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83. 동아일보 사람들- 임원근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임원근(林元根, 1899~1963)은 경기 개성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에서 2년 수학했다. 1922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한 뒤 박헌영·김단야와 함께 국내로 잠입하다 검거돼 1년6개월간 복역했다. 출소 후 1924년 5월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그해 8월에 훗날 북한 문화선전상,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등을 지낸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가 허정숙과 결혼했다. (허정숙의 부친 허헌은 북한 최고인민회의장, 김일성대학 총장을 역임). 허정숙도 1925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당시엔 보기 드문 사내 부부 기자로 근무했다. 1925년 6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으나 4개월 만에 퇴사한 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검거돼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30년 감옥에서 나온 뒤 1931년 2월엔 당시 파문이 일었던 신간회 해소론에 대해 “좌익소아병자의 인식 착오”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1932년 허정숙과 이혼하고 사회주의와도 사실상 결별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입사, 1936년까지 지방부장으로 근무했다.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독립전선’에 참여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임원근(林元根) (서울, ) ▲ 1924. 5 기자, 1925. 5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신랑신부

본사 긔자 림원근(林元根)군과 허뎡숙(許貞琡)양과의 결혼식은 금일(금요일) 오후 륙시에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거행할터이더라.

(동아일보 1924년 8월 1일자 2면)

 

 

동아일보 기자(東亞日報記者) 지방순회 일정(地方巡廻發程)

◇ 황해 일원(黃海一圓)·경북 일원(慶北一圓)◇

금일 오후 북대 출발(今日午後北隊出發)=본사 기자(本社記者) 임원근(林元根)=

◇ 오래전부터 만텬하 독자에게 약속하야오든 본사 긔자의 디방순회(本社記者地方巡廻)는 그동안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얏슴으로 이제 그 첫길을 떠나려 함니다

◇ 그런데 긔왕 발표에는 뎨일회로 경상도와 평안도로 하얏스나 여러가지 상치로 인하야 아래와 가치 순회구역을 변경하얏스며 일뎡(日程)은 미리발표하기가 어려워서 자세한 것은 그때 그때에 발표할터이며 순회하는 긔자도 일뎡한 시긔에 교대(交代)할 예뎡임으로 위선선발대가 순회할 디방의 순서는 대톄로 아래와 가치 작뎡하얏슴니다

◇ 북대(北隊)=황해 일원(黃海一圓)
◇ 기점(起點)은 황주(黃州)로|봉산(鳳山)|안악(安岳)|은율(殷栗)|송화(松禾)|장연(長淵)|옹진(甕津)|해주(海州)|신천(信川)|재령(載寧)|-

◇ 남대(南隊)=경북 일원(慶北一圓)
◇ 기점(起點)은 김천(金泉)으로|선산(善山)|의성(義城)|안동(安東)|청송(靑松)|군위(軍威)|칠곡(漆谷)|성주(星州)|고령(高靈)|달성(達城)|-

◇본사에서 단행하게 된 이 디방순회는 진실로 본사로 보아 적은일이 아니며 일반동포로 보아 등한히 볼바가 아닌터인즉 본사 긔자가 이르는 곳마다 만흔 편리와 뜻잇는 방조를 앗기지 마르시고 아울러 이번 긔회에 공복(公僕)이 되려는 본사의 긔자를 힘껏 부리여 주시옵

(동아일보 1925년 1월 15일 2면)
 

 

 

諸氏의 聲明

1. 선생은 민족, 사회주의자임니가?
2. 선생은 실행가, 학자가 되겟슴니가?
3. 선생은 사상상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만히 밧엇슴니가?

市內 光化門通 林元根

글세올시다. 저 딴으로는 저 자신에게 대하야 아모런 주의자라고도 부르지 안슴니다. 또한 부를 만한 아모 것도 업슴니다. 다만 일개 생물로서- 이성을 가춘 인간인 일개 생물로서 보다 인간다운 살림을 영위하고 십다고 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인가 함니다. 그러기에 저 자신으로는 무슨 학구적이니 실제운동이니 하는데 대하야서도 이러타할 만한 界線도 확실히 가지지 안앗슴니다. 또 그리고 저 자신이 이가치 두루뭉술이<25> 갓흔 標的인 까닭에 누구에게 엇더한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만히 바닷다고 특기할 것도 업슴니다.

