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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동아일보 사람들- 임병철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임병철(林炳哲, 1906~1947)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1929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1936년 8월에 발생한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1936년 8월 25일자 신문을 제작하면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치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으며 278일간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해방 후 1946년 4월 편집국장으로 복귀해 재직 중 지병으로 1947년 7월 20일 별세.

 

임병철(林炳哲) (함흥, 1906~1947) ▲ 1929. 3 기자, 평양지국근무, 학예부, 지방부, 경제부, 사회부, 사회부장. 1940. 8 폐간. ▲ 1945.12 재입사.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임병철(林炳哲) (함흥, 1906~1947) ▲ 폐간전 사회부장. ▲ 46. 4 편집국장, 취체역 편집국장, 47. 7 재직중 사망.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임병철(林炳哲) (1906~1947)

▲ 1906년 7월 19일 함남 함흥에서 출생
▲ 47년 7월 별세
▲ 29년 보성전문학교 졸업
▲ 29년 3월 동아일보 평양지국 근무
▲ 34년 본사 학예부 근무
▲ 36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피검
▲ 37년 12월~폐간때까지 사회부장
▲ 45년 12월 어린이신문 편집인
▲ 46년 4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 47년 2월 동아일보 취체역 역임

□ 동아일보 公採합격으로 記者입문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낸 임병철은 1906년 7월 19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어린시절에는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중학을 졸업할 때 신문 기자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바꿨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전문학교 다닐 때 개벽지에 투고한 글이 계기가 되어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 소오 설의식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1929년 3월 동아일보사 기자 공채시험에 응시, 치열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언론인이 된 것이다.
임병철은 30년 6월 동아일보사 평양지국 근무로 보직을 받고 평양으로 갔다. 그 당시 동아의 중견기자 치고 평양지국을 거치지 않은 기자는 거의 없을 정도로 한번은 거쳐야하는 코스였다. 그가 평양지국에 근무할 때만 하더라도 그리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문장력이 깔끔하고 뼈대있는 글을 인정받아 사회부 기자보다는 학예부쪽에서 일하는 것이 적임이라하여 34년 본사로 올라오게됐다. 그가 본사로 온 지 2년이 채 못된 36년 8월 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란 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세계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실었다하여 문제가 된 사건이다.
문제의 사진은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던 주간지 ‘朝日 스포츠’에 실린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서있는 손선수 사진을 그대로 복사해 싣기에는 민족적 양심이 허락지 않아 일장기를 지워 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그 일은 누구의 지시나 명령으로 된일이 아니고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동아의 체질에서 우러나온 거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일장기를 지워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체육부 기자 이길용 이었다.

□ 日章旗말소에 결정적 역할

이 기자가 복사한 사진을 들고 먼저 찾아간 사람은 조사부 전속 화가 청전 이상범이었다.
이길용은 이상범에게 우선 복사한 손선수의 사진을 내밀었다.
그때 두사람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은 채 서로 보고 빙레 웃었을뿐 이상범은 그 사진을 넘겨받았다.
이심 전심 내민자도 받은자도 무언중에 서로의 의사가 소토되고 일은 이루어진 것이다.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은 곧바로 동판으로 만들어졌고 이길용은 그 동판을 들고 사회부 편집을 맞고 있던 장용서에게 다가가 실어달라고 했다.
동판을 받아 든 장용서가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때 임병철이 거들었다.
그는 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김은배 선수가 6위를 했을 때 눈에 거슬리는 일장기를 기술적으로 말소해 신문에 실은 일이 있지 않느냐먼서 “그때 총독부에서 별다른 트집없이 넘어갔으니 실도록 하자”고 부추겼던 것이다.
임병철의 이 말은 장용서를 움직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일장기가 말소된 손 선수의 사진은 그대로 인쇄가 되어 거리로 나갔다.
이로인해 동아일보는 36년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그 사건과 관련, 먼저 사진부 백운선, 서영호, 편집자 장용서, 사회부 임병철, 사진과장 신낙균, 조사부 이상범, 체육부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등이 차례로 경찰부에 구속되었다.
임병철은 경찰신문에서 사진을 싣자고 한 것은 자신이라 주장했고 장용서는 임병철은 관여한바 없고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고 주장…… 따스한 동지애를 보인 아름다운 일화 한토막도 전해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임병철은 문초받는 자리에서도 “만일에 손기정 선수가 들고있던 꽃다발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었다면 우리는 일장기를 지우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장기를 보이도록 사진을 찍은 일본 사진기자의 생각이나 이를 지우려한 우리의 생각이나 다를바 없지않느냐 손선수는 한국인다. 한국인들에게 손선수를 똑똑히 보여주려고 한 일일뿐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는 주모자도 없고 누가 하라고 해서 한일도 아니다”라고 주장, 함께 조사를 받던 동지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임병철은 구속 10여일만에 풀려났으나 이길용, 이상범, 백운선, 서영호, 신낙균, 장용석, 현진건 등 7명은 40여일의 옥고를 치렀고 다시는 신문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총독부에 내고 신문사를 떠나야만 했다. 아까운 인재들이 언론계를 떠났던 것이다.
일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송진우 사장을 비롯 동아일보사 경영·편집의 중요 간부 17명의 사표를 강요 신문사를 떠나게 하는 사태로까지 확대했다.

