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봉(崔彰鳳, 1925~2016)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국방부 군 방송실장으로 40년 방송인의 첫발을 디뎠다. 공보부 방송실장, KBS 제작과장을 맡았고 1963년 동아방송 탄생의 실무 주역으로 개국 이후 방송부장으로 활약했다. 1964년 6월 4일 당시 계엄당국이 동아방송을 길들이기 위해 벌인 ‘앵무새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넘게 옥고를 치렀다. 동아방송 부국장, 국장대리를 마치고 KBS 부사장, MBC 사장, 한국방송진흥원 이사장,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자서전 <방송과 나: 영원한 PD 최창봉의 방송인생 다큐멘터리>(동아일보사, 2010)을 펴냈고 보관문화훈장, 충무무공훈장,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최창봉(崔彰鳳) (의주, 1925~ ) △ 63.5 방송국방송부장, 방송국부국장겸, 방송국장대리, 71.6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명복을 빕니다] 동아방송-HLKZ 개국 주도, 최창봉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그의 삶이 곧 한국 방송의 삶”
“그는 한국 방송의 설계자이며 개국 전문가다. 한국 방송은 그가 깔아놓은 길을 따라 걸어왔다.”(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방송계의 산증인이자 채널A의 전신인 동아방송(DBS)의 초석을 놨던 최창봉 한국방송인회 이사장(사진)이 2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1925년 평북 의주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홀로 월남해 고려대 영문학과에 다니다 6·25전쟁 때 군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국방부 군 방송실장을 맡아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최창봉의 삶이 한국 방송의 삶”(장한성 한국방송인회장)이란 말처럼 고인은 대한민국 방송사(史)를 열고 펼치고 닦은 인물이었다. 1956년 국내 최초의 TV 방송사인 HLKZ의 개국을 주도했으며, 역시 최초의 TV 드라마인 ‘사형수’ 연출을 맡은 한국 TV PD 1호였다. 이후 MBC 라디오 개국 기초를 닦은 뒤 개국 한 달을 앞두고 1961년 군사정권에 징발돼 국영TV KBS 개국 준비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40년 가까운 고인의 방송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1963년 동아방송 개국이었다. 고인의 자서전 ‘방송과 나’(2010년)에서 “동아방송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17년 7개월이란 제한된 기간에 우리 방송 문화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방송”이라고 회고했다.
고인의 방송 인생에서 ‘앵무새 사건’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가 신설한 프로그램 ‘앵무새’는 국내 최초의 라디오 칼럼. 당시 군사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담당 실무자들과 옥고를 치렀다. 1967∼1975년 동아방송 PD로 일했던 김학천 전 EBS 사장은 “고인 덕분에 광고나 청취율, 옆(군사정권)의 간섭에 휘둘리지 않고 올곧은 방송을 만드는 대단한 축복을 누렸다”고 돌아봤다.
‘국민배우’ 최불암 동아방송예술대 석좌교수는 “선생님과 함께 했던 술자리가 그립다. 선생님의 남자다운 모습을 그리워하고, 선생님의 결단력과 고집을 사랑한다”고 추모했다.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라디오와 TV, 국영과 민영, 공영방송을 두루 섭렵한 거의 유일한 방송인이다. 방송사에 끼친 그의 업적과 족적은 전설로 남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1997년 금관문화훈장을 비롯해 충무무공훈장(1953년) 보관문화훈장(1979년)을 받았다. 호암문화상(1993년) 월남장(2003년) 방송위원회대상 특별상(2007년) 대한언론인회 언론공로상(2008년)도 수상했다. 유족은 영이 영경 영진 씨 등 3녀.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발인은 31일 오전 7시.
(동아일보 2016년 12월 30일자 A25면)
동아방송의 개국
‘여기는 동아방송’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동아의 첫 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1963년 4월 25일 상오 5시 30분, 새벽 정적을 뚫고 동아방송이 태어났다. 꿈과 희망에 찬 첫소리, 그 자체가 방송사상 획기적인 큰 뉴스였다. 관영방송이 지배하고 두 민방이 앞섰으므로 세 번째 민방이지만 그러나 참된‘민중의 소리’를 대변할 유일한 민간방송이 태어난 것이다. 다른 두 민방, 기독교방송과 문화방송과는 달리 동아방송은 유일하게 일간신문사가 겸영하는 것, 활자매체와 전파매체가 서로 연계하여 보완하는 시대의 문이 열린 것이다. (…)
초대 국장에 김상기(金相琪) 업무국장이 전보되었고, 방송부장에 최창봉(崔彰鳳), 기술부장에 신광우(申光雨), 업무부장에 정봉진(鄭奉鎭), 그리고 편성과장에 이윤하(李潤夏), 제작과장에 조동화(趙東華), 음악과장에 조갑준(趙甲濬), 아나운서실장에 전영우(全英雨), 뉴스실장에 고재언(高在彦), 송신소장에 이창섭(李昌燮), 기술과장에 정관영(鄭寬永), 총무과장에 김기택(金基澤), 영업과장에 강기철(姜基喆)이 각각 임명되었다.