(임원근,  ‘諸氏의 聲明’, 삼천리, 1930년 5월호) 

 

 

五年만의 朝鮮社會

이런 제목을 내여건다면 맛치 그 동안에 朝鮮을 떠나서 어듸매인 海外를 도라단이다가 도라온 것가치 들니지마는 그 實은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아오기는 依然히 朝鮮땅에 발을 붓치고 살아오면서도 그 동안 朝鮮의 實社會 일은 바 자유인의 사회를 떠나서 鐵窓生活-囚人社會의 생활을 하여왓다는 것임니다. 내가 컴컴한 監房生活을 하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年前 卽 大正14年 10月 30日부터이엇고 다시 푸른 하날을 머리우에 이고 단니게 된 것은 今年 1月 1日부터이외다. 이와가치 감옥안에 잇섯던 동안은 매우 길엇다고 할 수 잇스나 實社會에 석겨 산 동안이 불과 석달 내외인 까닭에 내가 이제 그동안의 우리 社會變遷相에 대하야 무어니 무어니 할지라도 그것은 오즉 一時一時의 卽咸的 皮相的 관찰에 지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바임니다.

나에게 제일 먼저 늣겨진 것은 우리 사람들의 경영인 3개 신문-조선 東亞 中外 등의 내용이 양적으르 보아 매우 확장된 것이엇슴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質로 보아도 前日의 그것보다 충실하여 진 것이 不無하겟지마는 쓰고 십흔 기사를 마암대로 쓰지 못하고 안타가웁게도 迂廻的 暗示로 끗난 구절을 읽어볼 때에나 或은 OO 或 XX等의 符號가 이곳저곳 기사중에 석겨잇는 것을 볼 때에는 5년전 녯날에 비하야 아모리 하야도 내용이 더욱 풍부하여젓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갓슴니다. 그러나 양으로 보아 前日에는 僅僅 1日 4面 발행밧게 못되던 것이 오날에 니르러는 或은 朝夕刊 或은 夕刊만으로 1日 8面式을 발행하게 되엿스니 그갓만으로도 저 자신으로는 만흔 진보라고 생각함니다.

그리고 기사내용에 드러 文藝와 評論에 관한 것이 어느 신문에 잇서서나 모다 매일 발행되는 紙面의 半分이나 점령하고 잇는 것을 보아 그間 朝鮮社會의 文藝促進의 추세를 窺知할 수 잇다고 생각함니다. 나는 출감 후로 즉시 고향에 도라가 한 달 동안이나 한적한 날을 보내면서 오즉 신문 耽讀에 대부분의 시간을 제공하엿섯슴니다. 그래서 엇던 때에는 소설 한아 詩1行을 빼어노치 안코 1面으로부터 8面까지 너무 甚하게 보는 때에는 거의 병적이랄만치 廣告欄에까지도 視力을 쓴 때가 잇섯든 것이외다. 그리고는 우수운 말갓지마는 나 흔자말로 『야참 그 동안에 朝鮮社會에 詩人도 만히 생겨낫고 評論家도 만히 생겨낫고나. 엇재던 매우 조흔 현상이다』라고 부른<47> 적도 잇섯슴니다.

동시에 나는 그 동안 우리 사람 경영의 월간잡지가 10여종이나 늘어 난 것을 매우 깃버하엿슴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內容如何를 論斷할 것도 아니고 또한 나 자신 論評에 대한 아모런 技能도 업는 까닭에 그저 엇잿던지 분량만이라도 다만한 책이라도 늘어진 것을 깃버하는 것이외다. 이것은 맛치 목마른 자가 머-ㄴ 곳에 잇는 우물을 바라보고 그저 깃버 날뛰는 기분과 同類일 것으로 생각함니다. 5年前 우리 사회에 업든 것으로 오날 내가 새로 대하게 된 잡지는 別乾坤 農民 學生 新人間 大衆 公論 아히生活 朝鮮週報 大潮 三千里 등이라고 생각함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 동안 社會相이 매우 복잡하여젓다고 생각되는 것임니다. 보다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날의 朝鮮社會는 5년전의 그것에 비하야 정치적으로의 움지김이 매우 커젓고 민중의 신경들이 매우 예민하여진 것 갓슴니다. 쉬지 안는 檢擧의 旋風은 무엇보다도 가장 雄辯으로 時局의 불안정을 말하는 것 갓슴니다. 5년전 녯날에만 하야도 社會面 기사중에 뚜렷한 初號活字로 무슨 秘密結社이니 무슨 團의 무엇이니 하는 3段記事가 揭載되여잇스면 『에쿠 무엇인가?』하고 가삼을 놀내고는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그 後報를 긔대렷던 것임니다. 그러나 오날에 와서는 거의 엇던 날 신문에나 社會面記事는 모도 다 풀늬틔칼 무부멘트에 관한 것으로 그저 무슨 秘密結社의 발각이나 무슨 무엇의 被檢이니 公判이니 엇저니 하는 등의 기사만으로 滿載가 되여 잇다고하야도 과언이 아닐만치 되여잇기 때문에 날마다 특별한 뉴스를 긔다리던 독자심리로는 도로혀 어느 정도까지 支離하고 單調하다는 늣김을 가지게 되는 것도 갓슴니다. 참말로 이 가치 新聞紙面만을 통하야서도 오날의 朝鮮社會相이 몹시 거치러젓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됨니다. 하여간 朝鮮社會相이 엇더한 형태로서나 늘 動하고 잇는 것만은 넉넉히 推量됨니다.

