사리를 예리하게 판단하는 참 언론인이었다.

퇴직 언론인모임 위해 앞장서

피효진은 60년 10월 동아일보 조사부로 직장을 옮긴후 75년 2월 정년 퇴직할 때까지 다시 15년동안 조사부 차장으로 일했다. 그러니 모두 40년 가까이 조사부 기자로 일한 셈으로 이처럼 조사부에서 거의 일생을 보낸 예도 없을 것같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언론관계와 무관치 않았다. 동아일보 퇴직후 한때 피효진은 한국신문윤리위원회에서 일한 적도 있으나 그후 그는 퇴직언론인 친목회 발족에 참여,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1977년 4월 25일 ‘4.7 구락부’로 출범, 다시 ‘4.7 언론인회(80년 4월 9일)’로, 이어 사단법인 대한언론인회(88년 1월 30일)로 발전하기까지 실로 11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지만 애당초 퇴직언론인 친목회 준비 발기인대회가 열린 곳은 77년 4월 11일, 구 신문회관 사무국장실. 그때 모였던 발기인은 김을한, 남상일, 고흥상, 조동훈, 김진섭, 오소백, 피효진이이었다.
그후 발기인회를 겸한 창립총회를 연 것이 그해 4월 25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로 발행된 ‘독립신문(1896년 7월 4일 서재필선생이 창간) 창간 날짜를 기념 ’4.7 구락부‘로 회의 명칭을 확정, 담당 부서를 정했을 때 피효진은 운영위원회서기 직책을 맡았다.
그가 오랫동안 조사부에 근무, 누구보다도 언론인들의 인적사항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궂은 일을 마다않고 하는 그의 협력으로 죄직언론인 단체 조직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그는 ‘4.7구락부’와 관련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77년 6월 24일 ’4.7구락부‘ 회보 제1호가 나왓을때 그것이 겨우 16절지 프린의 볼품없는 체재였지만 “’4.7구락부’ 드디어 창간”이라는 머릿기사로 시작, 97명의 가입회원 명단까지 첨부, 13페이지로 엮어낸 창간호야말로 두고두고 우리가 간직해야 할 보배요 자랑거리다. “뿔뿔이 흩어져 되겠냐? 뭉쳐서 친목하고 서로 도와가며 언론계를 위해 무엇인가 이바지 해야 되겠다”고 강조한 그 글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무언가 이바지해야 되겠다는 망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 가습속에 간직하고 있다. 불과 97명이던 창설 회원수가 지금은 300명이었지만 창립 멤버의 일원으로 큰 보람을 느낀다.‘ (<대한언론인회 15년사>에서 인용)

두주불사, 지극한 애처가

피효진은 비교적 큰 키였으나 깡마른 체구여서 ‘매일신보’ 때부터 피골장군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그의 말로는 조상이 고구려때 장군으로 수유리에 조상의 고분이 여러 분상 있다고 하였다. 장군의 후예니 ‘피골장군’이라는 별명이 그리 싫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어눌하여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아코디온과 기타도 즐겼고 수채화 솜씨도 수준급으로 숨은 재주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신혼시절 그 부인에게 사교춤을 가르쳐줄 정도로 애처가였다.(94년 9월 1일자에 실린 ‘40년 외길 언론인 피효진’에서 인용)
그와 절친했던 고인인 김형균 씨가 밝힌 피효진의 일명이었다.
또 피효진과 술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이 깊다. 그야말로 두주(斗酒)도 불사(不辭)가 되고보니 완전 프로급이다. 사직동 ‘납작집’은 당시 신문기자라면 대개 몇 번씩 가본 적이 있던 유명한 막걸리집(무조건 외상을 주고 월급날이면 수금하는 특징있는 술집으로, 호주머니가 가벼운 기자들이 즐겨찾던 곳)이지만 피효진은 거기서 노상 살다시피하였다. 그저 마시고는 긋고(외상), 그걸 되풀이 하다보니 아마 외상값이 꽤 많이 쌓였던 모양인지 한번은 엄동설한에 새로 맞춰입은 외투(그것도 외상)를 박정하게도 납작집에서 압수해가버려 동동 떨기도 하였다(이상 ‘40년 외길 언론인’에서 인용)
그 이야기는 그와 가까운 동료들은 누구나 알고 있던 유명한 에피소드였다.