최창봉 방송부장은 개국 프로그램 편성과 방송인원 확보를 위해 1963년 1월에 위촉되었다가 개국과 함께 방송부장이 되었다. 최창봉은 56년 고려대학 영문과를 수료하고, 공보부 방송문화연구실장, 문화방송 방송부장, KBS TV 편성겸 제작부장을 거쳐 동아방송 개국준비에 참여했던 것이다. (…)
한편 개국 프로그램의 편성은 개국 2개월 전부터 최창봉 방송부장을 주축으로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동아의 이미지를 부조하기 위하여 가급적이면 딴 방송국의 프로그램과는 유형을 달리하면서도, 인기를 집중시킬 프로그램을 짜기에 부심하였다. 이리하여 다큐멘터리‘여명 80년’은 그 후 많은 방송국에 번지어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붐을 이루게 만들었고, 자선극‘이 사람을!’은 실의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프로로 청취자의 인기를 모았고, 건전한 오락프로‘유쾌한 응접실’은 꾸준히 방송되어 대중의 벗이 되기도 하였다.
(…)
‘앵무새’사건으로 입을 틀어막아
서울특별시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 날인 6월 4일 상오, 방송부장 최창봉(崔彰鳳), 뉴스실장 고재언(高在彦), 편성과장 이윤하(李潤夏) 등 3명이 수사기관원에게 연행되고, 같은 날 하오 제작과장 조동화(趙東華), ‘앵무새’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김영효(金榮孝)가 다시 당국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5일에는 ‘앵무새’ 프로그램의 스크립트 라이터였던 동아일보 외신부장 이종구(李鍾求)가 자택에서 연행되어 도합 6명이 체포되었다. 이밖에도 편집국 수습기자 이종률(李鍾律)이 6월 13일 학생데모 직후 조종혐의로 구속되었다.
한편 4일 하오에는 5월 20일에서 6월 3일 사이에 방송된 뉴스원고와 ‘앵무새’ 프로그램 원고도 압수되었다.
‘앵무새’프로는 강하고 신랄한 고발적 성격의 방송 ‘칼럼’. 우리나라 방송사상 처음 시도된 것인데, 냉철한 활자매체가 주는 효과와 달리 방송매체가 주는 감정적 소구력(訴求力)이 예민하여 권력측에서는 ‘앵무새’의 해학적 내용을 가리켜, ‘의도적으로 학생을 선동한 것’으로 단정하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앵무새’를 낭독한 동아방송 성우 1기생 이은미(李銀美)의 목소리는 매섭고 날카롭고 힘찬 데가 있어 더욱 청취자를 매료시켰으며, 그들의 압도적인 반응은 ‘체증이 뚫릴 정도로 시원하다’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해도 괜찮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도 박정희가 시국불안의 요소로 지적한 ‘무책임한 일부언론’의 보도 논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
그 후 7월 14일 계엄보통군법회의의 심판부는 관련자 6명 가운데, 최창봉(崔彰鳳) 조동화(趙東華) 이윤하(李潤夏) 등 3명을 보석키로 결정, 이날 밤 9시 40분께 서울 교도소에서 풀려났고, 나머지 3명은 64일만에 겨우 풀려났던 것이다. 그러나 1심과 재심공판이 끝나고 무죄가 확정되기까지는 만5년 1개월이 걸렸고, 이 동안에 한일회담이 성숙, 조약이 체결되었고, 67년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긴 시일에 걸쳤던 것이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새로운 방송(放送)에 대한 제언(提言), 최창봉(崔彰鳳) 방송문화연구실장
(동아일보 1960년 5월 4일자 4면)
얻은 것 잃은 것 ❷ 불려진『아나운서네 집』
최창봉(崔彰鳳) 동아방송 국차장 겸 방송부장(局次長兼放送部長)
(동아일보 1963년 12월 11일자 5면)
동아방송국(東亞放送局) 간부(幹部) 등 6명(名) 군재(軍裁)에 송치(送致)
반공법(反共法)·특정법(特定法) 등 위반 혐의(違反嫌疑)
(동아일보 1964년 6월 17일자 1면)
잇달은 『테로』와 협박(脅迫)… 최창봉(崔彰鳳)씨 집
(동아일보 1965년 9월 9일자 7면)
동아방송(東亞放送)사건 전원무죄(全員無罪)
(동아일보 1966년 12월 29일 1면)
[DBS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하루 빨리 보탬 되도록
개국전후…. 최창봉
개국 50일에 아직 개국전후라는 과거를 담담하게 얘기할수 있을 만큼 심경이 안정돼 있질 못하다.