다음으로는 朝鮮 사람들이 주머니가 더욱 가뷔여워진 것 갓슴니다. 물론 的確한 數字的 통계를 가지지 못한 나로서 막연한 推量만을 말하는 것이 몹시 非科學的인 줄도 암니다마는 대체로 보아 財界가 몹시 궁핍하여지고 인심이 더욱 强迫하야진 것 갓슴니다. 나는 네가 잘 아던 녯 친구를 대할 때마다 또는 집안 사람들의 살림사리 이약이 드를 때마다 그들 입으로부터 조곰도 넉넉한 말소래를 드러본 적이 업고 그 전보다는 돈이 몹시 졸아젓다는 말을 아니드른 적이 거의 업섯슴니다. 최근에 이르러 거대한 失業群이 街頭로 몰녀나오는 것은 아마 세계적 현상갓치도 보임니다마는 특히 우리 사회에 잇서서 산업이 부진되여 잇는 것만치 더욱 경향이 太甚한 모양갓흐며 爲政當局者로서도 이제와서는 이에 대한 對策講究를 云爲하고 잇는 모양 갓슴니다. 물론 朝鮮人의 生活難갓흔 문제가 오날에 비릇한 것이 아니고 무슨 이제 새삼스럽게 重言復語할 것이 아니지마는 무엇보다도<48>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중대한 문제인 것만치 축느러진 두 팔에다 힘업는 발길을 옴겨놋는 失業者의 거름거리를 볼 때에는 다 쓸어진 草家 옴악사리 행랑방을 볼 때에는 녯날에나 오날에나 水標다리 아래에서 궁구는 거지들의 무리를 볼 때에는 나는 水標다리 아래의 乞人떼를 지나다 보고는 無心中에 『아이구」 저놈 자식들이 아즉도 저 다리 밋구멍을 저의 집들을 삼고 잇구나』하엿다.-그 동안에 비록 만흔 세월이 지나첫다 할지라도 朝鮮人의 경제상태는 역시 녯날과 조곰도 다를 것이 업다는 것을 알게 되엿슴니다. 보다도 더 한층 악화되여진 것이 사실가치 보임니다. 서울이나 싀골이나 모도 다 살기 어려워 우는 사람뿐인 것 갓흐니 참 몹시 한심스러슚� 일임니다.

이제 말한 바와가치 朝鮮人의 生活難이 나날이 尤甚하여가고 경제에 관한 문제가 무엇보다도 제일 그들에게 중요성을 띌 수가 잇는 까닭에 오날의 朝鮮人들은 작년 재작년의 그들보다는 더한층 경제문제에 대하야 머리를 쓰고 잇는 것 갓슴니다. 하여간 엇지 되엿던지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여가는 것이 생물의 본질인 까닭에 임외 경제적으로 파멸을 당하고 잇다하야도 과언이 아닌 그들노서는 이 문제에 대하야 엇더케하면 먹고 살수가 잇슬가 하는 문제에 대하야 더욱 심각하게 머리를 쓰게 되는 것이 必然한 추세일 것 갓슴니다. 지방에서는 지방적으로 前日에 보지 못하던 무슨 조합이니 무슨 회이니 하는 수만흔 재단이 생겨나 잇고 都會地갓흔 데는 多數人이 集合되여 잇는 것 만치 또한 여러 가지의 消費組合 物産獎勵運動갓흔 것이 잇서보임니다. 더욱히나 物産獎勵運動갓흔 것은 일시 침체상태 중에 잇섯던 것이 다시 새로운 陣勢를 버리고 나온 모양이나 前鑑에 비취어 또한 現代式 經濟組織下에 잇서 그 결과로 얼마나 한 소극적 효과를 나타내일가 하는 것은 의문이라고 아니 할 수 업슴니다마는 하여간 이갓흔 經濟方面의 種種 運動相을 보아 오날 朝鮮人의 머리 속에는 일반적으로 經濟方面에 대한 考慮가 종전보다는 훨신 多分을 점령하고 잇는 것가치 생각됨니다.