여섯자녀 모두를 사회일꾼으로

그렇다고 피효진이 술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6살 연하의 부인 김형순과의 사이에 5남 1녀를 둔 피효진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성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특히 신문사를 물너난후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여섯 자녀를 키우는데 전력을 기울여 모두 고등교육을 거쳐 최고학부까지 마치게 함으로써 훌륭한 사회일꾼(아들 용조는 세계일보 제작 차장)으로 길러냈을 뿐만아니라 6.25때 실종한 친동생의 가족들까지 돌봐 그 자녀의 교육에까지 신경을 쓰느라고 그 좋아하는 술도 마음놓고 마시지 못해다고 전한다.
말년의 피효진은 그를 정성껏 받들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94년 7월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집필: 이혜복(대한언론인회 명예회장)

《한국언론인사화 5권》 p275~284

 

 

조사부 운영의 실제적 문제
피효진(동아일보사·조사부 차장)

서론

신문사의 조사부는 특수지대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일종의 특수도서상(圖書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사부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조사부가 빈약하고 내용이 없으면 신문제작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고금동서의 각종 자료가 구비되고 정리가 잘 되어 언제든지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조사부의 맡은바 사명임은 말할 것도 없다.
조사부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되는 것이 아니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서 쌓이고 쌓여 비로소 권위 있는 조사부가 식생(識生)되는 것이다.
신문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이 조사부의 기능여하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늘의 신문사 조사부 형편을 보면 아직도 훌륭한 자료를 구비하고 있는 조사부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는 우리나라 언론의 앞날을 위해 매우 불행스런 일이다.
차제에 신문기업주의 반성을 촉구한다. 과거의 어떤 편견을 버리고 좀더 과감한 조사부의 운영면의 뒷받침을 함으로써 내용이 충실하고 권위있는 알찬 신문이 제작됨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각사 조사부원은 모든 지식의 공급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전에 없는 노력으로 더욱 알찬 조사부 업무에 임해주기를 바라는 동시에 각사가 좀더 완전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상호협조하는 유대를 제창하는 바이다.
조사부는 학술 및 연구활동 등 온갖 신문제작에 필요한 자료를 신속히 수집하여 이를 필요한 자에게 제공, 이용할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정리, 준비하는 기구라 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조사부는 일반도서관 내지 공공도서관에 비길수 없는 특수도서관이라고 하겠다. 신문사도 하나의 기업체로서 타 기업체와의 경쟁이 불가피하겠으나 특히 조사부 자료면에서는 상호이용를 피하고 있는 것이 상례로 되고 있으나 특수자료를 제외한 상시 수집 가능한 자료는 상호이용을 허용하며, 나아가서는 자료교환도 상호협조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특수한 자료를 보유하는 것만으로서 기능을 다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이용가치를 위해 높은 자료의 수집과 전문직원에 의한 운영이 또한 필요하다.
어떤 신문사 조사부도 그 자체만으로서는 다방면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곤란한 점도 많다. 이런 점에서 조사부는 각각 특수분야에 거쳐 전문·특수 직능화하여 가장 효과적이며 능륙적인 협력체제를 가진다면 모든 분야의 문제는 시간의 낭비없이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문제작에 자료를 제공하는 조사부의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다할 것이다.

 

조사부의 창설
우리나라 신문사 창설 초기에는 조사부의 부서조차 설치하지 않았고 그후 조사부가 독립되었으나 그리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저명 인사의 사진·전기 등을 비치 보관하였고, 중요 자료 수집에는 등한시한 것 같다.
현재에 와서는 신문 제작에 필요한 자료는 물론 각종 도서·잡지·국내외 인물사진·각종 신문 등을 비치하여 편집국 등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신문기업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독립된 일부서를 차지하고 또한 도서령(圖書領)의 범주에 속하게 되어 조사부의 존재가 더높이 평가받게 되었고 중요시하게 되었다.
신문사 조사부는 1940년 매일신보사에서 처음 창설하여 기능을 발휘 확장한 것이 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8·15해방과 더불어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바뀌고 자료 및 시설을 인계받아 한국 유일의 조사부로서 그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였으나 불행히도 4·19 당시 전소하여 그 귀중한 자료가 소실되었다.
타 신문사에서는 창간 당시부터 조사부를 창설하였으나 그 규모가 적고 6·25동란으로 소실·분실 등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조사부의 자료수집
조사부의 존재 목적이 기사작성 및 필요한 자료·사진·도서 등을 측면에서 원조·제공하여 신문제작에 직접 간접으로 뒷받침하며 자료수집은 약력·사진·도서·인쇄물·자료교환·외근 및 방법으로 수집한다.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명사사진·약력 등을 특파원이나 주한각대사·영사관에 의뢰하며 또는 조사부원이 직접 방문하고, 국내자료는 외근기자 등에 의뢰하며 때로는 직접 출입도 하여야 된다.
자료수집이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일반 도서관과 같이 개개인의 교양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기관이 아니며 전문이용자를 위한 기능도서관이기 때문에 자료수집 경향에 있어서는 특이하다 하겠으며 자료수집 이후에 일정한 방침·계획에 입각하여 운영되어야 하겠다.
자료면에서 중요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일반참고도서
―, 특수참고도서
―, 전기도서
―, 관청 및 사회단체 간행물
―, 인물사진 및 약력·일반 각종 사진
―, 각국내외신문·잡지 제본
―, 정부간행물·신문·잡지 발췌
―, 자료색인·인사「카드」·도서「카드」 작성
―, 국내외 일지