□ 깨끗이 살다간 아쉬운 인재

어디 그뿐인가…… 문제의 말소사건 나흘째인 8월 29일자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까지 받게 된다. 자매지인 월간종합지와 여성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37년 6월 들어서야 장기 발행정지처분이 겨우 해제(6월 2일자) 된다. 실로 1년 가까운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 3년 후인 40년 8월에는 조선일보와 함께 영구폐간의 비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5년후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광복의 기쁨 속에 동아일보는 복간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일제하 강제로 폐간을 당하고 갖은 탄압과 특히 신문에 발도 못붙이게 추방까지 당했던 동아의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들도 한자리에 다시 모였다.
복간 직후 진용은 사장에 송진우(제8대) 편집국장에 고재욱 이었으나 곧 주필에 고재욱, 편집국장에 임병철, 편집부장에 장용서, 체육부장에 이길용 등이 참여, 동아를 소생케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편집국장 임병철은 언론의 바른 길을 지키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기관지가 될 수 없다고 정면으로 도전도 했고 때로는 “이 글은 내가 편집국장으로 있는 한 실을 수 없다”고 버티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쓴 사설에 가필이나 삭제는 아무도 하지 못했다. 만일 가필이나 삭제를 한 것이 발견되면 당장 공장에 내려가 조판된 활자판을 뒤집어엎어 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모로 보아 외교관이나 학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술과 담배를 멀리했고 온후한 성격에 차분한 음성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호감을 갖게했다.
반면에 그는 자신의 과거나 내력에 대해 일체 말하려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다친 그는 글을 쓸 때 이상하게 펜을 쥐곤 했다. 손은 왜 다쳤느냐고 물으면 ‘허어 남의 아픈 데를 찌르는 구먼’ 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 이야기하자며 말꼬리를 돌리곤 했다.
임병철은 47년 7월 42년의 짧은 세월을 살다간 아까운 언론인이다. 크게 남긴 업적은 없어도 격동기의 언론인으로서 티끌만치도 부끄러움없이 양심껏 살다간 그런 사람이었다.

(김호진 전 대한통신 편집국장,  ‘林炳哲’,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임병철 본사 편집국장(林炳哲本社編輯局長)… 작효(昨曉) 서울요양원(療養院)서 별세(別世)

본사 편집국장 임병철(林炳哲)씨는 위장병으로 그동안 시외 청량리(淸凉里) 서울요양병원에서 가료중이든바 마침내 20일 상오 1시 4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씨는 함흥(咸興) 출생으로 1920년 간도(間島) 영신(永新)소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야 휘문중학(徽文中學) 연희전문(延禧專門) 상과를 마친 다음 1929년에 본사에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야 그 필진을 내외에 떨치고 사회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40년 본사 페간과 동시에 일단 언론게를 떠낫다.

그리하야 해방후 고려문화사(高麗文化社) 주간으로 다시 등장하야 활약하다가 본사의 초청에 의하야 작년 6월 본사 편집국장에 취임하여 광복조선의 여론지도에 심혈을 경주하였었다. 유족으로서는 미망인 최(崔)씨와 4남 3녀가 있다.

그리고 씨의 영결식은 22일 상오 11시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6번지 서울요양병원 광장에서 집행하기로 되였는데 발인은 동일 상오 11시반이고 장지는 망우리묘지이며 호상소는 동 병원과 본사이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21일자 2면)

 

곡백담(哭白潭) (上)
오기영(吳基永)