그리고 나는 엇더한 날 일은 아참에 安洞 네거리에 이르러 校門을 향하야 발길을 재촉하는 수만흔 학생들을 본 적이 잇슴니다. 安洞 네거리로 말하면 京城 시내에서도 상당한 광장이지마는 밧분 거름으로 각기 자기교문을 바라보고 닷는 數百男女의 학생떼는 완전히 그 광장을 뒤덥허노코 말앗슴니다. 물론 前날에 잇서서도 만흔 학생들이 일은 아참마다 이 곳을 거처갓던 것도 사실이엇지마는 나는 5년전 녯날 아참의 學生數가 이가치 오날 아참가치 절대다수이엇스리라고는 생각되지 안슴니다. 나는 이 광경을 目睹하는 순간에 東京아참의 九段坂을 연상하엿슴니다. 學課에 게으른 학생이 늣도록 아참잠을 자고 난뒤에 아참 목간을 가랴고 하다가도 急流가치 몰녀나오는 九段坂의 學生群을 바라 볼 때에는 卽時 자기도 (第五頁에) (제47頁 林元根氏에서)

되고 만다는 말과 가치 나는 서울 시내에 잇는 게으른 학생들에게 대하야 安洞 네거리의 일은 아참을 구경가라는 말을 권하고 십슴니다. 아니 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 사람들에게 일은 아참의 장엄한 그 광경을 보여드리고 십다고 생각하엿슴니다. 이 갓흔 깃분 현상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겟슴니가. 물론 우리 조선 사회인에 그만한 교육열과 향학열이 沸騰히야 젓다는 것임니다. 더욱히나 남녀 학생들의 활발한 보조 쾌활한 말소래 경쾌한 복장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대하야 무한한 희망과 새로운 광명을 던저 주는 것가치 보엿슴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적어도 나 자신만은 이와 갓흔 第二 國民들의 씩씩한 容姿를 바라볼 때에 우리 압 길에는 행운의 전조가 가득하다고 생각하엿슴니다. 실로 그들에게서는 새로운 생명의 피가 뛰고 힘이 넘치는 것가치 생각되엿슴니다. 이와 갓흔 몃 마듸로써 출감 후 나의 소감을 되는대로 적어 본 것이외다.<5>

(임원근,  ‘五年만의 朝鮮社會’, 삼천리, 1930년 5월호) 

 

 

解消云云은 認識錯誤

한동안 한산하던 조선 정치이론계에는 「新幹會解消問題」로 인하야 적지 안은 파문을 일으킨 모양이며 또한 아프로도 아마 어느 정도의 시기까지는 이 문제가 그대로 진전될 것 가티 추량된다. 그러나 나는 아즉까지 이 문제를 그다지 誇大 중요시하려 아니한다. 그것은 이 문제가 대두한 지 임이 月餘가 되엿스되 오날까지 해소론자측의 「解消」에 대한 철저한 이론과 성명이 불성립되여 잇는 까닭이다.

解消決議를 감행한 利原 釜山 兩支會의 골자이론이라는 것을 紙上을 통하야 보면

1. 新幹會는 小뿌루조아지 집단체이다.

2. 新幹會는 勞農大衆의 투쟁력을 말살한다.

