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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동아일보 사람들- 전홍진

Posted by 신이 On 12월 - 27 - 2018

 

전홍진(全弘鎭, 1909~1969)은 서울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했고 1933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에서 근무했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된 후 매일신보로 옮겼다. 해방 이후 합동통신 편집부장,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한국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다.

 

전홍진(全弘鎭) (서울, 1909~1969) ▲ 1933. 5 기자(사회부, 경제부), 1940. 8 폐간.〔합동통신, 서울신문, 한국일보 편집국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成山 全弘鎭

▲ 1909년 서울 출생
▲ 1969년 10월 11일 별세
▲ 32년 보성전문대학교 상과 졸업
▲ 33년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기자
▲ 40년 매일신보 편집부장
▲ 45년 합동통신 편집부장(국장대행)
▲ 47년 합동통신 편집국장
▲ 52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 54년 한국일보 초대 편집국장
▲ 56년 서울신문 주필

□ 술한잔 못하면서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아

성산 전홍진에게는 「천일방(天一方)」이라는 또 하나의 별호가 있었다. 천일방이란 먼 하늘 저편의 미인을 바라본다(적벽부:赤壁賦)는 뜻으로 조금은 엉뚱한 사람을 말했던 것 같다.
확실히 성산에게는 그런면이 없지 않았다. 술한잔을 입에 대지도 못하면서 담배만은 줄담배였던 그는 기자들이 모이는 술자리라면 언제나 빠지는 일이 없었다. 남달리 입이 큰 편인 탓이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평소 말솜씨가 뛰어났던 그가 술자리에서 벌이는 음담패설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 둘러앉은 사람들의 배꼽을 쥐게 했다.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성산은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33년 5월 동아일보 사회부와 경제부 기자로 입사, 40년 8월 폐간때까지 활약하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경제부로 옮긴 뒤 편집부장까지 오른다.
「매일신보」 5년째인 45년 해방을 맞자 언론인 전홍진의 인생에 변화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그때까지 일제에 의해 독점되었던 통신사업에 관심을 돌린 것……. 해방 무렵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신을 발행하던 기관은 일본 동맹(同盟)통신의 경성지사 뿐이었다. 「동맹」은 소공동 테일러빌딩을 지사 사옥으로, 11개 지방도심에 지국을 두고 일제의 검열을 거친 세계 주요외신을 공급하고 있었다. 지사에 근무하던 한국인 김진기, 홍종옥, 백병흠, 송영훈 등은 14일 일본정부의 포츠담선언 수락 외신을 입수한 직후부터 따로 모임을 갖고 지사의 통신기자재를 접수, 우리말 통신을 새로 발간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16일 이들은 일본의 지사장과 편집부장을 찾아 옥신각신 끝에 기자재 일체와 경리장부까지 겨우 넘겨받고 김진기를 대표로 하는 간부진을 구성, 17일 아침 「해방통신(解放通信)」이란 이름아래 일간 2편의 우리말 통신을 창간한다.
그러나 좌우익으로 갈라선 정치정세가 혼란을 더해가면서 해방통신에서 내분이 일어 대표인 김진기는 좌익노선을, 실권을 쥔 홍종옥은 중립노선을 고수, 대립은 격화되기만 했다.
9춸초 들어 홍종옥 등은 김진기 일파를 제거, 해방통신을 재건키로 하고 전 「동맹」의 최기섭을 주간으로, 원경수를 취재부장, 전홍진을 편집부장으로 맞아들이면서 「국제(國際)통신」으로 제호를 바꾼다.