한달동안의 준비기간으로 14시간 방송을 가까스로 시작했다가 25일만에 19시간의 전시간 방송을 강행해야 했고 황급히 편성방송되면 각 프로그램시간을 제1차로 변경조절하는 등 아직 프로그램의 정리 대치방편 등 기초작업이 진행중에 일희일우(一喜一憂)하며 지나는 작금이라 지금 개국전후를 도리켜보며 이렇게 되었다하고 내세워 말할 것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로 어쨌던 HLKJ라는 콜사인이 세종로의 동아옥상 안테나를 떠너 매일 19시간식 서울 주변에 메아리지고 있다는 사실은 감개무량한 한편 이 동아의 빛나는 역사와 전통에 우리방송이 보탬이 될 때가 하루 빨리 와야겠다는 내일에의 꿈에 무거운 책임감만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이란 고마운것이어서 개국 전후에 어려웠던일 괴로웠던 일 등 좋지 않았던 것들은 벌써 기억에서 멀리 멀어져가고 있다.
개국하던 날 저녁 8시경 어느 요정에서 벌어진 개국축하연에 잠간만 참석하고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몇 몇 방송관계 간부들과 함께 불안을 무릅쓰고 참석했다. 동아의 신문과 방송관계 모은 간부 되시는 분들이 모이셨던 자리라서 유쾌한 기분으로 권해 주시는 대로 잔을 연상 들이키고 있던 중 주상(酒床) 밑에 숨겨놓고 듣고 있던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동아방송이 뚝 끊어져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황급히 달려가 전화를 걸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전화도 걸려지질 않는다. 허둥지둥 뛰쳐나와 방송국으로 택시를 몰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참한 심경이었다. 개국초일에 방송사고! 기가 막혔다.
택시를 내려 4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다이알을 돌려보았으나 KA나 KV 소리는 유유히 흘러나오는데 KJ만이 안나오고 있다. 주조(主調)로 뛰어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 방송이 나오고 있질 않은가. 송신이 되질 않고 있는가 했는데 수신 모니터에서도 개국기념 ‘DBS 카니발‘ 초야의 특집방송이 낭낭(朗朗)히 흘러나오고 있지않은가! 사고는 없었다. 간밤에 철야하던 여러 스텝들이 피곤한 기색도 없이 주조에서 정연히 방송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트랜지스터의 다이알을 다시 맞춰 보았다. 동아의 소리는 트랜지스터에서도 틀림없이 나오고 있었다.
취기에 다이알을 세대로 잡질 못했던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개국초일에 무모하게 주연(酒宴)에 참석했던 잘못을 책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었던지?
묵묵히 방송을 진행시키고 있는 스텝들이 그때처럼 고맙고 귀하게 보여지긴 처음이었다. 머리가 수그러졌다. (방송국차장)
(동우(東友), 1963년 6월 30일)
[동아방송 개국 15돌 기념특집] 동아방송 개국의 전후
동아방송의 개국을 앞두고 밤잠을 설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언 개국 15주년을 맞게 되었으니 남다른 감회도 크거니와 당시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동아일보사에서 방송국을 시작하리라는 얘기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설과 기재면에서 미리 준비작업에 착수했던 고 신광우 씨로부터 스튜디오 배치 문제라던가 제작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재 등에 대해서 이모저모 사적으로 상의도 받곤 했었다. 내가 방송문화연구실을 책임맡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차에 1962년 봄이였었을까, 당시의 동아일보사장 최두선 씨와 김상만 전무, 이언진 국장과 함께 한 자리에서 동아방송을 개국시키는 역사적인 일의 일익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때의 심정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엄청난 의욕과 구할길없는 두려움 같은 것이 교차되는 그런 착잡한 기분이었다.