는 등의 두 개 조항임을 알겟스나 나는 이것만으로서는 新幹會解消論을 일축한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1.첫재로 新幹會는 그가티 이 말과 가티 純全?한 小뿌루조아지의 집단이 아닌 것이니 그 구성분자의 대부분은 무산소시민과 노농층이다. 물론 그 중에는 多大數의 인테리와 이른바 小뿌루층이 혼재하여 잇는 것도 사실이며 또한 신간운동의 現狀은 그들 小뿌루級의 분자들이 지도역할을 맛하가지고 잇는 것도 어느 퍼―센트까지는 진정이라 하겟다. 그러나 그러타고 나는 그들 지도권의 확고성을 어느 때까지나 미드려 아니하며 또한 그와 동시에 노농층에 대한 그들―小뿌루적 지도정신의 被吸收性의 위험을 느끼지 안는다. 그것은 첫재로 자본주의의 발달이 外國의<16> 그것에 비하야 극히 幼稚의 域을 버서나지 못한 이른바 朝鮮의 小뿌루조아지들의 地盤的 잠재세력이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몹시 미약한 것과 둘재로 조선노농대중에게 잇서서는 임이 토착 小뿌루조아지들에게 대한 진실한 신임이 희박하다는 것과 셋재로 현재 新幹會에 포섭되여 잇는 노농층은 임이 半訓練과 半계급의식을 가진 무산군중으로서 오즉 그들 동일계급 내의 단체적 조직적 훈련과 더욱 그의 확대화, 강력화만이 今後로 그들을 긔다리고 잇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新幹會의 존재 이유는 결코 영구성을 띄우고 잇는 것이 아니니 그는 小弱民族의 정치과정에 잇서 일시 기형적으로 객관적 조건의 강제하에서 억지로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고로 그는 新幹會는 필연적으로 출생 당시부터 해소운명을 가지고 잇스니 그것은 오죽 時期問題이라 今後 朝鮮의 객관적 정세의 변천과 상반하야 階級運動線의 분야가 더욱 鮮明하야지고 딸아서 노농대중 自體의 XX力이 강대화하야 이른바 통일천하적 대협동X線 지금 新幹會의 존재와 가튼 두루뭉술이的 대동단결을 불필요로 느끼게 되는 때이다. 나는 이상의 제요건으로 해소이유의 하나인 『新幹會는 小뿌루조아지의 집단이다』라는 그 말을 그대로 시인하더라도 그 이론상 근거의 적합성을 거부한다.

2.둘재로 「新幹會는 노농대중의 XX力을 말살한다는 것이니 이는 솔직하게 말한다면 現下朝鮮의 객관적 제정세를 아지 못하는 이른바 『左翼小兒病者』나 혹은 일종 관념론자의 인식착오적 客言이라 하겟다. 나는 이 가튼 酷言으로써 결코 新幹會를 옹호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기에 부적당한 해소론 대두를 강압하려는 것과 또는 툭―하면 남의 것을 그대로 直譯輸入하려는 조선운동선의 在來弊風을 미워하는 까닭이다. (그러타고 정당한 이론을 결코 무시함은 아니다.) 이번 朝鮮에 이러난 신간회해소 운운 문제도 어떠케 생각하면 공연히 남의 본을 바다가지고 일본 노농당해소 운운을 모방하는 것 가튼 느낌이 생긴다. 나는 수년전 朝鮮에서 유행되던 이른바 「福本이즘」이라는 述語를 매우 듯기 실혀한다. (탈선이니 이 말은 그만두고)

新幹會는 小뿌루조아의 집단인 관계상으로 노농대중의 XX力을 말살 혹은 적어도 위축시킨다는 것은 一聞 그럴듯한 점도 잇지마는 이는 도모지 朝鮮의 객관적 제정세를 모르는 말이니 만일 그러타하면 어중이 떠중이의 합동체인 新幹會를 떠난 『勞總 農總』등 양대 진영의 그 역사적 X蹟은 과연 어떠하엿는가? 또한 至今 오날에 잇서서는 어떠하고 잇는가?

나는 제한된 지면상 관계로 기말을 쓰지 못하나니 要는 오죽 新幹會 외부에 잇서서 노농대중으로서의 自我의 진영을 더욱 조직XX化하여 가면서 여려 가지 방면으로 잘 훈련된 대중을 朝鮮의 각층을 망라한 협동체 新幹會로 방송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 내부에 들어가 배후에 엄연한 존재를 이루고 잇는 自X勢力과 함께 자기네들의 역사적 사명을 더욱더 잘 발휘하게 될 것이며 만일 그러케 된다면 그들의 XX力은 조금도 감소위축되지 아늘 것이니 이와 가튼 XX的 과정에 처하여서만 오즉 新幹會解消를 말할 수 잇스며 또한 現下 朝鮮푸로레타리아들의 밟아 나아갈 필연적 과정은 반듯이 그럴 것으로 밋는 바이다. 이리저리 仰制로 벗틔여 노흔 집을 그대로 하로 아침에 아모런 今後 타산도 업시 헐어 바리면 어찌하려는 것인가?

나는 이상의 멧말로 해소론자의 둘재 이유를 거부한다. 이 문제의 장래 진전 如何를 딸아 다시 後機를 미루면서. 貴問에 부적한지 모르나이멧듸로.(註=氏는 현재 社會運動에 從事)

(임원근, ‘朝鮮運動은 協同乎 對立乎, 新幹會「解消運動」批判’, 삼천리, 1931년 2월호)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