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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동아일보 사람들- 최형종

Posted by 신이 On 1월 - 1 - 2019

 

최형종(崔衡鍾, 1902~1994)는 경기 개성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마치고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잡지부 경제부 지방부 정리부에서 근무했다. 1940년 8월 31일자 폐간호를 편집하면서 사회면 첫머리에 “삼천만은 일심단결하자”는 취지로 포도송이 사진을 실었다. 해방 후 수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의사의 길을 걸었다.

 

최형종(崔衡鍾) (개성, 1902~ ) ▲ 1933. 9 사원(정리부, 잡지부, 경제부, 지방부). 1940. 8 폐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최형종

 

전(前) 동아일보 기자 최형종(崔衡鍾)옹 별세 

일제하에 東亞日報(동아일보) 정리부 사회부 경제부 기자를 지낸 최형종(崔衡鍾)옹이 노환으로 3일 밤 11시40분국립의료원에서 별세했다。향년 92세。개성 출신인 고인은 해방후 고려대에 재직하다일본에 유학、수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때 서울대 강단에 섰다가 한의사로 전업했다。
발인 6일 오전9시 국립의료원 영안실、장지 천안공원묘지 264 3603。

(동아일보 1994년 7월 6일 30면)

 

[東亞春秋] 강압폐간의 編輯 / 최형종(筆者·文筆人)

학창(學窓)에서 법학(法學)은 필업(畢業)하던 해 가을 일이다。 직업전선(職業戰線)에서 일자리를 찾아보게 되었는데 법조계(法曹界) 입문(入門)이 쉬운 일이겠으나 청운(靑雲)에 애착(愛着)을 느끼지 못한 까닭인지 또는 일찍이 기자경험(記者經驗)이 있었음인지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에 입사(入社)하게 된 것이다. 춘풍추우(春風秋雨)、십여개 성상(星霜)을 선배(先輩)와 동지(同志)의 넘치는 애호(愛護)를 받으며 동아지(東亞紙)를 위하여 청춘(靑春)의 정열(情熱)과 심혈(心血)을 경주(傾注)하였으나 민족투쟁(民族鬪爭)의 선봉(先鋒)이요、언론자유(言論自由)의 수호신(守護神)인 동아일보(東亞日報)를 만들어내는 거룩한 사업(事業)에 말석(末席)을 더럽히게 된 나는 항상 부덕(不德)과 천식(淺識)과 무능(無能)을 한탄(恨歎)한 바 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제2차 세계대전의 실머리가 태평양 바다에서 비롯하여 전진(戰塵)이 험상궂게 어지럽고 열전(熱戰)의 도수(度數)가 높아가매 기고만장(氣高萬丈))(?)하던 일제침략(日帝侵略)의 전황(戰況))은 날이 갈수록 예기(銳氣)가 좌절(挫折)되어 패적(敗績)이 승리(勝利)보다 많았고 세계의 정세(政勢) 또한 이(利)롭지 못함을 차츰 차츰 간파(看破)하게 되자 일제(日帝)의 최후 발악(發惡)은 못할 바가 없는 잔학상(殘虐相)이었으니 소위 『창씨(創氏)』、『국어상용(國語常用)』-등등、우리에게、아니 사람에게 행하지 못할 학정(虐政)을 감행(敢行) 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배일지(排日紙)니、이 신문을 그대로 두고는 소위 총독정치(總督政治)에 방해(妨害)가 많고 일선융화(日·鮮融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데에 최후결론(最後結論)이 떨어졌던 것으로 동아지(東亞紙)에 대한 강력한 가해(加害)의 창(槍) 끝이 뻔적거리었고 살기(殺氣)는 날카로웠다.

일장(日將) 남차랑(南次郞)은 『소화(昭和) 십오년(十五年) 팔월십일일부(八月十一日附)까지 발행(發行)하되 이로써 폐간(廢刊) 할 일』이라는 강제폐간명령(强制廢刊命令)을 서슴치 않고 발표 하였으니 故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先生을 비롯한 간부제씨(幹部諸氏)와 동인일동(同人一同의 『한민족(韓民族)의 표현지(表現紙)는 가석(可惜)하게도 그만 말살(抹殺)을 당(當)하는구나!』하는 단장(斷腸)의 감격(感激)은 아연실색(啞然失色)과 더불어 비절(悲絕)·침통(沈痛)의 연속선(連續線)일 뿐이었다.