어떤 이연에서였던지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방송이었던 부산문화방송국과 서울의 한국문화방송의 개국을 도운 적이 있고 그전에는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TV국이었던 KORCAD-TV(뒤에 대한방송주식회사)의 창립에도 처음부터 참여한 바 있어서 우리나라에서의 상업방송에 대하여는 남달리 많은 생각을 품어오던 터였다.
방송분야가 아직은 미개척지로 남아있는 처지였고 또 정부에서도 방송의 공익성 또는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뚜렷한 제도적인 장치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 상업주의적인 경영이 방송을 지배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일종의 기우였던 것 같다.
그런데 최두선 사장이나 김상만 전무를 몇 차례 만나 뵈는 동안에 나로서는 정말 뜻밖에도, 내가 말하고 싶었던 예기들을 그 어른들이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즉 동아일보사는 방송을 영리적인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민족 · 민주 · 문화’의 사시(社是)에 입각한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생각하고 그런 방침하에 운영되리라는 요지였다.
‘돈을 번다는 생각은 말고, 소신을 가지고 방송에 임하도록’ 오히려 당부하시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경영진 몇 분의 것만이 아니었다. 개국 초에 뉴우스 프로에 광고주가 붙는다는 얘기가 나왔을 대 많은 사람들은 동아뉴우스에 어떻게 ‘XX제약 제공’이란 제공 멘트를 붙일 수 있는가하고 반발했었을 정도며, 실제로 오랫동안을 뉴우스 프로는 판매않는다는 원칙 같은 것이 유지되었었다.
사회공기로서의 방송 내지는 방송인이 방송을 통해서 펴볼 수 잇는 이념같은 것을 생각하던 나로서는 동아방송이야말로 필생의 정열을 쏟아넣을 수 잇는 장소라고 확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동아방송을 출범시키는 일을 맡으면서 나의 각오는 분명했다.
즉 동아방송은 방송 본래의 사명을 다할 것이고, 특히 동아일보 반세기의 빛나는 전통에 보탬은 될망정 절대로 티끌만큼의 손상도 가게 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우선 사람들 모으는 일부터 착수해야했다. 그때 인사(人事)면에서의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즉 방송인이란 반드시 기계 만지는 재간에 능하고 시간에 맞추어 프로 구성을 요령것 잘 하는 사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방송제작 요원은 철저한 국가관 또는 민족관을 가지고 있고, 국가나 사회에 대한 봉사심도 뛰어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위에서 폭넓은 교양과 세련된 지성을 지닌 사람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일꾼을 모으는데 있어서 반드시 방송계에만 눈길을 둘 것이 아니라 시야를 넓혀서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두 번째로는 티임 웍을 철저하게 생각했다. 방송은 협동작업이다.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적을 위해 협동하는 것이다. 협조정신이 적은 사람은 곤란할 것이고 특히 동아방송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나와 상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사장과 김전무는 나의 이런 얘기를 어떻게 이해하셨던지 보도와 기술분야 이외의 전 제작 스탭의 인선을 나에게 맡겨주셨다. 뒤에 상각하니까 이것은 사의 이례적인 결단이었던 것 같다.
임시 고용원 한 사람 채용하는데에도 사장이 일일이 관심을 표시해온 것이 사의 전통인 것을 알고, 나는 나에게 맡겨진 책임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깨닫고 숙연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스탭 한 사람 한 사람 선임하는 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일일이 최사장 고재욱 부사장 김전무 그리고 김상기 방송국장에게 상의를 하고 재가를 얻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과정에서 윗분들은 한 마디의 제약도 주지 않았고 사람 한 사람 천거하지도 않았었으며 자천 타천으로 몰려든 이력서 뭉치 는 사장비서실 책상서랍에서 묵힌 채 단 한 장도 나에게 건네지지 않았었다.
이제 고백하지만 단 한번 조동화 씨의 선임에 대해서 그가 방송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잡지경력~ 특히 여성잡지의 편집자 경력은 방송에서도 크게 유용하리라 생각했었고 또 일본의 몇몇 유명한 프로제작자가 잡지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떻든 조동화 씨의 제작과장 취임은 두달 가까운 시일을 끈 뒤에 승인이 났었다.