□ 合同通信에 파벌일어 떠났다가 다시 復歸

그 무렵 국내에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외에 호남신문, 조선일일신문, 민주중보, 조선인민보, 노동자신문, 코리아타임스, 서울티임스 등 일간지들이 우후죽순과 같이 창간되고 있었으나 태반이 속빈강정으로 내외신 거의다 통신기사에 의존하는 설정이었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한 미군정 당국은 9월 하순들어 김동성, 남상일 등을 앞세워 국제통신을 군정관리 통신사로 지정, 11월에는 글래스 대령을 사장으로 임명하나 자금의 뒷받침이 따르지 못해 결국은 손을 떼게 된다.
그 사이 AP통신과의 계약을 성립시킨 「연합통신」(사장: 민원식 서울타임스 사장)이 새로 발족하게 되자 군정관리 통신으로 부채만 짊어지게 된 「국제」는 그 무렵 서울신문 사장이던 이관구를 내세워 민영으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연합」과의 합병교섭에 나선다.
이관구가 거중조정에 나선 두 통신의 합병은 의외로 급진전, 그해 12월 20일자로 회장에 민원식, 사장에 김동성 등으로 짜여진 「합동(合同)통신」이 창간된다. 초대 편집국장(대행)에는 전홍진으로 국차장과 편집부장 겸임이었다.
그는 창간 3년째인 47년 1월 대행을 떼고 비로소 정신 편집국장에 앉게 되지만 그 초창기 1~2녀동안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 무렵의 일을 성산 자신은 합동창간 10주년 기념특집호를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처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외신수용 태세가 신통치 못했다는 점, 그리고 내신 부문에서는 능숙한 취재기자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지방송신역시 마치 신문전보 치는 식이 되어 결함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골칫거리는 사원의 90%가 우리글에 서툴렀다는것……  전화를 해도 우리말 보다는 일본말이 90%는 섞여 나오곤 했다. 처음엔 기자들이 화낼 정도로 자주 주의도 주곤했으나 제대로 되질 않았다. 정화말씨는 반면 후부터 차츰 나아졌으나 원고는 2년이 되도록 신통치 못했다』

나는 원고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보기를 작정, 통신에 실리는 기사는 내손을 거쳐야만 한다는 대원칙을 스스로 정해 놓았다. 어쩌다 출근이 늦는 날이면 내 책상위에는 산더미처럼 원고가 쌓여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바로잡지 못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한 장, 한 귀절, 한자에 이르기까지 손을 대나갔다. 난해한 한문과 일본색 용어, 맞춤법은 물론 오역 찾아내기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것은 통신자체를 위해서는 물론 신문들이 통신을 그대로 전재할 경우를 생각해서 벌인 어쩔 수 없는 고행이었다. 머지 않아 각 신문에서는 합동통신 기사라면 「우선 안심」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갔고 차츰 다른사로 스카웃돼 나가는 기자도 잇따랐다.』

「탁치(託治)란 무엇인가」 「왜 단독정부 구상이 나오게 됐는가」「여순반란사건」 등 원경수 취재부장에 의한 해설기사가 부록처럼 통신에 실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한동안 비교적 순탄하게 사세를 넓혀온 「합동」에 「국제 대 연합」계열간의 불화에 이어 이번에는 「합동 대 서울신문」 계열간의 갈등이 악화되면서 서울신파로 지목된 성산도 48년 들어 어쩔수없이 국장직을 내놓고 서울신문 편집국차장 겸 편집부장으로 옮긴다.
그러나 49년 5월 들어 서울신문이 정부당국에 의해 정간처분을 당하고 「합동」 내분의 마지막 수습책으로 이갑섭 편집국장이 물러나면서 성산은 다시 친정인 「합동」의 제4대 국장으로 복귀, 6.25동란을 치르게 된다.
27일 오후 모든 사원에게 한달치 월급을 지불, 재회를 기약하고 난 김동준 사장과 성산 등 10여명의 간부진은 전황뉴스방송을 들으며 편집국에 앉아 꼬박 밤을 세웠으나 28일 새벽3시 미아리방어선을 뚫고 서울시내로 들어온 적의 탱크떼가 길거리를 누비면서 포를 쏘아대자 ‘합동’의 간판을 내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51년 1월 8일 부산지사에 마련된 임시본사에서 ‘합동’은 전시판 발행을 시작하게 된다.

□ 記者란 제멋에 겨워서 하는게 아닌가

전쟁의 와중에서도 젊은이들의 언론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대단했었다. 그 무렵 부산에 피난했던 신문·통신들이 부족한 인력을 채우고자 약간명의 공채 광고라도 내게되면 몇백명씩의 지원자가 몰려들곤 했다.
박봉에 피난살이로 가족들의 식생활마저 말이아니던 현직기자들에게는 그 점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편집국 고문으로 전시판 제작을 돕고 있던 성산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우리야 이제 하는 수없이 이러고 있지만 도대체 왜들 기자가 되려고 저렇게까지 몰려드는건지 모르겠어요”하자 그는 대뜸 “이 사람아, 기자란 원래 제멋에 겨워서 하는 것 아니가……”하면서 헛헛하게 웃었다.
그렇게 해가 바뀐다.
52년 4월,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나돌았던 한국은행의 백상 장기영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인수한다는 풍문이 백상의 한국은행 사임과 함께 더욱 구체화되면서 성산은 창간 초부터 전후 두차례에 걸쳐 역임해온 ‘합동’의 편집국장을 내놓고 ‘조선’의 논설위원으로 옮긴다.