젊은 편집자(編輯子) 나는 이 흉보(凶報)를 접하고 『이러고야 일본이 아니 망할 수 있으랴? 그의 퍠전(敗戰)은 머지 아니하여 있을 것이니 도국(島國) 근성(根性)인 도량(度量)없는 수법(手法)은 저질러서는 아니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두고보자, 앞날을』함이 그때의 소감(所感)이었으며 나는 아픈 가슴을 부둥켜안은 채 각일각(刻一刻) 신문의 운명(運命)(?)을 재촉하는 남은 며칠동안 갈팡질팡하는 붓대를 가다듬어가며 편집(編輯)을 계속하여 최후일각(最後一刻)까지 동아지(東亞紙)와 같이하였다.

천구백사십년(一九四○年) 팔월십일일부(八月十一日附) 지령(紙齡) 제육천팔백십구호(第六八一九號)、끝날 신문(新聞)의 편집(編輯)은 시작되었다.

사회면(社會面) 첫머리에 큼직하게 포도(葡萄)송이 사진(寫眞)을 실렸다. 이는 『포도(葡萄) 알이 주렁주렁 뭉친 것처럼 삼천만(三千萬)은 일심단결(一心團結)하라.』는 최후(最後) 한마디의 부탁이었던 것이다. 이날 석양(夕陽)에 신문이 반포(頒布)되었다. 감정(感情)을 표시(表示)할 자유(自由)조차 빼앗긴 적치삼천리(敵治三千里)에 수십만(數十萬) 독자(讀者)를 비롯하여 국내 전민중(全民衆)은 소리없는 방성(放聲)이외、눈물 없는 통곡(痛哭)의 애처러운 표정(表情)이었었다. 나의 기자생활(記者生活) 십유년(十有年)에 어찌하다가 이처럼 감격(感激) 깊고 애닯은 장면(場面)을 체험(體驗) 하였을까함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아니하는 기억(記憶)이다.

(동아일보 1955년 2월 20일 4면)

 

新裝한 舊都 開城行進曲 (地方紹介…其三)

開城의 名勝古蹟   (崔衡鍾)

松都의 산천을 말할 때에 엇더케 형용하는 것이 조흘고, 적당한 형용사가 생각나지 안이한다.그러나 松都를 첫 번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山紫水明한 곳이라고 말하리라. 전차, 자동차, 뻐스가 밧부게 왓다 갓다하는 어지러운 소리와 라듸오, 축음기, 극장, 카페-, 눈에 뵈이는 것 귀에 들이는 것이 神經을 과민케 하는 도시에서는 차저볼 수도 업슬만큼 閑雅한 勝地이다. 꾀꼬리 노래하고 금붕어 둥실둥실 떠도는 彩霞洞과 扶山洞 千初閣에 흘으는 물소리는 이즐 수업시 조흔 경치이다.

入谷非塵意
夕陽人去盡
緣溪有碧陰
流水自淸音(金初菴)

松都를 모르는 사람은 잇서도 朴淵瀑布를 아지 못하는 사람은 한아도 업슬 것 갓다. 조선적으로 유명한 폭포이기 때문이다. 朴淵이라 하면<73> 天摩, 聖居 두 놉흔 산을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麗朝의 피난하던 要害地이엿섯슴을 회상하게 될 것이다. 폭포의 壯快함이야 朝鮮에 盧山瀑布라 할만하다. 朴淵은 꼿 시절에 보는 것 보다도 단풍시절에 보는 것이 더욱 훌륭하다. 한적한 佛堂, 낡은 七重塔, 새벽의 木鐸소리는 塵世에 부댁기는 피곤한 靈을 가벼웁게 하야 준다.

松都의 시가는 南大門을 중심으로 한 十字街路가 제일 번화하다. 동에서 서에 남에서 북에 즐비한 상점은 점포장식한 것으로 본다든지 상품진열한 것으로 본다든지 開城상인의 모범적기풍을 나타낸다. 南大門은 李太祖가 즉위한 지 3년 되던 해에 건축한 것이다. 이는 조선최고건물이니 京城 崇禮門보다 두해 먼저 지은 것이다. 崇禮門과 가티 굉장 광대하지는 못하나 조선공예를 연구하는데 업지 못할 자료이다. 그리고 門樓에 大梵鐘은 高麗 忠穆王때에<74> 元나라 名工이 주조한 것이니 4대 梵鐘 가운데 한아로 우리의 귀중한 보배이다.