음악과장 조갑준(백봉) 씨, 편성과장 이윤하 씨, 아나운서실장 전영우 씨는 공교롭게도 모두 KBS에서 옮겨왔지만 물론 KBS를 특별히 의식했던 것은 아니고 모두방송에 대해서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분들이고 훌륭한 재능과 경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제작 일선에서 뛰게 될 중견 PD나 아나운서들도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재능들을 감안하면서 엄선되었었다.
뒤에 방송제작 스탭들을 ‘최창봉사단’이라고 호칭하는 분들이 있었다.
또 ‘방송국 사람들은 똘똘 뭉쳐있다’는 말도 들었다. 이런 표현들은 듣기에 따라서 곡해(曲解)의 여지도 없은 것은 아니나 나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처음에도 말햇듯이 방송은 똘똘 뭉쳐서 일사불란하게 협동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사관계에서 한 마디 더 부언한다면 수습 1기의 PD 및 아나운서에 관해서인데, 이들은 정말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2기 3기가 우수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1기생들은 특히 우수했고, 거기에다 1기라는 긍지까지 지니고 있어서 동아방송의 기초는 든든한 것이라 속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한 광고사태로 인해서 1기 PD들은 다 나갔다고 들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르겠다. 반면에 1기 아나운서들은 지금도 정말로 동아방송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개국 초의 프로 편성면에서 돌이켜 보면 우선 보도에 역점을 둔 점을 말할 수 있다. 동아일보의 빛나는 전통이 방송에서도 반드시 계승되어야 하며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앞으로는 전파의 시대라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또 동아방송은 언론기관에서 직영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이었다. 그런 뜻에서도 동아방송은 방송언론을 확립해 나아가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고재언 뉴스실장도 이점에서 나에 못지않은 소신을 가지고 있어서 Pen대를 가지고 잔뼈가 굵은 기자들로 하여금 녹음기를 메게 하고 마이크 앞에 서게 하고 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신문기자가 방송기자로 제질을 바꾼다는 것이 하루이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기자는 마이크나 녹음기에 신선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어떤 기자는 끝내 녹음기 메기를 꺼리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신문쪽으로 돌아갔을줄 안다.
그러나 동아방송의 뉴스는 굉장했었다. 동아방송 이전까지는 방송에서의 뉴스란 그다지 인기있는 프로가 아니었었다. 그런데 동아방송의 뉴스는 달랐다. 무슨 사건이 일어나거나 국내외의 정세가 어수선할 때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아방송 뉴스에 매달리곤 했었다.
이런 사실은 개국 초에 방송간부들이 직접 가두청취조사에 나서 실감했었고, 뒤에 조사연구실을 두어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해서도 확인됐었다.
뉴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무언가 우리의 것, 우리 민족의 것, 전통적인 문화, 그리고 우리의 역사 등을 어떻게 프로화 하는가였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얘기는 다할 수 없으나 여러해 뒤에 민방(民放)간에 청취율 경쟁이 치열해졌을 때 나는 각국마다 이제는 편성면에서 특색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가하고 동아방송은 ‘격조 있는 민족의 방송’이어야 한다고 내세웠었다.
이 생각은 개국 전부터의 나의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동아일보의 반세기 역사는 숙명적으로 동아방송의 청취대상을 ‘중산지식층’으로 잡고 대중을 이끌어나가는 입장에 서야 하리라 믿는다.
개국초에는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프로를 전부 편성해놓고 그 이상의 것을 항상 개발하고 시도하여 많은 ‘한국 최초의 프로’를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길게 봐서는 음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동아방송에서 일한 10년 가까운 세월을 생애에서 가장 값지고 보람있는 것으로 회상할 수 있다. 그리고 미흡하나마 나의 정열을 쏟아 방송에 몰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최두선 사장이나 고재욱 부사장, 지금의 김상만 회장 과 김상기 부사장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몇가지 후회가 되는 것도 있다.
방송의 선진국에서는 여러 10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고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는 PD system을 실현하지 못한 점, 그보다 먼저 선진PD들에 대한 재교육 내지는 보다 깊이 있는 방송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와 여유를 주지 못했던 점 등 이다. 편성이다 제작이다 하다보니까 긍지 있는 방송인의 양성이라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난 생각되는 것이다.
정말 동아방송이 개국 15주년을 돌이켜보니 감회가 많다.
앞으로도 계속 멋있는 방송을 해줘서 한때 동아의 가족이었던 이 사람도 같이 자랑스러울 수 있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동우(東友), 1978년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