그해 4월 28일 ‘조선’의 대표취체역 사장에 취임한 백상은 취임하자마자 논설진부터 오종식, 우승규, 전홍진, 유봉영 등으로 대폭 보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무렵의 신문사 논설위원이란 것이 상임과 비상임으로 나뉘어 고료만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 곳곳을 전전하면서 발행했던 타블로이드 2면짜리 전시판에도 이따금씩 그가 사설이나 칼럼 ‘팔면봉(八面鋒)’을 집필해 왔었다는 소문에 비쳐볼때 성산은 옮기기 이전부터 ‘조선’과는 각별한 관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처음 5년동안의 위탁경영을 맡았던 백상은 휴전과 함께 수복된 태평로사옥에서 ‘조선’이 어느정도 복구의 기틀을 다지게 되자 54년 4월 30일 꼭 참여 2년만에 물러나게된다.
그는 ‘조선’을 나오자마자 경영난에 허덕이는 영자지 ‘코리아타임스’를 김활란으로부터 인수하는 한편 ‘태양신문’도 넘겨받아 그해 6월 9일 ‘한국일보’를 창간, 초대 편집국장에 성산을 맞아들인다. 그러나 성산은 ‘한국’을 곧 그만두고 이기붕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언론계를 떠난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후배들에게 (그동안 넉넉지 못했던 자신의 사생활을 후회한 탓이었을까……)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는 법”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그후 강원도 전씨집성촌이라는 어느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56년 3월, 서울신문사장 고문으로 다시 언론계에 복귀한다.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 당시로서는 28세의 최연소 총각사장인 장기봉 사장을 최선을 다해 도왔으나 자유당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장사장이 취임 5개월만에 물러나자 새로 부임한 김형근 사장 밑에서는 주필 겸 전무직을 맡아 58년 6월까지 활약했다.
191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 재학중 고대(高大) 사범과에 합격, 경성지법 판사와 대검 검사를 거쳐 서울지검장을 지낸 순수 법조인인 김사장이 서울신문 사장을 맡게된 것은 전적으로 5.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사장은 부임초부터 ‘신문에 문외한임’을 강조, 성산을 주필 겸 전무취체역에 올려놓고는 뒷바라지에만 전념했으며 취임 당일과 퇴임하던 날을 빼고는 재임 2년동안 공장이나 편집국에 나타난 적이 거의 없었다.
김사장의 그 같은 몸가짐이 성산으로 하여금 그만큼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서울’은 곧바로 경영합리화를 위해 불요인원을 정비하는 대신 급료를 2배로 올렸고 회수불가능한 미수금을 소가처분, 적자요인을 청산하는 한편으로 지사, 지국망도 재정비, 보급망을 강화해나갔다.
또 제작면에서는 사회적 비리척결에 중점을 두기로 그 방향을 뚜렷이 제시했으며 신규사업으로 그해 10월17일을 기해 광복후 초유의 한글판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활기찬 운영으로 해가 바뀌면서 신문보급은 계속 호조를 띠어 5만부선을 쉽게 넘어섰으며 보급이 늘자 경영도 흑자로 돌아섰을 뿐아니라 사세 또한 상승세에 올라선다. 이같은 ‘서울’의 대변신에 성산의 공헌이 적지않았음은 물론이며 ‘합동’을 떠난이래 정계와 언론계를 전전해온 그의 생애중 가장 보람된 2년이었던 셈이다.
58년 들어 김사장이 유엔한국대사로 잠시동안 미국을 다녀온 사이 그 역시 자유당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김법린 7대사장에게 바톤을 넘긴채 법조계로 돌아간다. 성산 역시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김사장과 함께 ‘서울’을 떠난 성산은 그때 갓 쉰살의 초로에 마악 접어들고 있었다.

(박기병 전 춘천MBC 사장, ‘成山 全弘鎭’,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언론인 전홍진(言論人全弘鎭)씨

언론인 성산 전홍진(成山 全弘鎭)씨가 14일 오후 8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2가 21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全(전)씨는 일제때 매일신보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서울신문 편집국장, 조선일보 주필 등을 지냈다. 발인은 18일 오전 10시.

(동아일보 1969년 10월 16일 7면)

 

 

‘오늘의 한국(韓國)’을 엮고 간 60년대의 100人

(1969년)
『조선(朝鮮)』주필(主筆) 거쳐
전홍진(全弘鎭)= 매일신보 기자(每日申報記者)로 언론계에 투신한 이래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를 거쳐 서울신문 한국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주필(朝鮮日報 主筆) 역임(歷任). 10(十)월 14(十四)일 몰(沒). 61(六一)세.

(동아일보 1969년 12월 18일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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