우리는 백담(白潭) 임병철(林炳哲)을 잃었다。
천하(天下)에 슲으지아니한 죽엄이 어디있고 눈물없이 지어지는 무덤이 어디 있으랴마는 진실(眞實)을 위(爲)하여 싸우든 한줄기 지성(知性)을 잃은 우리의 심정(心情)은 그래서 더욱 애절(哀切)한바가 있다.
도라보매 내가 그대를 맞난 것이 어느듯 20년이다.
아직 연전(延專) 교복(校服)을 입은채 졸업생(卒業生) 후보(候補)로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記者)가 되었을 때였다. 이래(爾來)로 한자리에서 한일을 가티하기 10년(十年). 가치 민족(民族)의 비참(悲慘)을 울고 매양 붓을 들면 글짜 한자에까지도 일제(日帝)에의 반항(反抗)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기정(孫基禎)이 백림(伯林)에서 우승(優勝)하였을때 새벽에 호외(號外)를 맨돌며 우리는 울었다. 감격(感激)에 울고 손기정(孫基禎) 가슴에 일장기(日章旗)를 보며 우리는 울었다. 그 손기정 사진(孫基禎寫眞)에서 가슴에 붙은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린것이 소위(所謂) 일장기말살사건(日章旗抹殺事件)이거니와 그 사건 책임자(事件責任者)의 하나로 그대가 투옥(投獄)되고 나는 총독부 경무국(總督府警務局)에 불려가서 정간명령(停刊命令)을 받아가지고 나오던 기억(記憶)이 우리에게는 이즐수 없는 것이다.
우리 손에서 붓대가 꺽긴 뒤에 회사(會社)의 사무원(事務員)으로 어울리지 않는 생애(生涯)를 보내던 몇해동안 국방복(國防服)에 각반(脚絆)친 모습이 서로 어색하여 민망하였더니 해방(解放)된 이틋날 우리가 맞났을때는 기약(期約)없이 먼저 눈물이 흘렀다. 그대는 어렸을때 일제(日帝)의 교수대(絞首臺)에 끌려간 삼춘을 생각하고 나는 옥중(獄中)에서 병(病)을 얻어 지레죽은 형(兄)을 생각하고 이날의 감격(感激)을 죽은 이들과 나눌 수 없음을 울렀다.

그래도 그때의 울움은 기쁨속에서 울어났지마는 이제 새나라가 서려는 이 마당서에 그대의 죽움을 울어야 하는 것은 이 무슨 슲은일이냐 새나라에 유용(有用)한 귀중(貴重)한 인재(人材)들 잃는것이라 그래서 더욱 애절(哀切)한 것이다.
해방이후(解放以後) 다시 붓을 잡으매 그대는 정(情)과 열(熱)을 기우렸다치더써야하고 더 웨처야할때에 그대는 가고 마니 어찌 가기가 그리 빠른가. (繼續)

(동아일보 1947년 6월 22일자 2면)

곡백담(哭白潭) (下)
오기영(吳基永)

내 일찍 하도 죽엄을 숦이한 끝에 대체(大體) 이 죽임이 우었인가를 이리저리 섭렵(涉獵) 해본적이 있었다.

불가(佛家)의 말을 빌면 색즉시공(色則是空), 공증시색(空則是色)이요 색부이공(色不異空), 공부이색(空不異色)이라 하여 생사(生死)가 일여(一如)라 하였다. 생존(生存) 그것이 이미 잠유(暫有)요 가유(假有)라 하기에 그럴드시 알아서 그로부터 나는 나의 거실(居室)을 가유실(假有室)이라 하였으니 이리 생각하면 무언무읍(無言無泣), 묵연(默然)히 장(葬)할 것이요 사(死)를 곡(哭)하는 그것이 워낙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사람에게는 산 것을 좋아하는 정(情)이 있지아니한가. 이 정(情)이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것이지마는 어쩌리요 어리석은 채로 슲음을 참을 길이 없고나.

그대는 언젠가 나히 60(六十)에 장가간 사람의 신문기(新聞記) 사제목(事題目)에『인생(人生)은 60(六十)부터』라하고 껄걸 웃지 않앗는가. 그 60(六十)이 되려면 그대는 아직 18년(十八年)이나 모자라지 않는가.

그러나 그대는 이미 죽었다. 우리가 아무리 아깝다하고 마지막 장송(葬送)을 아무리 정성(情誠)으로 한다하다 그것이 그대를 위(爲)하여 무슨 호사가 될 것이냐. 다만 그대에게 마지막부탁(付托)이 있으니 저 생(生)에 가서 행(幸)혀 그대의 삼춘을 맞날지라도 민족(民族)의 해방(解放)이 온 것을 고(吿)할지언정 그대가 죽는 날까지 보고 탄식(嘆息)하든 이 민족(民族)오늘의 분열(分裂)을 고(吿)하지 말라. 나라를 위(爲)하여 순국(殉國)한 선열(先烈)의 영혼(英魂)이 우실 것이 자못 걱정스럽기 매문이다. 정해 6월 20일(丁亥六月二十日) 가유실(假有室)에서

(동아일보 1947년 6월 25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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