 

특수도서관의 기능과 자료
조사부는 일반도서관과 달라 특수도서관이라 하겠다. 그런고로 신문사 조사부는 전문적 특수한 주제 집서(集書)를 가지는 점에서 일반도서관과 구별된다.
조사부는 전문적인 자료를 수집할 뿐 아니라 자료속의 신뢰성 있는 일체의 자료를 정확히 수집하는데서 순수한 특수도서관이다.
신문제작에 필요한 도서뿐 아니라 전문가를 대상으로 또는 자료를 위주한 도서를 구입하여야 된다.
여기서 특수도서관이라 함은 전문자료를 가지고 전문분야의 목적을 위하여 전문의 이용자를 대상으로 전문직원에 의해서 조직되며 전문분야를 중심으로 널리 자료를 망라하고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서구입도 엄선하여 구입·교환 또는 납본에 의하여 비치·정리하는 것이다.
조사부는 실지로는 여러가지 기능을 겸하고 있으므로 그의 중요한 기능을 살릴 수 있게 자료를 선택·수집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인물사진 및 기타사진

대부분의 신문사는 사진부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신문기사에 나타나는 국내외 인물사진에 관하여 사진의 유무를 확인하고 자료가 없을 경우 또는 조사부 자체에서 구득(求得)이 불가능할 때는 사진부 기자에게 외뢰한다. 조사부에서는 신문에 일단 사용한 사진자료를 비치·보관하고 차후의 활용을 위하여 분류 보존하여야 하며, 또는 잡지에서 인물사진을 발췌하여야 한다.
한편 일반 국내외 사진(정치·경제·문화·기타사진)은 후면에 설명과 연·월·일을 기입하여 분류된 「앨범」에 첩부(貼付) 영구 보관한다.

○신문·잡지 등의 발췌

조사부의 업무 중 중요한 것이 국내외 신문 「뉴스」 발생 연·월·일을 신속히 연락(連絡)할 수가 있다.
자료색인은 신문제작에 참고 이용할 수 있는 여러 자료를 신속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작성하는 것이다. 도서나 기타자료가 확인될 수 있다면 별문제이겠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 발췌할 수 없는 도서·인쇄물·사진 기타 등이 허다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색인을 작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색인은 참고자나 조사부원도 활용하기에 편리하고 참고자는 자료가 게재된 「스크랩」·도서·인사「카드」·인물사진·「마이크로 필름」 등의 내용을 열독 그 자료를 곧 인지할 수 있다.
색인「카드」를 「카드」함에 분류 정리함으로서 자료로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색인「카드」 작성은 각사마다 다르게 이용하고 있다.
인사「카드」는 국내외 인사·사회단체 인사 등의 약력·본적·현주소·가족상황 등을 수시 수집하여 인사「카드」함에 보관·비치하여야 하며 또는 자택·직장에 직접 우송(郵送)하여 수집하고, 본인이 래사(來社)한 경우 직접 기입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인사이동이 있을 때는 부원이 직접 기입해야 한다.