雪月前朝色
南樓愁獨立
寒鐘故國聲
殘郭暮烟生(權鞸)

開城의 松岳과 漢陽의 北岳은 항상 뜻잇게 뵈인다. 北岳은 景福宮을 중심으로한 희비극적 史實을 말하는 듯하며 松岳은 延慶宮을 중심으로 한 高麗時代의 史實을 말하는 듯한 늣김을 주는 까닭이다. 松都는 高麗時代의 首府로 정치의 중심이오 燦爛한 문화의 중심지이엿섯다. 그럼으로 松都의 고적은 어느 것이나 高麗興亡의 과거를 말하지 안이하는 것이 한아도 업다.

滿月臺는 高麗王宮인 延慶宮의 녯터이다. 恭愍王시대에 宏壯하든 궁전은 鳥有에 歸하고 지금에는 넓은 녯터에 잡초가 무성할 뿐이다. 松岳은 쓸쓸한 페허를 위엄잇게 내려다 보고 땅에 무친 주초ㅅ돌은 영화의 녯 꿈을 꾸고 잇다. 滿月臺와 달은 서로 떠날 수 업는 인연이 잇다. 달을 떼어 노코는 滿月臺를 이약이하기 얼럽고<75> 滿月臺를 떠나서 달을 구경할 맛이 업슬 것이다. 滿月臺이야말로 유명한 풍경화의 한 폭이다.

충신의 흘린 피는 천만년이 지나가도 사라지지 안이하나 보다. 善竹橋 돌다리. 鄭圃隱이 흘린 피는 오백년 후 금일에도 오히려 선홍색을 띄엇스며 高麗의 멸망을 분개하야 바위에 머리를 부듸처 죽은 孫登, 河檠 두 충신의 더운 피는 아즉까지 바위 우에 남아 잇는 것을 볼 수가 잇다. 낡은 돌다리 졸졸 흐르는 시내가에 垂楊이 푸르럿슬 때와 낙엽이 우수수 거친 풀이 시들어 갈 때에 한 번 차저 보고 십흔 곳이나 풍경도 풍경이지만는 별다른 정취가 잇는 까닭이다.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번 고처죽어
白骨이 塵土되어 넉이야 잇고 업고
님향한 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잇스랴(鄭圃隱)

현대인의 눈에 빗치는 伯夷와 叔齊는 케케묵은 녯날 志士에 지나지 안이한다.<76> 산ㅅ속에 들어가서 굴머 죽은 이 두사람의 事蹟이 녯날 역사 어느 모퉁이에서 데굴데굴 걸리대다가 언제 업서저 벌엿는지 그다지 주의를 끄는 인물이 안이라고 생각하기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일흠은 역사 폐지에 고금을 통하야 뚜렷이 존재하야 잇다. 孫文과 蔣介石이 支那現代史上에 큰 자랑꺼리인 만큼 伯夷와 叔齊도 支那古代史에 업지 못할 보배이다. 한아는 動的 偉人이요 한아는 靜的 偉人인 것이 서로 다르지 그네들의 가슴에서 끌는 피는 다 갓흘 것이다. 우리는 支那에 伯夷叔齊가 엇섯슴을 부러워할 바가 안이다. 우리에게는 伯夷叔齊 72인이 잇지 안이한가. 高麗 遺臣 曺義生林先味 등 72인은 李朝에 벼슬을 거절하고 杜門終世한 사람들이다. 그네의 충절이 얼마나 高潔하냐. 이 72인의 충신은 우리 역사에 빼노흘 수 업는 큰 자랑꺼리며 만고를 통하야 그네들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지 안이치 못할 것이다.

(최형종, ‘新裝한 舊都 開城行進曲(地方紹介…其三)’, 별건곤, 1930년 11월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이름 최형종 (崔衡鍾 )
민족구분 한국인
현주소 1) 서울市 東大門區 昌信洞
출전 1) 민국인사, 175

학력
1) 普成專門學校 法科 卒業
출전 1) 민국인사, 175

경력및활동
1) 中外日報 學藝部, 東亞日報 社會部, 東亞日報 雜誌部, 東亞日報 經濟部, 東亞日報 編輯部 記者
新韓公社 「새한」報 編輯課長, 新韓公社 「새한」報 調査課長, 漢城日報 編輯局次長 等 歷任
漢城日報社 囑託, 國立서울大學校 醫科大學 講師, 中央漢醫學硏究會 主幹 就任
서울市 昌信洞에 華生堂醫院 開業
출전 1) 민국인사, 175

취미특기 1) 園藝
출전 1) 민국인사, 175

참고문헌
대한민국인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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