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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동아일보 사람들- 정재완

Posted by 신이 On 12월 - 28 - 2018

 

정재완(鄭在琬, 1881~1964)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1~1924년 동아일보 취체역(이사)을 역임했다. 하동 인근 최고의 갑부로 많은 전답을 처분해 부산 동래에 고급 요정 산해관을 만들어 운영하며 은밀히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정재완(鄭在琬) ( ) ▲ 1921. 9 취체역, 1923.12 사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정재완[鄭在涴]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재완(鄭在涴)의 호는 물헌(勿軒))이다. 정재완은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태어났다. 근검절약하여 재산을 모아 만석 거부(萬石巨富)가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를 통해 상해 임시 정부에 자금 지원을 하였다. 또한 부산 동래에 산해관(山海館)을 건립하여 독립지사의 연락 및 은신처로 제공하였다. 정재완의 가옥인 금남면 대치리 정씨 고택은 일제 강점기에 세워져 근대적 한옥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전통 가옥이다. 정재완(鄭在涴)의 아버지 정규영(鄭奎榮)은 효자로 유명한데, 정재완은 아버지의 글을 모아 1943년 문집인 『한재집(韓齋集)』을 편찬해내기도 하였다.

 (‘정재완(鄭在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사창립총회

창립준비중이든 주식회사 동아일보사는 거십사일오후이시에 시내 명월관에서 창립총회를 개(開)하고 경과보고가 유(有)한 후 중역선거를 행(行)하얏는대 피선된 취체역급감사역의 은 좌(左)와 여(如)하더라

취체역(取締役) 이운(李雲)▲장덕수(張德秀)▲김찬영(金瓚永)▲송진우(宋鎭禹)▲이상협(李相協)▲성원경(成元慶)▲장두현(張斗鉉)▲정재완(鄭在涴)▲신구범(愼九範)▲김성수(金性洙) 감사역(監査役) 현준호(玄俊鎬)▲장희봉(張熙鳳)▲박용희(朴容喜)▲이충건(李忠健)▲허헌(許憲) (…)

(동아일보 1921년 9월 20일 2면)

 

 

재외동포위문회원 방명(在外同胞慰問會員芳名)

(동아일보 1923년 2월 10일 2면)

 

일신교 기부금(一新校寄附金) 오십여만(五十餘萬)의 거액(巨額)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 5면)

 

형설회 연극 성황(螢雪會演劇盛况)

(동아일보 1923년 7월 8일 4면)

 

 

 

憂國之士 勿軒 鄭在涴 先生 고유제 및 제막식 가져
유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노력으로 금남면 대치마을에

지난 5월24일 금남면 대치마을에서는 우국지사(憂國之士) 물헌(勿軒) 정재완(鄭在涴) 선생의 유적비 제막식이 열렸다.
선생(先生)의 유적비는 하동군, 하동향교유림(전교 정한효), 하동문화원(원장 정연가), 항일청년보전회(회장 이수종), 진양정씨 은열공파 목사공문 대종회(회장 정희대), 선생의 유족(대표 정현상ㆍ정한숙)등 유적비 건립 추진위원들의 물심양면(物心兩面) 2년여에 걸친 노력에서 얻어진 값진 결과 였다.
이날 제막식에는 추진위원들을 비롯해 선생의 후손들 그리고 지역주민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물헌(勿軒) 정재완(鄭在涴) 선생!
선생은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지난 1881년 유학자이셨던 부친(父親) 정규영(鄭圭榮)의 큰 아들로 태어 났다.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부친은 통정대부비서감승직(정3품)과 하동향교 전교직에 올랐으며 하동군 최고의 갑부(甲富) 였다.
선생의 부친 정규영(鄭圭榮)은 1909년 4월 고향 대치리에서 자신이 운영영해 오던 서당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4년제 사립 현산(峴山)학교 (구. 김양분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6년동안 교장직을 맡았다.
물헌(勿軒) 선생은 지난 1919년 백산(白山)상가의 주식회사 전환 당시 주식 500주를 출자하여 백산상회 하동연락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하동경찰서에서 오랜기간 문초를 겪었다.
또,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길은 육영사업에 있다며 전답(田畓)을 팔아서 민족학교 개교등에 많은 자금을 내어 놓았다.
부친(父親) 정규영(鄭圭榮)이 학교장으로 있던 사립 현산학교의 운영을 맡으면서 교육과 인연을 맺어 1923년 일신고등보통학교(現. 진주 여자고등학교의 전신) 설립자 총회에서 자금을 출자하여 이사에 피선되면서 학교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고, 동래(東萊)일신여학교(現. 부산동래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에도 많은 자금을 출자했다.
또한, 육영사업과 함께 민중의 계몽과 항일운동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민족신문발간이 시급하다는 생각으로 동아일보의 창간에 많은 돈을 출자하여 대주주로서 55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이어, 상해 임시정부의 특사로부터 독립신문의 재정난이 심각하여 폐간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논을 일본의 국책 회사인 동양척식 마산지점에 담보로 하고 자금을 마련하여 상해로 보냈다.
이후, 1929년 세계 대공항으로 쌀값이 1/4로 폭락하자 선생은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며, 이후 동양척식회사는 담보로 했던 땅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특히, 선생은 1920년 하동청년회의소 창립에 나서고 1926년 지금의 하동항일청년회관 건립에 크게 기여 했다.
하동군내 독지가 및 신간회 지부의 회원등 35명과 함께 자금을 출연하여 청년회관을 건립해 당시 집회와 민중계몽의 장소로 제공했다.
이후, 동래(東萊) 온천장에 운영해오던 산해관(山海館, 훗날의 국제호텔)마져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선생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1930년대말 진주(晉周)에 음료수 공장인 ‘광천사’를 설립해 아들에게 경영을 맡겼으나 당시 일본인들의 방해가 심각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력의 부족으로 설립 4~5년만에 문을 닫았고 아들이 독립군과의 내통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초를 겪게 되자 선생은 금남면 대치리에 칩거 했다.
선생이 칩거에 들어간 바로 이듬해 고향에서 광복을 맞이 하였지만 당시 좌익과 우익의 혼란스런 충돌속에 아들이 공산주의운동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국군 토벌대에 붙잡혀 큰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로인해 더없이 애통한 마음에 세상을 등지고 사셨던 물헌(勿軒) 선생은 그렇게 쓸쓸한 말년을 보내셨다.

(하동군민신문 장성춘 기자(하동 짱) 블로그, ‘호국의 달 6월, 서거 44년만에 건립된 유적비’, 2008, https://blog.naver.com/hdnews9001/130032409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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