「마이크로」 사진기
「마이크로」 사진기는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 사진기는 신문만 촬영하는게 아니라 모든 비밀문서 또는 귀중한 문헌, 서적 등 각방면에 이용가치가 있는 것이다. 보관신문이 산적하고, 부패와 장소가 협소할 때 또는 유사시에 「마이크로·필름」에 수록된 「필름」만 지출(持出)하면 어느때든지 「리다」기계로 신문 전면을 보는 것이다. 또한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고 참고자가 지참하기에도 편리하다.
1933년 「뉴욕·헤랄드·트리분」지가 최초로 창간 100년분을 「마이크로·필름」에 수록했고, 1950년 일본 「讀賣新聞(요미우리신문)」이 보관지를 「마이크로·필름」에 수록한 것ㅇ르 시초로 일본 각신문사에서 보관지를 촬영하였다.
현재는 동아일보사 조사부에서 이 사진기를 설치하여 창간호로부터 「마이크로·필름」에 수록중이다.
이 사진기는 신문보관지뿐만 아니라 국내 외 기사를 구별 촬영하고 색인을 작성·분류하여 수시, 인출 「리다」기계로 볼 수 있다.
우리 신문계에서도 「마이크로」사진기를 설치하여 귀중한 자료 및 신문을 「필름」에 수록 영구보존 사용하는 시기가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조사부의 업무
신문사 조사부는 우선 도서·자료대출·회수규정법을 작성, 시행, 실시 하여야 되며 부원도 이에 따라야 된다. 타부직원이 조사부원을 볼 때, 사진 도서 신문 기타 잡지등속이나 보관하고 한가하게 책이나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조사부로 이동되면 좌천이나 당한 것처럼 여긴다.
조사부원은 「산 백과사전」이며 상식과 지식이 타부원과 비교되지 않으며 타부에 대해 최대한으로 봉사를 발휘할 수 잇는 부서인 것이다.
조사부는 항상 상대적인 위치에서 봉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신문기업가도 조사부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거나 등한시하여서는 안 된다.
또 각자의 업무분담이 필요하다. 아무리 귀중한 자료를 잠고자에 신속히 또는 정확히 제공한다 할지라도 사용된 사료를 회수·재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부원은 애독자에 대한 봉사도 유의해야 한다.
독자가 간단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조사부이므로 부원은 어디까지나 이에 친절한 응답을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 같은 부원의 부재 시를 예상하여 각자가 자료요구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같은 부원의 담당분야도 파악해야 한다. 조사부는 아무리 귀중한 자료 및 특수사진을 편집에 제공하여도 특상(特賞)은 받아 본 일이 없다.
외근기자나 편집자 또는 사진기자 등에는 특상과 공로상이 있으며 또 외국시찰이나 혹은 국내시찰에도 나가보지 못하며 외근기자 잡지 등의 주요자료를 발췌하는 것이다. 자사 신문 뿐 아니라 타사지와 비교하여 주요 기사를 발췌하여 자료로서 참고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일반잡지나 외국신문에서 필요한 자료도 발췌한다. 발췌는 대량으로 「스크랩」한다 해서 잘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을 잘하고 또 상세한 분류와 정리 보존이 따르지 않으면 「스크랩」은 사용가치가 없다.
신문 「스크랩」은 각사 조사부마다 편리하고, 능률적인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데 「카드」식 「스크랩」사용이 참고이용에 대단히 편리하다.
각사 「스크랩」방식을 보면 「카드」식 「스크랩」, 「스크랩·북」식 「스크랩」, 봉투식 「스크랩」 이상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보관함에 있어서 철제 또는 목제를 이용하고 있는데 철제는 녹이 스는 단점이 있고, 목제는 습기가 스며드는 단점이 있지만 목제를 사용하는 게 좋다.

○「카드」식 「스크랩」

「카드」식은 보관함에 맞는 규격의 「스크랩」 합지(合紙)에다 발췌기사를 첩부(貼付)하는 방식이다.
4단으로 횡점선(橫點線)을 인쇄하여 발췌기사 첩부가 편리하도록 돼있다. 이 「스크랩」은 보관함에 추안하게 되면 제본하여 서가에 비치하여 도서와 같이 참고할 수 있는 편리한 점이 있다. 또한 내외근 기자가 수시 지참 대출 참고할 수 있고, 참고자로서도 가장 편리한 장점이 있으나, 참고자의 부주의로 분실될 우려성이 있다.

○「스크랩·북」식 「스크랩」
이 방식은 「스크랩·북」에다 발췌기사를 첨부하는 것으로 1권 1권이 기사의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자료 참고자가 부내에서 사용함에는 편리하나 지참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그리고 관련기사를 연결해서 첩부하는데도 불편한 점이 있고, 공간이 크며 여백이 남기 때문에 「카드」식에 비교하는 소모가 크다.
또한 참고자가 경우에 따라 지참 대출할 때 부피가 방대하기 때문에 지참 대출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제본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서 서가 비치가 가능하다.

○ 봉투식 「스크랩」
이 방식은 대·소형 봉투에 기사주제에 관련되는 일련의 「스크랩」을 한 봉투에 보전·참고하는 방식이다. 신문기사만 발췌하여 봉입(封入)하기 때문에 간단하다.
그러나 봉출(封出)하여 참고할 때는 기사 자체에 파손될 염려가 있고 참고자의 부주의로 분실할 경우 그 관계기사는 완전히 분실되므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점이 있다.
그리고 「스크랩」은 각부 자체에서 작성하는 것도 좋다.

 

일지·자료색인·인사「카드」
조사부는 사진「스크랩」 발췌 외에 일지·자료색인·인사「카드」 등을 작성하여야 한다.
참고자료나 인쇄물이 여러 곳에 산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료에 대하여 소재·지명(誌名)·권호수 및 내용·사진·기사의 분류 등의 색인을 작성함으로써 도서 및 사진 기타 등을 완전 보전할 수 있으며 또 「카드」 1매로서 인물사진·종합사진·약력·저자 등을 알 수 있게 색인을 적성하여야 한다.
일지(日誌)는 기사표제(記事表題) 그 내용을 한정된 자구(字句)로 축소하여 「뉴스」 발생 일자순으로 기재하며 매일 게재되는 「뉴스」 또는 기획 기사의 색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지는 국내외 일지로 구별하여 기사 내용에 따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으로 분류 기입하여야 되며 또 신문이 「뉴스」를 신속히 보도하기 위하여 각 도판을 발행하고, 새로운 「뉴스」를 게재함으로 일지작성 담당자는 최종판까지 기사를 완전 열독하여야 되며 직원이 분할작성 할 때는 기사의 연재성을 고려하여야 된다 그리고 항시 같은 지면을 담당하여 일지 작성을 해야 한다. 자칫하면 동일기사가 수개의 일지에 기입될 우려가 있다.
국내기사는 「뉴스」 발생과 더불어 동일(同日)에 보도되나 외신기사에 있어서는 발행일자 후에 기재됨으로 이런 때는 「뉴스」 발생일자를 중심으로 일지작성을 함으로써 참고자에 편의와에 비교하여 볼 때, 조사부 부원은 햇빛 못보는 그늘에 핀 시들어진 蓄薇꽃이다.
사닥다리와 가위 또는 먼지를 먹어가면서 묵은 자료를 탐색하고 노력하는 부원을 볼 때 가슴 아프며 이러한 조사부원을 신문기업가나 타인이 볼 때,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하다.
타부원에게는 수당이 있으나 조사부원에게는 수당보다 분실된 도서나 자료등에 변상이 앞서고 있다.
해는 서쪽으로 길우어져도 조사부원은 아무말 없이 각국·부를 상대하여 자료제공에 노력하며 또는 회시된 자료 재정리에 힘을 쏟고 있다.

 

결론
신문사 조사부는 특수한 주제에 관한 최신 문헌을 수집 비치하고 분류 색ㄱ인을 적성 능률적이며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하여 불편없이 항상 이용자의 요망에 응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부원은 전문분야의 높은 지식을 필요로 하며, 전문문헌자료에 관하여 비상한 관심을 항시 경주해야 하며 풍부한 지식과 예리한 판단력이 있어야 참고자에 즉응(即應)할 수 있으므로 그와 같은 훈련과 대책이 필요하며 부원의 이동이 빈번할수록 조사부의 권위를 상실하고 만다.
한마디로 조사부는 전문직원, 전문자료, 일반자료를 가지고 전문적 이용자를 상대한 기관이라 하겠다.

《新聞評論 23호》p43~49 , 1967년 9월 

  新聞評論 제호가 1976년 11월 신문과방송으로 변경됨

 

 

제작경쟁의 勝負는 우리 손에 – 찾는 자료 없을 땐 죄인처럼 쩔쩔매고

조사부 방담

참석자 :고재언(부장), 피효진(차장), 이성재·조인혁·안병섭·김창구·임응숙·박창옥(기자), 배석: 송원석·조남두(수습)

때: 8월 15일 오후 4시

곳:별관회의실

내용 생략
※ 지니어스 DAMG게시판 > 동우지/동우회보 >동아사보 동우 1968년 8월 파일 참조

《 東友 제40호》p22~25, 1968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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